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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강해 제 16장 부에 관한 인자의 교훈
전 장에 이어서 제자들에게 하신 부에 관한 교훈이다. 전 장은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올 때의 하나님의 기쁨에 관한 이야기가 언급되었으나 본 장은 제자들이 세상에서 재물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 가에 대한 교훈이다. 이러한 본 장은 ‘불의한 청지기 비유’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인에 대한 경계’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로 구성되어 있다. 앞의 두 비유는 오직 본서에서만 기록되어 있다.
1. 불의한 청지기 비유 (16:1-13절)
이 비유는 인간의 입장에서 해석하면 비윤리적이라는 지적을 피할 수가 없다. 여기 등장하는 청지기는 불의한 청지기로서 자신의 해고당함을 면하기 위해 주인에게 빚진 자들의 빚을 자기 임의로 탕감하여 주인의 장부를 변조하였다. 이런 방법으로 채무자들의 환심을 삼으로써 청지기직에서 쫓겨난 후에 채무자들이 그에게 신세를 갚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도덕적이나 윤리적인 관점에서 이러한 청지기의 행위는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첫째, 주인의 해고에 대한 보복 행위로서 간주될 수 있다.
둘째, 자신의 형편 상 이기심 때문에 주인을 손해를 보게 한 악한 행위로 간주될 수 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주인의 판단이다. 주인이 불의한 청지기가 행한 일을 알고 그 행위를 지혜로운 행위라고 칭찬했다는 것이다. 재물의 손상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일반적 해석으로는 이해가 불가능한 대목이지만 그 행위 자체보다도 후일을 대비하는 그의 지혜만 보면 주인에게 크게 해를 끼친 악한 행위는 아닌 것이다. 채무자들은 주인의 탕감 명령에 의해 청지기가 탕감해 주었는지, 아니면 청지기가 임의로 탕감해 주었는지 알 길이 없었기 때문에 주인의 명령으로 알고 주인에게 감사했을 것이며, 결과적으로 이는 주인에게 영광이 돌아간 것이 되었고, 청지기에게는 후일을 대비하는 지혜로운 방법이 되었다. 이 비유에서 교훈하고자 하는 요지는 청지기의 그와 같은 부정직함을 칭찬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장래를 예비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일을 지혜롭게 처신했다는 것이다. 이 교훈은 비유와 그것에 덧붙여진 경고의 두 부분으로 구성되며, 1-8절까지는 불의한 청지기 비유이며, 9-13절은 재물의 사용에 대한 교훈이다.
여기 나오는 어떤 부자가 누구인지 분명하지 않다. 현장에 관리를 둔 대지주를 말하는 것으로 그에게 빚진 자들의 면모를 보아 그가 큰 부자이며 도량이 넓고 측은지심이 강한 좋은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다. ‘청지기’는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는 고용인이거나 대리인을 가리키며 ‘간사’ ‘총무’ ‘집사’로 번역된다. 그는 주인의 종일 수도 있으며 자유인으로서 주인과 고용 계약을 맺은 자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그들이 근무하는 동안 주인의 재산을 부정하게 취하거나 도용할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억울한 누명을 쓰고 징계를 받을 수도 있으며 정직한 자로 인정을 받고 대단한 권세를 누릴 수도 있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로 요셉을 들 수 있고, 아브라함의 청지기 엘리에셀 같은 사람도 있다. 예수께서는 당시에 흔히 있던 청지기의 실례를 통해 제자들에게 재물의 사용에 관해 교훈하시고자 했던 것이다. 이 청지기는 평소 주인의 재물을 허비했는데 ‘디아스코르피조’라는 이 말은 돈이나 재물을 마구 탕진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주인의 재물을 횡령하고 부실 경영을 했으며 낭비벽이 심한 사람이었다. 이러한 사실이 주인에게 알려졌고 주인이 그를 불러 실사를 시행했으며 책임을 엄히 추궁했던 것이다. ‘보던 일을 셈하라.’는 말은 단순히 계산하라는 뜻이 아니라 모든 사무를 청산하여 다른 사람에게 넘기라는 말이다. 즉 청지기 직무를 계속하지 못하고 해고를 당한 것이다. 청지기는 삶의 위기를 느꼈고 절망적이며 급박한 상황에 처하였음을 직감하였다. 사실 이 사람은 비록 부정은 저질렀지만 신속한 판단과 빈틈없는 사고의 소유자였다. 그러므로 모든 경쟁을 뚫고 부자의 청지기가 되었던 것이다. ‘땅을 판다’는 말은 정신적 노동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육체적 노동을 가리킨다. 지금까지 정신적 노동을 해 오던 사람은 육체적인 노동인 농사일이나 목축업을 할 수가 없다. 이 사람은 신체적으로 약한 체질을 타고 났기 때문이다. ‘빌어먹다.’는 말은 구걸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거지 행각을 뜻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높은 지위에 앉아서 거드름을 피우며 관리처럼 살아온 사람의 체면으로는 거지 행각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당장에 자신의 능력을 올바로 판단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결단해야 하는 것이다.
