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802
3월20일[사순 제5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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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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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ML2vBGf4m1w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박재찬 안셀모(본원장)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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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는 주님에 대한 희망과 사랑으로 죽음의 두려움에 충분히 맞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우리의 죽음을 진지하게 묵상하고 성찰하도록 초대하는 사순 시기에 큰 도움을 줄 명저가 출간되었습니다. '남겨진 단 하나의 사랑’ ‘발타사르, 예수를 읽다’ ‘세계의 심장’ 등 불멸의 저서로 유명한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1905~1988)가 지은 ‘발타사르, 죽음의 신비를 묵상하다’(가톨릭 출판사)입니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위대한 대 신학자로서 그의 신학 사상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 크게 이바지하였는데, 이에 대한 감사와 존경의 표현으로 1988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은 그를 추기경으로 서임했지만, 안타깝게도 수여식 이틀 전에 선종하고 말았습니다.
‘발타사르, 죽음의 신비를 묵상하다’를 우리 말로 번역하신 분은 존경하는 윤주현 베네딕토 신부님이십니다. 가르멜 수도자이신 윤신부님 역시 대단한 신학자이십니다. 필요한 작업이지만, 다들 엄두도 못 내는 신학 서적들을 꾸준히 번역하고 출간하는데 진심인 신부님의 노력 앞에 큰 감사와 박수를 보냅니다.
옮긴 이의 말에서 윤 신부님은 아주 간략하고도 명쾌하게 죽음의 신비 속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죽음은 인간이 존재하면서부터 떠안을 수밖에 없는 존재 방식입니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인간을 ‘죽음을 향한 존재’라고 정의한 바 있습니다. 이처럼 인간은 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으로 각인된 존재입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짧은 인생에 ‘영원’을 각인하려는 염원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어떤 형태로든 각자 삶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영원’의 조각을 새기려 합니다.
그러나 죽음은 이러한 모든 노력을 수포로 돌아가게 합니다. 마치 냉엄한 사형 집행인처럼 말입니다. 영원을 갈망하지만 그 시작부터 사형 선고를 받은 비극적인 존재, 인간의 이러한 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 분은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밖에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죽음에 대한 의문을 풀 해결책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있습니다. 성부에게서 인류 구원을 위한 사명을 위임받아 이 세상에 강생하시고, 친히 우리가 겪을 죽음의 무게를 짊어지심으로써 죽음을 인생의 마지막이 아닌 영원을 향한 희망의 아이콘으로 바꿔 주신 분, 그리스도야말로 결국 한 줌의 재로 영원히 사라질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을 향한 가능성을 결정적으로 선사해 주신 분이자, 인류의 진정한 ‘구세주’이십니다.”
윤신부님께서는 오늘 우리 각자를 향해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죽음의 두려움 앞에 신앙인들은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잘 소개하고 있습니다.
“신앙 안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고백해도, 죽음은 여전히 이승에서 우리의 존재를
최종적으로 마감하며 해체하는, 우리의 본성을 거스르는 사건입니다. 그렇기에 괴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은 죽음에서 부정적인 측면보다 더 강한 긍정적인 의미를 봐야 하고 또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 신비적으로 변화되어 주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파스카 사건에 동참함으로써 죽음 속에서 부활의 빛을 발견할 수 있는 신앙의 눈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에 대한 희망과 사랑으로 죽음의 두려움에 충분히 맞설 수 있습니다. 죽음을 긍정적인 실제로 바라보기 위해서는 반드시 주님과 깊이 일치해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신앙인에게 죽음은 자신을 ‘결정적으로’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과 결합시키는 기쁨과 희망의 사건이 될 것입니다.”
받아들이기에 너무나 부담스럽고 고통스러운 죽음에 대해 깔끔하고도 명료하게 선을 그어주신 신부님께 큰 감사를 드립니다.
“만일 우리가 죽음에 직면해서 두려워 떤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죽음이 지닌 가치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에 앞서 죽음의 의미를 바꾸기 위해 친히 죽음을 끌어안으신 주님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분께서는 한 개인으로서 우리와 함께 돌아가신 것이 아니다. 이미 당신 자신 안에 우리의 죽음을 간직한 채 수난하고 돌아가셨다. 무엇보다도 그분께서는 당신의 죽음을 통해 우리 존재가 간직한 고뇌와 무능함 그리고 당신을 향한 열망이 부족한 우리의 내면을 제대 삼아 당신 자신을 성부께 온전히 봉헌하셨다.”(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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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rEn0Ztb4zv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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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하느님을 아버지로 믿는 근거는?>
세라 애드킨스는 오하이오에 사는 약사입니다. 그녀는 샘슨과 솔로먼이라는 어린 두 아들을 남편 트로이와 함께 키웠습니다. 그런데 남편 트로이가 우울증과 불안 발작 증세를 보였고, 세월이 흐르면서 이 증세는 점점 더 심해졌습니다. 나중에는 직장도 그만두고 가족에게 불같이 화를 내며 강박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세라와 트로이는 이 어려움을 극복하려고 노력하며 치료법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한동안은 노력의 효과가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두 아이가 각각 여덟 살과 여섯 살이던 2000년 어느 가을날이었습니다. 주말을 맞아 세라는 오랫동안 계획을 세웠던 골동품 여행을 어머니와 여동생과 함께 떠났습니다. 일요일에 세라는 여러 번 트로이에게 전화했지만, 연결이 되지 않았습니다. 호수에 배를 타러 나갔거나 다른 일로 바쁜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일요일 다섯 시쯤 집에 돌아와서는 우편물이 현관 앞에 방치된 걸 보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아이들에게 주려고 주문했던 장난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녀는 불안한 마음을 억누르며 문을 열고 들어가서 “엄마 왔어!”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러나 아무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남편이 두 아들을 죽이고 자살을 한 것이었습니다. 트로이는 이런 쪽지를 남겼습니다. “나는 혼란, 의심스러운 충성, 죄의식, 절망, 상호 의존, 불안정으로 가득 찬 인생으로부터 샘슨과 솔로먼을 지켜 낼 것이다. 이 참혹한 불행의 반복을 나에게서 끝낸다.”
수많은 사람이 세라를 도우려고 힘을 모았다. 그녀는 석 달 동안 부모님과 함께 지내며 그들의 침대에서 함께 잤습니다. 세라가 충격에서 회복하기까지는 여러 해가 걸렸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남편과 세상과 악에 지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말합니다. “나는 그 경험을 통해 성장했습니다. 화가 났거든요. 나는 그 사람이 나에게 하려고 했던 것에 대항해 싸웠습니다, 세상을 바꾸는 것으로 말입니다. 보세요, 그 사람은 나를 죽이지 못했습니다. 그 사람한테 내가 해 줄 대답은 바로 이겁니다. ‘나한테 무슨 짓을 하려고 했든 간에, 빌어먹을, 난 절대로 못 건드려!’” 엄청난 자존감입니다. 자존감은 내가 누구냐는 믿음에서 옵니다. 부모와 함께 머물렀던 이 시기에 그녀는 다시 부모의 소중한 딸이라는 자존감을 회복하였을 것입니다. 그것만이 아내나 엄마라는 우울할 수밖에 없는 감정에서 자기를 해방할 수 있습니다.
