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0730. 묵상글 ( 연중 제17주간 화요일. - 구별과 차별을 하는 것이 가라지다.. 등 )
----------------------------------------------------
240730. 연중 제17주간 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구별과 차별을 하는 것이 가라지다.
오늘 복음은 밀과 가라지의 비유입니다.
우리 공동체를 보면 가라지가 꼭 밀 가운데 섞여 있는데,
그 가라지들을 우리가 뽑으려고 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비유에서는 가라지를 잘 솎아낼 능력이
우리에게 없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오늘 저는 다른 차원에서 이 문제에 접근할까 합니다.
지금 나는 나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나를 밀이라고 생각하는가? 가라지라고 생각하는가?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자기를 밀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가라지입니다.
자기를 가라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밀이고
다른 사람을 가라지라고 생각하고 솎아내려는 사람이 실은 가라지입니다.
오늘은 이 짧은 묵상 나누기만 하겠습니다.
이것이 지난 토요일 저의 나눔이었습니다.
오늘의 나눔은 이것에 이어지는 것입니다.
가라지는 구별과 차별하는 것이 가라지입니다.
이것을 뒤집으면 구별하지 않는 것,
특히 차별하지 않는 것이 밀입니다.
불교에서 구별은 부처가 할 짓이 아니고,
그러니 깨닫지 못한 자가 하는 짓입니다.
인간의 모든 고통과 불행은 이 구별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사실 악이라는 것 또는 가라지라는 것은 선에서 시작되지요.
이것이 선이라고 하는 순간은 이것이 아닌 것이 악이잖습니까?
이것만이 선이라고 하는 순간 이것이 아닌 것이 악이잖습니까?
양단의 개념이란 것이 다 이렇습니다.
흑백논리라는 말이 있듯이
모든 것을 백이 아니면 다 흑이라고 보는 것은 위험하고,
그 이전에 흑과 백을 나누고 구별하는 것 자체가 나쁩니다.
구별이 이렇게 나쁘면 차별은 더 나쁩니다.
구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것일 뿐인데 악한 것이라고 하고,
오늘 비유에서 가라지를 뽑아내려 하는 것처럼
악한 것이기에 없애야 한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늦잠을 잔 관계로 여기까지만 나누기 하려고 하는데
위의 나눔에서 악이란 죄의 악까지 포함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밝힙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존재(선)를 파괴하는 죄악까지
괜찮다고 하거나 그런 죄악을 우리가 없애려고 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
240730. 연중 제17주간 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사람들은 고통의 시간을 모두 기억할까요? 대니엘 카니먼과 그의 동료들은 하나의 실험을 했습니다. 이 연구팀은 참가자들에게 얼음이 둥둥 떠 있는 차가운 물 속에 손을 담그고 버티게 했습니다. 이때 A 집단은 1분 동안 얼음물에 손을 담그고 있게 했고, B 집단은 1분에 30초 더 얼음물에 손을 담그게 했습니다. 그러나 B 집단은 1분 30초 뒤, 30초 동안 따뜻한 물에 손을 담글 수 있게 했습니다. 정리하면, A 집단은 1분 동안 찬물에, B 집단은 1분 30초 동안 찬물에 그리고 30초를 따뜻한 물에 손을 담근 것입니다.
이 중 어느 집단이 더 고통을 호소했을까요? 얼음물에 1분 30초 담근 B 집단이 더 오랫동안 찬물에 있었으니 괴로웠을 것이라고 예측하지만 실제로는 A 집단이었습니다. 얼마나 오래 괴로웠는가보다 최후의 경험이 중요했습니다. B 집단은 따뜻한 물 30초가 괴로움을 한껏 낮춰준 것이었습니다.
고통과 시련으로 힘들다는 분을 종종 만납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하나같이 “이제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니 고통과 시련의 무게가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때 무엇인가를 해야 했습니다. 고통과 시련으로 기도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기도해야 했습니다. 고통과 시련 안에서 나올 수 없다며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라도 해서 좋은 기억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고통과 시련을 어떻게 대하고 계십니까? 이 역시도 지나갈 하나의 과거라는 사실을 잊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밭의 가라지 비유 말씀을 설명해 주십니다.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사람의 아들이고, 밭은 세상이라고 하십니다. 또한 좋은 씨는 하늘 나라의 자녀들이고 가라지들은 악한 자의 자녀들이며,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악마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수확 때는 세상 종말이고 일꾼들은 천사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 안에 가라지 같은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들을 만나면 힘이 들고 또 큰 아픔과 상처를 겪게 됩니다. 그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가라지 같은 저 사람 때문에 도저히 못 살겠어!’라면서 포기하고 좌절해야 할까요? 가라지에 눌려서 제대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맙니다.
세상 종말 때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울 것이기 때문에, 포기하고 좌절하는 삶이 아니라 어떻게든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의인이 되어 하느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수 있습니다.
