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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반으로 인도하는 팔정도
(수밧다 경에 대한 법문)
마하시 사야도 법문
우 틴 팟 영역
오원탁 (향원) 옮김
여기 모가웅 아리야와사 담마용에서의 오늘 법문은 열반으로 인도하는 팔정도에 대한 것입니다. 이것은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후에 바로 다섯 명의 비구들에게 초전법륜경으로 설법하신 것입니다. 그 후에 부처님께서는 45년 동안 이 법을 계속 가르치셨습니다. 심지어는 대반열반에 드는 날 밤에도 유랑하는 고행자 수밧다에게 팔정도를 설명하셨습니다. 그는 부처님 생존 시에 아라한이 된 마지막 제자였으며, 이 이야기는 수밧다경이라고 합니다.
1. 수밧다경의 배경
45회의 안거를 마친 부처님께서는, 일전에 마라(Māra)가 요구한 대로 일생을 마감할 때가 되었다고 결정하셨습니다. 그래서 마하 삭까라이(mahā sakkarāi) 148년, 까손(Kason) 축제기간 중의 보름날 빠와(Pāvā)의 금세공인인 쭌다(Cunda)가 공양 올린 음식을 드시고, 설사병에 걸리셨습니다.
몹시 허약한 몸이었지만, 부처님께서는 빠와에서 꾸시나가라(Kusināgara)까지 약 6마일 정도를 걸어가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돌아가시기 전에 마지막 두 가지 법문을 하시려고 결심하셨기에 이러한 엄청난 노력을 하신 것입니다.
얼마 전에 아난다가 부처님께서 대반열반에 드는 것을 연기해 주실 것을 요청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사건으로 인하여 부처님께서는 두 가지를 마음속에 새기게 되었습니다. 하나는 마하수닷사나 경을 법문하시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수밧다에게 팔정도를 설명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수밧다에게 법문하시기만 하면, 그는 몇 시간 내로 깨달아서 아라한의 지위를 얻게 되어 있었습니다. 부처님께서 꾸시나가라에 가시지 않고 빠와에서 열반하셨다면, 수밧다는 법의 빛을 볼 기회가 없었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마지막 순간을 보내려고 의도하신 장소로 여행하시는 숭고한 노력을 하신 것은, 유랑하는 고행자에 대한 위대한 연민 때문이었습니다.
아무리 제자를 측은하게 여긴다고 해도, 중병을 앓고 있는 노스님이 설법하기 위하여 몇 마일을 걷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가장 무더운 계절에 아난다와 쭌다의 도움을 받아서, 25군데에서 25번 쉬시면서 그 길을 걸어가시는 어려운 일을 하시었습니다.
말라(Mallā) 왕의 영토에 있는 사라나무 정원에 도착한 다음, 두 그루의 작은 사라나무 사이에 침상이 마련되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머리를 북쪽으로 하시고 오른 쪽 옆구리를 바닥에 대고 이 침상에서 쉬셨습니다.
그때 수밧다는 우연히 꾸시나가라에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그 날 밤 부처님께서 반열반에 들어가신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 마음을 괴롭히는 의심을 없애줄 분은 부처님뿐이라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수밧다는 평범한 고행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부처님의 상수제자인 사리불 존자나 목련 존자와 같은 고귀한 신분이었으며, 백만장자라는 뜻인 마하살라(mahāsala) 계급 출신이었습니다. 그는 단순히 통상적인 고행자가 아니어서, 속세의 모든 재산을 포기하고 적절한 옷을 입고 진리를 찾아서 방랑하였습니다. 그를 우빠까(Upaka)의 아들인 동시에, 사냥꾼의 딸 짜빠의 남편인 방탕한 수밧다와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미얀마의 전설에 의하면 외도인 우빠까는 고귀한 신분이 아니었습니다.
수밧다는 자신의 의문점을 해결하기 위하여 그 당시 번성했던 뿌라나깟사빠(Purānakassapa) 등의 외도 지도자들에게 질문했으나, 만족스런 대답을 듣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부처님께는 여쭈어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뿌라나깟사빠 같은 노장들도 설명할 수 없는 것을 그들보다 젊은 부처님이 대답할 리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주석서에 나와 있는 내용입니다.
그때 수밧다는, 부처님께서 지금 이 자리에서 열반에 드신다면, 진리를 물어볼 수 있는 모든 기회를 잃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하고 몹시 불안해졌을 것입니다. 아마도 이 특이한 순간에 그의 마음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드릴 자세로 바뀌었을 것입니다. 그는 부처님의 배려로 법을 얻을 마지막 제자로 운명 지어져 있었습니다.
