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은 언제나 온순해서
누구나 어울리지만
제 몫을 다투지 않아
언제부턴가
숲은 풀을 무서워합니다
건강하고 서늘한 풀을 보자고
바람도 시원하게
숲으로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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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祈禱)
김현철
제가 강물이 되어 흐르다
어느 소(沼)에 닿으면
잠시 한숨 돌릴 시간을 주소서
지나가는 바위 불러
그 녀석 넓은 등에 답(答)을 새겨 두고 가겠습니다
뒤에 오는 강물들이 시시덕거리면서
제 답(答)을 만져보고 쓸어보다가
저희들 답(答)으로 어지럽히더라도
“그 답(答)은 틀렸어! “라고 투덜대는 강물로
넘치게 하소서.
난장(亂場)을 치며 흘러가다
바다에 이르지 못하고
언덕에 닿아 사라진다 해도
목마른 강물들의 답(答)이 되게 하소서
부디 그런 답(答) 하나 갖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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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은“오래 묵혀졌다가 세상에 나온 아름다운 이야기" 맞지요?
김현철
좋은 음악 한번 들었다고 그 음악의 전부를 어찌 다 알겠습니까
어쩌다 좋은 사람 만나 말을 섞어 비벼본다고
한번에 그 사람 됨됨이 어찌 다 아시겠습니까
꽃구경 간다고 산에 오르다 어찌어찌 눈길 한 번 끌었다고
그 꽃이 가슴에 담아지는 것 아니잖아요
겨우내 눈 덮인 벌판을 달려본 배고픈 늑대가 되고서야 먹이가 절실하듯
꽃이 절실한 것은 겨우내 꽃고픈 허기 혹은 기다림이 있었음이니
오래 묵혀둔 것들이 없고서야 어찌 익어간다고 하겠습니까
그대 가슴 속에는 무엇을 묵혀두시는지요?
저는 보고 싶은 얼굴들이 스쳐 가면
아, 만나서 만져주고 손잡아주고 손등도 톡톡 두드려줘야 할
그 묵은 만남들
못다 준 사랑들이 빚으로 남아 있는
죽기 전에 한번은 만나서 용서를 빌어야할 인연들이 떠오르면
음악을 듣고 싶습니다
음악 한번 듣는다고 그 속의 묵은 이야기 어찌 다 읽어내겠습니까
음악에는 묵은 것들이 묵은 대로 있지만
뒤에 오는 삶 또한 우리와 결코 다르지 않으니
묵은 것이 낡은 것이 아님을 겸손히 기억합니다
모차르트의 힘은 무엇이었는지 참으로 궁금합니다
모차르트를 끌고 간 동력을 짐작은 하되 온전히 느끼지 못하지요
어느 아침 그의 천진한 영혼이 맑은 얼굴로 잠에서 깨어날 쯤
열린 창문으로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는데요,
눈 부시는 햇살에 눈 등을 비비며 일어나는데요,
눈에는 햇살마다 음표를 달고 쉼표를 달고 챙그랑 챙그랑 건들거리고
귀에는 멀리서 부는 나팔 소리가 점점 더 크고 또렷하게 다가와서
우리는 모차르트가 악상의 즉흥을 축복 받았다고 하지만,
모차르트의 묵은 삶 몇 가닥이
갈증과 고독에 지쳐 보낸 밤들이
어느 아침
찰랑거리며 춤추는 맑은 햇살을 맞아
오래 묵혀둔 소망처럼 그만 통제도 없이 와르르 쏟아져 나와
햇살에 부딪히고 바람에 흔들렸던 것은 아닌지
슬픔도 오래되면 힘이 된다던데
음악은“오래 묵혀졌다가 세상에 나온 아름다운 이야기" 맞지요?
묵은 이야기들에 반해서 아득히 음악의 낭떠러지에 떨어집니다
살아 퍼덕거리는 이야기를 듣고 싶은 날에는
술병을 들고 거리를 나섰다가 넘어지고 깨어지긴 하지만
이것들도 언젠가 묵혀지고 묵혀져 아픔은 사라지고 아름다움만 남았다가
햇살 맑은 어느 날 양지바른 들판에 할미꽃으로 피면
바람들이 우르르 달려와 묵은 전설 몇 개 이 마을 저 마을로 전하겠지요
그대는 어떤 것들을 묵혀두고 계시는지요?
그대의 아름다움이 익어가는 장독대 위로 기분 좋은 햇살 펑펑 쏟아지시기 바랍니다.
첫댓글 좋은 글들을 다시 한번 감상합니다.^^
저두 다시 감상해봅니다. 음악과 좋은 글이 없다면 어떻게 이 여린 마음을 지탱하고 살아갈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