------------------
오늘의 명언: 행복은 선택에 달려 있다. 우리에겐 여전히, 삶을 좌우할 수 있는 엄청난 힘이 남아 있다(존 딜런드)
----------------------------------------------------
240730. 연중 제17주간 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우리는 때로는 이 세상에 판치고 있는 폭력과 불의와 죄악을 보면서 곧잘 흥분하고 분노하기도 합니다. 보고만 계시는 하느님이 실망스럽고 원망스럽기도 합니다. 또 교회와 우리 공동체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부정과 부조리와 모순을 보면서 경악하고 환멸감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자신 안에 꿈틀거리고 있는 미움과 무관심과 온갖 악한 생각들을 보면서 심히 좌절하기도 합니다. 사실, 공동체 안에도, 우리 자신 안에도, 밀과 가라지가 같이 자라고 있습니다. 어찌해야 할지, 참으로 당혹스럽고 망막할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밀밭의 가라지 비유를 자세히 설명해주십시오.”(마태 13,36)라고 청합니다. 왜냐하면, 밭에 가라지가 있는 것을 발견한 종들이 집주인에게 “저희가 가서 그것들을 거두어 낼까요?”(마태 13,28)하고 묻자, 주인이는 말했습니다.
“아니다. 너희가 가라지를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마태 13,29-30)
이는 그 속에서 당신이 주님이심을 깨닫고, 주님이신 당신께 의탁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동행하시는 주님을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그 속에서 주님 사랑하기를 배우라는 말씀입니다. (에페 6,12: “우리의 전투 상대는 인간이 아니라 권세와 세력들과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의 악령들이입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끝날”(마태 13,40)이 되면, 밀과 가라지의 분리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곧 가라지와 밀을 거두어드릴 ‘때’가 따로 있으며, 또한 그것들을 거두어드리는 일을 맡은 ‘일꾼’이 따로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밀과 가라지에 대한 주권이 바로 당신께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동시에, “세상의 끝날”이 될 때까지는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도록 허용되었다는 말해줍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는 것 속에서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앞의 파견설교에서,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마태 10,16)고 하시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 10,2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악이 세상 안에 함께 자라고 있다고 해도, 우리가 그 악에 젖어 들거나 협조하거나 방조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단지 악을 피하고 선이신 하느님께로 나아가라는 것만도 아닙니다. 비록 우리가 악을 뿌리 뽑을 수는 없다 할지라도 악이 번지지 못하도록 막아야 하고, 오히려 악으로부터 선을 보호해야 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악이 더 이상 활개 치지 못하도록 싸워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 10,34)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밀밭의 가라지”(마태 13,36)
주님!
이 세상에 폭력과 불의와 죄악이 판을 쳐도,
내 안에 미움과 무관심과 온갖 나쁜 생각들이 꿈틀거려도,
비록 가라지가 아무리 기승을 부려도,
어둠이 빛을 가리지 못하고 당신의 사랑을 가로막을 수 없게 하소서.
오늘도 꺼지지 않는 빛을 밝혀 사랑의 밀밭을 밝히게 하소서. 아멘
----------------------------------------------------
240730. 연중 제17주간 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인생의 끝에 서면
이건숙씨의 “꼴찌의 간증”에 보니 이런 글이 있습니다.
장수비결
“인생은 육십에 시작하는 것이니
칠십에 저승사자가 오면
잠깐 밖에 나갔다고 전해다오.
팔십에 저승사자가 오면
직 이르다고 말해다오.
구십에 와서 가자고 하면
뭘 그리 서두르냐고 달래다오.
백 살에 와서 가자고 하면
이제 서서히 좋은 시기 봐서
가겠다고 전해다오.”
인생의 끝에 서면 하루라도 더 이 세상에 머물고 싶어지나 봅니다. 욕심이라고 하기에는 모두가 가진 기대요, 바람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1요한2,17). “자기의 육에 뿌리는 사람은 육에서 멸망을 거두고, 성령에 뿌리는 사람은 성령에게서 영원한 생명을 거둘 것입니다. 낙심하지 말고 계속 좋은 일을 합시다. 포기하지 않으면 제때에 수확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갈라6,8-9).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가라지의 비유를 설명해 주시는데 아주 쉽게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사람의 아들이고, 밭은 세상이다. 그리고 좋은 씨는 하늘나라의 자녀들이고 가라지들은 악한 자의 자녀들이며,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악마다. 그리고 수확 때는 세상 종말이고 일꾼들은 천사들이다.”