그가 마지막 제자가 된 것은, 그가 어느 전생에서 마지막 순간에 마지막으로 수확한 곡식을 공양물로 바쳤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고따마 부처님 시절에 꼰단냐(Kondañña)가 될 운명이었던 그의 형은, 제일 처음에 수확한 곡식을 공양물로 바쳤습니다.
2. 부처님 뵙기를 청함
한밤중에 수밧다는 서둘러 부처님께로 왔습니다. 그러나 스승을 면담하려면 우선 아난다의 허가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는 아난다에게 이렇게 간청했습니다.
“아난다여, 부처님이 영겁 동안 단 한 번만 출현하신다는 것은 상식입니다. 나는 고따마가 오늘 밤 늦게 반열반에 든다는 소식을 지금 막 들었습니다. 나는 풀어야 할 의심이 있는데 그가 이를 해결해 줄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니 만나게 해 주기 바랍니다.”
아난다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고행자들은 대개 부처님의 가르침을 반대한다. 수밧다와의 논쟁은 스승을 기진맥진하게 할 것이다.’
그래서 아난다는 수밧다에게 죽음을 맞이하고 있는 세존을 질문으로 괴롭히지 말라고 했습니다. 수밧다는 세 번 요청했지만 세 번 다 거절당했습니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모두 듣고 계시던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난다야, 수밧다를 허락하지 않는 것은 적절치 않으니 나를 만나게 하여라. 그는 물어볼 것이 있는 것이지, 나를 괴롭히려는 것이 아니다. 내가 대답하면 그는 즉시 깨달을 것이다.”
아난다의 허락을 받은 수밧다는 의례적인 말로 세존에게 인사하고, 부처님께서 쉬고 계신 침상을 기준으로 하여, 여섯 가지 잘못을 범하지 않는 적절한 장소에 앉았습니다. 경전에 의하면, 이는 너무 가깝지도 않고 멀지도 않으며, 바람이 불어오는 쪽도 아니고 바람이 불어가는 쪽도 아니며, 마주보고 앉는 것도 아니고 등을 돌리고 앉는 것도 아닌 장소입니다.
북쪽을 향하고 있는 침상의 머리 방향에는 작은 사라나무가 한 그루 있었고, 발 방향에도 또 하나의 작은 사라나무가 있었습니다. 부처님께서 오른 쪽 옆구리를 바닥에 대고 누워 계셨으므로 얼굴은 서쪽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수밧다는 발에서 멀지 않은 곳에 앉아서 얼굴을 침상의 머리 쪽을 향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때까지는 법을 묻는 고행자가 스승에 대해 예의를 갖추었다는 말이 경전에 없습니다. 이는 비록 부처님께서 의문을 풀어줄 능력을 갖고 있는 것은 믿게 되었지만, 세존에 대한 수밧다의 신뢰가 아직은 자신이 믿는 잘못된 사상에 대한 것만큼 강하지 않았다는 것을 나타낸다고 하겠습니다.
3. 수밧다의 질문
그래서 수밧다는 경의를 표하지 않고 부처님을 평범한 고따마로 대하고 자기가 알고 싶어 하는 것을 물었습니다.
“(뿌라나깟사빠 등의 고행자에 의해 만들어진) 여러 가지 신흥종교의 많은 종파들이 널리 퍼져 있고 제자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들의 사상은 태어나고 죽는 끊임없는 윤회를 주장하는 것도 있고, 그 반대도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자기들이 안다고 장담하는 것을 압니까 아니면 모릅니까?”
그가 종파의 지도자라고 말한 것은, 뿌라나깟사빠, 막칼리고살라(Makkhaligosāla), 아지따(Ajita), 빠꾸다(Pakudha), 산자야(Sañjaya), 니간타 나따뿟따(Nigaṇtha Nātaputta)를 염두에 둔 것입니다. 이들 육사외도(六師外道)들은 존재의 모든 현상들의 과거 현재 미래를 안다고 장담하고 있었습니다. 수밧다는 그들이 정말로 아는지 모르는지, 아니면 그들 중 일부는 아는지에 대해 의심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가 그런 의심을 갖는 것은 당연합니다. 대부분의 세상 사람들은 종교적 신조들을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 혹은 스승으로부터 제자에게 전통적으로 전해왔기 때문에 아무런 의심 없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입니다. 그들은 그것들이 타당한지 알아보지도 않고 맹목적으로 믿든가 아니면 그 반대로 추론해 보고 믿지 않습니다.
수밧다는 심사숙고하는 기질을 가지고 있어서 소문만 듣고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만약에 육사외도들이 진실로 진리를 안다면, 진리는 하나이어야만 합니다. 진리가 여러 가지일 수는 없습니다.
