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문점 도끼 살인 사건(板門店 도끼 殺人事件, 영어: Axe murder incident) 은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인근 공동경비구역 내에서 조선인민군 군인 30여명이 도끼를 휘둘러 미루나무 가지치기 작업을 감독하던 주한 미군 장교 2명을 살해하고 주한 미군 및 대한민국 국군 병력 다수에게 피해를 입힌 사건이다.
대한민국에서는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8·18 도끼 만행 등으로도 불린다.판문점 도끼 살인 사건DMZ incident tree.jpg사건의 발단이 된 문제의 미루나무날짜1976년 8월 18일시간UTC+8:00 기준 오전 10시위치판문점 근처좌표북위 37° 57′ 21.59″ 동경 126° 40′ 21.33″원인미루나무 벌목 시도결과폴 버니언 작전 발동으로 사건에 대한 보복.목차사건의 발생 편집사건 당시의 모습.이 사진에 마크 배럿 중위는 찍혀 있지 않다(배럿 중위로 표시된 사람은 진 비클리(Gene Bickley) 하사이다)문제의 미루나무는 당시 공동경비구역에서 25년생 15m 높이의 나무로서 대한민국(이하 남한)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하 북한) 양측이 상대방을 감시하기 위한 시계확보에 지장을 주고 있었다.유엔군 측 주한 미군은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안의 제5관측소에서 제3초소와 비무장지대를 관측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북한 3개 초소에 둘러싸인 제3초소 부근에 미루나무 가지가 무성하게 자라있어 이를 제대로 관측할 수가 없었다.1976년 8월 18일 오전 10시경 주한 미군 경비중대장 아서 조지 보니파스(Arthur George Bonifas, 1943년 4월 22일생) 대위를 위시하여 소대장 마크 토머스 배럿(Mark Thomas Barrett, 1951년 6월 9일생) 중위 등 2명과 부사관과 병[1] 4명, 대한민국 국군 장교 1명과 부사관과 병 4명 등 11명은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안의 '돌아오지 않는 다리' 남쪽 유엔군측 제3초소 부근에서 시야를 가린 미루나무의 전지작업을 하는 남한 노무자 5명의 작업을 감독·경비하고 있었다.조선인민군 박철 중위와 다른 장교 1명, 그리고 15명의 부사관과 병이 나타나 작업 중지를 요구하였다.
미루나무의 위치가 유엔군 측의 관할에 속했기에 보수작업을 하는데 문제가 없다고 판단한 보니파스 대위는 경비중대장 직권으로 작업을 계속 지시하였다. 인근 초소의 인민군 부사관과 병 20여명은 경비 병력을 요청받고 트럭을 이용하여 도착하였다. 박철 중위의 작업 중지 재요구를 보니파스 대위가 거부하자 박철의 공격명령에 따라 인민군 부사관과 병들은 트럭에 실어 가지고 온 곡괭이, 몽둥이와 함께 노동자들이 작업에 쓰려고 가져왔던 도끼 등을 빼앗아 휘두르며 기습하였다. 이들은 유엔군측 지휘관과 장병들에게 집중 공격을 가하여 경비중대장 아서 보니파스 대위와 배럿 중위가 이마에 중상을 입고 이송 중 사망하였으며, 주한 미군 부사관과 병 4명, 국군 장교와 부사관과 병 4명 등이 중경상을 입었고, 유엔군 트럭 3대가 파손되었다
.[2]대한민국과 미국의 대응 편집폴 버니언 작전폴 버니언 작전 후 잘린 나무조각을 담은 기념품사건이 발생하자 미국 백악관에서는 워싱턴 특별 대책반이 소집되었으며 미국 국무부과 함께 "이 사건의 결과로 빚어지는 어떠한 사태에 대해서도 그 책임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있다"는 공동성명을 당일에 발표하였다. 또한 제럴드 포드 미국 대통령의 명령에 따라 스틸웰 주한미군 사령관은 문제의 미루나무를 베고 공동경비구역 내에 인민군이 설치한 불법 방벽(防壁; 바리게이트 등)을 제거하기 위한 폴 버니언 작전(Operation Paul Bunyan: 미국 전설에 등장하는 거구의 나무꾼 폴 버니언에서 따온 작전명)을 기본으로 F-4, F-111, B-52 폭격기, 미드웨이호 등을 동원하는 대규모 무력 시위 계획을 수립하였고, 전투준비태세인 데프콘 3이 발령되었다.
