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규영시모음 22편
☆★☆★☆★☆★☆★☆★☆★☆★☆★☆★☆★☆★
《1》
곡조틀린 노래
최규영
우세스런 몸짓
서투른 그림도 그런 대로 괜찮은데
하물며 갈고 닦은 작품이랴.
시는 노래다
시는 춤이다
시는 그림이다
아니면 언어다.
☆★☆★☆★☆★☆★☆★☆★☆★☆★☆★☆★☆★
《2》
究竟處
최규영
늙은 철학선생
평생 강의가 부끄러워
말문을 닫는
피 토하고 득음한 명창
자신의 소리가 솔바람 소리만도
못하다는 것을 아는
글 몇 줄에 우주를 담아보려 애쓰던 시인
마침내 확대경을 내던지고
커다랗게 마침표를 찍는
그림보다 실경이 더
아름답다는 사실을 아는
아니, 그렇지만도 않다는 사실을 아는
.......................................
☆★☆★☆★☆★☆★☆★☆★☆★☆★☆★☆★☆★
《3》
그저 흥얼거려도
최규영
들을만한 가락이 있다.
제 흥에 겨운 몸짓도
감칠맛 나는 맵시가 있다.
그림이 그려내지 못하는
경지를 글자로 그려낼 수도 있다.
무쇠를 갈아서 바늘을 만들 듯
언어를 갈고 또 가는 작업도 있다.
글자의 노래
글자의 율동
글자의 그림
갈고 닦은 언어를 시라 한다.
☆★☆★☆★☆★☆★☆★☆★☆★☆★☆★☆★☆★
《4》
나이
최규영
선배는 5분전 전철을 탔다.
후배는 5분후 전철을 탔다.
그러나 우리들은 종점에 이르기까지
서로 만나지 못했다.
☆★☆★☆★☆★☆★☆★☆★☆★☆★☆★☆★☆★
《5》
남의 얘기
최규영
남 얘기 하지 마라.
상대는 산산이 부서진다.
덩달아 네 인격도 부서진다.
자살테러다.
성인이래야 성인을 알아보는 법
연작이 어찌 붕새의 뜻을 알겠느냐
성인이 아니라도,
붕새가 아니라도 좋다.
그 사람이 아니면 그 사람을 모른다.
제 잣대로 남을 헤아리다
눈이 망가진다.
망가질 눈도 없다.
장님이 말하는 코끼리 이야기
그게 남의 얘기다.
아니다.
남 얘기나 실컷 하거라.
네 삶의 궤적에 네 얘기는 있을 리 없고
남의 얘기만 들어 있을 테니-
☆★☆★☆★☆★☆★☆★☆★☆★☆★☆★☆★☆★
《6》
논리 없는 추리물
최규영
해답 없는 수수께끼
풀리지 않는 퍼즐은 없다.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란 없다.
밑도 끝도 없는
상념의 파편들을
제자리에 맞추지도 못하고
대충 늘어놓는다거나…
상징이라는 가면을 쓰고
은유라는 허깨비를 세워놓고
문학기법이라는 허울 뒤로
숨어버린다거나…
어떤 글이든
작자가 시라 할 때 시일 수밖에 없다면
그 독자는 정직한 아이가 되거나
벌거벗은 임금님이 될 수밖에 없다.
☆★☆★☆★☆★☆★☆★☆★☆★☆★☆★☆★☆★
《7》
대폿집 추억 1
최규영
집에 가면 양식 떨어졌을 텐데
자식놈 월사금 줘야 되는데
돌아가는 발걸음 터덕거리는데
밀린 외상술값 더 두려워
쭈빗쭈빗 용기내어 들어선다.
반가운 듯, 외상술 경계하는 듯
주모 겹친 표정 외면하고
목로 한구석 자리하여
한 사발, 두 사발 들이키다 보니
어느새
술값 걱정
양식 걱정, 월사금 걱정
저절로 스러지는 것을.
☆★☆★☆★☆★☆★☆★☆★☆★☆★☆★☆★☆★
《8》
대폿집 추억 2
최규영
설거지 대충 마친 반백의 주모
외상 술값 채근하러 옆에 와 앉아
요새 일거리 없어 힘들지?
나도 손님 없어 참 힘들어,
연탄 백 장 떼기도 어렵다니까.
그래도 예전엔
이 장사로 먹고는 살았는데,
이제는 잔술 팔아 집세도 모자라.
때려치워야 할지 말지…
허, 내 처지보다 못하다고?
여하튼 대폿잔은 요술을 부려
일배, 삼배 더해갈수록
호호탕탕 장부기질 되살아나나.