진리는 하나이며 나눌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오늘날 부처님 법은 중도 즉 팔정도라는 단 하나의 기본이 있을 뿐입니다. 그것은 바로 계를 지키고, 집중을 향상시켜, 심오한 지혜와 사성제를 성취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법을 실제로 수행하지 않고 불교의 목표와 목적이 달성된다고 설명한다면, 우리는 즉시 그가 정상 궤도에서 벗어났음을 알아야 합니다.
수밧다는, 육사외도들이 주장하는 노선의 지식들이 저마다 각기 다른 것은, 그들이 기본을 모르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옛 스승들을 존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깨달은 분에게 세 가지 질문을 제시한 것입니다.
4. 부처님의 답변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수밧다여, 그대는 육사외도들이 진정으로 아는가 모르는가, 혹은 일부는 알고 일부는 모르는가를 묻고 있다. 그러나 이 질문은 옆으로 치워놓자. 내가 그대에게 유익한 법을 알려 주겠다. 잘 들어라.”
부처님께서는 수밧다의 질문에 직접적으로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육사외도들이 안다고 장담하는 것을 그들이 모른다는 사실을 이야기하면 그에게 좋을 것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게다가 그러한 편협한 사람들에게는 이와 같은 평범한 말이 단순히 질책으로만 여겨질 수 있고, 불선업이 되고 아무 소용이 없게 될 것입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잘못을 지적해 주면 잘못한 사람이 오히려 화를 냅니다. 그러므로 우리 승려들은 말할 때 아주 조심해야 합니다. 바른 법을 실천하는데 거슬리는 행동을 하지 않는 한, 그들의 잘못을 너그럽게 눈감아 주기도 해야 합니다.
그러나 남에게 피해를 주었을 때는 객관적인 입장에서 법의 심오함을 설명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들은 우리들이 사물의 이치도 모르면서 그들을 압도하려 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심지어 우리들을 나쁜 사람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세존께서는 의도적으로 수밧다의 날카로운 질문을 젖혀 두고 그에게 도움이 될 것만 법문하셨습니다.
이제 수밧다는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일 태세로 부처님을 “존자여(Bhante)”라고 불렀습니다. 어떤 사람이 상대방의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자신의 교리를 설명하려고 하는 경우를 상상해 보십시오. 질문한 사람은 틀림없이 적대감을 나타낼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수밧다는 세존의 말씀을 받아들여 “그렇게 하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마음속에서 믿음이 우러나왔음을 나타냅니다.
5. 번뇌는 성자의 도를 통해서만 근절된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수밧다에게 이렇게 법문하셨습니다.
“어떤 종교의 교리(法. dhamma)와 계율(律. vinaya)에 팔정도가 빠져 있다면, 그 종교를 따르고 실천해도 점차적으로 청정으로 인도하는 흐름에 들어 첫 번째 성자인 수다원이 될 수 없고, 두 번째 성자인 사다함이 될 수 없고, 이 세상에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아나함이 되는 세 번째 성자도 될 수 없다. 나아가서 최종적으로 모든 번뇌를 극복한 아라한이 될 수 없다.”
이것은 주석서에서 인용한 것이 아니라 부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깊이 명심해야 합니다. 간단히 말해서, 팔정도가 없는 가르침으로는, 위에서 말한 해탈의 네 가지 단계를 통과한 네 가지 범주의 성자를 배출해 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탐욕 성냄 어리석음에서 비롯되는 14가지 불선한 마음부수로 구성되어 있는 번뇌를 뿌리 뽑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나는, 재가불자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종교 혹은 종교의 가르침이라는 의미로 교리와 계율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팔정도가 없다면 어떤 종교적 가르침이라도 결코 수다원이나 사다함이나 아나함이나 아라한을 배출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이 불교의 자명한 이치입니다. 불교 이외의 종교에는 성자의 도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다음 초전법륜경을 설법하시기 전까지는, 선정의 제7단계를 획득한 알라라(Alāra)와 8단계를 획득한 우다까(Udaka)조차 이 성자의 도를 몰랐습니다. 모르기 때문에 남에게 가르쳐 줄 수도 없었습니다. 이런 지식이 없기 때문에 기본적인 수다원 단계조차 체험할 수 없었습니다.
요즈음은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것과 반대로 말하는 사람들도 생겼습니다. 그들은 누구든지 일단 지식을 획득하기만 하면 법을 실천할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런 말은 실질적으로 법의 실천을 거부하는 것이며, 팔정도를 배제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팔정도는 지속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팔정도의 본성을 통찰하는 힘을 배양하는 데 도움이 되는 바베땁바라고 하는 계율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노력하지 않고 저절로 되는 것은 없습니다.