그녀의 집은 위험지대로 선포되었고, 모든 것을 깨끗하게 정리하는 데 3만 5,000달러가 들었습니다. 그렇게 많은 돈이 들지는 몰랐습니다. 그때 세라는 깨달았습니다. 가난한 여성은 자기 아이들이 총에 맞아 살해되거나 폭력으로 자기 집이 난장판이 되었을 때 장례비나 그 밖의 다른 비용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그런 사람들은 자기 손으로 직접 카펫에 묻은 피를 닦아 내야 하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일까요? 그래서 세라는 이런 참담한 일을 겪은 여성들에게 장례식과 청소 비용을 지원하는 재단을 만들었습니다. 그녀는 오하이오대학교와 오하이오주립대학교에서 강의합니다. 또 무료 건강관리 클리닉에서 일하면서 이런 클리닉을 새로 하나 더 열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웃을 위한 봉사만이 우리 모든 악한 감정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것은 진리입니다. 그러나 그 진리를 알더라도 내가 누구냐는 정체성을 회복하지 못하면 진리의 삶을 따를 수 없습니다. 아기가 두 발로 걷는 게 진리라도 먼저 내가 인간이라는 믿음이 없다면 따를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려면 아버지, 어머니를 만나야 합니다. 이 시간이 기도입니다. 기도 때 우리는 정체성을 회복하고 진리를 따를 준비를 마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아무에게도 종노릇한 적이 없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면 당신을 받아들였을 것이라 하십니다. 당신이 진리이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너희는 너희 아비가 한 일을 따라 하는 것이다.”라고 하실 때 그들은 “우리는 사생아가 아니오. 우리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느님이시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너희 아버지시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할 것이다.”라고 하시며 실제로는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임도, 하느님의 자녀임도 믿고 있지 못하기에 진리를 받아들일 수 없는 존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하느님의 자녀임을 믿어야 이웃 사랑의 진리를 실천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자녀임을 믿는다는 말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존재임을 믿는 것입니다. 내가 인간 아버지의 자녀라고 믿으면 나는 성장하여 아버지가 하는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존재라고 믿습니다. 이 믿음이 없다면 진정 아버지를 아버지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고 그러면 그분의 말씀인 진리를 따를 수 없게 됩니다.
누구에게 좌우될 것인가가 내가 누구 자녀인지가 결정됩니다. 참 자유는 나는 그런 것에 좌우될 사람이 아니라는 믿음뿐입니다. 그 믿음은 나의 아버지를 정하는 데 있습니다. 세라 에드킨스는 그런 일이 있고 난 뒤 석 달 동안 부모와 함께 잤습니다. 다시 자기 정체성을 되찾는 노력을 한 것입니다. 우리를 진정 자유롭게 하는 진리,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그분 안에 머물기 위해서는 그분을 보내신 분을 아버지로 인정해야 합니다. 그 방법은 하느님이 할 수 있는 모든 능력을 우리에게도 주셨음을 믿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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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나이를 먹으면서 하지 않아야 할 말들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잔소리’라고 합니다. 요즘 사람들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잘 지내기 마련입니다. 잔소리하는 이유는 인정받고 싶어서라고 합니다. 잔소리하는 이유는 누가 알아주지 않아 심심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잔소리가 늘어 가면 늘어갈수록 사람들은 더욱 멀어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전에 선배들이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입은 닫고 지갑은 자주 여세요.’ 아버지도, 어머니도 철이 들면서부터는 잔소리를 하지 않았습니다. 성인이 되었으니 저를 믿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부모님의 침묵이 더욱 무겁게 저 자신을 돌아보게 하였습니다. 둘째는 ‘반복되는 이야기’라고 합니다. 좋은 이야기도 자꾸 들으면 따분하고 귀찮기 마련입니다. 하물며 지난날의 허물을 들추어내면서 험담하고, 불평하는 이야기를 반복하면 가까이하고 싶지 않게 됩니다. 부부간에 다툼이 있을 때라도 지금 현안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좋지, 예전에 있었던 일까지, 특히 친정과 시댁의 이야기를 반복해서 꺼내면 다툼은 싸움에까지 이르고,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기도 합니다. 셋째는 ‘나 때는’이라는 이야기라고 합니다. 저도 예전에 선배들이 ‘나 때는’이라고 하면서 훈계를 하면 귀찮았습니다. 돌아보니 저도 가끔 ‘나 때는’이라는 말을 하곤 합니다. 흘러간 물로는 방아를 돌일 수 없다고 합니다. ‘나 때는’이라는 말은 서랍 속에 깊이 넣어두고 지금 살아가는 이야기를 경청하면 좋겠습니다. 본당 모임에서, 사목회에서 이 3가지 말만 조심하면 사목에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성경 말씀은 모두 우리 삶의 등대가 되고, 지치고 목마른 영혼에 단물이 되지만 제게 특히 가슴을 뛰게 했던 성경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는 ‘눈물로 씨 뿌리는 사람이 기쁨으로 곡식을 얻으리라.’입니다. 저는 ‘고진감래(苦盡甘來)’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사필귀정(事必歸正), 인과응보(因果應報), 상선벌악(賞善罰惡)은 문화와 문명의 버팀목이 되었습니다. 저는 서품 성구로 ‘눈물로 씨 뿌리는 사람이 기쁨으로 곡식을 얻으리라.’로 정했습니다. 성실하게, 정당하게 열심히 일한 사람이 그 노력의 대가를 받는 것이 이치에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불의한 사람이 득세하고, 불로소득 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권력을 사유화해서 억울한 사람이 생기고, 약한 사람을 괴롭히면 그것은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사회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사회를 정화하기 위해서 예언자를 보내셨고,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냈습니다. 다른 하나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Veritas Liberabit Vos!)' 신학교에서 강의 시간에 이 성경 말씀을 들었는데 마치 어둠 속에서 찬란한 빛을 본 것 같았습니다. 하늘을 나는 새가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돈이 많은 사람도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이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지식이 많은 사람도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삶을 풍요롭게 하고, 원하는 것을 채울 수는 있지만 참된 자유는 아닌 것 같았습니다. 자유는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을 내줄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진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유는 상태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믿음 때문에 모든 것을 내어 줄 수 있다면 그것이 자유입니다. 사랑 때문에 모든 것을 내어 줄 수 있다면 그것이 자유입니다. 희망 때문에 모든 것을 내어 줄 수 있다면 그것이 자유입니다. 좋은 옷을 입고, 맛난 음식을 먹었지만 라자로에게 인색했던 부자는 결코 자유로운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재물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될 수 없었던 부자 청년은 결코 자유로운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사드락과 메삭 그리고 아벳느고는 비록 불가마 속에 있었지만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모든 것을 내어놓았기에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어드린 여인은 기꺼이 가진 것을 주님께 봉헌했으니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자유는 소유함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 때문에, 사랑 때문에, 희망 때문에, 열정 때문에 기꺼이 내어 줄 수 있다면 감옥에 있어도, 병중에 있어도, 가난할지라도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그래서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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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8,31-42: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31절) 말씀 안에 머무른다는 것은 진리와 자유에 대한 희망 때문이다. 