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헌영(朴憲永)은 독립운동가이며 북한의 정치가로 본관은 영해(寧海 :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박씨 아버지 박현주(朴鉉柱)는 쌀장사를 하던 상인이고 어머니 신평(新平) 이씨 이학규(李學圭)는 한번 결혼을 했다가 사별하고 박현주의 첩실로 들어와서 1900년 5월 1일 충청남도 예산군 신양면 신양리에서 박헌영을 출산했다.
박헌영은 어려서부터 서당에서 글을 배우다가 1911년 12살 때 예산군 대흥면에 있는 대흥보통학교 (현 대흥초등학교)에 입학하고 1915년 졸업하고 그해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등 학교)에 입학고 조선중앙기독교 청년회(YMCA) 영어반에 가입하고 영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1919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4월 11일 중국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조직되자 그해 9월 상해로 건너가서 지내다가 1920년 10월 동갑인 공산주의자 임원근(林元根)을 만나면서 공산주의 길을 걷게되었다.
임원근을 만난 박헌영은 그후 김단야(金丹冶), 최창식(崔昌植)과 함께 이르츠크파 고려공산당 상해지부를 이끌던 김만겸(金萬謙)을 만나서 고려공산당 상해지부에 정식으로 입당을 하고 고려공산청년동맹 책임비서에 취임하였다. 1921년 상하이(上海) 외국어학교를 다니던 허정숙 (許貞淑)의 소개로 상해 안정씨여학교(晏鼎氏女學校)에서 영어와 피아노 공부를 하던 주세죽(朱世竹) 을 만났다.
1922년 1월 박헌영은 고려공산당 상해지부에서 함께 활동하던 김단야, 임원근과 함께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인민대표대회와 극동청년대회에 고려공산청년단 대표로 참가하고 그해 3월에 상해로 돌아온 박헌영은 김단야, 임원근과 함께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총국을 결성하고 집행위원이 되고 주세죽(朱世竹)과 결혼을 했다. 그해 4월 박헌영은 김단야, 임원근과 함께 상해에 있는 고려공산당청년회를 국내로 옮기고 국내에서 활동을 시작하기 위해서 입국하다가 신의주역에서 공산당원 이라고 일경에 체포되고 신의주지법에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1924년 1월 만기출소한 박헌영은 그해 2월 결성된 신흥청년동맹에 가입하고 김찬(金燦), 신철(辛鐵)과 함께 전국 28개 도시를 순회하며 청년의 사회적 지위와 식민지 청년운동을 주제로 강연회를 열고 신흥청년동맹 상무위원을 지내고 그해 4월 동아일보사에 기자로 입사했다.
1924년 4월 23일 서울중앙청년회관에서 전국 223개 청년 단체 대표 170명이 참석한 가운데 조선청년총동맹창립대회를 개최되고 중앙검사위원에 선출되었다. 그해 9월 동아일보를 사퇴하고 사회주의 단체인 신사상연구회의 화요회(火曜會)에서 활동하던 홍증식(洪增植)의 소개로 조선일보 사회부로 자리를 옮기고 1925년 9월 8일 조선일보 신일용(辛日鎔) 기자가 조선총독부의 식민통치를 비판하는 사설 "조선과 러시아의 정치적 관계"에 문제가 되자 조선일보사는 무기발행정지처분을 받고 박헌영도 이에 연류되어 해고되었다.
1925년 4월 17일 서울 을지로 황금정(黃金町 : 현 서울시 중구 을지로1가) 중국 음식점 아서원 2층에서 공산당 화요회, 북풍회, 상해파 등에서 활동하던 조봉암, 김약수, 김재봉, 윤덕병, 조동호등 공산주의자 19명이 비밀리에 모여서 조선공산당창당대회를 개최하고 창설하였다.
다음 날인 4월 18일 박헌영은 주세죽과 살던 자신의 신혼집에서 박헌영, 주세죽, 조봉암, 김찬, 김단야, 권오설, 임원근, 홍증식, 김광, 박철환, 조이환, 장수산, 염창렬, 등 20명이 참석한 가운데 고려공산청년회를 결성하고 책임비서직을 맡았다.