청지기는 주인의 재산이 자기의 것인 양 착각하고 흥청망청 낭비해 버렸다. 그 결과 해고를 당하게 되었고 그는 난처한 상황에서 자신의 살길을 도모하게 된다. 여기 부자를 하나님에 비유한다면 청지기는 우리 인생이다. 인간은 자신이 부여받은 힘과 지혜와 재물을 자신의 것으로 착각하고 자기 의지와 결단에 따라 함부로 낭비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신자들은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은 것을 알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할 책임이 있는 청지기인 것이다. 만약 이 모든 것들을 허무하게 낭비한다면 이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행위이며 교만한 소행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의 날이 도래하게 되는 것이다. 즉 ‘네가 보던 일을 셈하라.’는 주인의 엄한 명령을 받고 청지기 직에서 쫓겨나는 날이 이르게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인생은 ‘미래적 피조물’이기 때문에 미래를 위한 지혜로운 삶을 살아야 하며 주인에게 칭찬을 받아야 한다. 불의한 청지기는 한 가지 자신의 할 일을 찾았는데 그것은 주인에게 빚진 자들을 불러 그들의 빚을 탕감해 주고 그 후에 그들로부터 은혜를 입기로 한 것이다. 청지기가 빚진 자들을 불러 증서를 변조하거나 위조할 수 있었다고 하는 것은 이 증서의 계약자가 주인이 아니라 청지기 자신이며 이를 임의로 변조할 수 있는 권한을 주인으로부터 절대적으로 위임받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특권을 주신 것을 의미하며 하나님을 대신하여 땅을 정복하고 다스릴 권한을 부여 받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빚진 자들의 물품의 수량은 대단히 많은 양으로서 기름 백 말은 약 2,300리터에 해당하는데 감람나무 한 그루의 평균 수확량은 기름으로 23리터에 불과하기 때문에 이는 감람나무 약 100그루의 소산에 해당하며 돈으로 환산하면 천 데나리온이 된다. 노동자 한 사람이 3년을 일하여 버는 금액으로 지금의 화폐 가치로는 2억이다. 청지기는 2억의 채무를 1억으로 탕감해 주었던 것이다. 이 사람은 낭비벽이 큰 만큼 탕감의 통도 상상을 초월하였다. 아마도 채무자는 잠을 자다가 날벼락을 맞은 것처럼 크게 놀라고 감사했을 것이다. 또 다른 사람은 밀 백석을 빚졌는데 이는 2,500 데나리온에 해당하는 금액으로 지금의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약 5억에 해당한다. 이 사람에게는 20%를 탕감해 주었는데 역시 1억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미루어 짐작하면 다른 채무자들에게도 이러한 수준에서 동일하게 탕감해 주었을 것이다. 참으로 기발하고 대단한 일을 감행했던 것인데 주인의 입장에서 보면 엄청난 재물의 손괴가 일어난 것이고 청지기 입장에서 보면 자신의 미래의 생계 대책으로 이만한 준비가 없었을 것이다. 주인은 이 청지기의 모든 행위를 다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추궁하거나 조사하거나 책망하지 않고 도리어 칭찬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그가 낭비한 재물은 그의 미래를 준비한 것이 아니요 도리어 그의 미래를 망하게 하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낭비했을 뿐만 아니라 이웃에 대한 인색함뿐이었지만 지금의 행동은 그의 장래에 생명을 연장해 주는 것이었으며, 동시에 많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푼 자비의 행동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주인을 