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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이토록 비상식적이고, 이토록 비인간적인 시대가 조속히 마무리되길 기도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뇌리 속에 강력히 각인된 생각이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된 백성이라는 의식이었습니다. 스스로에 대해서 그런 자부심을 지닌다는 것 결코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은 해도 해도 너무할 정도로 과도한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선택받지 못한 이민족들은 사람 취급도 안 했습니다. 이민족들을 상종하지 말아야 할 존재들, 동물 중에서도 개로 취급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서도 특히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지니고 있었던 순혈주의, 율법과 전통에 대한 자부심과 위세는 하늘을 찌를 정도였습니다. 그들은 평소 입고 다니던 복장부터 남달랐습니다. 화려하고 요란스러웠으며 치렁치렁했습니다.
뿐만아니라 옷 여기저기 성구갑이라고 성경 말씀을 넣은 작은 상자를 달고 다녔는데, 그것을 마치 큰 자랑거리, 훈장처럼 여겼습니다. 성구갑은 내가 얼마나 성경을 많이 읽는 줄 알아? 내가 얼마나 성경 말씀에 정통한 사람인지 알아? 라고 외치는 표시였습니다.
이 대목에서 갑작스레 공식 석상에 섰던 한 장교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카메라 앞에 선 그의 모습은 정말이지 가관이었습니다. 그냥 편안한 복장으로 출연해도 별문제가 없을 텐데, 그가 입고 나온 군복 전면이 가관이었습니다. 그간 받은 훈장이란 훈장은 다 달고 나왔습니다. 그 무게가 상당한 것 같았습니다. 참으로 꼴불견이었습니다. 그 옛날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꼭 그랬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예수님께서는 그토록 자부심 가득한 유다인들을 절대 그냥 놔두지 않습니다. 그들의 위선, 그들의 이중 플레이 앞에 참지 않으십니다. 거침없이 당신께서 하고 싶으셨던 말씀을 가감 없이 쏟아놓으십니다.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루카 4,27)
이 말씀 끝에 잔뜩 화가 난 사람들은 순식간에 들고 일어났습니다. 동물도 아닌데, 예수님을 슬슬 고을 밖으로 내몰았습니다. 그리고 낭떠러지 벼랑 끝까지 몰고 갔습니다. 그리고 합세해서 그분을 벼랑 아래로 떨어트리려 했습니다. 그러나 아슬아슬하게 예수님께서 그들을 피해 다른 곳으로 옮겨가셨습니다.
유다인들은 일종의 살인미수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들이 비록 예수님을 살상하지는 않았지만, 이미 마음속으로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것입니다.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하실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의 용기가 참으로 존경스럽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 이 비참하고 야만적인 시국 앞에서, 거대한 악의 세력이 판을 치고 창궐하는 이 순간, 또 다른 예언자들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사제들과 수도자들은 무엇을 외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정말이지 간절히 기도하고 또 기도합니다. 이토록 비상식적이고, 이토록 비인간적인 시대가 조속히 마무리되고, 이토록 심각한 분열과 처절한 기 싸움이 하루빨리 종식되는, 그래서 화해와 일치, 기쁨과 평화의 날이 빨리 다가오길 큰 목소리로 간구합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화가 날 때는 언제나 자신의 죄가 드러날 때이다>
복음: 루카 4,24ㄴ-30
사람이 진실 앞에서 보이는 가장 솔직한 반응은 ‘분노’일지도 모릅니다. 진실은 칼날처럼 예리해서, 우리의 무의식 깊은 곳에 감춰진 상처나 수치를 찌릅니다. 루카 복음 4장 24절 이하에서 예수님께서 고향 나자렛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은, 그들의 종교심과 신앙 안에 감춰진 교만을 정확히 찔러낸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과연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어떤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이 말씀이 도대체 무슨 큰 죄가 되었길래, 사람들은 예수님을 끌어내어 벼랑으로 밀쳐 죽이려 하였을까요? 예수님은 단지 엘리야 시대에 이스라엘의 과부가 아닌, 사렙타에 있는 이방 여인에게 기적이 일어났고, 엘리사 시대에도 이스라엘의 나병환자가 아닌 시리아 사람 나아만이 치유받았다는 사실을 말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 말이 그들의 민족적 자부심과 신앙적 특권의식을 건드렸습니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깊이 성찰해야 합니다. “왜 나는 그 말에 화가 났는가?”라는 질문은 우리 안의 죄를 드러내는 거울과도 같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저 구약의 역사적 사실을 이야기한 것뿐인데, 사람들은 그것을 개인적 모욕처럼 받아들입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자신들의 죄와 직결된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알았던 것입니다.