사실 세상의 종말은 개인적으로 볼 때는 죽음의 순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생 여정의 수확 때인 죽음의 순간에 남을 죄짓게 하고 불의를 저지르는 가라지의 상태로 있다면 불구덩이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나 의인의 상태였다면 아버지의 나라에 들어가게 되고 그 삶은 해처럼 빛나게 됩니다. 너무도 당연한 결과입니다. 그럼에도 그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쉽게 알아들은 만큼 삶의 모습도 맑고 밝아졌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안타깝게도 마지막 날에 좋은 씨앗인 하늘나라의 자녀 가운데에서도 내적으로는 악한 자의 자녀로 밝혀질까 두렵습니다. 얼마나 오래 살아왔는가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살았느냐의 문제가 더 소중함을 일깨우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날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의인은 이 세상의 삶을 살면서 하느님과 멀리 떨어지는 것보다 죽음을 간절히 청했습니다. 그야말로 “의인은 희생의 제물이고 그의 생애는 끊임없는 제사입니다”(성녀 벨라뎃다).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를 갈망하는 만큼 지금 여기서 참 신앙인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늘은 이미 지상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지상 여정은 알곡을 만드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알곡은 추수 때 곳간에 쌓일 것입니다. 의인의 삶이 빛나듯 우리의 삶이 해처럼 빛났으면 좋겠습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240730. 연중 제17주간 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뉴욕엘 며칠 다녀왔습니다. 신문사에 있는 계좌를 정리하려면 제가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하나의 계좌는 닫았고, 다른 하나의 계좌는 결재권을 후임 신부님에게 넘겨 드렸습니다. 인수인계를 하면서 은행 업무도 같이 마무리해야 했는데 깜빡했습니다. 덕분에 뉴욕에서 반가운 얼굴을 볼 수 있었습니다. 직원들은 후임 신부님과 호흡을 잘 맞추고 있었습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신문사 홈페이지의 변화였습니다. 후임 신부님이 전문가의 도움을 받았다고 합니다. 뉴욕에서 돌아오니, 수녀님의 도움으로 청년들이 창고에 ‘벽화’를 그렸습니다. 지난번 창고를 만들면서 어른들이 매주 토요일에 만났습니다. 그렇게 4개월 만나면서 저는 본당 교우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창고는 단순히 물건을 보관하는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창고는 친교와 나눔의 공간이 되었습니다. 저는 청년들에게 벽화를 그려보라고 하였습니다. 벽화는 청년들의 마음을 담은 그림이지만, 벽화를 통해서 청년들이 친교와 나눔을 가질 수 있기를 원했습니다. 저의 뜻대로 청년들은 벽화를 그리기 위해서 자주 만났고, 재능과 끼를 모아서 아름다운 벽화를 만들어냈습니다.
‘身土不二’라는 말이 있습니다. 몸과 땅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서양의 철학과 학문을 배우면서 분석하고 나누는 것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는 어쩌면 ‘통합과 통섭’ 속에서 찾아지는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묵상하고 원리와 기초를 생각하는데 자꾸만 죄가 떠오릅니다. 죄는 부끄럽고, 죄는 멀리해야 하겠지만 우리 삶의 발자국에 함께 따라오는 것입니다. 병은 우리 몸에 깊은 상처를 주지만 우리 마음은 그 병 때문에 오는 ‘근심, 걱정, 두려움’에 더욱 큰 상처를 받습니다. 우리가 음식을 먹으면 완전하게 에너지로 변화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체는 음식을 섭취하고 나서 배설물을 남기게 됩니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생명현상입니다. 배설물은 혐오스럽고 피해야 할 대상이 아닙니다. 배설물은 살아있는 생명은 모두 갖게 됩니다. 굳이 오래 간직할 필요가 없으므로 우리는 에너지로 사용되고 남은 배설물을 밖으로 배출하는 것입니다.
죄란 어쩌면 우리의 몸과 둘이 아닌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는 세상이라는 바다를 항해하면서 죄라는 배설물을 남기게 됩니다. 죄는 버리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의식은 우리 영혼에 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죄의식은 2가지 형태로 나타납니다. 하나는 교만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약함을 거짓으로 감추는 행위입니다. 다른 하나는 열등감입니다. 이 또한 우리를 자유롭지 못하게 합니다. 죄인은 회개를 만나면 은총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죄인은 주님을 만나면 새로운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났던 많은 죄인은 죄를 용서받고 새롭게 변화되었습니다. 사도 바오로도 주님을 만나서 교회의 기둥이 되었습니다. 사도 베드로도 회개의 눈물을 흘렸고 주님의 길을 충실히 따라갔습니다. 우리가 아는 많은 성인도 죄 중에 있었지만 회개하였고 신앙의 별이 되었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 프란치스코 성인도 그랬습니다. 우리들 역시 그렇게 변화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밀과 가라지의 비유를 설명해 주십니다. 밭은 우리의 몸과 같습니다. 밀은 건강한 지체입니다. 가라지는 병들어 아픈 지체와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서양의학에서 하는 것처럼 즉각적으로 가라지를 제거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동양의학처럼 말씀을 하십니다. 지켜보면서 몸의 기능을 강화해 나가라고 하십니다. 건강한 지체들이 활력을 얻으면 건강하지 않은 지체들이 치유될 수 있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예전에 감동적인 경기를 본 적이 있습니다. 육상경기에서 1등으로 달리던 선수가 넘어졌습니다. 그 뒤로 오던 선수가 넘어진 선수가 일어나기를 기다렸고 둘은 서로 선을 잡고 결승점에 도달했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관중들은 모두 일어나서 박수 쳤습니다. 넘어진 1등을 뒤로하고 2등으로 오던 선수가 1등이 되었다면 그렇게 감동적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공동체에서도 그렇습니다. 여러 단체가 있습니다. 각 단체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모인 지체들입니다. 어떤 단체는 열심히 봉사 합니다. 어떤 단체는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함께 지내야 합니다. 잘못이 있는 사람, 단체를 배제하고, 공동체에서 받아들이지 않으려 한다면 그것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뜻이 아닙니다. 주변에 부족한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잘못을 하는 사람들도 보일 것입니다. 그럴 때 오늘 주님의 말씀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
240730. 연중 제17주간 화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혹시 반딧불 보셨습니까? 어릴 때 다 보셨겠지요? 요즘은 어디를 가야 볼 수 있을까요? 저는 어릴 때 시골에 살았기에 볼 수 있었습니다. 물론 산속 군 생활 중에도 볼 수 있었습니다.