심지어는 노력 자체가 고통이니 거기에 빠지면 안 된다는 틀린 사상을 주장하는 종파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고생스럽게 팔정도에 따라서 수행하고 계율을 실천하려고 하겠습니까? 아무도 이 법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법의 빛이 수행자의 내부에서 우러나오겠습니까? 성자의 도의 본성에 대한 통찰 없이 어떻게 번뇌를 제거하고 열반이라는 평화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위빳사나 수행 방식으로 사띠하고 관찰해야만 팔정도의 교리를 알 수 있습니다. 성자의 도의 교리와 수행을 부정하는 어떤 주장도 불교의 가르침을 방해하거나 파괴하는 것입니다. 불교가 활성화되지 않는 이면에는 성자의 도가 없기 때문이며, 성자의 도가 없는 곳에는 열반으로 가는 길을 가로막는 번뇌의 근절이 없습니다.
수밧다에게 이 법문을 하시는 부처님에게는 사견(邪見, personal illusions)이 없었습니다. 부처님은 육사외도들의 종교적 이데올로기에 대해서나, 당시의 주류였던 브라만의 종교적 이데올로기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으셨습니다. 단지 팔정도가 없는 곳에는 평화로 가는 길에 장애물뿐이라는 것을 강조하시기만 하셨습니다.
여기서 수밧다는 즉각 깨달았습니다. 육사외도들이 팔정도의 교리에 의한 방법과 수행을 모르기 때문에, 그들이 장담하는 바와 달리 모든 것을 알지 못함을 알았기에 수밧다가 깨달은 것입니다. 육사외도들과 브라만의 가르침에는 성자의 도가 없었습니다. 그들의 가르침으로 평화로 가는 길을 방해하는 번뇌를 제거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6. 팔정도를 실천
팔정도를 실천한다는 것은 계를 지키고 집중을 해서 지혜가 생기도록 하는 것입니다. 수행자가 충실하게 계를 지킨다면, 세 가지 계(戒)의 도(sīla magga) 즉 바른 말, 바른 행동, 바른 생계를 준수하고 있는 것입니다. 수행자가 알아차리는 수행을 한다면, 세 가지 정(定)의 도(samādhi magga)의 요구 사항 즉 바른 노력, 바른 사띠, 바른 집중이 달성될 것입니다. 통찰지에 대한 수행은 위빳사나 수행인데 바른 견해와 바른 생각을 촉진합니다. 이 두 가지 특성은 혜(慧)의 도(paññā magga)의 구성요소입니다.
계정혜는 수행자를 성자의 도로 인도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르침에 대해 확신한다면 계를 지킬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는 자신의 신봉자들에게 단순하고 쉬운 방법을 창안했다는 종교 지도자에 의해서 제창되곤 합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부처님 시절에는 지성적이고 뛰어난 인물들이, 부처님의 법문을 듣는 순간 법의 빛을 보는 사례가 있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물론 간단한 설명만 들으면 ‘즉각 사성제의 의미를 파악하는 사람’(ugghaṭitaññū)이나, ‘좀 더 상세한 설명을 듣고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사람’(vipañcitaññū) 같은 천재도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부처님 시대에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고도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는 동안 지혜의 빛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지혜를 깨닫기 위해 배우지 않으면 안 되는 범부(보통 사람)인 경우에는, 부처님이라도 즉각 법의 빛을 보게 할 수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다음 게송이 경각심을 불러일으킵니다.
잠재 번뇌의 뿌리를 모두 뽑기 위해서는
스스로 힘써 노력하여야 한다.
여래는 다만 길을 보여줄 뿐.
너희들 스스로 사마타와 위빳사나 수행을 해야 한다.
그래야만 선업을 파괴하는
번뇌의 굴레로부터 해방되리라.
(법구경 276)
그렇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길만 가르쳐 주실 뿐이어서, 도의 이러저러한 단계에 도달하려면 이렇게 저렇게 해야 한다고 명령하실 수 없습니다. 제자들은 사마타 수행을 하여 집중력(삼매)을 향상시키고, 위빳사나의 대상인 다섯 가지 집착의 무더기[五取蘊]를 관찰해서, 위빳사나 지혜를 생기게 하고 점점 더 높은 단계의 지혜를 생기게 해야 합니다.
7. 스스로 노력하라
부처님께서 맨 처음으로 초전법륜경을 다섯 명의 비구들에게 설법하셨을 때, 다섯 사람 중의 네 명, 즉 왑빠(Vappa), 밧디야(Bhaddiya), 마하나마(Mahānama)와 앗사지(Assaji)는, 법이 너무나 심오하여 설법하는 동안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부처님의 지도하에 엄청난 노력을 계속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들은 각각 순서대로 하루, 이틀, 사흘, 나흘 동안 치열한 수행을 한 다음에 가서야 비로소 수다원이 되었습니다.