신앙인은 믿음과 희망으로 사는 이들이며, 진리와 자유를 얻기 위해서 기다림과 인내가 필요하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32절) 우리는 진리를 향해 가는 것이며, 진리는 참된 자유를 주시는 분이시며,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 자유는 진리에 온전히 따를 수 있을 때 얻을 수 있다. 이 진리는 우리를 죽음, 곧 죄의 노예 상태에서 자유롭게 해주시는 하느님이시다. 우리가 평화 속에서 진리를 누리지 못하는 한, 어떠한 자유도 누리지 못한다. 자유롭게 된다는 것은 죽음, 부패 그리고 변하는 것에서 벗어나게 한다는 의미이다. 진리는 그 자체가 죽지 않고 썩지 않고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참으로 죽지 않고 썩지 않으며 변하지 않는 것은 하느님이시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아무에게도 종노릇 한 적이 없습니다.”(33절) 이 말은 진실이 아니다. 역사적으로 이스라엘은 노예 생활을 했고, 지금도 유대인들은 로마에 세금을 내면서 살고 있지 않은가?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이다.”(34절)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도 게으르거나 소홀한 실천으로 그의 자손이라는 지위를 잃어버릴 수 있다.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아브라함이 한 일을 따라 해야 할 것이다.”(39절) 이 말씀은 아브라함의 신앙을 말한다. 전 생애를 통하여 하느님과 아브라함이 가졌던 관계를 말한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그러한 신앙으로 살아가라고 하신다. “그런데 너희는 지금, 하느님에게서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이야기해 준 사람인 나를 죽이려고 한다. 아브라함은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40절) “그러니 너희는 너희 아비가 한 일을 따라 하는 것이다.”(41절) “우리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느님이시오.”(41절) “하느님께서 너희 아버지시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할 것이다.”(42절) 하느님은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이들의 아버지가 아니시다. 예수님께서 사랑받으셔야 하는 이유는 당신이 하느님에게서 나셨고, 그 하느님을 자기들의 아버지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아들을 믿고 사랑하는 사람만이 또한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진정한 자유인으로 태어나는 시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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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미리내 성모성심 수녀회)]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성주간이 가까워지고 있는 이때, 예수님께서는 우리 신앙의 매우 중요한 본질 하나를 가르쳐 주십니다. ‘그분의 제자가 되려면’ 무엇보다도 그분 말씀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스승의 말씀을 듣고 간직하며 그 말씀 안에 머무는 것은 제자로서 당연히 하여야 할 일입니다. 말씀을 따르는 것이야말로 스승과 제자 사이를 드러내 주는 일차적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굳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려는 것일까요? 그분의 제자가 되면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깨달으려면 진리 자체이신 분 가까이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러면 또 다른 질문이 생깁니다. 도대체 진리는 왜 그렇게 중요한 것일까요? 그 답도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인간의 존엄은 ‘자유’를 통해서 발현됩니다. 구속이나 검열 또는 규제의 방식으로 누군가를 대하면, 그는 사람이 아니라 동물로 전락하여 버립니다. 교육이 아닌 조련으로 길들기 때문입니다.
한편 오늘 독서는 불가마에 던져진 세 청년의 이야기로 진리가 어떻게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지 알려 줍니다. 하느님만을 섬기고 우상을 거부하며 ‘진리’를 선택한 그들은 불가마 안에서도 ‘자유롭게’ 걸어 다닙니다. 그러자 박해의 주범인 네부카드네자르조차 “신의 아들” 같은 존재가 불가마 속에서 그들과 함께 거닐고 있음을 증언합니다.
진정한 인간으로 살아가는 데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자유’이고, 이 자유는 ‘진리’에서만 싹트며, 진리는 그분의 ‘말씀’이기에, 교회는 무엇보다도 그분의 말씀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놀랍게도 하느님의 말씀을 따를 때 진리이신 그분께서는 모든 상황을 역전시키십니다. 심지어 지옥의 불가마같이 뜨겁고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 있다 하더라도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걸으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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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1ㄴ-3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이다. 종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르지 못하지만, 아들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른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요한 8,34ㄴ-36)
여기서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면 구원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나의 가르침이 너희를 구원할 것이다.”>
‘진리’는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구원의 진리’를 뜻합니다. (예수님의 복음과 계명들도 모두 포함됩니다. 이 진리를 ‘학문의 진리’와 혼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유’는 구원받은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에서 누리는 생명, 평화, 행복, 안식, 기쁨 등을 총체적으로 가리키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그 ‘자유’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으려면(하느님 나라의 자유를 얻으려면)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야 합니다. “내 말 안에 머무르면”이라는 말씀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을 뜻하는 말씀입니다. ‘머무르다.’라는 말은 ‘포도나무의 비유’에 연결됩니다.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요한 15,4-5)
‘포도나무의 비유’를 생각하면,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라는 말씀은 거꾸로 읽어야 합니다. “너희가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되려면 내 말 안에 머물러라.” 여기서 ‘제자’는 ‘신앙인’을 뜻하고,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된다는 말은, 충실한 신앙인이 되어서 구원받을 자격을 얻는 것을 뜻합니다.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라는 말씀은, 뜻으로는 “진리를 깨달아라.”입니다. 여기서 깨닫는다는 말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그 깨달음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들을 ‘온 삶으로’ 실천하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라는 말씀을 모두 하나로 합해서 생각하면, “구원을 받아서, 하느님 나라에서 자유와 평화를 누리기를 바란다면, 나의 가르침들을 온 삶으로 충실하게 실천하는 참된 신앙인이 되어라.”가 됩니다.