며칠 전 귀가를 하는데 동네 아이들이 작은 랜턴을 들고 장난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잊었던 반딧불을 생각나게 했습니다. 반딧불이 반짝이면 꼭 별들이 눈앞에 내려와 있는 듯합니다. 아직도 그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런데 더 이상 도심에서는 반딧불을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반딧불이 살 수 없는 환경에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환경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어쩌면 우리의 아이들은 책에서만 반딧불을 볼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종말의 때를 이야기해 주고 있습니다. 좋은 씨는 거두어들이고 가라지는 불구덩이에 던져 버린다고 합니다.
선과 악의 구별이 분명합니다. 하느님이 보시기에 좋은 씨는 천국에 가라지는 지옥으로 가게 될 것입니다.
그 판단의 기준은 누구입니까? 하느님입니다.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것은 오른편에 그렇지 않은 것은 왼편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을 닮았습니다. 그렇게 창조되었다고 창세기는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하느님이 주신 아름다운 환경을 지니고 태어납니다. 아름다운 마음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살아가면서 오염됩니다. 태어날 때는 1급지였는데 점점 2급지, 3급지로 그 등급이 내려갑니다.
각종 죄악이나, 미움, 분노, 무관심, 시기, 질투, 이 모든 것이 우리는 점점 더럽힙니다.
집 안 청소 하는 것, 동네 쓰레기를 줍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내 마음을 잘 가꾸는 것도 중요합니다.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마음을 먹고 있는지, 이것이 하느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마음일지, 자신에게 묻고 또 물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언제나 1급지처럼 깨끗한 곳이어서 하느님이 보시기에 반짝이는 보석 같길 희망합니다.
---------
나이가 든다는 것은.....
영화를 보다 보면 그 영화의 중심되는 대사를 만납니다.
영화(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에 나온 대사입니다.
-나이가 든다고 사는게 좀 더 편해지진 않아
다만 주변 상황에 덜 흔들리게 되지-
나이가 든다고 사는게 편해지지는 않는 것 맞습니다.
세상은 좋아지지만, 좋아지는 것이 우리를 늘 편하게 만들어 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변 상황에 덜 흔들리는 것은 맞는 것 같습니다. 이전에는 힘들어했을, 그리고 아파했을 일들이 이제는 그러려니 하는 생각으로 넘어가기 때문입니다.
덜 흔들린다는 말의 의미는 무뎌진다는 뜻이 아닌 많은 것을 이해하게 됐다는 뜻일 테니까요.
----------------------------------------------------
240730. 연중 제17주간 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세상 종말
“구원이냐 멸망이냐?”
더불어Together, 귀가歸家의 구원 여정
오늘 복음은 가라지의 비유에 대한 설명입니다. 예수님 친히 하신 설명이기보다는 초대교회의 우의적 해설이라함이 맞지만 예수님 역시 동의하리라 생각됩니다. 우의적 해설이라 더욱 현실감있게 마음에 와닿습니다.
1.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은 예수님입니다.
2.밭은 세상입니다.
3.좋은 씨는 하늘 나라의 자녀들입니다.
4.가라지들은 악한 자의 자녀들입니다.
5.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악마입니다.
6.수확때는 세상 종말입니다.
7.일꾼들은 천사들입니다.
비유의 의미가 분명해집니다. 가라지의 비유는 원래는 하느님의 ‘인내’에서, 우의적 해설에서는 그 초점이 ‘심판’으로 바뀝니다. 저는 세상 종말을 죽음으로 바꿔 이해합니다. 죽음을 통해 인생 모두는 끝나고 구원이냐 멸망이냐의 세상 종말과 같은 현실이겠기 때문입니다. 세상 종말시 두 부류로 나뉘는 모습이 그림처럼 선명히 드러납니다.
1.“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그의 나라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을 거두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거기서 그들은 울며 이를 갈 것이다.”
2.“그때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
첨예하게 대비되는 구원과 멸망의 상태 인간들입니다. 삶은 선택입니다. 선택하라면 누구든 둘째 번일 것입니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납니다. 둘 중 하나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지도 모릅니다. 더 이상 미사도, 수행도, 회개도, 사랑도, 기도도, 공부도, 감사도, 희망도, 믿지도 못합니다. 우리의 생명이 연장되는 것은 회개를 위해, 사랑하기 위해, 좀 더 잘 살기 위함일 것입니다.