8. 번뇌로부터의 해방
부처님의 가르침 안에서만 번뇌의 굴레로부터 해방되는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계속해서 수밧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수밧다여, 내가 정해 놓은 법(교리)과 계율 아래에서만 여덟 가지 요소를 가진 거룩한 도(팔정도)가 있다. 이 교단에서만 첫 번째 성자인 수다원을 만날 수 있고, 두 번째 성자인 사다함을, 세 번째 성자인 아나함을, 그리고 네 번째 성자인 아라한을 만날 수 있다. 내 가르침이 없는 곳에는 안다고 장담하는 것을 실제로 알고, 잠재되어 있는 번뇌를 근절할 수 있는 사문이 있을 수 없다.”
지금까지의 설명을 요약합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으시고 나서 팔정도를 설명하시기 전에는, 알라라나 우다까나 범부인 범천들도 도의 지혜를 얻지 못했습니다. 법의 바퀴가 처음으로 굴러가기 시작했을 때, 일억 팔천만 명의 범천(brahmā)들과 수많은 천신(deva)들이 지혜를 얻어서 번뇌를 근절하였습니다.
인간 가운데는 꼰단냐만이 맨 처음으로 수다원이라는 영적으로 계발된 상태를 획득했지만, 다섯 명 가운데 나머지 네 명은 나중에 번뇌를 없앤 사문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부처님 이전에는 아무도 팔정도를 가르쳐 주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도 번뇌를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불교가 번성하고 있는 요즈음에도 팔정도를 모르거나 회의적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들 중에는 수다원이 있을 수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불교의 교단이 아닌 곳에는 사문이 있을 수 없다는 점을 수밧다에게 강조하셨습니다.
주석서는 그러한 사문을 12가지로 제시하고 이를 세 가지 부문으로 나누었습니다. 첫 번째 부문에는 위빳사나 수행을 이미 충분히 해서 성자의 도를 얻기 위하여 열심히 노력하는 아랏다위빠사까라고 불리는 네 종류의 위빳사나 수행자가 있습니다. 두 번째 부문에는 도의 지혜(magga-ñāṇa)를 얻은 성자 네 종류가 있습니다. 세 번째 부문은 과의 지혜(phala-ñāṇa)를 얻은 성자 네 종류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열심히 수행을 하는 아랏다위빠사까를 주목해서 봐야 합니다. 그에게는 언젠가 생멸의 지혜가 생길 것입니다. 이 사실로부터 판단해 볼 때, 도의 성취를 열망하는 수행자는, 첫 번째인 수다원도를 획득하기 위하여 위빳사나 수행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수다원도를 체험하려는 수행자는 무상, 고, 무아라는 삼법인(三法印)을 관찰해야합니다. 관찰해 감에 따라, 그는 지금 일어나고 있고, 지금 사라지고 있는 모든 현상들의 흐름에 자신의 주의를 계속 보낼 것입니다. 마음이 그렇게 변화하는 현상에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번뇌가 그의 마음을 괴롭힐 기회가 없을 것입니다. 사실상 번뇌는 모두 제거될 것입니다.
이런 사람을 사문라고 합니다. 불교의 영역을 벗어나면, 위빳사나 수행을 모르기 때문에 사문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불교도라고 하면서 불교란 정신과 물질에 관한 것이며, 무상과 불만족과 실체가 없다는 것에 관한 것이지 위빳사나 수행을 할 필요가 없다는 종파에 속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여덟 가지 거룩한 성자는 말할 것도 없고, 사문의 계보도 끊어지게 되는 결과가 됩니다.
9. 가르침이 오래 지속되게 하는 방법
번뇌를 근절시킨 진정한 사문은 불교 안에서만 존재하며, 불교가 쇠퇴하게 된 이면에는 사문의 계보가 단절되어 있음을 보이신 다음, 부처님께서는 수밧다를 깨우쳐 주시기 위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계속 존속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을 말씀하십니다.
“수밧다여, 이 교단의 법과 그것을 보완하는 팔정도 그리고 그것을 실천하는 사문들이 오랫동안 유지되게 하는 방법을 알려주겠다. 내가 열거한 12가지 종류의 비구들이 잘 살아간다면, 아라한을 포함한 진정한 사문의 계보가 단절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나는 주석서의 주해에 따라서 12가지의 사문에 속한다는 의미로 비구라는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12가지는 네 가지 위빳사나 수행자와 여덟 가지 거룩한 성자들을 말합니다.
