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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ノ군대이야기 8. 18 판문점 도끼 만행
음악과 대화 추천 1 조회 283 18.08.18 09:17 댓글 15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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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18.08.18 09:35

    첫댓글 아무리 남북관계가 좋아져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6. 25 전쟁 이후 전쟁 발발의 위기였던 1976. 8. 18


    안보와 평화는 거져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 하겠다.
    어느때 보다 정신무장을 강활]해야 할 때이다.

    그 당시 군 복무 했던 전우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맹호

  • 작성자 18.08.18 16:40

    수기사(수도기계화보병사단)에서 복무할 때 였으며, 전역을 6개월 앞두고 8.18 사태로 인해 전투준비태세에 들어갔다.
    병사들은 물론 간부와 영외 거주자들은 모두 전투태세로 영내 대기상태에 들어갔다.

    정비대대 본부에 근무했는데 모든 장비를 m602트럭에 적재하여 부대 정문에서 길게 대기하고 있었다.
    내무생활은 없었으며, 저녁엔 인원파악만 하고 군화를 신은 체 취침에 들어갔다.

    상황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낮에도 군화를 신은 체 동초 근무만 하고 침상에서 대기상태였다.
    행정보급관(당시 인사계)에 의하면 가평 현리시내 분위기를 잠시 들을 수 있었다.

  • 작성자 18.08.18 16:42

    사단사령부 직할대, 1여단 26여단 포병여단 간부들은 거의 모두 현리에 가족가 영외 거주를 할 때였으니
    가족들은 전쟁이 날수도 있다는 간부들 말에 울고불며 큰 걱정을 했다는 간부들의 이구동성이었다.

    후에 들은 여단의 소식은 포병여단을 비롯해 예하 전투여단들은 모두 전방으로 출동했다고 했다.
    영내에서 일반신문을 볼 수 없었기에 사회 소식은 들을 수 없었다.

    한편 영내에서는 수시로 인원파악만 했으며,
    전투차량과 전차 장갑차 등의 차량정비는 모두 중지되었으며,

    조식 중식 석식 때 식사만 하면 됐다.
    그러므로 마음은 편했다. 맹호

  • 18.08.19 13:29

    모든휴가병은 자대로복귀명령이 이루어졌지요
    저도휴가중이라
    후방에 모든병력들이 전방으로집결
    저는 g,p안으로 그날 죽는줄 알았습니다
    수류탄 탄알 560발 완전무장에서 총알받이되나 했습니다
    많은동료병사들이 이제죽었구나 하면서 지냇던 그시절이 생각납니다
    지금도 일년에한번식은 찿아갑니다 철원으로

  • 작성자 18.08.21 11:14

    태창리 님. 안녕하세요.
    찜통 더위 잘 참으셨네요.

    전방에서의 느낌은 금방이라도 전쟁날것 같은
    긴장 분위기었겠습니다. 죽음을 생각하니까요.

    청성부대복무? 백골부대복무?
    3,4십도 더위를 보내니 요즘은 견딜만 하네요.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맹호

  • 18.08.20 00:06

    그때나 지금이나 호시탐탐 남한을 집어 삼키려는 북한!
    평화는 우선 안보가 튼튼해야 평화가 보장되는데
    문을 다열어주고 있는 현실이 ~~~

  • 작성자 18.08.20 21:33

    국가안위의 제 1은 안보입니다.
    결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무엇이 그렇게 급한지요?
    경운산님. 맹호

  • 18.08.20 07:43

    도끼만행사건 생각하기도싫지요 너무나악날한 북한놈들이였지요
    지금도잊지않는사람들이 많이잇지요 그날을 기억도 못하는사람들도잇겟지만
    너무나 큰사건이였지요 생각하기조차하기싫네요

  • 작성자 18.08.20 21:36

    그당시 모든 것이 어려웠지만,
    사병들의 사기는 충천했었습니다.

    격동의 그시대
    지금 남북, 북미간의 모든것이 잘 해결되기
    바랄 뿐입니다. 맹호

  • 18.08.26 14:34

    이 당시 나는 상병으로 여단 중무장구보 선수로뽑혀 대대본부에서 합숙훈련을 할때였는데 부대전체에 비상이발령되었고 대대에는 5분대기조가 출동준비에 만전을 기했던것같은데
    그래도 우리 중무장구보 선수들은 대대장의 명에따라 훈련을 계속하였다
    이유는 중무장구보가 68년도 12.1사태때 체포된 김신조의 자백으로 그들보다 더 빨리뛰어야한다는 부대장의 지시에 따라 우리 해병들 고생많이했지요
    중무장이란 완전무장에 공용화기를 3등분하여 메고 12키로메타를 뛰는데 50분정도 + 3분여정도 사람잡았다는거죠

  • 작성자 18.08.27 14:06

    정말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말이 중무장 구보지 상상이 갑니다.

    당시 공용화기는 AR, LMG? ㅡ어휴~~~
    진짜 고생 많이하셨습니다.

  • 18.09.23 20:31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
    첫 휴가나와다가 자진복귀 저희 어머니가 따라나오시면서 울며불며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선하군요~

  • 18.12.19 22:08

    당시,,,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JSA에서 근무했던 몇 안되는 전역병 중 1인 입니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결코,, 잊을 수 없는 그 날 이지요.
    님들의 많은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 작성자 18.12.20 21:48

    세고개 님! 안녕하세요. 님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저는 수기사(맹호부대)에서 근무 중이었습니다.

    당시 JSAㅇ서 근무하셨다니 누구보다 생생하게 기억하시겠군요.
    놈들은 그렇게 잔인한 행동을 했죠.

    그러니 지금도 하는 짖이 신뢰가 안갑니다.
    남북한 연락도 안되고 직통전화도 안받고 놈들 맘대로 합니다.

    우린 너무 순진한지 바보인지 방문해달라고 매달리는 한심한 행동이죠
    광화문 거리에 인공기가 올라가고, 환영하고^^^^

  • 24.07.24 13:47

    모든 부대가 그 시절에는 초긴장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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