하느님은 회개한 이들의 과거를 묻지 않습니다. 오직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의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로 힘껏 사는 것입니다. 성 베네딕도의 말씀처럼, 날마다 죽음을 눈앞에 환히 두고,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날마다 하루하루의 선물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결국 가라지의 비유가 의도하는 바는 회개와 더불어 현재의 삶이겠습니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의 문제는 결국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로 직결됩니다. 오늘 옛 어른의 말씀도 좋은 도움이 됩니다.
“왔던 길을 돌아보는 까닭은, 돌아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헤매지 않고 바른길로 나아가고자 함이다.”<다산>
과거를 통해 미래를 내다보고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야 나쁜 실패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기억, 감사, 희망의 순서입니다. 과거의 기억에서 감사가 샘솟고 감사는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꽃피어납니다.
“뉘우침이 마음을 길러주는 것은 똥이 싹을 북돋우는 것과 같다. 똥은 더러운 것이지만 싹을 북돋아 좋은 곡식으로 만든다.”<다산의 여유당 전서>
뉘우침은 기도와 성찰이 포함된 회개로 읽으면 됩니다. 회개와 더불어 새롭게 샘솟는 신망애의 삶입니다.
엊그제 조부모와 노인의 날을 맞이한 교황님의 담화문 한 대목을 나누고 싶습니다. 어떻게 노년을 맞이할까에 대해 좋은 도움이 되는, 우리를 각성하게 하는 조언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가능한한 독립적이고 다른 사람과 분리된 삶 안에서 개인적 성취를 추구합니다. 공동체의식은 위태로워지고 개인주의가 찬양받고 있습니다. 곧 ‘우리’에서 ‘나’로의 전환은 우리시대의 가장 명백한 징표입니다. 우리가 혼자의 힘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반박하는 가장 근본적인 논거가 되는 가정마저 이러한 개인주의 문화의 희생양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나이들고 쇠약해지기 시작하면, 우리가 아무도 필요로 하지 않고 사회적 유대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는 개인주의의 환상은 그 본색을 드러냅니다. 실제로 우리는 삶에서 더 이상 도움을 얻을 수 있는 다른 이들이 옆에 없고 기댈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될 때에야 그 모든 것이 필요한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슬프게도 많은 사람이 너무 늦은 시점에서 이를 깨닫습니다.”
교황님이 더불어의 공동체 삶을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혼자와 더불어가 조화된 삶이요, 우리의 여정은 더불어의 여정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더불어의 여정중 제가 늘 강조하는 것이 내 삶을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로 압축할 때, 일년사계一年四季로 압축할 때, 어느 시점에 위치해 있는가에 대한 확인입니다. 이래야 날마다 오늘 지금 여기서 거품이나 환상이 걷힌 본질적 깊이의 선물인생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요셉수도원에 부임한 후 36년동안 정주하고 나니 하루로 하면 정오 12시에서 오후 4:30분쯤 된듯하고, 일년사계로 하면 늦여름에서 초겨울로 진입한 듯 이제 노인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이런 자각이 하루하루 절박한 심정으로 회개와 더불어 하느님을 찾게 합니다. 제1독서 예레미야의 고백은 이런 우리의 고백이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 공동체를 대표한 예언자의 고백입니다.
“저희가 당신께 죄를 지었습니다. 당신의 이름을 위해서 저희를 내쫓지 마시고, 저희와 맺으신 계약을 기억하시고, 그 계약을 깨뜨리지 마소서. 이민족들의 헛것들 가운데 어떤 것이 비를 내릴 수 있겠습니까? 하늘이 스스로 소나기를 내릴 수 있겠습니까? 그런 분은 주 저희 하느님이신 바로 당신이 아니십니까? 그러기에 저희는 당신께 희망을 둡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궁극의 미래이자 희망입니다. 하루하루 아버지의 집으로의 더불어, ‘귀가의 구원 여정’중에 있는 우리들입니다. 과연 일일일생, 일년사계중 어느 시점에 있는지요?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하루하루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종말론적 구원의 아름다운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
240730. 연중 제17주간 화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길의 끝 그 너머>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마태 13,40)
아무도
피할 수 없는
마지막을 향한
언젠가는
너의 끝과
나의 끝으로 갈릴
아직은
너와 나 함께
우리의 길을 걸으며
늘 그렇게
너 아닌 나를
다그치되
가끔씩
나 아닌 너를
살피는 까닭은
네가
바르면
너를 닮고
내가
바르면
홀로라도 이렇게
너로
말미암아
나를 잃음 없이
끝을 향한
지금여기에서
한걸음 또 한걸음 내딛어
마침내 닿을
길의 끝 그 너머까지
영원히 걷고 싶기 때문입니다
----------------------------------------------------
240730. 연중 제17주간 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을 떠나 집으로 가셨다.(마태 13,36)
집으로 가시다
비유로 군중에게 충분히 가르치신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돌려보내신 다음 당신 집으로 가시고, 제자들이 그곳으로 그분을 따라갑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돌려보내신 이들과 함께 가지 않았습니다. 남달리 열심히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많은 사람이 먼저 그분을 따라갑니다. 그러고는 그분의 집이 어딘지 알아낸 디음 그곳을 보아도 된다는 허락을 받습니다. 그곳에 온 그들은 그분을 보며 온종일 그분과 함께 머물렀습니다.