그런데 ‘잘 산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비구들이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법에 푹 빠져서 산다는 의미일까요? 천만에 말씀입니다! 그들이 편안한 생활을 한다면 아라한의 계보는 이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팔정도가 보급될 때에만 성자들이 계속 출현하고 아라한의 계보가 끊어지지 않게 됩니다. 이에 대해서 주석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사문이 ‘잘 산다’는 말은, 성자의 첫 번째 도를 획득한 수다원이 자신이 획득한 지혜를 다른 사람들에게 보급시켜서 그들도 자신과 같은 수다원이 되도록 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 해설은 명쾌합니다. 수다원은 자신이 얻은 법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이 관심을 갖게 하고 그들에게 팔정도를 잘 실천하는 방법을 가르칠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는 위빳사나 수행을 실천하도록 다른 사람들을 납득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노력의 결과로, 어떤 수행자가 성자의 도를 획득하여 수다원이 된 다음에, 계속해서 같은 방식으로 열심히 수행하여 더 높은 수준인 사다함과 아나함과 아라한의 지위에 도달한다면, 후대에까지 아라한이 계승될 것입니다.
‘잘 산다’는 말의 이런 취지가 사다함 등에도 적용된다는 것을 되풀이하여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요. 새로운 아라한들이 계속해서 출현하는 한, 그들의 계보는 결코 단절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주석서에 처음 네 가지 성자의 도를 기반으로 해서 어떻게 점점 더 많은 수다원이 생겨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10. 수다원을 성취하기 위한 위빳사나 수행
계속해서 주석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또한 수다원의 지위를 얻기 위하여 힘써 노력해서 생멸의 지혜를 획득한 위빳사나 수행자는, 자신이 탁월하게 수행하는 모습을 실제로 보여주면서 설명하여,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수다원의 도를 얻기 위해 따라하게 할 수 있다. 그렇게 한다면 그는 ‘잘 산다’는 말을 들을 것이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도를 얻기 위해 힘써 노력하여 생멸의 지혜를 얻은 위빳사나 수행자가 진정한 아랏다위빠사까입니다.
정신과 물질의 현상들을 계속해서 지켜봐서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 조건을 파악하는 지혜나, 명상의 지혜를 얻은 수행자는, 생멸의 지혜를 얻을 때까지는 진정한 아랏다위빠사까라고 할 수 없습니다.
수행자가 이 지혜를 얻은 다음에만, 경험이 풍부해져서 다른 사람들이 도를 계발하도록 하는 촉진제 역할을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방법을 알기만 하면 충분하지 수행을 꼭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엉뚱한 주장에 대하여, 이 아랏다위빠사까가 각별한 관심을 갖고 대응하기를 바랍니다. 그 견해는 전적으로 틀립니다. 성자의 네 가지 범주는 팔정도에 대해서 수행을 한 다음에만 성자의 도 안에서 확립됩니다. 만약 수행자가 지속적인 수행에 의해서, 대상인 물질과 그 대상을 아는 마음인 정신이, 소멸되는 것을 아는 단계인 소멸의 지혜에 도달한다면, 꼭 필요한 것을 성취했기에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위빳사나 수행자가 생멸의 지혜에 도달하면 수행에 능숙하게 된 것이고, 상카라에 대한 평온의 지혜에 도달한다면 수행에 완전히 숙달된 것입니다. 그런 단계에 도달한 수행자들이 위빳사나 수행 방법을 자기와 친한 사람들에게 알려 줄 것을 강력히 권합니다.
권유에 의해서 그의 친구와 이웃 사람들이 생멸의 지혜에 도달한다면, 성자의 도를 얻으려고 열심히 노력하는 아랏다위빠사까가 된 것입니다. 영감을 얻게 되면, 아라한을 체험할 때까지 계속해서 노력할 것입니다. 그러면 새로운 세대의 아라한이 출현하게 됩니다.
우리 비구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 보완물인 아라한과 함께 유지하려는 관점에서, 수행이라는 과업을 떠맡고 있습니다. 나는 진정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이 오래 지속되기를 기원하는 사람들이, 우리의 벤처 사업을 도와줄 것을 강력히 호소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어떤 사람들은 우리들이 없는 자리에서 비우호적으로 비난하며 우리의 노력에 찬물을 끼얹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는 실로 유감스런 일입니다.
과거의 부처님들 시대에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오랫동안 유지하려는 비슷한 노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법이 더 이상 설명되지 않고 보급되지 않아서, 결과적으로 실천될 수 없었던 시기도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 하에서 세상 사람들은 팔정도를 완전히 잊어버렸으며, 성자의 도와 그것을 얻는 방법을 알게 되는 것은 새로운 부처님이 출현하였을 때입니다. 수행자가 성자의 도의 부흥을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는 한, 진정한 사문은 계속해서 활약하게 될 것입니다.
