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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이사야의 예언
1]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예수께서 인용하신 이사야의 예언은 사 6:9,10에 해당하는 70인역(LXX)의 번역을 옮긴 것이다. 이에 대하여는 다음 두 가지 사실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1) 이 문장은 이사야 본문에서는 문자 그대로 미래에 대한 직접적 예언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사야에게 선지자 소명을 주시는 중에 백성의 완악성(頑惡性)을 꾸짖는 말로 주신 간접적 예언이다. 예수는 이 말씀이 당시의 비유를 듣는 무리들의 심령 상태에도 잘 적용되었기 때문에 동질성(同質性)이란 측면에서, 즉 이사야의 말이 당시의 무리에게도 잘 적용된다는 측면에서 예언으로 보았던 것이다.
2) 이하 인용된 14,15절의 말씀은 70인역(LXX)의 번역을 옮긴 것으로서 문맥이 조금 불분명한 감(感)이 있다. 따라서 독자들은 이사야서의 해당 본문 자체를 염두에 두는 것이 좋을 듯하다. 이 말씀도 표면적으로만 살펴서 형식논리로만 생각한다면 백성이 악하기 전에 마치 하나님이 먼저 그들을 악하게 만드신 것처럼 오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기실(其實)은 스스로의 자유 의지(free will)에 따라 완악해진 인간을 하나님이 그대로 방치해 두시겠다는 구체적 의지를 강조 표명한 것이다. 즉 사태에 대한 당신의 주권적 작정의 측면을 강조한 것이다. 이는 11절에 인용된 바대로 하나님의 작정과 인간의 자유 의지란 심오한 문제를 깊이 생각하게 한다.
'이루었으니'는 헬라어 동사 '아나프레루타이'(*)의 시제는 현재 완료형이라기보다는 진행형으로 보아야 한다. 이렇게 될 때 이사야의 해당 본문이 예수 자신의 시대에까지 적용되고 있음으로 해서 예언적 본문이 된 것이라는 예수의 해석을 가능케 해주기 때문이다. 이 동사를 진행형으로 보면 현재의 우리들에게도 이 말씀은 계속 적용되고 있는 것으로서 일부 사람들이 복음 선교에 대하여 거부하고 있는 현상적 원인(13절)과 그렇게 된 궁극적 원인(14절)을 잘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이사야의 예언의 성취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이 마음의 완악함으로 하나님의 복음 진리를 깨닫지 못할 것을 예언하셨다. 하나님의 선택은 진리에 대한 사람의 관심과 이해와 믿음과 순종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버림을 받은 자들은 진리에 대해 관심이 없고 깨달음도, 믿음도, 순종심도 없다. 그들의 마음은 무지하고 완고할 뿐이다. 그러나 천국 복음을 깨닫고 믿는 자는 복되다.
옛부터 선지자들과 의인들이 보기를 원하였고 듣기를 원하였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그의 친 음성을 듣고 그 말씀을 깨닫고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복 받은 자들이다.
15. 백성들의 마음
1]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완악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퀴노'(*)는 살이 찌고 둔하여진 상태를 가리킨다. 따라서 생명력으로 자기 사상과 자기 의지에 제 스스로 살찐 자가 되어서 영적 감수성을 상실한 상태를 가리킨다. 인간이 자기(육체적 삶) 중심적일 때 필연적으로 하나님(영적 생명력)과의 관계는 단절, 상실되고 만다. 이것은 곧 허무와 절망의 제 1 보(步)이다.
2]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둔하고'란 말의 원뜻은 '눌러 내리다'(oppress), '짐을 지우다'(burden), '가리우다'(curtain)로서 가는귀가 먹거나 말귀를 못 알아듣는 것이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듣지 않으려고 하는 상태를 말한다.
3] 눈은 감았으니
눈을 '감다'로 번역된 '캄뮈오'(*)는 원래 '내리닫다'의 뜻으로서 눈에 밀랍이나 기름 등을 바름으로써 억지로 감기게 한다고 하는 의미가 있다. 고대 사회에서는 눈에 밀랍을 칠해 사물을 바라보지 못하도록 하는 형벌제도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다만 스스로 눈을 감아 진리 보는 것을 완강히 거부하는 자를 극적으로 표현하는 단어로 사용되었다.
4]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돌이켜(*, 에피스트려소신)는 하나님 보다는 죄 된 세상을 더 사랑하던 사람이 그 전존재를 하나님께로 복귀하는 행위라는 뜻이다. 즉 '회심' 혹은 '회개'(*, 메타노이아)와 같은 의미를 갖는다. '돌이킴'은 신앙생활로 들어가는
1) 제 1단계로서 자신의 죄에 대한 자각과
* 마 5:7 -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 고후 7:10 -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2) 제 2단계로서의 새 생활로 전반적인 변화로 나눠질 수 있다.
* 막 1:15 -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 눅 13:3,5 - 3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5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 행 2:38 -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성령의 선물을)로 받으리니
제 1단계의 자각은 인간 자신의 반성과 회개에 의해서만 가능하고, 제 2단계의 새로운 변화는 하나님께 '고침을 받게' 되기 전까지는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긴 하지만 선결 문제는 인간 스스로의 돌이킴(자각)이다.
* 눅 15:17 -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하나님께서 죄에 대한 자각조차 하지 않는 완악한 이스라엘로 하여금 자신의 길로 그대로 가도록 허락하심은 그들을 벌하시고자 결정하신 연고이다.