아마 더러는 더 오래 머물렀겠지요. 제 생각에 요한 복음에는 이런 내용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 그러니 예수님께서 돌려보내시는 군중과 달리,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집으로 가서 군중이 받은 것보다 더 좋은 것을 받고 싶다면,그분께서 집으로 들어가실 때 제자들이 다가갔던 것처럼 우리도 그분께 다가갈 수 있도록, 예수님의 친구가 됩시다. 그리고 그분 곁에 다가가면, 밭의 가라지에 대해서든 다른 것에 대해서든 비유에 대해 여쭈어 봅시다.
-오리게네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9
하느님 나라가 다가온 줄을 아시오
하느님 나라가 다가온 줄을 아시오(루카 21,31),
하느님을 알고자 하는 영혼은 자기를 잊고 자기를 여의어야 할 것입니다. 자기를 의식하는 영혼은 하느님을 알 수 없습니다. 자기를 여윈 영혼이라야 하느님 안에서 자기를 다시 알 수 있습니다. 영혼은 하느님을 앎으로써 자기를 알고, 자기가 결별한 모든 것을 하느님 안에서 알게 될 것입니다. 자신과 만물로부터 결별하면 할수록, 영혼은 자기를 넉넉히 알게될 것입니다. 선을 바르게 알고자 한다면, 선 자체가 있는 곳에서 알아야지, 선이 분열되어 있는 곳에서 알아서는 안 됩니다. 진실로 존재를 알고자 한다면, 존재 자체가 있는 곳에서, 즉 하느님 안에서 알아야 합니다.
거기에서만 우리는 충만한 존재를 알 수 있습니다. 전에도 말했듯이, 인성 전체는 한 인간 존재 속에 있지 않습니다. 한 인간 존재는 모든 인간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영혼은 하느님 안에서만 인성 전체를 알 수 있고,만물의 가장 뛰어난 모습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영혼이 만물을 그들의 존재에 따라서 알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아름답게 꾸민 집에서 산다고 합시다. 그 집에 들어가 보지 못한 사람들은 그 집에 대하여 이러쿵저러쿵 의견이 분분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집에서 사는 사람은 자기의 집을 속속들이 알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나도 내가 살아 있다는 것과 하느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하느님을 알고자 하는 영혼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하느님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경지에 도달한 영혼,곧 우리가 앞에서 말한 다섯 가지 지식을 갖춘 영혼이야말로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 나라가 얼마나 가까이 다가왔는지 - 하느님 나라와 하느님이 얼마나 가까이 다가왔는지 - 를 알게 될 것입니다.(211)
✝️ 화요일 성령(성시간)의 날✝️
예수님, 마리아 안에서 결실을 드러내신 당신의 구속사업에 영광을 드리며 어머니의 태중에 잉태되는 모든 아기를 당신께 봉헌합니다. 그들의 부모가 선물로 주어진 생명을 기뻐하며 사랑으로 받아들이게 하소서! 주님 그들의 기쁨을 없애거나 어둡게 하는 죄와 그 모든 것에서 그들을 지켜주소서.
태아들이 병에 걸리지 않고 부모가 지은 죄의 영향을 받지 않으며, 그들이 태중에서 선물로 받은 생명을 기뻐하게 하소서!
모든 아이가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협력하여 생긴 사랑의 열매가 되게 하소서. 오 예수님 그 누구도 욕정이나 죄의 열매가 되지 않게 하소서! 안나가 딸 마리아를 잉태하고 기뻐했듯이 모
든 어머니가 생명의 잉태를 기뻐하게 하소서!
0 예수님, 이제 새로 잉태된 모든 생명과 그들 부모의 이름으로 당신을 흠숭하나이다.(침묵 가운데 반복한다.)
-성시간, 슬라브코 바르바리치-
----------------------------------------------------
240730. 연중 제17주간 화요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13,40)
「교회-순결한 창녀」는 교회론에 관한 책 제목이며, 순결한 창녀라는 표현은 어쩌면 오늘 복음의 좋은 씨와 겨자씨의 비유를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봅니다. 밭인 세상의 현실은, 교회 안에서, 공동체 안에서, 그리고 우리 각자의 영혼 안에서도, 좋은 씨와 겨자씨 곧 선과 악이 함께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선이 있는 곳에 필연적으로 악도 함께 공존하고 있습니다. 악은 선에 의하여 완전히 제거되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았음을 역사를 통해서, 우리의 인생에서 우리는 이미 겪었고 체험하고 있습니다.