이쯤에서 우리는 이런 속담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방귀 뀐 놈이 성낸다.” 곧, 죄책감이나 부끄러움을 느낀 사람이 오히려 더 격하게 반응한다는 뜻입니다. 자기 잘못이 드러날 것 같을 때, 사람은 본능적으로 화를 내고 공격함으로써 자신의 허물을 가리려 합니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은 주인공 신애의 깊은 상실과 용서, 그리고 분노의 여정을 그립니다. 아들이 유괴되어 사망한 깊은 슬픔 속에서 신애는 지역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며, 신앙을 통해 위로를 찾으려 합니다. 그녀는 아들을 죽인 범인을 용서하기로 결심하고, 교도소로 그를 찾아갑니다. 그러나 범인은 이미 하느님께 용서받았다고 말하며 평온한 모습을 보입니다. 그는 “저는 이미 하느님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편안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에 신애는 큰 충격을 받고, 분노와 혼란에 휩싸입니다. 자신이 용서하려 했던 사람이 이미 용서를 받았다는 사실에, 그녀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있던 분노와 상처가 드러납니다. 이는 그녀가 진정으로 용서하지 못했음을, 그리고 자신의 상처를 직면하지 못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하느님과 세상에 자기 분노의 탓을 돌리며 화를 내고 죄를 이어갑니다.
아담과 하와, 카인과 아벨부터 분노는 자기 죄가 드러나는 순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다른 일을 하시지 않고 그저 진리를 말씀하시며 사람들의 분노를 유발하십니다. 비난받는 표적이 되면서 사람들이 자기 죄를 볼 기회를 제공하시는 것입니다. 그 죄를 보고 자기를 고칠 것인지, 그냥 화만 낼 것인지는 자신이 선택하는 것입니다. 다만 죄에서 돌아설 사람들은 분노가 날 때 자기 죄를 보는 이들입니다.
정확한 사실인지는 모르겠으나, 인터넷에 나온 엔도 슈사쿠의 이야기를 보겠습니다. 그는 1923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가톨릭 신앙을 접했지만, 일본에서의 기독교는 소수 종교였기에 종종 내적인 갈등을 겪었습니다. 그는 일본에서의 삶과 기독교에 대한 정체성의 혼란을 느끼며 자랐습니다. 일본은 그에게 매우 세속적이고 불교와 신도 중심의 문화였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을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엔도는 후에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게 되며, 그곳에서 신앙에 대한 회의와 무신론적인 사상을 더욱 강화시켰습니다. 그는 프랑스에서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무신론적인 사상을 깊이 탐구하며, 기독교와 신의 존재에 대해 강한 의문을 가졌습니다. 그는 신의 존재를 믿지 않기로 결심하면서, 신의 침묵이 고통을 부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왜 신은 인간의 고통 앞에서 침묵하시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고통스러운 답을 찾지 못하고, 결국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길을 택했습니다.
그러던 중, 1950년대 중반, 엔도 슈사쿠는 일본에서 심각한 폐결핵에 걸리게 되어, 일본 도쿄의 와세다 대학 병원(Waseda University Hospital)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폐결핵은 당시에도 치명적인 질병으로, 입원한 시기인 1956년부터 약 1년간 그는 병상에서 고통을 겪으며 신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이 병원에서의 시간이 엔도에게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입원 후, 엔도는 신에 대한 무신론적인 입장에서 벗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병상에서 자신의 고통을 느끼며, "왜 신은 내가 이렇게 고통받고 있는데도 침묵하시는가?"라는 질문을 반복적으로 던졌습니다. 그러나 그 질문 속에서 그는 신의 침묵이 아니라 자신의 고통과 죄를 직시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당시의 고통 속에서 점차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엔도 슈사쿠는 그 고통 속에서 점차 신의 존재를 인정하기 시작합니다. “신은 나와 함께 고통받고 계셨다”라는 깨달음은 그에게 깊은 영적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그는 자신의 내면 깊숙한 곳에 숨어 있던 분노와 상처가 사실 신을 떠나기 위한 방어기제였음을 깨닫고, 그분의 침묵은 자신이 감당해야 할 죄를 드러내기 위한 신의 방식이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엔도는 회심 후, 자신의 작품인 『침묵(Silence)』에서 그가 겪은 내적 갈등과 신앙의 회복을 풀어냅니다. 이 소설은 일본에서 가톨릭 신앙을 지키려 했던 선교사들의 고난을 다룬 작품으로, "침묵"이라는 주제 속에 신의 고통과 인간의 고통이 어떻게 맞물리는지를 탐구합니다. 그는 회심 후, "내가 신을 믿지 않으려 할 때, 그 신을 향한 분노가 더 크게 느껴졌고, 그 분노가 결국 내 죄를 드러냈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그의 회심은 신을 거부하려 했던 자신을, 오히려 신의 뜻을 찾게 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분노와 고통을 통해 자신을 직시하고 회개할 수 있었음을 깨닫게 했습니다. 이는 많은 이들에게 신앙에 대한 깊은 성찰을 주었고, 엔도는 그 이후로도 그의 작품을 통해 신앙의 의미를 탐구하며, 전 세계적으로 그리스도교 신앙을 이해하는 중요한 작가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처음엔 분노가 일었지만, 그 말이 나를 위한 진리였음을 깨달았을 때, 삶은 변한다.” 예수님도 우리에게 그러하십니다. ‘듣기 좋은 말’이 아니라, ‘살리는 말’을 하십니다. 그 말이 불편하더라도, 분노를 넘어 성찰로 나아갈 때, 우리는 구원의 길에 서게 됩니다.