11. 팔정도를 향상시키는 법
생략
정리합니다. 지금까지의 설명은, 위빳사나 수행을 통하여 열반을 체험함에 의해 자신을 번뇌로부터 해방시키고, 성스러운 사문인 아라한이 되는 방법에 관한 것입니다.
자, 이제 수밧다의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부처님께서는 대반열반의 날 저녁에, 이제는 경건한 마음으로 열심히 귀를 기울이는 고행자를 불쌍히 여기시어, 마지막 법문을 하셨습니다.
23. 수밧다에의 마지막 법문
부처님께서는 수밧다에게 마지막으로 이렇게 법문하셨습니다.
“수밧다여, 스물아홉의 나이에 나는 완전한 깨달음을 찾아 출가하였고, 그 이래 오십여 년이 흘렀다. 내가 그동안 가르친 법과 율을 떠나서는 팔정도의 일부로서 위빳사나 수행을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거기에는 성자의 일단계인 수다원이 된 사문이 없었고, 이단계인 사다함이 된 사문이 없었고, 삼단계인 아나함이 된 사문이 없었고, 사단계인 아라한이 된 사문이 없었다. 내 가르침의 범위 밖에서는 네 가지 범주에 속하는 열두 가지 종류의 사문이 없기 때문에, 마음의 번뇌로부터 해방되고 자신들이 진정으로 안다고 주장하는 것을 아는 사문이 없다. 수밧다여, 팔정도가 있는 한 진정한 사문의 계보는 영원히 끊어지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만약 열두 가지 종류의 사문인 비구가 진정으로 잘 산다면 진정한 아라한이 단절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 고별사에서 현저하게 드러나는 것은, 다른 어떤 종교나 이데올로기에서 위빳사나 수행을 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위빳사나가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조심하십시오. 그러한 말은 위빳사나 수행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만약 위빳사나 수행이 빠져 있으면 부처님의 가르침이 일반적인 다른 가르침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24. 수밧다의 자기 성찰
그러자 수밧다는 생각했습니다.
‘나의 스승이나 스승의 스승이 가르친 교리 속에는 위빳사나 수행에 대한 가르침이 없었다. 그러므로 고행자들 중에는 마음의 번뇌라는 덫으로부터 해방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들 중에는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감촉하거나, 생각하고, 무상, 고, 무아(삼법인)를 관찰하는 등의 조건 지어진 현상(상카라, 행)을 주시하는 수행자가 없었다. 위빳사나 도라는 예비적인 길을 가는 사람도 없었다. 그러니 어찌 번뇌를 없애고 성자의 도에 도착한 진정한 사문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나는 고행주의를 포기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들기로 한다.’
그렇게 생각한 그는 부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세존이시여, 세존의 말씀은 저를 감동시켰습니다. 세존께서는 숨겨져 있던 것을 낱낱이 설명해 주셨으며, 길을 잃은 자에게 길을 가리켜 주셨으며, 등불로 어둠을 밝혀 주셨습니다. 여러 가지 법문으로 법의 빛을 비추시어 제가 보도록 해 주셨습니다. 세존의 가르침을 들은 저는 부처님과 법과 승가를 피난처로 삼겠습니다(三歸依). 세존의 곁으로 출가하고자 하오니 구족계(具足戒)를 받도록 허락하여 주십시오.”
25. 부처님께서 계를 주시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수밧다여, 나의 가르침이 아닌 다른 종파에 속했던 사람은 시험 기간을 거치는 것이 관례다. 나의 법과 율을 받아들여 출가하고자 하는 사람은 4개월 동안 삼보에 귀의하고 계를 지키는 것을 전제 조건으로 한다. 그 다음에 장로들이 만족하면 계를 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전제 조건을 적용해야 하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를 안다.”
그러자 수밧다는 부처님 앞으로 다가와서, ‘다른 사람들은 4개월만 하더라도, 필요하다면 저는 4년이라도 신뢰 시험을 받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시험기간이 필요 없다는 것을 아시고, 아난다에게 즉시 계를 주기 위한 준비를 시작하라고 하셨습니다.
아난다는 수밧다를 데리고 가서 삭발을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몸의 32부분 중의 처음 다섯 가지의 더러움에 대한 사띠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수밧다는 황색 가사를 입고 부처님과 법과 승가를 피난처로 삼겠다고 삼귀의를 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는 그날 바로 사미가 되었습니다.
그때는 까손 축제 기간 중의 보름날 한밤중이었습니다. 아난다는 행자를 세존께 데리고 갔고, 세존께서는 구족계를 주셨습니다. 주석서에, 부처님께서 그를 “오너라. 비구여!”(Ehi Bhikkhu)”라고 말로 부름에 의해 비구가 되었다고 기재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렇게 승가에 들어온 승려는 머리를 깎을 필요도 없고 황색 가사를 입을 필요도 없으며, 삼보에 귀의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부처님께서 예비 승려에게 “오너라. 비구여!”라고 말씀하시면, 삭발이나 황색 가사 입기와 승려가 갖추어야 할 번잡한 절차를 모두 갖추지 않고도 승려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수밧다는 정식 절차를 밟아서 수계한 셈입니다.