<이 말씀을, 산상설교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지 않는 자는 모두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휘몰아치자 무너져 버렸다.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마태 7,24-27) 집을 반석 위에 안전하게 지어서 아무 걱정 없이 사는 사람이 평화를 누리는 모습은 자유를 누리는 모습이고, 반대로, 집을 모래 위에 지어서 늘 불안해하고 걱정하면서 사는 사람이 평화를 누리지 못하는 모습은 자유를 잃은 모습입니다. 그처럼 신앙생활을 충실하게 하면서 영혼의 평화를 누리는 것이 바로 신앙인의 자유입니다.>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이다. 종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르지 못하지만, 아들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른다.”라는 말씀은,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 연결됩니다.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방탕하게 살던 때의 작은아들의 모습과 화를 내면서 밖에 있는 큰아들의 모습은, ‘죄의 종’이 되어서 집의 ‘밖에’ 있는 모습입니다.(루카 15,13.28) <비유에서는 두 아들이 모두 스스로 밖으로 나간 상황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최후의 심판 때에는 집에 머무를 자격을 잃고 쫓겨나는 상황이 될 것입니다.>
작은아들이 회개하고 집에 돌아왔을 때, 아버지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아들 자격을 회복시켜 준 일이었습니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루카 15,22) 아버지의 집에 머무르면서 참된 자유와 평화와 행복을 누리려면 아들 자격을 얻어야 하는데, 그 자격은 아버지께서 주시는 것이고, 우리 쪽에서 할 일은 ‘회개’입니다. 그런데 내 마음대로 “나는 회개했다. 이만큼 했으면 충분히 한 것이다.”라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주님께서 참되고 진실한 회개라고 인정해 주셔야만 합니다.
신앙생활과 회개를 얼마나 잘했는지를 평가하는 기준은 내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정하시고, 그 평가와 판단도 주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바로 그것을 나타내는 말씀이,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주님만이 우리에게 참된 자유를 주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참으로 자유롭게 되는 것은(구원받는 것은) ‘나의 힘으로 이루는’ 일이 아니라, 주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자비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하여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겸손하게 자비를 간청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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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김훈일 세례자요한 신부님]
<자유>
“자유 아니면 죽음을 달라.” 그렇게 외치며 실제로 죽음의 길을 선택한 사람들이 지난 인류의 역사 속에 많이 있었습니다. 자유는 인간에게 있어서 죽음과도 맞바꿀 만큼 소중한 가치가 있습니다.
하느님은 인간이 당신을 거역하고 죄를 지어 죽음에 이르렀던 상황에서도 자유를 빼앗지 않으셨습니다. 자유는 인간에게 하느님을 찾게 하는 가장 소중한 도구입니다. 자유라는 것이 이처럼 소중한 것이지만, 그러나 모든 자유가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자유를 얻게 되었다고 해서 삶의 궁극적 의미가 실현되는 것은 아닙니다. 자유란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라고 하는 현상은 같지만 그 내용은 제각기 다릅니다. 서로 질이 다르고 서로 차원이 다릅니다.
어떤 이는 감옥에서 자유롭게 되기를 바랍니다. 어떤 이는 시간에서 자유롭기를 바랍니다. 어떤 이는 사람에게서 자유롭기를 바랍니다. 어떤 이는 사상과 이념에서 자유롭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하고 가장 높은 차원의 자유는 어떤 것일까요? 예수님은 오늘 복음을 통해 죄로부터의 자유가 바로 그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인간을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모든 근원은 죄로부터 시작합니다. 이 죄로부터의 자유는 우리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진리 안에 있다면 죄를 이겨낼 힘을 가지겠지만 우리는 진리를 소유할 힘이 없습니다. 그 힘은 진리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진정 자유로운 인간이 되는 길은 예수님을 통해서 진리를 찾고 죄를 이겨내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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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허광철 요셉 신부님]
<진리 역시 사랑>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 입구에는 이런 말이 씌어 있습니다. ‘노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ARBEIT MACHT FREI).’ 실제는 그렇지 않은데, 수용소 사람들을 농락한 나치들의 구호였습니다. 극심한 노동 후 그들이 얻게 된 자유란 진짜 자유가 아니라 죽음이었지요.
하지만 수감자들은 대문자로 씌어 있는 글자 중 B를 교묘히 뒤집어 놓음으로써, 그러니까 보기엔 B자가 맞지만 뚱뚱한 아랫부분이 위쪽에 있도록 하여 나치에게 무언의 항의를 했습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나치뿐 아니라 수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이 말씀을 패러디합니다. 하지만 진짜 진리와 관련이 없다면 그 어떤 것도 결코 인간을 궁극적으로 자유롭게 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자유롭게 하기는커녕 진짜 진리가 들어갈 자리조차 막아 버리기에 그러한 이들은 살인까지 저질러 버릴 정도로 위험합니다.(37절 참조) 우리의 신앙은 진리를 삼위일체 하느님 안에서 발견합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성령은 곧 진리이십니다.”(1요한 5,6)
진리는 곧 하느님, 하느님의 이름은 사랑이기에 ‘진리 역시 사랑’입니다.
“진리가(하느님이/사랑이) 나를 자유롭게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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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오늘 복음도 어제 복음과 같이 예수와 유다인들 사이의 논쟁을 들려준다. 요한복음사가는 이 논쟁을 통하여 예수의 신적(神的) 자기 계시를 도모하는 한편, 다른 한편으로는 유다인들의 고정관념을 근거로 한 고집과 아집을 보여준다.
이로 인해 예수와 유다인 지도자들 사이의 절벽은 점점 더 깊어만 가고, 둘 사이의 이해 가능한 지평이나 공감대는 점점 멀어만 간다. 논쟁의 결과는 결국 서로의 고립으로 치닫는다.
어제 복음은 그 와중에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했다.(30절) 그런데 그들이 '정말 예수님을 믿는 것일까', 아니면 그들이 '도대체 무엇을 믿고 있는가' 하는 의구심이 생긴다. 이는 우리보다 예수께서 먼저 가지신 느낌이다.
그래서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당신을 믿는 유다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31절)라는 서두로 시작한다. 언뜻 보기에 예수께서 믿음을 가졌다는 유다인들에게 가르침을 내리려는 듯이 보이나 실상은 논쟁의 연속이다.
논쟁의 연속으로 전개되는 오늘 복음은, 그러나 두 가지 중요한 가르침을 담고 있다. 하나는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새기고 산다면 참으로 예수의 제자가 되고, 그럴 때 진리를 알게 되며, 이 진리가 우리에게 자유를 선사한다(31-32절)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죄를 짓는 사람은 누구나 죄의 노예가 된다(34절)는 것이다. 오늘의 두 가지 가르침은 다 '자유'와 관련이 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인데, 참으로 제자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새기고 사는 것'이다.
'말씀을 새기고 산다.'는 것은 참다운 제자로서의 믿음을 말하는 것인데, 이는 예수를 향한 단순하고 순간적인 이끌림이나 매료됨이 아니라 충실함과 인내함으로 말씀을 실천하는 것을 말한다.