경험적으로 내가 악을 미워하면서 그 악을 완전히 뿌리 뽑겠다고 결심하고 실행하는 그 순간에, 나의 선의 실행 결심은 이미 독선의 악이 지배하기 시작합니다. 선량한 지킬 박사가 밤이면 괴물인 하이드로 변하는 스티븐슨의 소설은 선악이 별개로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야누스의 얼굴처럼 이중적이라는 점을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렇다고 선악이 같다고 궤변을 늘어놓고자 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선악이 다르지만, 동전의 양면처럼 같이 공존하고 있기에 다만 ‘수확 때까지, 종말 때까지’ 우리 가운데 견디어 내며 아빠 하느님께 내어 맡기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후반부에선 이런 우리의 마음을 읽은 듯, 사람의 아들에 의한 세상 종말의 때에 모든 것이 제 자리를 잡게 된다는 희망을 선포합니다. 물론 성서학자들은 이 부분은 예수님의 말씀이 아니라 마태오 저자의 해설이지만, 이 해설에는 당대의 그리고 오늘 우리의 바람이 은연중에 내포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초대 교회 신자들은 자신들이 겪고 있는 거부와 배척 그리고 박해의 와중에서도, 하느님에 대한 믿음으로 닥칠 악의 위세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마지막 날 단죄하시고 심판하실 사람의 아들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그분 마음에 드는 선을 행하면서 견디어 내려고 분투 노력하였습니다. 어쩌면 초대 교회의 신자들처럼, 오늘 우리가 직면한 악의 실체를 직시하면서 어떤 대응과 실천을 해야 하는지 배워야 할 것입니다. 악은 결코 악으로 이겨내지 못하고 선 하나만이 가능성이 있음을 믿는다면 선하고 슬기로운 우리는 지난 역사의 위기에 때마다 함께 힘을 모아 굳건히 어려움을 이겨낸 것처럼 작금의 위기가 기회로 전환할 수 있음을 기억하면서 극복해 나가도록 합시다.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내” (13,41)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을 거두어, 불구덩이에 던질 것이며” (13,42) 의인은 “해처럼 빛날 것”(13, 43)임을 믿고 살아갑시다. ‘좋은 씨’와 ‘가라지’는 이 세상에서 한때 함께 공존하겠지만, 마지막 날이 되면 “밀은 내 곳간으로 모아들이고, 가라지는 거두어서 단으로 묶어 태워 버릴 것이다.”(13,30)라는 말씀은 꼭 실현될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에 대한 하느님의 약속이며, 그 약속은 실현될 것입니다. 악은 결코 승리할 수 없으며, 하늘나라는 악을 통해서 결코 성취되지 않을 것입니다.
예전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만들어진 ‘화해와 치유재단’ 해산과 대법원의 강제 징용 피해자의 배상 판결에 따른 보복 차원에서 시작했던 일본 정부의 반도체 핵심 재원과 다른 품목에 대한 수출 규제를 기억하고 있으리라 봅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에 조선인 강제 동원이 대규모로 이뤄졌던 일본 니가타현 사도광산이 7월 27일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가운데 한·일 정부가 사전에 ‘강제노동’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기로 합의했다고 일본 언론이 보도했습니다. 이 소식은 의식 있는 이들에게 참으로 안타까운 소식이고 분노할 내용입니다. 2015년 7월 조선인 강제동원 피해가 있었던 군함도(하시마) 등이 세계유산에 등재될 당시엔 일본 정부는 ‘본인의 의사에 반해’(against their will) 동원돼 가혹한 조건에서 ‘강제로 노역’(forced to work)을 했다‘라고 밝히는 등 강제성을 명확히 한 바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일본은 여전히 합의한 사안까지 무시하고 반성할 줄 모르고 오히려 왜곡해서 발표한 것을 보면서, 이미 돌아가신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소리 없는 아우성과 밤낮으로 그치지 않을 그 가족들의 눈에서 눈물을 봅니다.
오래 전 「녹두 꽃」이란 드라마의 ‘우금치 전투’ 장면에서 일본군과 관군에 의해서 무참하게 죽은 수많은 이들의 허망한 죽음을 보면서 한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정말이지 이 땅에서 우리 민족의 자긍심과 자존심을 야비한 방법으로 또다시 짓밟으려는 일본 자민당 정권과 극우파에 대한 저의 솔직한 심정에서, 구전 노래 「새야 새야 파랑새야」를 보냅니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 장수 울고 간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너 뭣하러 나왔느냐 솔잎 댓잎 푸릇푸릇 여름인 줄 알았더니 백설이 덜덜 엄동설한이 되었구나.』
----------------------------------------------------
240730. 연중 제17주간 화요일.
■ 가라지보다 못한 인생이 되어서야 / 굿뉴스 게시판
박윤식 [big-llight] 2024-07-29 ㅣNo.174601
예수님은 참 이해하기 어려운 밭의 ‘가라지 비유’를 설명하시면서 평화를 구하는 법을 세세히 일러 주셨다. 사람의 아들이 이 세상에 하늘 나라의 자녀들을 만드셨는데 악마들이 악한 자의 자녀들도 함께 만드셨다나. 소위 좋은 씨만 뿌렸다지만 가라지도 함께 있다는 거다. 그 흔한 지나가는 말로 ‘좋은 분’ 속에 ‘좋지 않은 놈’도 쾌나 있는 경우이리라. 누가 좋은 이고 누가 가라지 같은 모습을 지녔는지는 ‘세상 끝 날’에는 드러나겠지만, 모든 이가 그걸 궁금해 한다.