☆★☆★☆★☆★☆★☆★☆★☆★☆★☆★☆★☆★
《9》
마이산 전설
최규영
내 나이 몇이더냐
말귀가 나를 닮았지 어찌
내가 말귀를 닮겠느냐
사람들의 욕심 서린 상상때문에
속절없이 내가 속물이 되었구나
산이
곤두박질 치고싶어 승천하겠느냐,
잡인들에게 짓밟히려 상경하겠느냐
행여 볼일 있으면
하늘더러 내려오라고 해라
서울더러 다녀가라고 해라.
☆★☆★☆★☆★☆★☆★☆★☆★☆★☆★☆★☆★
《10》
산책길
최규영
용기 있게 결단을 내리면
잠자리 속의 게으름이 무안해진다.
이슬이나 서리를 밟노라면
아침까지는 우수리 시간이다.
시나브로 어둠을 빨아드리는 시각
간밤에 하얀 카펫 깐 호젓한 길에
싱싱한 발자국 이미 수놓아졌다.
누굴까.
작년 이맘 때던가
사드락 사드락 눈길 밟고 돌아오시던
그 할머니
요즘은 안 나오시는구나.
몸져누우셨나, 아니면 돌아가셨나?
올 여름까지도
휘적휘적 팔 돌리며 논길 걷던
그 젊은이
요즈음 안 보이는구나.
무슨 일 있나, 아니면 도시로 이사갔나?
알 수 없어라
☆★☆★☆★☆★☆★☆★☆★☆★☆★☆★☆★☆★
《11》
생명형
최규영
생명 있는 모든 것들
피고는 사형!
다만 죽을 때까지 그 집행을 유예한다.
자유형 추가
-개집 앞에서
피고는 사형!
다만 돈이 될 때까지 그 집행을 유예한다.
사형집행 때까지 철창 또는 목줄로 무기 구금한다.
재산형 추가
-부잣집 상가에서
피고는 사형!
피고가 일생동안 모은 돈은 모두 몰수한다.
☆★☆★☆★☆★☆★☆★☆★☆★☆★☆★☆★☆★
《12》
性善說
최규영
전용차선을 시원하게 달리는 버스안에서
옆차선의 버벅거리는 승용차들을 보면 왜 그리 통쾌한가
사촌이 논을 사면 왜 배가 아픈가
거지를 보면 왜 위안을 얻는가
강 건너 불구경이 왜 재미있는가
TV로 보는 사건, 사고들이 왜 흥미로운가
60년대 풍경
전면 가득 커다란 거울
대인 얼마, 소인 얼마 요금표
옆벽에는 풍경유화 한두 점
페놀 냄새나는 유리소독장
틈틈이 숫돌에 면도날을 세우고
칼날을 머릿결에 대 본다
겨울이면 톱밥난로 빨간 불구멍이 졸고
여름이면 떨어진 부채 몇 자루 뒹구는 데
마루의자에선 장기판이 벌어지고
훈수로 장기가 두어졌다
내 어릴 적 신문도서관
소문의 확대 재생산공장
고담준론의 동네 논객들
나라꼴에 핏대도 세우고
휴회 없는 동네국회
☆★☆★☆★☆★☆★☆★☆★☆★☆★☆★☆★☆★
《13》
손석배 선생님의 부음을 듣고
최규영
새벽에 별을 보고 집을 나서서
한밤 중 별을 보고 사립문을 들어섰답니다.
국민학교야 오산리재를 넘어
면소재지에 있는 학교를 다녔으면 됐지만
그것도 고개 넘어 이십 리길
소년은 그렇게 학교를 다녔습니다.
중학교는 부귀에 없어 읍내에 있는
진안중학교를 다녔는데 이제는 40리 길입니다.
왕복이면 80리 입니다. 전주-진안간 거리입니다.
그렇게 새벽별보기 운동을 3년이나 했더랍니다.
그래서 그는 초등 교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동시(童詩) 시인이 되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진안문학’에 꼬박꼬박 원고를 보내주셔서
저는 그 시를 읽고
늘 정신이 쇄락(灑落)해지곤 했습니다.
선생님은 어린 시절의 고생을‘잘 살아보자’는 투의 세속적 각오를 다진 계기로 삼은 것은 아닌 듯 합니다.
어린이의 맑은 눈에 투영된 것 같은 선생님의
시상(詩想)이 그랬습니다.
시(詩)가 그랬습니다.
선생님이 제게 어린 시절의 통학담을 얘기해 주실 때도
전주-진안간의 교통로였던 곰티 덕봉에서 겪은
옛적 얘기를 해 주실 때도
평소의 삶에서 묻어나게 마련인 위선의 편린과는 상관없는 순수(純粹)였습니다.
당시 선생님은 70객이었지만 저는 선생님을 70대가 아니라 마음이
해맑은 소년으로 기억합니다.