속이고 임의로 주인의 재산에 손실을 준 행위 그 자체는 악한 것이지만 결과는 많은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선한 일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불의한 청지기는 주인의 재산으로 자신과 많은 사람들의 미래를 준비했는데 주인이 그를 해고한 까닭은 그가 미래를 준비하지 않고 무조건 낭비만 하는 것을 책망한 것이며 이제 정신을 차리고 미래를 준비한 것에 대해 칭찬을 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보다 불의한 청지기가 더욱 지혜롭고 총기 있게 행했다고 하셨다. 즉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이웃과 반목하고 재물에 인색하고 이웃의 가난을 돌보지 아니하고 멸시하는 태도를 가진 사람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의 청지기도 이렇게 지혜롭게 행하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백성들은 더욱 미래를 준비하기 위하여 재물로 친구를 사귀로 이웃을 돌보아야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하늘의 쌓아둔 보화’라는 말의 반대되는 관점으로 땅에 쌓아 둔 재물을 ‘불의의 재물’이라고 하셨다. 이는 세상의 재물을 가리키는데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재물 중에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바치고 남은 재물을 말하는 것이다. 그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는 것이다. 재물이 선용되지 못하고 악용될 경우 황금만능 풍조가 생겨나고 물질을 신으로 섬기는 우상숭배가 일어나는 것이다. 여기 ‘친구’는 구제해야 할 가난한 사람들을 말하는데 그 재물을 그들에게 나누어 주고 그들의 진정한 이웃이 되며 친구가 되라는 것이다. 이는 곧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는 결과가 된다. 만약 이 재물을 나를 위하여 땅에 쌓아두면 언젠가는 부요함이 사라질 날이 올 것이며 설사 남은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사용할 수 없는 때가 오는 것이다. ‘없어진다’라는 말 ‘에클레이포’는 부와 재물이 소용없게 되는 죽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람이 죽은 이후에는 그 재물은 아무 소용이 없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재물을 자신의 생명의 안정적 처소로 이해하여 그 재물이 자기를 지켜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상 재물과 안정은 아무 관련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재물로 친구를 사귀면 죽음의 날이 올 때에 성도의 영원한 고향인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함을 받을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영원한 처소’는 일반적으로 장막의 뜻인 ‘스케네’ 즉 일시적인 거주지를 말하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영구적인 곳을 가리키는데 이는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초월적인 영원한 나라를 가리킨다. 따라서 재물로 가난한 자들을 도우면 이 세상의 종말이 오고 죽음을 맞이할 때에 도움을 입은 천사들이 그를 하나님 나라로 영접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것이 구원의 방법론을 의미한다고 해석하면 곤란하다.