“그분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히브 4,12)
그 칼날은 우리를 베기 위한 것이 아니라, 썩은 것을 도려내어 새 생명을 위한 수술입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루카 4,24-30: 어떤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예수님은 나자렛을 방문하신다. 그들을 회당에서 가르치셨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24절). 예수께서는 엘리야가 찾아간 사렙타 마을의 과부 이야기와 엘리사 시대에 시리아의 장군 나아만을 고쳐주신 이야기(24-27절)를 하시면서, 기적을 팔레스티나 밖에서 행하신 것은 바로 당신의 백성들이 믿음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하신다. 사실 사렙타 마을의 과부(1열왕 17-18장)와 시리아 사람 나아만 장군(2열왕 5장)은 큰 신앙을 보여주었다.
결국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산벼랑으로 예수를 끌고 가 그곳에서 떨어뜨려 죽이려고 한다. 바로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께서 선포하신 새로운 것들에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에게 적개심을 갖게 되었고 그분을 배척하였다. 그분이 불편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리스도와 나와의 관계는 어떤가? 그분은 어떤 면에서 불편한 분이시다. 이 불편한 분의 말씀에 부응하여 우리 자신을 변모시켜 나가고자 하고 있는가, 아니면 나자렛 사람들과 같이 폭력은 행사하지 않았더라도 그분에게 어떤 제약을 가하려 하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 보아야 한다. 우리의 마음 안에도 어떤 면에서 이러한 나자렛 사람들의 모습이 나타날 수도 있다.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하면서도, 내가 가지고 있는 어떤 선입견으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지 못한다면, 그래서 우리 가운데 계시는 주님을 산벼랑으로 밀어내어 죽이려고 하는 것과 같다. 항상 주님의 자녀로서 어떠한 판단을 갖지 않고, 이웃에게서 하느님의 뜻을 발견하고 실천하는 삶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우리가 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매년 2~3차례 이상의 피정을 신학생 때부터 했으니, 이제까지 참 많은 피정에 참여했음을 기억하게 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피정이 이를테면 고상한 피정이었습니다. 신학생 대상의 피정, 신부 대상의 피정은 수준이 높았습니다. 피정 지도자들은 하나같이 이름이 나 있는 분들이었고, 그 내용도 어른에게 알맞은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부끄럽게도 이 피정 지도자들의 강의에 크게 와닿은 적이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문제에 많이 고민했습니다. ‘나의 수준이 너무 낮은 것이 아닐까? 하느님을 너무 모르는 것이 아닐까?’ 등등…. 피정 갈 때마다 늘 이런 고민이 따라왔습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커다란 울림을 얻었던 피정도 많았습니다.
가장 큰 도움이 된 피정은 한 달 동안 이루어진 이냐시오 영신수련이었고, 도 다른 피정은 찬양 속에서 이루어진 특히 자기 체험 안에서 주님을 느끼게 해주는 피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피정들의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자기의 위신, 자존심, 체면, 권위, 품위 따위를 버려야만 했습니다. 그때 피정에서 뜨거운 눈물을 흘릴 수 있었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피정 지도자가 온다고 하더라도 자기가 낮추지 않으면 피정의 기쁨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어린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 주님께서 강조하신 겸손 속에서만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고향 나자렛에 가십니다. 그곳에서 하느님의 말씀이 당신에게서 이루어졌다고 선포하셨지만, 사람들은 이 말씀에 화가 잔뜩 납니다.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자기를 낮추는 겸손을 통해서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들이 예수님보다 더 높다고 생각하고 있기에, 주님의 말씀을 듣기가 거북하고 불쾌해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예수님을 벼랑까지 끌고 가 떨어뜨리려 합니다.