소년답게 건강도 아직 염려 없을 것으로 믿고 있었는데 작년 연말 선생님의
부음이 멀리 돌고돌아 제게 전해졌습니다.
어찌 노인이 가신 것 같지는 않고 소년이 요절한 것 같은 그런 마음이 드는 것은
선생님이 그만큼 소년처럼 맑은 영혼을 지니고 있어서일 겁니다.
선생님의 순수한 마음처럼 명로(冥路)도 밝을 것으로 믿습니다.
부디 왕생극락하시옵소서.
☆★☆★☆★☆★☆★☆★☆★☆★☆★☆★☆★☆★
《14》
술 건망증
최규영
간밤에 보따리 하나를 또 잃었다.
거기에 들어있을 고주망태의 일상들이야
잃은들 어떠랴만
흠씬 젖어버렸을 내 인격의 쪼가리들은
또 누가 주워갔을꼬…
☆★☆★☆★☆★☆★☆★☆★☆★☆★☆★☆★☆★
《15》
시공(時空)
-시간의 역사 2
최규영
해탈(解脫), 속박에서의 해방
속박(束縛), 시간이라는 포승줄
시간 속에서는 극락이 없다
그저 권태라는 지옥이 있을 뿐
달마의 9년간 면벽(面壁) 수행
9년이 지루했으면 그 짓을 했을까?
이차돈은 생명이 귀찮았을까,
불생불멸의 이치를 알아서였을까?
시간의 흐름이 정지된 경지,
아예 시간이 사라져 버린 경지.
시간이 사라지면
한 뼘 내 묫자리의 공간은 어찌될까?
☆★☆★☆★☆★☆★☆★☆★☆★☆★☆★☆★☆★
《16》
시종(始終)
-시간의 역사 1
최규영
시작이 있으면 반드시 종말이 있다.
137억년 되었다는 우주는 반드시 종말이 있다.
물론 45억년 지구도 반드시 종말이 있다.
재깍재깍, 초침은 종점으로 가는 도정(道程)이다.
시간 속에서는 영생(永生)이 있을 수 없다.
영생이란 말 자체가 물리법칙 위반이다.
85세 된 노인의 부음이 들려온다.
때마침 100광년 거리의 항성이 85억년의 생애를 마치고
폭발하여 사라졌다는 천문학계의 소식도 전한다.
이 두 사건은 조만(早晩)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시종(始終)의 명제(命題)를 다시 확인해준다.
끝장을 당하지 않으려면 시계를 멈춰야만 한다.
그래도 시간은 갈테지만….
☆★☆★☆★☆★☆★☆★☆★☆★☆★☆★☆★☆★
《17》
心經
최규영
어머니 바늘귀를 꿰어주던 여섯살 밝은 눈
미풍에 살랑거리는 나뭇잎 소리도 듣던 귀
바람결에 묻어온 라일락 향기를 맡아낸 코
열 살 때인가 짜장면의 희한한 맛을 본 혀
날카로운 첫 키스의 감촉에 감응하던 육신
이 모든 감각을 실재한다고 믿었던 자의식
無 眼이비설신의
無 안耳비설신의
無 안이鼻설신의
無 안이비舌신의
無 안이비설身의
無 안이비설신意
☆★☆★☆★☆★☆★☆★☆★☆★☆★☆★☆★☆★
《18》
정치얘기
최규영
정치 이야기 하지 마라.
너와 내가 공감할만한
얘기꺼리는 이젠 없나보다.
아무리 농담이라 해도
널더러 꼴통이라 하면,
널더러 좌빨이라 하면,
어디 기분 좋더냐?
네가 그를 비웃으면
그도 너를 비웃는다.
남도 귀중한 식견이다.
아니다.
악의적으로 오염된 시각이다.
망막이 오염되었으면
사물이 제대로 보일 리 없다.
문제는
서로 상대가 오염되었다고
생각하는 거다.
어차피
이해 못하는 이웃은
아무래도 이해 못한다.
그냥
그만두거라.
☆★☆★☆★☆★☆★☆★☆★☆★☆★☆★☆★☆★
《19》
종교얘기
최규영
종교는 살고 죽는 문제니
거론되고 또 거론돼도 모자랄 텐데
모임에선 종교 얘긴 하지 말잔다.
화제에 올려도 무방한
자애로운 신은 아마도 없나보다.
내 신만이 옳으면
남의 신은 그르다.
따지자면 피보기 십상이니
그냥 덮어두자는 거다.
평화협정이 아니라 휴전협정이다.
네가 너의 신(信)을 이해할 수 있을 때
남의 신(神)을 얘기하라.
아니다.
네가 너를 이해했어도
이해 못하는 이웃은
아무래도 이해 못한다.