예수께서는 하늘의 보화와 땅의 재물을 더욱 구체적으로 비교하여 설명하시는데 ‘지극히 작은 것’과 ‘큰 것’ ‘불의한 재물’과 ‘참된 것’ ‘남의 것’과 ‘너희의 것’이라고 비교하여 교훈하신다. ‘지극히 작은 것’이라는 뜻의 헬라어 ‘엘라키스토스’는 작은 것의 최상급으로 더 이상 표현할 수 없는 작은 것을 가리키는데 이 세상의 재물을 이렇게 표현하신 것이다. 반대로 ‘큰 것’은 ‘많은 것’의 원급 형용사이다. 이 세상의 재물은 복음 즉 하늘의 보화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것에 불과하다. ‘충성된 자’라는 말은 재물에 의해 무조건 복종하고 돈의 힘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재물을 주고, 받고 보관하는 등의 경제 영역에 있어서 신뢰를 받는 사람 즉 돈에 정직한 사람을 말한다. 그러므로 재물에 정직한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도 정직하며 재물의 관리에 불의한 자는 하나님의 일에도 불의하다는 것이다. 사람이 무엇을 섬기느냐 하는 것이 다를 뿐 어떤 경우에도 정직한 자는 다른 일을 맡겨도 정직하게 행한다. ‘참된 것’이라는 말 ‘알레디노스’는 ‘진리’ ‘실재’를 의미하는 말로 복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불의한 재물에도 정직하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복음을 맡기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사람의 일상생활에서 경건과 신실함이 드러나지 않는다면 이 사람은 영육 간에 부실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진실로 충성된 사람은 평범한 생활 가운데서 열매를 맺는 사람이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삶 가운데서 신실하고 정직한 사람에게 하늘의 보화를 맡기시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지극히 작은 것’ ‘불의한 재물’에 이어서 ‘남의 것’이라고 하셨다. 사실 이 땅에서 인간이 소유하는 재물은 확실히 나의 것이라기보다는 남의 것이다. 재물을 나의 것이라고 등기하고 확증해 놓아도 국가나 사회의 결정에 따라서, 혹은 사람들의 평가 기준이나 환경에 따라서 얼마든지 남의 것이 될 수 있다. 주식이 그렇고, 부동산이 그렇고, 심지어 은행에 들어있는 현금까지도 언제 어떻게 날아갈지 모른다. 이렇게 재물은 일시적인 것이며 나의 것이 아니라 남의 것이 된다. 여기서 ‘충성하라.’는 말은 일시적인 재물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영구적이고 귀중한 일에 도구로 사용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우리에게 허락된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재물도 예외는 아닌 것이다. 하나님의 것을 나의 이기적인 목적에 사용해서도 안 되며 하나님 나라 공동체를 위해 사용해야 하는 것이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참 보화를 주시는데 그것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보화이며 이것이 진실로 나의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은 변하는 것도 아니며 날아가 버리는 것도 아닌 영원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다 아신다. 우리의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바 되시는 하나님께서 날마다 공급해주시는 일용할 것들뿐만 아니라 우리의 생명과 진리와 자유와 안식과 천국의 축복을 주시는 것이다. 대개 사람들은 하나님도 섬기고 재물도 가지기를 원한다. 그러나 양손의 떡은 내가 다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한 가지도 먹을 수 없고 손에 쥐고만 있다가 버리게 되는 것이다.
‘집 하인’은 주인에게 절대적인 헌신과 충성을 다해야 하는 자를 가리키는데 예수님 당시에는 종이 두 주인에게 속하여 일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고 한다. 바울 사도가 빌립보에 가서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귀신 들린 여종 하나를 만났는데 점으로 그 주인들에게 큰 이익을 주는 여자였다. 여기 ‘주인들’이라는 말은 여종의 주인이 여러 명 혹은 두 명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두 명의 주인을 섬기는 종은 한 주인에게는 자유를 얻었으나 다른 주인에게는 여전히 종속된 채로 살아가는 것이다. 이럴 경우 종은 자신이 유리한 쪽의 주인을 성심껏 섬겨 차등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두 주인을 동일하게 섬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예수께서는 이 비유를 들어 재물과 하나님을 동시에 잘 섬길 수 없다고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려면, 지극히 작은 것과 남의 것에 충성하려면, 이기적인 소유욕에서 벗어나 오직 하나님께만 충성해야 하는 것이다. 그럴 때 천국의 보화가 비처럼 하늘에서 내릴 것이다.