5]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하지나 않을까'라는 뜻의 미래 직설법 접속사 '메포테'(*)의 지배를 받아 '내가 고치다, 내가 낫게 하다'의 뜻인 '이아오마이'(*)가 미래형으로 변형되었다. 이 문장을 영어로 고치면 'lest ... and I should heal them'으로, 주절과 합쳐진 전체 문장의 주어는 그들(they)이 된다. 따라서 이사야 본문에서는 두려워하는 주체가 하나님 자신인 것과는 달리 본서에 인용된 이사야 예언은 백성들 스스로가 돌이키게 되고 하나님으로부터 고침을 받게 될 것에 대해 두려워하고 있다.
사람들은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고침을 받게 되지 않기 위하여 자신들의 눈을 감고 귀를 닫았다. 이는 유대인들이 예수로부터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하는 증거를 접하고서도 그를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은 행위를 말함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유대인에게, 나중에 이방인에게 전해야 하나, 유대인들이 이를 거부하고 멸망 받을 자로 자처한 행위를 말한다. 이것은 그들의 영원을 결정짓는 지상 최대의 실수였다.
* 행 13:46 -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버리고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16. 눈과 귀
1]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단순히 보고 듣는 육체적 행위가 아니라 보고 듣는 사건의 의미를 탐구하고 받아들이고자 하는 영적 의지와 감수성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문장을 '너희 눈은 보니 복이 있고 너희 귀는 들으니 복이 있다'로 보다 정확히 번역해 보면 15절의 닫힌 눈과 막힌 귀와 잘 대조가 됨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랑이나 천국의 복음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고 객관적으로 제시되나 받아들이는 자의 주관에 따라 극과 극의 결과를 가져온다. 이를 역(逆)으로 보면 천국 복음은 들으면 좋고 안 들으면 그만인 선택(option)의 문제가 아니다. 생과 사를 가늠하는 필수(obligation) 문제이다.
봄으로, 들음으로는 11절에 전제한 천국의 비밀이다. 비밀의 구체적 내용은 지금껏 구약에서는 예언으로만 존재하던 천국, 즉 메시야의 나라가 역사 안으로 들어 와서 우리의 삶의 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통치(주권)에 의하여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무리들(국민)을 규합하여 이 세상에서 새 하늘과 새 땅(영토)에 이르게 하기 위해 이미 시작됐다는 사실이다.
16절은 개인적 관점에서 지금 주어진 천국의 비밀을 깨닫는 자는 복이 있다는 사실만을 말한다. 17절은 구속사적 관점에서 볼 때 너희들은 이전 시대 사람들은 보고 또 들으려고 원해도 천국의 비밀을 알 수 없었다. 이것이 너희에게는 이미 주어져 있음을 새삼 강조하면서 예수 이후 시대 사람들의 구속사적 특권과 책임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2] 복이 있도다.
복이 있도다(*, 마카리오이)는 어떤 사람에게 일어난 행복을 찬양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성경적 용례를 살펴보면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를 듣는 자들, 이 메시지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들, 헛된 요구를 하지 않는 자들, 예수의 말씀과 행위를 깨닫는 자들이 각각 복이 있는 자들이라고 불렸다.
* 마 5:3 -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 눅 1:45 - 믿은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주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리라.
* 요 20:29 -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 요 13:17 -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17. 원하였지만
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진실로'라는 뜻의 헬라어 '아멘'(*)은 구약에서는 주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는 일, 즉 축복이나 저주 등의 수락(受諾)을 확증하는 것으로 사용하였다.
* 대상 16:36 -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영원부터 영원까지 송축할찌로다. 하매 모든 백성이 아멘 하고 여호와를 찬양하였더라.
또는 송영에 답하여 하나님께 대한 찬양을 입증하기 위하여 기도와 송영의 끝에 붙여서 사용하였다. 이는 하나님의 말과 행위,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찬양이 타당한 것일 뿐만 아니라 구속력이 있는 것임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께서는 이 말을 당신이 특별히 강조하고 싶으신 내용에 앞서 사용함으로써 이하 전개되는 말씀의 진정성(verity)과 진실성(truth)을 확증하면서 우리를 각성시키실 때 사용하셨다.
2]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
많은 선지자와 의인(righteous men)이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이뤘던 구약의 선지자들과 그 밖의 사람들, 즉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고대하던 사람들을 가리킨다. 메시야를 영접했던 사람들 또는 그 이후의 우리들이야말로 단지 예언을 통해 메시아를 대망했을 뿐이다.
* 히 11:13,39 - 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39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
믿음의 선진들이 열망했던 그 영광스런 특권의 실질적인 수혜자인 것이다(Homer A. Kent, Jr).
* 벧전 1:10-12 - 10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11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 하니라. 12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고한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그들이 듣지도, 보지도 못한 것이 그들의 자질이 우리보다 상대적으로 뒤졌거나, 듣고 보기를 싫어하였기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의하여 세워진 구약 시대와 신약 시대의 질적 차이 때문이다. 신약 시대의 우월성은 그 시대에 속한 우리들로 하여금 교만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더 큰 감사와 더 큰 책임을 요구한다. 그 이유는 우리가 원해서 신약 시대의 축복이 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많이 받은 자가 많은 책임을 지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구약과 신약의 질적 차이에 대한 언급은 11:11을 들 수 있다. 신약 시대의 우리는 구약의 이사야, 다니엘, 아브라함과 다윗도 보고 듣지 못한 천국의 위대한 비밀을 알게 된 축복을 받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18. 들으라
1] 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한글 개역 성경에는 번역이 안 된 '너희'(*, 휘메이스)란 단어가 특히 강조된 구문이다. 단순히 '이해하라'는 정도(De Wette)의 의미 이상으로 구약의 선지자들과 의인들이 갖기를 원하고 완악한 자들이 단호히 거부했던 영적인 진리를 알 특권이 '너희에게'까지 확대되었다는 측면에서 '너희는' 반드시 들어야만 한다는 강조적 구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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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설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