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이 접수하는 고소장이 한 달에 무려 8만 건이라고 한다.
경찰이 사건 안 된다고 퇴짜 놓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누구를 고소하러 경찰서 가는 사람이 한 달에 수십만 명이라는 얘기. 다시 말해, 누구나 살면서 한 번씩 고소를 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고소를 당하고 ‘난 떳떳해’, ‘나는 아무 잘못이 없다’고 당당하게 경찰서에 들어갔다가 수사관의 유도심문에 걸려 졸지에 범죄자로 내몰리는 경우가 많은데, 이 때 중요한 부분이 미필적 고의다.
https://www.youtube.com/watch?v=_uDpanQQBdg
정인이 학대 사망 사건에서도 죽일 의도는 없어도 아기가 숨질 것을 알고 밟았다면 살인죄, 모르고 그랬다면 아동학대치사죄가 되는데, 살인죄와 아동학대치사죄는 처벌수위, 형량의 차이가 매우 크다. 이것을 가르는 결정적인 요소가 ‘미필적 고의’다.
물론, 모든 정황을 면밀하게 따져봐야 하지만, 고의냐? 미필적 고의냐? 과실이냐? 하는 것은 수많은 사건에서 범죄 여부, 처벌 수위, 형량을 결정하는 부분이기 때문에, 미필적 고의가 무엇인지 아는 것은 중요한 ‘생활의 지혜’ 또는 '처세술'이라고 할 수 있겠다.
* 미필적 고의 [未必的 故意, dolus eventualis]
- 실현 가능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그것을 감수하는 의사 |
예외도 있지만, 형법은 기본적으로 고의가 있어야 처벌한다.
‘작정을 하고 그랬느냐, 모르고 그랬느냐’가 결정적이라는 얘기.
대표적인 사례가 김정남 암살사건이다.
김정남 암살 사건에서, 김정남 얼굴에 청산가리를 묻힌 여성 2명이 체포되었다. 이들은 원래 연예인지망생이었고 실제로 오디션 프로그램도 출연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한국의 PD라는 사람이 찾아와 같이 방송해보자고, 잘 되면 한국의 방송에 출연시켜주겠다고 꼬드겼다. 그 PD라는 사람은 손에 향수를 뿌린 다음 사람얼굴에 칠하고 도망치고 반응을 보는 유투브 몰카 방송을 찍는다고 여성들을 속였다. 이 여성들은 실제로 이렇게 몰카 촬영을 몇 번 했고 그 영상도 공개되었다. 그날 공항에서도 몰카 촬영인줄 알고 김정남 얼굴에 향수를 발랐다. 그런데 알고 보니 향수가 아니라 청산가리였고, 한국 PD라는 사람도 북한간첩이었다. 손에 묻은 청산가리는 물로 씻으면 되고 해독제도 있다고 한다. 이 여성 2명은 결국 석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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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나는 칼을 그냥 들고 있었는데 자기가 와서 찔리더라’, ‘툭 치니까 꽥 하더라’ ...........이런 식으로 변명하는 경우가 있어서 도입된 개념이 미필적 고의다.
‘미필적 고의란 범죄사실이 발생할 가능성을 인식하고 또 이를 인용하는 것’이라고 한다. 즉, 인식은 하는데 의욕이 확정적이지는 못한 상태로 조건부 고의(條件附 故意)라고 한다. 과실은 인식, 의도가 없는 상태를 말한다.
쉽게 말해, ‘그렇게 되어도 할 수 없다’. ‘그렇게 되든지 말든지’고 생각하고 일을 저질렀다면 미필적 고의가 된다. 반면, ‘설마 그렇게 되겠어?’ 했는데, 실제로 그 일이 벌어졌다면 ‘과실’이 된다. |
욱해서 사람을 쳤는데 죽어버렸다면, 상해치사죄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칼로 가슴을 찔러 죽여 놓고 그냥 혼내줄 생각이었다고 주장한다면 미필적 고의로 살인죄가 될 가능성이 높다. 칼을 가슴에 찌르면 사망할 수 있다고 누구나 인식할 수 있고 특히 다른 것도 아닌 칼로 찔렀기 때문에 그 결과를 감수했다고 인정될 가능성이 높다.
요컨대, 미필적 고의는 고의와 과실의 중간단계에 있다. 그러나 어쨌든 고의이기 때문에, 사람이 죽었다면 살인죄가 된다. 완전히 작정하고 죽인 것은 아니더라도 ‘이렇게 하면 죽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럴 것도 같고’ 생각했다면 미필적 고의가 된다. 반면, ‘설마 죽겠어?’하고 생각했다면 과실치사죄가 된다. |
미필적 고의의 사례를 보면,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애매해서 판단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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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한테 빚을 못 갚아 고소당했다. 떼먹을 생각은 없었지만 돈을 빌릴 당시에 빚도 많았고 형편도 어려워서 ‘6개월 뒤에 못 갚으면 어쩌나’ 걱정은 됐으나 어쨌든 돈을 빌렸다. 돈을 갚지 못할 가능성을 인식했기 때문에 미필적 고의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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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화물질이 있는데 그 옆에서 담배 피우면 불이 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담배 피우다가 불이 나면 미필적 고의가 된다. 반면, 인화물질 주변에 온갖 소방시스템이 있고 ‘설마 불이 나겠어’하고 담배피우다 불이 났으면 과실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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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층 옥상에서 돌멩이를 던졌다. 밑에 지나가는 사람이 맞으면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그냥 던졌다. 그런데 실제로 벽돌을 맞고 사람이 죽어버렸다. 이것은 미필적 고의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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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날아가는 새를 향해 총을 쏘면 그 옆에 있는 사람이 맞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냥 쐈다가 사람이 맞아 죽었다.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죄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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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다치기를 원하지는 않았지만 학교 앞 어린이 보호구역에서 빠른 속도로 자동차를 몰아 사고가 났다. 이런 곳에서 빨리 달리면 사고날 수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으므로 미필적 고의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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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꽁꽁 묶어놓고 밖에 나갔다 돌아오니 아이가 죽어있었다. 이렇게 묶어 놓으면 아이 상태가 나빠져 죽을 수 있다는 점을 알면서도 방치한 것이기 때문에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죄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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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구르트를 다른 사람이 계속 훔쳐 먹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요구르트에 농약을 섞어 냉장고에 넣어두었고 그것을 훔쳐 먹은 사람이 죽었다. 그 사람이 먹을 것을 예상하고 저지른 행동이기 때문에 미필적 고의가 인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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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를 빠져나올 때 남아있는 학생들은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세월호 선장 이준석은 ‘해경이 그렇게 큰 배를 갖고 구조하러 왔는데, 당연히 해경이 애들을 구해주는줄 알았지. 나는 절대 그 애들이 죽을 줄 몰랐다’고 주장했고, 해경의 책임에 관심이 쏟아졌다. 결국, 세월호 선장에게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죄가 적용되기는 했으나, 법리적으로 따져보면 미필적 고의냐 아니냐 논란이 있었다.
살인죄의 범의는 자기의 행위로 인하여 피해자가 사망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식, 예견하는 것으로 족하지, 피해자의 사망을 희망하거나 목적으로 할 필요는 없고, 또 확정적인 고의가 아닌 미필적 고의로도 족하다.
/ 대법원 1994. 3. 22. 선고 93도36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