[3][4][5]폴 버니언 작전 시 유엔군은 데프콘 2(공격준비태세)를 발령하였다. 미국 본토에서 핵무기 탑재가 가능한 F-111전투기 20대가 한반도로 긴급 파견되었고, 괌에서는 B-52 폭격기 3대, 오키나와 카데나 미공군기지에서 이륙한 F-4 24대가 한반도 상공을 선회하였다. 또한 함재기 65대를 탑재한 미해군 제7함대 소속 항공모함 미드웨이호가 순양함 등의 중무장한 호위함 5척을 거느리고 동해를 북상하여 한국 해역 인근에 배치되었다.
대한민국은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특전사 제1 공수특전여단 김종헌 소령을 지휘관으로 하고 64인의 특전사 대원들로 구성된 결사대가 편성되어 보복작전이 실시됐다. M16 소총, 수류탄, 크레모아 등을 트럭에 숨기고 카투사로 위장한 64명의 특전사 요원들은 공동경비구역 내에서의 폴 버니언 작전에 투입되어 조선인민군 초소 4개를 파괴하였다. 조선인민군이 이에 무력대응할 경우엔 과감히 사살하여 보복을 완료한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조선인민군이 이에 대응하지 않고 물러서서 더 이상의 무력사태로까지 확대되진 않았다.
[6]경과 편집판문점 내 남북 경계폴 버니언 작전 종결 후 북한은 긴급 수석대표회의를 요청, 주석 직에 있던 김일성의 '유감성명'을 전달했다. 처음에 미국은 북한의 유감성명이 잘못을 인정한 것이 아니라며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다가 24시간 만에 태도를 바꿔 이를 수락하였다. 북한은 1년 반 동안이나 준전시상태를 풀지 않았고, 남한도 북한을 강력하게 비판하는 등 사건의 파문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이후 사건 당사자인 미국이 빠진 상태에서 남한과 북한 간의 군사적 긴장상태가 지속되었다. 이후 판문점 내의 공동경비구역에서도 경계가 설정되었으며, 경계 밖 상대 지역에 존재하던 초소는 철거되었으며, 혼응토 단으로 경계를 표시하였다. 사건 10주년인 1986년 8월 18일에는 근처에 있는 캠프 키티호크(Camp Kitty Hawk)가 보니파스 대위를 기려 캠프 보니파스로 개칭되었다.
이 당시 나는 상병으로 여단 중무장구보 선수로뽑혀 대대본부에서 합숙훈련을 할때였는데 부대전체에 비상이발령되었고 대대에는 5분대기조가 출동준비에 만전을 기했던것같은데 그래도 우리 중무장구보 선수들은 대대장의 명에따라 훈련을 계속하였다 이유는 중무장구보가 68년도 12.1사태때 체포된 김신조의 자백으로 그들보다 더 빨리뛰어야한다는 부대장의 지시에 따라 우리 해병들 고생많이했지요 중무장이란 완전무장에 공용화기를 3등분하여 메고 12키로메타를 뛰는데 50분정도 + 3분여정도 사람잡았다는거죠
첫댓글 아무리 남북관계가 좋아져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6. 25 전쟁 이후 전쟁 발발의 위기였던 1976. 8. 18
안보와 평화는 거져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 하겠다.
어느때 보다 정신무장을 강활]해야 할 때이다.
그 당시 군 복무 했던 전우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맹호
수기사(수도기계화보병사단)에서 복무할 때 였으며, 전역을 6개월 앞두고 8.18 사태로 인해 전투준비태세에 들어갔다.
병사들은 물론 간부와 영외 거주자들은 모두 전투태세로 영내 대기상태에 들어갔다.
정비대대 본부에 근무했는데 모든 장비를 m602트럭에 적재하여 부대 정문에서 길게 대기하고 있었다.
내무생활은 없었으며, 저녁엔 인원파악만 하고 군화를 신은 체 취침에 들어갔다.
상황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낮에도 군화를 신은 체 동초 근무만 하고 침상에서 대기상태였다.