1925년 11월 22일 신의주 조선공산당 회원 결혼식 축하연 뒤풀이에서 조선공산당 회원 20여 명이 노래를 부르면서 가무를 즐기고 있을 때 옆 방에서 술을 마시고 있던 신의주 경찰서 소속 형사들이 시끄러우니 조용히 해달라고 요구하자 싸움이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조선공산당 회원들은 경찰을 집단구타를 하고 신의주 경찰서는 신의주 공산당 회원을 구속하고 신의주 공신당 사무실과 회원들의 집을 수색하는 과정에서 청년회원인 김경서의 집에서 조선공산당 중앙당 집행위원회 회원 명단과 박헌영이 상해 조선공산당으로 보내는 비밀문서가 발견되었다.
그러자 신의주 경찰서는 조선공산당 중앙 사무실이 있는 서울 종로경찰서에 이같은 사실을 통보하고 합동 조사를 시작해서 전국 조선공산당 간부회원 60여 명을 체포했다. 이른바 이 사건이 제1차 공산당 사건으로 11월 29일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 박헌영과 부인 주세죽(朱世竹)도 종로경찰서에 검거되고 의주형무소로 이감되어 수감되고 조사를 받았다. 조사결과 부인 주세죽은 20여 일 후에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되고 박헌영은 서대문 형무소로 이감되고 수감되었다.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된 박헌영은 미친 사람 짖을 가장하자 1926년 11월 병보석으로 출감 했다.
출감후에 고항 예산군 신양리에서 지내던 박헌영은 부인 주세죽과 함께 1928년 소련 블라디보스토크로 탈출하자 조선총독부는 함흥경찰서의 관계자들에게 박헌영이 소련으로 탈출하는 것을 막지못했다고 그 책임을 물어서 징계처분을 내렸다.
후일 가수 김용환은 박헌영이 소련으로 도망친것에 영감을 엍어서 노래 눈물 젖은 두만강을 작곡하기도 하였다.블라디보스토크 한국인 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하고 지내던 박헌영은 1928년 9월 1일 부인 주세죽과 함께 모스크바로 가는 횡단열차에서 부인 주세죽은 딸 박비비안나를 출산했다.
1929년 1월 국제레닌학교에 입학해서 수료를 하고 2월 소련공산당에 입당하고 그해 모스크바 공산대학인 동방근로자대학에 입학하고 호치민을 만나서 친분을 쌓으며 교류하였다. 1931년 동방근로자대학을 졸업하고 1932년 1월 딸 박비비안나를 모스크바에 있는 고아원에 맡기고 아내 주세죽과 함께 상하이로 건너간 박헌영은 김단야 김형선 등과 함께 공산당활동을 하면서 공산당 기관지 "코뮤니티"를 발행하고 국내로 들여와서 배포하다가 1933년 7월 5일 상해 일본영사관 경찰에 체포되고 경기도 경찰부로 압송되어 치안유지법과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6년형을 언도받고 복역하자 부인 죽세죽은 1937년 11월 박헌영과 친구처럼 지내던 김단야와 재혼하고 박헌영은 1939년 만기 출옥하였다.
만기 출옥한 박헌영은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고 인민정부를 세우기 위해서 김단야, 김삼룡, 이관술 등과 함께 경성콤그룹을 창설하고 활동하면서 경성콤그룹의 전신인 조선공산당 재건경성 준비 그룹을 결성한 이재유(李載裕)의 부인 이순금(李順今)과 내연의 관계를 가지면서 경성콤그룹에서 활동하다가 1941년 9월 일본 경찰의 수배를 받자 이순금과 함께 전라남도 광주로 피신하여 은둔 생활을 하면서 공산당 지하조직을 이끌었다.
※[이금순은 1946년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에 열류되어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1950년 한국동란 때 한국군에게 살해당한 이관술의 배다른 여동생이다.](1933년 2월 9일 경성학생 협의회 사건으로 동대문 경찰서에 구속된 이순금)
※[경성콤그룹 : 김단야, 김삼룡, 이관술, 정태식, 이현상 등이 이재유가 조직한 조선공산당재건경성준비그룹을 독립운동단체이자 비밀결사 조직인 조선공산당 재건운동 단체인 경성콤그룹으로 조직한 단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