예수의 말씀을 삶으로 실천하는 제자는 그 보상으로 진리를 알게 될 것이고, 진리가 그를 자유롭게 한다는 것이다.(32절)
여기서 진리란 두말할 것 없이 예수님 자신을 가리킨다. 결국 진리이신 예수께서 자유를 주시는 것이다. 그러나 죄를 짓는 자는 죄의 노예가 된다.(34절)
노예는 자유를 마음대로 행사할 수 없는 신분일 뿐만 아니라 아예 자유를 지니지 못한 신분이다. 이는 죄 자체가 참다운 자유를 선사하는 진리이신 예수를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죄를 지은 자는 자유가 없는 노예가 되고 마는 것이다.
이제 죄를 지은 자의 죄를 용서하시고 참다운 자유를 선사하시는 분은 오직 예수님 한 분뿐이시다.(36절) 예수님은 진리이시고, 진리가 곧 사람을 참으로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참다운 자유는 다시금 진리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새기고 실천하며 사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진리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새기고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참으로 자유롭다고 말할 수 없다. 그가 비록 자유를 주장하더라도 그 자유는 종종 아무 거리낌없이 마음대로 행동하는 방종(放縱)이 될 수밖에 없다. 그에게 참다운 자유를 선사하는 진리가 빠져있기 때문이다.
예수와 진리, 이는 예수님 옆에 어떤 무엇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분은 스스로가 바로 진리 자체이신 것이다. 진리란 예수님이 어떤 철학자로서 배워 익혀 제자들에게 주시고자 하는 어떤 불변의 지성적 가르침도 아니다.
진리는 바로 예수님 그 자체이시다.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은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말씀 안에 사는 것은 진리이신 예수님 안에 사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날 자주 진리(예수님)가 주는 자유(은총)의 삶과, 진리를 거부하는 죄(세상)가 주는 가책(종살이)의 삶을 두고 선택의 고민에 자주 빠지게 된다. 그러나 진리를 택한 자는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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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8,31.32)
예수님은 이 땅을 떠나시기 전, “아버지, 제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이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요17,16~17) 라고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아버지에게서 보고 들은 진리를 이야기해 준 자신을 세상은 죽이려고 한다,(8,38.40 참조)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세상, 곧 거짓과 오류에 속하지 않고 아버지로부터 파견된 진리의 말씀이신 예수님께 속한 제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아버지 하느님의 말씀이 진리임을 깨닫게 되고, 아버지의 말씀이신 예수님 안에서 참 자유를 누리는 존재들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집에 머무시며 진리이신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전하신 분이시기에 그분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면 우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입니다.(8,35~36 참조) 그런데 우리는 진리이며 말씀이신 예수님 안에서 참 자유를 누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까?
어쩌면 진리이신 하느님을 만나고 체험할 때, 외적인 배척과 박해 등이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진리를 저버릴 수는 없습니다. 이를 증명해 주는 진리의 사람들 그리고 그 진리 안에서 한없이 자유로운 영혼들을 오늘 독서 다니엘에서 만납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 느고’는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이 ‘금상에 절하라.’고 명령하지만 이를 거부하자 불가마에 던져집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불가마 속에서도 하느님을 찬미하며 더욱 천사가 그 세 사람과 함께 거니는 모습을 보고 네부카드네자르는 마침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 느고의 하느님께서는 찬미 받으소서. 그분께서는 당신의 천사를 보내시어, 자기들의 하느님을 신뢰하여 몸을 바치면서까지 임금의 명령을 어기고, 자기들의 하느님 말고는 다른 어떠한 신도 섬기거나 절하지 않은 당신의 종들을 구해 내셨다.”(3,95) 하고 고백하게 됩니다. 불가마에 던져지는 고문과 고초를 겪었지만, 꿋꿋이 진리이신 하느님만을 섬기는 영적 자유를 몸으로 보여준 분들입니다.
오늘 다니엘 예언서의 세 젊은이 곧 사드락, 메삭, 아벳 느고는 그들 나름대로 진리를 깨달았기에 그 진리로 인해 임금의 압박과 회유에도 불구하고 임금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신들이 믿고 있는 ‘하느님만을 섬기겠다.’라고 고백하고, 기꺼이 죽음의 불가마에 사지가 묶인 채 던져집니다. 그런데 그들이 “주님께서는 타오르는 불가마와 임금님의 손에서 저희를 구해 내실 것입니다.”(3,17)라고, 간절히 믿었던 그대로 불가마 위에서 주님을 찬양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들은 참으로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은 자유로운 영혼들이었음을 증명해 보입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8,31.32)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이라는 의미는 단지 말씀을 듣고 이해하는 것보다 인격적인 차원에서 말씀이신 그분의 인격과 존재와 친밀한 일치와 합일을 이룰 때 비로소 참된 제자가 되고, 그분의 사람이 되리라는 것입니다. 이런 스승과 참된 제자 간의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살아가노라면, 진리이신 하느님의 말씀과 진리이신 하느님을 온전히 만나게 됩니다. 더 나아가서 진리이신 하느님께 몰입하고 투신할 때, 비로소 땅에 속한 모든 에고로 인한 거짓과 오류에서 깨어나 참 자유를 누릴 것이다, 고 말씀하신 것으로 저는 알아듣습니다. ‘진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오랜 과거로부터 오늘날까지 수많은 신학자, 철학자, 과학자들이 진리를 찾기 위해 힘을 쏟았지만, 공통된 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요한 14, 6절에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는 말씀에서 진리란, 아리스토텔레스가 「형이상학」에서 말한 ‘사실적 진리 곧 존재물의 진리’가 아니라 인간의 언어와 행위가 마땅히 따라야 할 ‘삶의 길道’에 대한 종교적 진리입니다. 삶의 진리 혹 종교적 진리가 실현되는 가운데서만 자기 삶의 의미와 가치를 구현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이며, 그 말씀이신 예수님 또한 진리이며 그분의 제자가 될 때 우리는 충만한 생명으로 넘쳐나며, 이 진리와 생명이 바로 우리의 자유의 힘이며 원천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스스로 오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세상에 보내셨기에 오셨습니다. (8,42참조) 파견되신 까닭이란 바로 세상의 모든 사람이 길이신 당신을 통하여 진리이신 아버지를 만나서 진리를 깨닫고 충만한 생명을 누리며 살아감으로써 그 어떤 것에도 억매이지 않는 참 자유를 누리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님, 찬미 받으소서.”(사순시기 복음환호성 후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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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인터넷에서 텀블러를 구입했습니다. 사실 몇 개의 텀블러를 이미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쇼핑몰에서 텀블러 가격이 터무니없이 싼 것입니다. 840원. 그것도 배송비 포함이었습니다. 주문하고 며칠 뒤에 텀블러를 받았습니다. 워낙 가격이 쌌지만, 텀블러의 질이 너무 형편없었습니다. 허접하고 지저분했습니다. 물로 깨끗이 닦다가 글쎄 손을 베고 말았습니다. 텀블러의 입구가 제대로 마감되어 있지 않아서 날카로운 것입니다. 싸게 샀지만, 현재 전혀 사용하지 않습니다. 혹시 입술을 베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이렇게 제게 쓸데없는 짐이 또 하나 늘었습니다.