행정보급관(당시 인사계)에 의하면 가평 현리시내 분위기를 잠시 들을 수 있었다.
사단사령부 직할대, 1여단 26여단 포병여단 간부들은 거의 모두 현리에 가족가 영외 거주를 할 때였으니
가족들은 전쟁이 날수도 있다는 간부들 말에 울고불며 큰 걱정을 했다는 간부들의 이구동성이었다.
후에 들은 여단의 소식은 포병여단을 비롯해 예하 전투여단들은 모두 전방으로 출동했다고 했다.
영내에서 일반신문을 볼 수 없었기에 사회 소식은 들을 수 없었다.
한편 영내에서는 수시로 인원파악만 했으며,
전투차량과 전차 장갑차 등의 차량정비는 모두 중지되었으며,
조식 중식 석식 때 식사만 하면 됐다.
그러므로 마음은 편했다. 맹호
모든휴가병은 자대로복귀명령이 이루어졌지요
저도휴가중이라
후방에 모든병력들이 전방으로집결
저는 g,p안으로 그날 죽는줄 알았습니다
수류탄 탄알 560발 완전무장에서 총알받이되나 했습니다
많은동료병사들이 이제죽었구나 하면서 지냇던 그시절이 생각납니다
지금도 일년에한번식은 찿아갑니다 철원으로
태창리 님. 안녕하세요.
찜통 더위 잘 참으셨네요.
전방에서의 느낌은 금방이라도 전쟁날것 같은
긴장 분위기었겠습니다. 죽음을 생각하니까요.
청성부대복무? 백골부대복무?
3,4십도 더위를 보내니 요즘은 견딜만 하네요.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맹호
그때나 지금이나 호시탐탐 남한을 집어 삼키려는 북한!
평화는 우선 안보가 튼튼해야 평화가 보장되는데
문을 다열어주고 있는 현실이 ~~~
국가안위의 제 1은 안보입니다.
결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무엇이 그렇게 급한지요?
경운산님. 맹호
도끼만행사건 생각하기도싫지요 너무나악날한 북한놈들이였지요
지금도잊지않는사람들이 많이잇지요 그날을 기억도 못하는사람들도잇겟지만
너무나 큰사건이였지요 생각하기조차하기싫네요
그당시 모든 것이 어려웠지만,
사병들의 사기는 충천했었습니다.
격동의 그시대
지금 남북, 북미간의 모든것이 잘 해결되기
바랄 뿐입니다. 맹호
이 당시 나는 상병으로 여단 중무장구보 선수로뽑혀 대대본부에서 합숙훈련을 할때였는데 부대전체에 비상이발령되었고 대대에는 5분대기조가 출동준비에 만전을 기했던것같은데
그래도 우리 중무장구보 선수들은 대대장의 명에따라 훈련을 계속하였다
이유는 중무장구보가 68년도 12.1사태때 체포된 김신조의 자백으로 그들보다 더 빨리뛰어야한다는 부대장의 지시에 따라 우리 해병들 고생많이했지요
중무장이란 완전무장에 공용화기를 3등분하여 메고 12키로메타를 뛰는데 50분정도 + 3분여정도 사람잡았다는거죠
정말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ㅡ어휴
말이 중무장 구보지 상상이 갑니다.
당시 공용화기는 AR, LMG
진짜 고생 많이하셨습니다.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
첫 휴가나와다가 자진복귀 저희 어머니가 따라나오시면서 울며불며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선하군요~
당시,,,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JSA에서 근무했던 몇 안되는 전역병 중 1인 입니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결코,, 잊을 수 없는 그 날 이지요.
님들의 많은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세고개 님! 안녕하세요. 님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저는 수기사(맹호부대)에서 근무 중이었습니다.
당시 JSAㅇ서 근무하셨다니 누구보다 생생하게 기억하시겠군요.
놈들은 그렇게 잔인한 행동을 했죠.
그러니 지금도 하는 짖이 신뢰가 안갑니다.
남북한 연락도 안되고 직통전화도 안받고 놈들 맘대로 합니다.
우린 너무 순진한지 바보인지 방문해달라고 매달리는 한심한 행동이죠
광화문 거리에 인공기가 올라가고, 환영하고^^^^
모든 부대가 그 시절에는 초긴장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