2. 바리새인을 경계하심 (16:14-18절)
예수님의 교훈은 두 가지 반응으로 나타났는데 하나는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마음으로 이를 거부한 자들이다. 바리새인들이 대표적인 사람들인데 예수께서는 이들의 위선적 태도를 경계하셨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안락과 부는 하나님께서 주신 보수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언젠가는 없어질 재물이 하나님의 상급이 아니라 하늘의 보화 즉 복음만이 영원한 축복이라고 가르치신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기는 자들이었으며 위선의 탈을 쓰고 하나님을 잘 섬기는 형식을 취하였지만 시상 그들의 주관심사는 재물이었다. 예수께서 저들의 탐욕을 지적하시자 저들은 예수를 비웃었던 것이다. 그 사실을 간파하신 예수께서 그들을 책망하셨는데 ‘스스로 옳다하는’ 이라는 말의 정확한 의미는 ‘정당화 하려고 애쓰다.’라는 것이다. 이는 성도의 믿음 즉 예수를 그리스도 주로 고백하고 그의 계명을 지킴으로 받는 하나님의 의와는 대조적으로 사람 앞에서 스스로 의롭다 여기고 자기의 주장을 정당화하려고 애쓰는 것을 말한다. 바리새인들은 밀려오는 헬라 문화의 영향으로부터 유대의 율법을 지키는데 있어서 매우 엄격했기 때문에 유대교를 지킨 사실에 대해 대단한 자존심과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들은 전통적인 율법 수호자이며 백성의 종교 지도자로서 일반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기를 원했고 나라로부터도 그에 합당한 대접을 받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영적 허례와 허식은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죄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저들과 멀리 계셨으며 저들을 미워하셨다.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이 지키고 자랑하는 율법의 시대가 이미 지났다는 것과 이제는 새로운 시대 즉 복음의 시대가 열렸다는 것을 깨우쳐 주셨다. 율법은 창세기에서 신명기까지의 모세 오경을 가리키며, 그 이후의 성경을 모두 선지자라고 정의하신 후 이 둘을 합한 구약성경 모두를 ‘율법과 선지자’라고 하신 것이다. 마태복음 11:2에는 ‘세례 요한의 때부터’라는 말이 나오며, 누가는 본문에서 ‘요한의 때까지’라고 하였다. 마태는 요한의 때를 신약시대에 포함시킨 것 같은 뉘앙스를 주고, 누가는 요한의 때를 구약에 포함시키는 뉘앙스를 주지만 실상 두 가지 모두 요한을 율법시대에 포함시키고 있는 것이다. 마태의 ‘헤오스’ 누가의 ‘메크리’ 모두 율법시대를 의미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신약시대는 예수의 공생애로부터 시작한다. ‘하나님 나라’의 주제는 예수의 핵심적인 메시지로서 예수의 사역과 더불어 이 땅에 실제로 임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그림자에 불과했던 구약 이스라엘의 율법 시대가 지나가고 진정한 하나님 나라에는 그의 백성들이 그리로 침입한다고 하셨다. 마태는 ‘천국이 침노를 당한다.’고 하여 수동태로 되어 있는 반면에 누가는 ‘비아제타이’ 라 하여 ‘침입하다’라는 중간태형을 말하고 있다. 이 말은 복음에 대해 역동적으로 반응하는 사람들의 적극성을 나타낸다. 율법과 선지자의 시대는 이미 지나갔고 바리새인들 앞에 천국이 이미 임하였는데도 저들이 계속해서 율법 준수를 고집하는 것은 미련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지는 것보다 천지가 없어지는 것이 쉬우리라고 하신 것은 율법의 절대성과 영원성을 강조하는 말로 구약성경의 권위를 나타내신 것이다. 세상이 없어지기 전에는 하나님의 말씀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비록 이 땅에 복음이 전파되어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지만 구약의 예언의 말씀은 반드시 성취된다는 것이다. 율법과 복음은 서로 배타적이 아니며 상호 보완의 역할에 의해 영원히 존속될 것이다. 예수께서 갑자기 이혼 문제를 제기하신 것은 특별히 이혼 문제를 통하여 율법의 진정한 가치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무지를 지적하시고 율법의 영구성을 제시하시기 위함이었다. 마태는 ‘음행한 연고 없이’라는 단서를 붙였지만 누가는 ‘무릇 자기 아내를 버리고’라고 함으로써 더욱 엄격한 인상을 준다. 당시 이스라엘 사회는 부도덕한 성생활이 난무하였으며 이혼이 성행하였다. 모세는 이혼증서를 주어서 아내를 내보내라고 했지만 이는 사람의 마음의 완악성 때문에 허락한 것으로 예수께서는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 것이라.’고 하여 율법의 진정한 정신을 잘 나타내셨다. 예수께서는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요 무릇 버림당한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라.’하여 이혼 그 자체가 간음이라는 구체적 교훈을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의 시대나 복음의 시대 역시 동일하게 진정한 율법의 정신은 변함이 없는 것이다.