물질적인 것으로 풍요롭게 사는 것이 아니라, 아주 적은 것으로도 매우 풍요롭고 만족스러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어렸을 때를 떠올려 보십시오. 결코 지금보다 많은 것을 갖고 있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때를 떠올렸을 때 결핍을 느끼지 못합니다. 많은 것이 없어서 불행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때를 그리워하지 않습니까?
욕망하는 것이 적을수록 더 풍요롭고, 더 자유로우며, 더 강력해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를 이기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물질적인 것에 의존하면 ‘나’ 스스로 하는 것이 줄어들게 됩니다. 온전히 나의 노력을 통해 ‘나’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무엇인가를 통해 ‘나’를 만들려다 보니 남과 비교하면서 부러운 이유만이 늘어납니다.
미국의 유명한 편집자 맥스웰 퍼킨스는 “더 강한 사람일수록 원하는 게 적다.”라는 말을 자기 외투에 새겨놓고 늘 다짐했다고 합니다. 원하는 게 적을수록 ‘나’에 집중할 수 있게 되어, 더 강한 ‘나’를 만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던 그 모든 모습을 보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가 분명해집니다. 세상 것에 집착하는 삶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사는 삶에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래서 늘 사랑하라고 하셨고, 당신께서 직접 모범으로 보여주셨던 사랑의 삶을 통해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세상 것에 욕망을 두는 우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 안에서는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없습니다. 오로지 주님을 통해서만이 진정 자유로운 사람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하면서 사랑을 실천하는데 더 집중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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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자유>
요한 8,31-42 (아브라함의 참된 자손)
그때에 예수님께서 당신을 믿는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그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아무에게도 종노릇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찌 ‘너희가 자유롭게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십니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이다. 종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르지 못하지만, 아들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른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 나는 너희가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알고 있다. 그런데 너희는 나를 죽이려고 한다.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이야기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실천한다.”
그들이 “우리 조상은 아브라함이오.” 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아브라함이 한 일을 따라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너희는 지금, 하느님에게서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이야기해 준 사람인 나를 죽이려고 한다. 아브라함은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 그러니 너희는 너희 아비가 한 일을 따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우리는 사생아가 아니오. 우리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느님이시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하느님께서 너희 아버지시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할 것이다.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와 여기에 와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다.”
<자유>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1-32)
믿음 안에 머무르는
의심으로부터의
자유는 믿음
희망 안에 머무르는
무기력으로부터의
자유는 희망
사랑 안에 머무르는
탐욕으로부터의
자유는 사랑
진리 안에 머무르는
허위로부터의
자유는 진리
선 안에 머무르는
악으로부터의
자유는 선
빛 안에 머무르는
어둠으로부터의
자유는 빛
포용 안에 머무르는
독선으로부터의
자유는 포용
자비 안에 머무르는
비정으로부터의
자유는 자비
화해 안에 머무르는
배척으로부터의
자유는 화해
일치 안에 머무르는
분열로부터의
자유는 일치
섬김 안에 머무르는
군림으로부터의
자유는 섬김
살림 안에 머무르는
죽임으로부터의
자유는 살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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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진리 안에 자유롭게 되기를>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아름다워지는 일입니다. 사랑하면 그를 닮게 되고 상대방의 모습으로 변하게 됩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면 사랑하는 이와 하나가 됩니다.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사랑하는 이에게 맞춰주기보다는 나에게 맞추려 하고 내 마음대로 하려고 한다면 아직 깊은 사랑을 하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을 사랑한다면 예수님 삶의 모습에 이끌려 그분의 모습으로 바뀌게 됩니다. 나를 사랑하는 그분의 사랑을 안다면 그냥 함부로 살 수가 없습니다. 그야말로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시는 것”(갈라 2,20) 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주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얼마나 마음에 새기고 사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아무리 신앙생활을 오래 하였다고 하더라도 마음에 주님의 말씀을 새겨 두지 않았다면 그는 겉모양만 제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요한 17,21.)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요한 10,30). 이제 우리가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실천하여 주님과 하나 되어야 할 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이야기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실천한다.”(요한 8,38)고 하셨습니다. 결국 주님의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참된 제자가 됩니다. 예수님은 자나 깨나 당신을 세상에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을 생각하고 당신의 삶으로 하여금 오직 그 말씀이 실현되게 하신 분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제자라고 하면 하루에도 수없이 하느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실행해야 합니다. 성경에는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 하는 일마다 잘 되리라.”(시편 1,2-3)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소홀히 하여 깨닫지 못하고 실천하지 못할 때 우리는 세상의 흐름, 세속의 그늘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서 우리에게 죄악으로부터의 자유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말씀을 깊이 새겨 말씀 안에서, 말씀과 함께,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은 말로만 되는 일이 아닙니다. 살아야 합니다. 실천을 요구합니다. 우리에게 꼭 필요한 사랑의 메시지인 성경, 성경대로 생각하고, 성경대로 살아가는 삶이 우리의 소명입니다.
그러니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사실 누가 말씀을 듣기만 하고 실행하지 않으면, 그는 거울에 자기 모습을 비추어 보는 사람과 같습니다. 자신을 비추어 보고서 물러가면, 어떻게 생겼는지 곧 잊어버립니다.”(야고 1,25) 자기 얼굴을 비추어 보고 무엇이 흉하게 묻었으면 지워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말씀에 마음을 비추어 무엇이 잘못되었으면 고쳐야 합니다. 우리 영혼을 비추는 거울은 곧 하느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그 말씀에 비추어 영혼이 자유롭게 되기를 바랍니다.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실천”함으로써 예수님과 하나 되는 기쁨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넌 내 마음 몰라. 좋으면서 싫은 척하는 내 마음 몰라. 떨리면서 떨리지 않는 척하는 내 마음 몰라. 겉으로는 차가운 척하면서 속으로는 온통 열병을 앓고 있는 내 마음 몰라.” 사랑의 열병을 앓고 있는 나를 아는 분은 누굴까? 참새 마음은 참새가 알고, 비둘기 마음은 비둘기가 안답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면 속을 알게 됩니다. ‘주님께서 저를 알고, 저도 주님을 압니다.’하고 고백하고 싶습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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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진리가 너희를 참으로 자유롭게 하리라>
-자유의 여정, 예닮의 여정-
"주님은 내 등불을 밝혀주시고, 당신은 내 어둠을 비추시나이다."(시편19,29)
“내가 하는 일이 옳은 것이라면, 설사 세상이 나를 돕지 않아도 하늘이 나를 돕는다.”