이에 예수님의 반응이 인상적입니다. 보통 누군가가 화를 내면, 그 화를 삭이기 위해 그 사람 편에서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전혀 얽매이지 않으십니다.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십니다. 겸손하지 않은 사람, 자기를 낮추지 않는 사람과 함께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 안에서 주님과 함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교만과 이기심이 가득하다면 과연 주님께서 함께하실까요? 그냥 우리 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실 것입니다. 자기를 낮추는 겸손 가득한 사람만이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며, 주님과 함께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세상의 모든 것을 받아들여라. 그러나 아무것도 소유하려 하지 마라(장자).
※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출처 : 묵상글 단톡방)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
나의 편의와 안위를 위해
우리는 가끔 예수님을
벼랑 끝까지 밀어 내곤 합니다.
타인을 고정관념과 선입관 그리고 편견으로
냉소적 시선을 보내고
나의 기준과 잣대로만 보았던 우리는
너무 쉽게 타인을 판단하고 단죄하며
오늘날에도 그 누군가를
벼랑으로 밀어내고 있습니다.
얕은 믿음으로 수면 위만 보고
물속에 감추어진 깊은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내 마음속 벼랑 끝으로
예수님을 밀쳐내려고 합니다.
이런 우리의 모습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시는 예수님은
우리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가십니다.
이 순간 벼랑 끝으로 밀고 있었던 우리는
다시금 말씀 안에 살아계시고
우리 안에 오시는 주님을
밀쳐대는 일이 없어야겠습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 구속주회
03.24.월."그들 가운데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루카 4, 27)
언제나
하느님께서는
옳으셨습니다.
최선을
다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이십니다.
그 사람이
되어보지
않고서는
그 사람을
결코
알 수 없습니다.
받아들여야 할
하느님의 뜻입니다.
깨지지 않는
우리의 뜻을
깨끗이
씻겨주시는
분 또한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우리의
고집을
비워야
깨끗해질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모르기에
우리는 더욱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이 세운
믿음과
하느님께서
세우신 믿음은
다릅니다.
기대감은
믿음이
아닙니다.
기대감으로
기진맥진해지는
우리의 부실한
내면입니다.
욕심 하나하나에
갇혀있는 우리들
삶입니다.
사랑의 마음이
없으면
우리의 욕심만
앞설 뿐입니다.
사랑이 치유이고
사랑이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가는
믿음입니다.
믿음은
하느님의
은총이
너무 많아
헤아릴 수 없기에
무릎을 꿇습니다.
믿음과 치유
사이에서
제자리걸음만
하는 우리들
신앙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구원과 치유의
주도권이
하느님께 있음을
우리가 믿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역사 안에
하느님의
사랑이 있었고
아직도 깨닫지
못한 은총과
치유가 있었습니다.
욕심을 비워내야
가득해지고
깨끗하여지는
구원입니다.
구원을 가로막는
선입견과 편견의
가장 아픈 대상은
바로
우리 자신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사순 되시길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이병우 루카 신부님 - 마산교구 합천성당 주임신부님
"그들 가운데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루카4,27ㄴ)
'현재를 살자!'
오늘 복음(루카4,24ㄴ-30)은 '모두에게 열려져 있는 구원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활(예수님의 구원활동)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희년 선포'(루카4,18-19)를 나자렛에서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인간 예수로만 바라보면서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엘리야 때에 이스라엘에 과부가 많이 있었던 것과 엘리사 시대에 이스라엘의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던 것을 언급하시면서, 이스라엘에 구원의 손길이 내리지 않고, 이방인 지역에 구원의 손길이 내려진 것을 언급하십니다. 회당에 있던 유다인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화가 잔뜩 나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하느님의 구원은 믿는 이들에게 내려지는 구원', '지금 믿는 사람들, 지금 회개하는 사람들에게 내려지는 구원'이라는 것을 다시금 깊이 깨닫게 됩니다.