3.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 (16:19-31절)
본 비유 역시 바리새인들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이다. 바리새인들의 폐단은 두 가지인데 첫째는 탐욕과 재물욕이다. 이들은 하늘에서의 삶과 최후의 심판을 믿으면서도 그 같은 신앙에 부합되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부자의 삶을 사는 것을 경책하셨다. 그 다음은 그들의 냉혹함이다. 저들은 스스로 율법의 모범적인 준수자요, 선생이라고 자부했으나 그것은 허위와 위선이었다. 이들은 이웃 사랑이라는 율법의 대강령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여기 등장하는 한 부자는 왕같이 사치스럽고 호화로운 생활을 하는 자였다. 그의 의복은 왕이나 귀족들이 입는 자색옷과 고운 베옷이었다. 이 옷은 같은 무게의 금보다 두 배나 더 비쌌다. 그들은 매일 잔치를 열며 세상 연락을 즐겼는데 이들이 호화롭게 부귀를 누리는 그 자체를 죄라고 할 수는 없으나 주위에 있는 가난한 거기 나사로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것은 율법을 어기는 죄에 해당한다. 예수께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고 하신 말씀은 재물의 강한 흡인력을 경계하신 것이기도 하지만 그 보다는 가난한 자를 멸시하고 냉대하는 저들의 냉혈성을 경계하신 말씀이다. ‘나사로’는 히브리어 ‘엘리에셀’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하나님께서 도우시는 자’라는 의미이다. 이 이름은 가난한 사람의 경건을 암시하기도 하지만 그가 지금은 고통 중에 있으나 죽은 후에는 평안을 누리게 될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엘리에셀’은 아브라함의 종의 이름과 일치하고, ‘나사로’는 마리아의 오라버니 이름과 일치하는데 이 사람은 예수께서 죽음 가운데서 다시 살린 친구이다.
부자의 대문 앞에 버려진 거지 나사로는 헌데 투성이였는데 그의 병은 궤양, 혹은 종기로서 피부병의 일종이다. 그는 온몸을 꼼짝할 수 없는 불구자였다. ‘버려진’이라는 말은 ‘불구자’라는 의미이다. 나사로는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음식으로 배를 불리려 했는데 대개 유대인들은 바닥에 떨어진 빵을 먹어서도 안 되며 그것을 도로 접시에 담아서도 안 된다. 오히려 음식의 찌꺼기를 식탁 아래로 버리는데 여기서 ‘떨어지는 것’이라는 말은 그냥 떨어진 빵이 아니라 부자들이 배불리 먹고 남은 떡을 땅 바닥에 던진 것을 말하는 것이다. 나사로에게 접근하여 헌데를 핥은 개들은 집 안에서 기르는 개가 아니라 사납게 거리를 쏘다니는 개들이다. 이는 나사로가 가장 천한 개들에게까지 모욕을 당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 마침내 거지 나사로가 죽었으며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갔는데 유대교 사상에 의하면 의로운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을 천사들이 받들어 올라가고, 악한 사람이 죽으면 악귀들이 데리고 간다고 믿었다. 나사로의 주검은 정상적인 장례식도 없이 공동묘지와 같은 곳에 버려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영혼은 그의 조상 아브라함의 품이었다. 아브라함의 품이란 낙원을 가리킨다는 견해가 유력한데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이 낙원에 가 있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인간이 죽은 후 육체는 무덤에서 부패하나 영은 천국과 지옥의 중간 상태인 낙원과 음부로 들어간다고 하였다. 