그렇지만 세상 종말에는 사람의 아들이 천사들을 보내 가라지를 거둬 태우듯이, 남에게 죄짓게 하는 이들과 불의를 저지른 자들은 몽땅 모아서 불구덩이에 던져 버린단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불며 이를 갈 것이라나. 그렇지만 의인들은 태워 없어져버릴 가라지와는 달리 아버지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게다. 이건 분명히 그날에 일어날 일이고 우린 그걸 믿는 이다.
이렇게 우리는 가라지 같은 악인이 없는 세상을 간절히 소망한다. 그러나 우리는 정작 자신의 삶의 모습조차도 잘 모르는 게 대부분이다. 우리가 가라지마냥 악인인지, 아니면 선인인지 잘 구별해 내지 못하듯이, 살다보면 어느 것이 참인지 거짓인지를 잘 모르면서 지낸다. 그러기에 추수 때 가라지가 아닌 하느님 천사들이 거두어들일 밀알이 되도록 매순간 우리 스스로를 되돌아보면서, 그분을 떠나지 않고 언제나 그분 안에 머무르는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만 할 게다.
간혹 직장 생활에서 처음에는 ‘어떻게 저런 애가 여기에 들어왔을까?’라는 생각을 서로서로 갖게 될 경우가 있으리라. 온종일 함께 지내다 보니 서로 실망하는 부분이 많은 것이 사실이니까. 그러다가 경력이 올라갈수록 자신도 그들처럼 많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게다. 곧 처음에는 옳은 직장 생활을 하기에는 합당하지 않은 ‘가라지’라고 서로 비판하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부족한 자신을 ‘밀’로 바꾸어 주시는 하느님을 꼭 체험하는 경우가 허다할 터이니까.
살다 보면, ‘가라지’라고 비판하고픈 이가 적지 않다. 죄란 사랑을 거스르는 거고 남을 죄짓게 한다는 것은 그에게서 ‘사랑의 마음’을 빼앗는 행위일 게다. 세상에서 봉사하는 마음을 없게 만드는 것이리라. 이보다 더 ‘어두운 행동’이 있을지? 이웃을 악하게 만드는 가라지보다 더 못한 삶의 모습이다. 따라서 모든 ‘인연’을 선하게 만들도록 애써야만 한다. 그러면 천사가 된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착한 마음과 아름다운 생각을 품는다면, 이보다 더 ‘밝은 행동’이 있을지? ‘사랑의 마음’을 지니면 ‘좋은 이’ 되고, 비뚤어진 마음 지니면, ‘가라지보다 못한 이’ 분명 될 게다. 예수님께서는 가라지 비유를 설명하시며 종말 때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이 모두 불구덩이에 던져질 것이라나. 그런데 이는 남 이야기같이 들리지 않는다. 왜냐면 우리 가운데 죄 없어 하느님의 진노를 피할 수 있는 이가 아무도 없을 것이기에. 참 다행스러운 일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중개로 그분과 새로운 계약을 맺게 되었다는 거다.
이렇게 비록 화려하지 않을지라도 하느님께서는 필요한 곳에 딱 맞는 이들을 보내주신다. 그분께서는 늘 세상이라는 밭에 그처럼 좋은 씨를 뿌리신다. 따라서 그 씨앗 하나하나 잘 키운 농부는 칭송받아 마땅하리라. 하느님께서 만드신 이 공동체를 정말 잘 아껴 그분 뜻 따라 키우자. 땀 흘린 그 보람 세상 끝날 그날에는 정녕 칭송받아 마땅할게다. 아니 응당 그러하리라.
----------------------------------------------------
240730. 연중 제17주간 화요일.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하느님을 왜 믿습니까? 바오로 사도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되살아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1코린 15,13-14).
우리가 하느님을 믿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주님 부활로 시작되는 ‘영원한 생명’ 때문입니다.
그러나 많은 신자가 왜 하느님을 믿고 있는지를 잊은 채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한 번이라도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준비하신 영원한 생명에 대하여 깊이 묵상하여 보았다면, 우리의 삶은 참으로 많이 바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 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악인들에 대한 심판은 마지막 날에 분명히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그때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라는 말씀처럼,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은 이들은 모두 하느님께서 준비하신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제1독서는 우리가 마지막 날에 하느님을 ‘의인’으로 만날 수 있는 길을 알려 줍니다.
“참으로 저희가 당신께 죄를 지었습니다. 당신 이름을 위해서 저희를 내쫓지 마시고, 당신의 영광스러운 옥좌를 멸시하지 마소서. 저희와 맺으신 당신의 계약을 기억하시고, 그 계약을 깨뜨리지 마소서.”
죄로 넘어질 때마다 우리 죄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하느님께 자비와 용서를 청하는 믿음을 가지고 다시는 그 죄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는 회개의 자세를 잃지 않는다면, 우리는 모두 마지막 날에 ‘의인’으로 하느님을 만날 것입니다.
‘성찰’과 ‘고해성사’를 사랑하는 마음은 우리를 이 신비의 주인공이 되게 하여 줍니다.
“그때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