26. 수밧다가 수행주제로 수행
그리고는 부처님께서 수행주제를 주셨습니다. 초기의 주석서에는 수행하라고 어떤 수행주제를 주었는지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그러나 후에 만들어진 경전에는 위빳사나 수행주제에 대한 언급이 있고, 수밧다가 위빳사나 수행에 몰두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전에는 부처님의 말씀을 들은 적이 없다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는 이제 겨우, 부처님께서 반열반에 드시기 직전에 부처님의 법문을 들었습니다.
이런 온갖 약점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존께서 수밧다에게 승려가 되자마자 수행하라고 지시하셨습니다. 연기의 법칙에 정통하기 전에는 수행을 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그런 주장은 법에 따라서 수행하려고 마음먹은 열성적인 사람의 사기를 떨어뜨릴 수 있습니다. 수밧다가 비범하기 때문에 연기의 법칙을 배울 필요가 없다는 주장은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만약 이 주장이 맞는다면 비범하기는 마찬가지인 찬다의 경우는 어떻게 될까요? 그는 연기의 법칙을 배우지 않았고, 자부심이 강했기 때문에 비범함에도 불구하고 법의 빛을 볼 수 없었습니다. 세속 생활에 대한 집착이 강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인과의 법칙을 깨닫는 것이 아주 어렵지는 않을 것입니다.
일단 이 인과의 법칙에 확신을 갖게 되고 조건 지어진 것들이 일어날 때 주시하려고 노력하면, 스스로 인과의 법칙이 작용하고 있음을 깨달을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초전법륜경을 설법할 때 설명했습니다.
부처님으로부터 수행주제를 받은 수밧다는 그것을 주시하면서 수행하기에 알맞은 곳으로 천천히 걸어갔습니다. 그 당시에는 부처님의 제자가 너무 많아서 승려가 없는 조용한 곳을 찾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적절한 곳이라는 것은 승려가 너무 많지 않은 곳을 의미합니다. 그런 장소를 찾아가서,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왔다 갔다 하면서 수행했습니다.
수행하는 동안 걸었기 때문에 그의 수행은 사마타 수행이 아닙니다. 그가 들이쉬고 내쉬는 호흡을 관찰하거나, 아니면 몸의 32가지 더러움을 관찰하는 수행을 했었다면 정지한 상태에서 움직이지 말고 수행했어야 합니다. 까시나 수행에서는 개념화된 원형 이미지에 수행자의 마음을 집중해야 합니다. 부정관에서는 시체에 마음을 집중해야 합니다. 신성한 머묾(梵住)에 대한 수행에서는 자애(慈), 연민(悲), 같이 기뻐함(喜)과 평온(捨)에 마음을 집중해야 합니다. 이러한 수행주제들을 사용하는 수행자는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수밧다에게 위빳사나 수행주제를 관찰하라고 지시하셨을 것이라고 추측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염처경에서 가고 있을 때 가고 있음을 주시하라고 요구하는 바와 같이, 수밧다가 사띠를 확립하는 수행인 위빳사나 수행을 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걸으면서, 수밧다는 움직이는 현상들이 일어날 때마다 주시했으며, 되풀이해서 집중한 결과로 위빳사나 지혜가 생겼으며, 마침내 사무애해를 갖춘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부처님 계신 곳으로 와서, 경의를 표하고는 거기에 앉았습니다.
초기 종단에서는 이 모든 사건들이 이야기되었고 주목되었습니다. 법에 대해서 생각하기만 해서는 도의 지혜나 과의 지혜나 열반을 성취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아야 합니다. 마음이 가고 싶어 하는 대로 가게 내버려두고, 마음을 훈련하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으면, 팔정도의 길을 갈 수 없다는 것은 상식입니다. 이 성자의 도를 체험하지 못하고는 그 누구도 모든 번뇌로부터 해방된 진정한 성자가 될 수 없습니다.
초기 종단에서는 부처님께서 살아 계시는 동안 수밧다가 마지막으로 아라한의 지위를 얻었다는 것을 당연히 주목하고 있었습니다.
수밧다경에 대한 이 법문을 듣는 모든 수행자들이, 기초 단계인 근원도에서부터, 예비 단계인 전단계의 도를 거쳐, 아라한들과 마찬가지로 최종 단계인 성자의 도에 이를 때까지 수행하여 열반을 성취하기를 기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