오늘 3월 20일, 다산 어른의 말씀도 좋습니다. 자유란 말만 들어도 가슴이 설레고 눈물이 난다는 어느 시인의 말도 생각이 납니다. 무책임한 자유가 아니라 반드시 책임이 따르는 자유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유를 추구합니다. 자유로워 인간이고 자유로워 행복입니다. 자유가 있을 때 인격이지 자유가 없으면 인격도 없습니다. 과연 참으로 자유롭습니까?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요? 자유도 능력임을 깨닫습니다. 자유를 누리는 능력도 사람마다 천지 차이일 것입니다. 어떻게 참으로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사람은 자유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자유에로 부르셨습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의 복된 존재임을 알림이 자유입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참으로 바라시는바, 자유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작가인 그리스의 니코스 카찬차키스의 묘비명도 특이합니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평생 자유를 추구했지만 자유롭지 못한 작가였습니다. 우리 수도생활을 하느님을 찾는 여정이라 하고 날로 자유로워지는, 자유의 여정이라고도 합니다. 과연 살아갈수록 자유로워지는 삶인지요? 자유를 추구하지만 세상 것들에 중독되어 세상의 노예 되어, 딸려 살아가는 이들도 점차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광야 인생 ‘제대로 미치면 성인이지만 잘못 미치면 폐인이 된다’라는 말마디는 저의 지론입니다.
광야 인생 셋 중 하나 즉, 성인이 아니면 폐인, 또 괴물이 될 수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세상 것들에 중독된 자들 얼마나 많은지요! 잘못된 자유의 헛된 추구가 세상 것들에 중독되어 폐인으로 괴물로 만들기도 합니다. 어제 저는 얼마전 영국의 유명한 베네딕도회 출신의 바실리오 흄 추기경(1923-1999)에 대한 글을 흥미있게 읽었습니다. 어느 유다인 랍비의 흄 추기경에 대한 소개글입니다.
‘내가 흄 추기경을 생각할 때 나는 유다이즘의 초기 성인들의 말을 떠올린다. 그들은 묻는다: “누가 영웅인가?” 그들은 대답한다: “낯선 이들을 친구들로 만드는 이다(One who turns strangers into friends).” 그것이 바로 흄 추기경의 위대한 은총이었다. 그는 그의 하느님의 사랑과 그의 인간에 대한 깊은 감정으로 사람들을 그에게로 끌어들였다. 너희는 흄 추기경 그분과 함께 있는 동안, 너희들은 한없이 넓어짐을 느낄 것이다. 그는 하나의 친구다. 우리가 그분을 만나는 것은 행운이다. 그는 삶 안에서, 죽음의 면전에서 지극히 고요하고 평온했다. 흄 추기경은 참으로 낯선 이들을 친구들로 만든 하느님의 사람이었다.”
만나는 낯선 이들을 누구나 친구들로 만들었던 흄 추기경이야말로 참으로 매력적인 참 자유인입니다. 대하는 이들을 누구나 무장 해제시켜 본연의 편안하고 자유로운 참 사람으로 만드는 사람이 바로 참 자유인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자유 역시 은총의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자유 또한 선택이자 훈련이요 습관임을 깨닫습니다. 자유 역시 부단히 배우고 익혀야 함을 깨닫습니다.
사람이라 다 똑같은 사람이 아니라 자유를 누리는 능력도 사람마다 참 다양합니다. 바로 오늘 복음이 참 자유의 비결을 가르쳐줍니다. 참 자유의 비결은 이 하나뿐이라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주님 친히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진리입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면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서울대 교표인 "진리는 나의 빛(VERITAS LUX MEA)"이란 말마디도, 하버드 대학교의 로고 중 "진리(VERITAS)"란 말마디도 여기서 유래합니다. 저절로 자유가 아니라 주님 안에 머물러 주님의 제자로 사는 선택이 우선입니다. 바로 이때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고 이 진리가 참으로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무지에 대한 답도 진리의 자유 하나뿐임을 깨닫습니다. 혼자 격리된 자유가 아니라 더불어 주님 안에 머물러 제자들로 살 때 비로소 진리이신 주님을 깨달아 자유로워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을 떠나서는, 더불어 공동체를 떠나서는, 참 자유는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유의 여정은 우리 각자 날로 진리이신 주님을 깨달아 알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진리와 자유는 불간분의 관계에 있음을 봅니다. 진리 없는 자유는 애당초 가능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과 빌라도의 대화도 생각납니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
빌라도가 예수님께 물었다. “진리가 무엇이오?" 진리이신 예수님을 앞에 두고 진리가 무엇이라 물으니 이런 무지에 대한 답은 침묵뿐이었을 것입니다. 진리와 자유는 함께 갑니다. “진리의 연인”이라 칭하는 성 아우구스티누스, “진리의 협조자”라 불리길 원했던 베네딕도 16세 전임 교황, 역시 참 자유인이었습니다. “진리에 몸 바치는 것이 소원”이라 했던 불가의 고 성철 대선사 역시 익명의 크리스천이자 대 자유인임을 깨닫습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말씀이 참 자유를 분명히 깨닫게 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이다. 종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르지 못하지만, 아들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른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
아버지의 집인 수도원에서, 교회에서 죄의 종으로 머문다는 것은 너무 부끄러운 일입니다. 우리와 늘 함께 계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할 때 정녕 자유롭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날마다 주님과 일치를 깊게 해 주는 미사은총이 우리를 참으로 자유롭게 하는 데 얼마나 결정적 역할을 하는지 깨닫습니다. 진리 자체이신 예수님을 떠나 자유의 추구는 연목구어(緣木求魚)의 어리석은 행위일 뿐입니다.
진리 자체이신 주님과 함께함이 참 자유의 첩경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 이스라엘의 사드락, 메삭, 아벳 느고 세 청년이 참 자유의 실상을 보여줍니다. 타오르는 불가마 속에서 자유로이 거니는 세 청년들 참 자유인의 상징입니다. 세 청년이 ‘이슬 머금은 바람 서늘한’ 불가마 속에서 한 일은 오늘 독서에서 생략됩니다만 단 하나 하느님 찬미였습니다.
‘세 젊은이는 가마 속에서 한 목소리로 하느님을 찬송하고 영광을 드리며 찬미하였다.’
새삼 불가마 같은 공동체 생활 중에도 온전한 자유인이 되게 하는데 찬미와 감사의 공동전례기도 은총이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게 됩니다. 어떤 역경 속에서도 진리 자체이신 주님과 함께하며 하느님 찬미에 전념할 때 온전한 자유임을 깨닫습니다. 기절초풍하여 그 사유를 묻는 바빌론의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입니다.
“우리가 묶어서 불 속으로 던진 사람은 셋이 아니더냐?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네 사람이 결박이 풀렸을 뿐만 아니라, 다친 곳 하나 없이 불 속을 거닐고 있다. 그리고 넷째 사람의 모습은 신의 아들 같구나.”