유다인들은 자신들이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되었기에 구원은 자신들의 몫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선포하신 것은 구원은 이방인들을 포함한 모두에게 열려져 있고, 특히 진실되게 믿고, 오늘 깨어 있는 이들, 오늘 회개하는 이들, 오늘 믿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구원이 있다는 선포였습니다.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루카4,27)
내가 성직자라는 것이, 내가 수도자라는 것이, 내가 세례받은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이 하느님 구원의 절대적 보증 수표가 아닙니다. 오직 오늘 지금 여기에서 진실되게 믿고, 회개하는 사람에게만 구원이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마르10,31)
현재를 살도록 합시다!
복음말씀
제1독서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지만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루카 4,27 참조).>
▥ 열왕기 하권의 말씀입니다.5,1-15ㄷ
주님께서 나아만을 시켜 아람에 승리를 주셨던 것이다.
나아만은 힘센 용사였으나 나병 환자였다.
2 한번은 아람군이 약탈하러 나갔다가,
이스라엘 땅에서 어린 소녀 하나를 사로잡아 왔는데,
그 소녀는 나아만의 아내 곁에 있게 되었다.
3 소녀가 자기 여주인에게 말하였다.
“주인 어르신께서 사마리아에 계시는 예언자를 만나 보시면 좋겠습니다.
그분이라면 주인님의 나병을 고쳐 주실 텐데요.”
4 그래서 나아만은 자기 주군에게 나아가,
이스라엘 땅에서 온 소녀가 이러이러한 말을 하였다고 아뢰었다.
5 그러자 아람 임금이 말하였다.
“내가 이스라엘 임금에게 편지를 써 보낼 터이니, 가 보시오.”
이리하여 나아만은 은 열 탈렌트와 금 육천 세켈과 예복 열 벌을 가지고 가서,
6 이스라엘 임금에게 편지를 전하였다.
그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이 편지가 임금님에게 닿는 대로, 내가 나의 신하 나아만을
임금님에게 보냈다는 사실을 알고, 그의 나병을 고쳐 주십시오.”
7 이스라엘 임금은 이 편지를 읽고 옷을 찢으면서 말하였다.
“내가 사람을 죽이고 살리시는 하느님이란 말인가?
그가 사람을 보내어 나에게 나병을 고쳐 달라고 하다니!
나와 싸울 기회를 그가 찾고 있다는 사실을 그대들은 분명히 알아 두시오.”
8 하느님의 사람 엘리사는 이스라엘 임금이 옷을 찢었다는 소리를 듣고,
임금에게 사람을 보내어 말을 전하였다.
“임금님께서는 어찌하여 옷을 찢으셨습니까? 그를 저에게 보내십시오.
그러면 그가 이스라엘에 예언자가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9 그리하여 나아만은 군마와 병거를 거느리고
엘리사의 집 대문 앞에 와서 멈추었다.
10 엘리사는 심부름꾼을 시켜 말을 전하였다.
“요르단 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으십시오.
그러면 새살이 돋아 깨끗해질 것입니다.”
11 나아만은 화가 나서 발길을 돌리며 말하였다.
“나는 당연히 그가 나에게 나와 서서, 주 그의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며
병든 곳 위에 손을 흔들어 이 나병을 고쳐 주려니 생각하였다.
12 다마스쿠스의 강 아바나와 파르파르는 이스라엘의 어떤 물보다 더 좋지 않으냐?
그렇다면 거기에서 씻어도 깨끗해질 수 있지 않겠느냐?”
나아만은 성을 내며 발길을 옮겼다.
13 그러나 그의 부하들이 그에게 다가가 말하였다.
“아버님, 만일 이 예언자가 어려운 일을 시켰다면 하지 않으셨겠습니까?
그런데 그는 아버님께 몸을 씻기만 하면 깨끗이 낫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14 그리하여 나아만은 하느님의 사람이 일러 준 대로,
요르단 강에 내려가서 일곱 번 몸을 담갔다.
그러자 그는 어린아이 살처럼 새살이 돋아 깨끗해졌다.
15 나아만은 수행원을 모두 거느리고 하느님의 사람에게로 되돌아가
그 앞에 서서 말하였다.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
온 세상에서 이스라엘 밖에는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예수님께서는 엘리야나 엘리사처럼 유다인들에게만 파견되신 것이 아니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4,24ㄴ-30
예수님께서는 나자렛으로 가시어 회당에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24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25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삼 년 육 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 온 땅에 큰 기근이 들었던 엘리야 때에,
이스라엘에 과부가 많이 있었다.
26 그러나 엘리야는 그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파견되지 않고,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에게만 파견되었다.
27 또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
28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 화가 잔뜩 났다.
29 그래서 그들은 들고일어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다.
그 고을은 산 위에 지어져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그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30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