네가 비웃으면
이웃도 비웃는다.
그냥
그만두거라.
탄금대 해설사
최규영
탄금대에 올랐다.
임란 때 비운의 장수 신립의 자취를,
거문고의 악성 우륵의 자취를,
신명을 다하여
설명해주던
문화유산해설사 아줌마가 있었다.
감자꽃 시비에 이르자
청하지도 않았는데 그 시를
노래로도 불러주었다.
헤어질 때
일행을 향해 화사한 웃음으로
손 흔드는 모습
탄금대가 우리를 배웅하고 있었다.
☆★☆★☆★☆★☆★☆★☆★☆★☆★☆★☆★☆★
《20》
황혼의 엘레지
최규영
서산에 걸려 불타는 노을.
처소로 돌아가는 황혼객은
노을마저 과분하다.
싱그러운 아침녘
넉넉한 하룻낮을
부질없이 날려버리고,
오늘이 저물어 가는데,
올해도 저물었다는 듯
찬바람에 낙엽이 뒹군다.
하루가 쌓여, 해가 가는가.
내일의 태양을 기다릴까
내년 신록을 기약할까.
마침 휴대용 MP3에선
추억의 노래가 흘러나온다.
황혼의 엘레지
☆★☆★☆★☆★☆★☆★☆★☆★☆★☆★☆★☆★
《21》
SNS
최규영
“포항 지진은, 문재인 정부에 대한 하늘이 준엄한 경고 그리고
천심이라고 하는 지적들이 나오고 있다”(류여해)
/
그런데 왜 하필 포항인가? 포항은 MB의 고향 아닌가? (#지나가다)
재판결과에 대한 과도한 비판은 헌법위반이다.(김명수)
/
그러면 헌법상 최고가치인 민주질서를 짓밟은 사람들을 법원의 이름으로
풀어줘 역사의 단죄를 방해하는 행위는? (#글쎄)
(세월호)유골을 은닉한 행위는 정권을 내놓아야 할 만한 중대 범죄다.(홍준표)
/
그 더러운 입 좀 다물라. (#세월호 유가족)
☆★☆★☆★☆★☆★☆★☆★☆★☆★☆★☆★☆★
《22》
20~30.
최규영
참, 세상 ㅈ같아서….
먼놈의 세상이 이래
내 어릴 적엔 이렇진 않았는데
내가 떼쓰면
엄마, 아빠가 다 들어줬는데
세상살기 참 더럽네
먼놈의 세상이 이럴까
내 어릴 적엔 이렇진 않았는데
내가 떼 안 써도 할머니, 할아버지가
다 받아줬는데
아니,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도
그랬는데
세상이라고 나가보니
그게 아니네.
군대도 가야 되고, 취직도 해야 하고
결혼도 해야 하고, 집도 장만해야 하고
나름 우리끼리 처세도 해야 하고
엄마 품 벗어나니 만만치 않네
거기에다 꼰대들은 뭣도 모르면서
우리를 철부지라 하는 거야
우린 철부지가 절대 아닌데
돌아가는 판 알건 아는데
울 엄마, 아빠도 전에 그랬어
너는 잘못한 것이 없노라고
네가 최고라고
그래, 그럴 거야
이건 다 세상 탓일 거야
이건 다 꼰대들 탓일 거야
이건 다 정치 탓일 거야
울 엄마, 아빠도 전에 그랬어
너는 잘못한 것이 없노라고
네가 최고라고….
60~.
저항할 수 없는 폭력아래 살다보면
그 폭력에 동화되고 그 폭력을 미화하게 된다.
-스톡홀름 신드롬
내가 사업하던 시절 호황이었다.
독재니 뭐니 했지만
그게 나와 무슨 상관
내 공직자 시절 할만했다.
강압행정, 계도행정 말 많았지만
그때는 관주도였으니깐
내 기자 시절 할만했다.
세상이 온통 야바위판이었으니
황금어장 따로 없었다.
내가 동네 유지 시절 할만했다.
적당히 시류를 타면
관에서도 대접 잘 해줬지.
내가 거지생활 할 때가
차라리 그립다.
그 때는 내가 젊었거든.
언론개혁, 검찰개혁?
그딴 거 내 밥 안 먹여준다.
그보다 집값이나 잡아라.
노동자 인권
최저임금, 주 52시간?
이래가지고 사업하겠나?
그래, 차라리 개혁을 해라!
180석 줘봐도 쓸 줄 모르는
ㅂㅅ같은 놈들….
순응하며 적당히 살면 그만이지
잘난체 하는 꼬락서니들라니
이건 내가 살던 세상이 영 아닌거라.
아니, 내 한평생 내 입으로
하던 말들이 있는데
다 늙어서 나를 부정할 수는 없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