참으로 진리자체이신 주님과 함께할 때 온전한 자유인들의 공동체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귀신이 곡할 기적에 놀란 임금의 하느님 고백이 감동입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 느고의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 그분께서는 당신의 천사를 보내시어, 자기들의 하느님을 신뢰하여 몸을 바치면서까지 임금의 명령을 어기고, 자기들의 하느님 말고는 다른 어떠한 신도 섬기거나 절하지 않은 당신의 종들을 구해내셨다.”
참 자유는 섬김의 자유입니다. 참으로 진리이신 주님과 함께 섬김의 삶에 충실할 때 천하무적의 진리의 용사로서 참 자유인의 삶이겠습니다. 주님은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진리이신 당신 안에서 섬김의 삶에 충실함으로 날로 자유로워지는 예닮의 여정을 살게 하십니다.
"생명의 샘이 진정 당신께 있고, 우리는 당신 빛으로 빛을 보옵나이다."(시편 36,1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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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알아듣기 어려운 말일지라도 참 제자라면>
주님께서는 당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주님이 길이라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고, 생명이시라는 말씀도 어렵지 않습니다.
우선 길이시라는 것은, 당신께서 하늘과 땅 사이의 길이라는 것, 곧 이 세상과 하느님 나라를 이어 주시는 길이라는 것,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오시는 길이요 우리가 하느님께 가는 길이시라는 것이지요.
예수 그리스도라는 길이 없으면 하느님과 우리 사이가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까요? 하늘과 땅 차이라고 흔히 얘기하는데 그 차이만큼 하느님과 우리 사이는 벌어져서 하느님은 우리가 가까이 갈 수 없고, 뵐 수도 만날 수도 없는 분이실 것입니다.
아무튼 주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인간이 되어 오심으로써 하느님과 우리 사이의 가교요 통로가 되어 주신 고마운 분이십니다.
그런데 주님이 길이시라는 것은 이렇게 고맙고 가깝게 다가오는 것에 비해 진리시라는 것은 그리 가깝지 않고 그래서 그리 고맙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진리의 주님은 우리의 느낌에 가깝지 않고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진리의 주님은 진리의 말씀이라는 말처럼 말씀이신 주님이십니다. 말씀이신 주님은 하느님께서 한 말씀으로 모든 것을 창조하신 것처럼 그분으로 모든 것이 생겨났고 그분 안에서 모든 것이 생겨났지만 정작 그 말씀을 하신 하느님은 어디 계시는지 알 수 없는 분이고, 그래서 멀리 계시는 분이고 신비이신 분이십니다.
아무튼, 진리의 말씀이신 주님은 말씀으로 모든 것이 생기게 했기에 이때의 진리는 원리 곧 모든 생명의 원리요 생성의 원리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진화론을 부정하고 창조론을 주장하며 진화론을 받아들이더라도 그 진화론은 창조적 진화론이라고 합니다.
다음으로 이렇게 모든 것이 진리의 말씀으로 인해 생겨났기에 자연 만물과 모든 일도 이 진리의 말씀에 따라 움직이고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때의 진리는 이치 곧 자연의 이치요 작동의 이치라고도 합니다.
그리고 이 이치에 따라 모든 것이 돌아가고 움직이면 일은 순리대로 잘 풀릴 것이고, 생명은 죽지 않고 살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이치를 따르지 않고 누가 제 마음대로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때의 자유는 진리에 역행하고 순리를 따르지 않기에 일은 꼬이게 하고 생명을 죽게 하는 자유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을 따라 그리고 진리와 생명이신 주님의 말씀에 따라 진리의 길을 가면 생명의 길도 갈 것이고, 진리의 길을 벗어나지 않는 자유라야 그 자유가 생명의 자유요 참자유일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이 말씀 참으로 알아듣기 쉽지 않지만 우리가 주님의 참 제자라면 그러기에 오히려 이 말씀 안에 오래 머무는 오늘 하루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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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아브라함이 한 일을 따라 해야 할 것이다."(요한8,40)
<온전한 믿음!>
오늘 복음(요한 8,31-42)은 '아브라함의 참된 자손에 대한 말씀'이며, '당신을 믿는 유다인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8,31-32)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다는 유다인들의 모습이 이상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임을 거부합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그들에게 '아브라함의 참된 자손'이 되라고 하십니다.
'온전한 믿음!'
'아브라함의 참된 자손'은 예수님 말씀처럼, '아브라함이 한 일을 따라 하는 사람들'입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처럼, '믿음이 삶으로 이어지는 의로움을 간직하는 사람들', 곧 '온전하게 믿는 사람들'입니다.
나의 믿음이 온전한 믿음인지, 참된 믿음인지는 '나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불편함과 고통 앞에서 드러나는 나의 모습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독서(다니3,14-20.91-92.95)는 모진 박해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온전한 믿음을 간직했던 '세 젊은이', 곧 바빌론 유배 때에 그곳으로 끌려간 '사드락(하난야)과 메삭(미사엘)과 아벳 느고(아자르야)의 믿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는 세 젊은이가 자신의 신을 섬기지 않고 자기가 세운 금 상에 절하지 않는다고 그들을 타오르는 불가마 속으로 던져 넣습니다. 이런 모진 박해 속에서도 세 젊은이의 믿음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천사들을 보내어 그들을 구해 내십니다.
'나의 믿음이 생각과 말과 행위로 믿는 온전한 믿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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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1bzXURMS4u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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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요한 8, 36)
봄꽃이
피어나고
봄꽃이 날리는
자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께
죄와 허물을
내어드리고
주님께서는
진리와 자유를
우리에게
주십니다.
진리의 길을
걷지 않고서는
자유로울 수 없는
우리들의 삶입니다.
참된 자유는
진리로 말미암아
자유롭게 되는
자유입니다.
진리가
만들어가는
자유의
힘찬 발걸음이
여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는
죄의 노예가
아니라
용서와 사랑의
참된
자유인입니다.
우리는
자유를
먹고 사는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우리의 삶 속으로
들어온 자유이며
우리가 누려야 할
참된 자유입니다.
진리와
자유이신
예수님께서는
죄로도
묶을 수 없는
구원과 해방을
당신의 자녀들인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함께하시는
예수님께서는
끝없는
자유의 길을
맑게
걸어가십니다.
예수님을 통해
자유가
보장된
삶을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온전한
모든 자유는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됩니다.
하늘이 열리고
복음이 선포되는
구원의
자유입니다.
우리의 자유는
우리의 생명입니다.
생명을
내어주시는
용서와
사랑입니다.
갇혀있고
묶여있는
우리를
풀어주시는
자유이신
하느님의 진리를
따르는 은총의
십자가입니다.
자유를 믿고
진리를
따릅니다.
진리와 자유는
온전한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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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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