신자들의 영은 낙원에 들어가고, 불신자들의 영은 음부에 내려간다는 것이다. 부자 역시 죽음을 맞이하였고 그는 나사로와 반대로 음부로 내려갔으며 ‘불꽃’ 가운데서 고통을 당하였다. 신약에서는 지옥에 대해 종종 꺼지지 않는 불에서 고통을 당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거지 나사로는 축복을 받고 있지만 부자는 철저한 결핍과 소외를 당하고 있었다. 즉 의인들이 풍성한 사랑 가운데 하나님과 교제의 축복을 누리는 것에 반해 악인들은 목마름과 고통과 궁핍과 소외감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부자는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아브라함의 품에서 평안을 누리고 있는 나사로를 보고 아브라함을 불러 자기의 소원을 말했는데 그것은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을 신앙의 조상으로 여겼기 때문에 그를 아버지라 불렀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유대인이 분명하며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자랑하는 바리새인들과 같다. 그는 혈통적 특권에 의지하여 긍휼을 얻기를 소원했던 것이다. 부자는 나사로의 손가락에 물을 찍어 자기의 입에 떨어뜨려 혀를 서늘하게 해달라고 했다. 이는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과 대조가 된다. 유대인들은 의인들이 있는 곳에는 생수가 흐르고 있다고 믿었는데 이 세상에서의 부자와 나사로의 상태가 저 세상에서 완전히 바뀌었음을 나타낸다. 이는 복음이 전해지기 전의 두 사람의 상태와 복음이 전해진 이후의 두 사람의 상태가 극명하게 달라진 것과 같다. 부자는 지옥의 불꽃 가운데서 ‘고민한다.’고 했는데 ‘오뒤나오’라는 이 말은 ‘괴로움을 겪다.’ ‘고통을 당하다.’라는 의미로 울부짖지 않을 수 없는 극심한 상태를 나타낸다. 이는 육체적 고통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으나 실상은 영적 절망과 소외감을 가리킨다.
아브라함은 부자를 향하여 ‘얘’라고 불렀는데 이 말은 부모가 자녀를 부르는 호칭으로 ‘아들아’ ‘딸아’ 라는 말이다. 아브라함은 그를 자손으로 시인했지만 그 다음의 말로 보아 부자는 선택된 민족, 유대인의 특권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라는 말 앞에 소유 대명사가 붙어 있는데 직역하면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다.’라는 말이다. 즉 부자가 받은 ‘좋은 것’은 자신의 재물로 누린 호화로운 생활을 의미한다. 반면에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다.’는 말은 그 고난이 나사로의 잘못에 의한 고난이 아님을 암시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나사로가 받은 고난은 부자의 냉혹함과 교만, 이웃에 대한 무관심 때문에 생긴 고난이었다는 것이다. 이는 사회의 구조적인 악과 가난에 의해서 바리새인들로부터 율법을 지키지 않은 자라는 정죄를 받았던 세리와 창기들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제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서 위로를 받고 부자는 지옥에서 괴로움을 받는다는 말은 지상에서의 부유함이 저 세상에서 고난을 의미하고, 지상에서의 가난함이 저 세상에서 위로를 받는다는 말이 아니라, 탐욕과 이기심으로 인해 자신의 재물을 자기만을 위해 사용했던 부자가 복음을 거부함으로 심판을 받아 고통의 지옥에 빠지게 되고, 비록 가난했지만 부자를 원망하지 않고 경건한 삶을 살아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은 나사로는 하나님 나라에서 위로를 받는다는 것이다. 부자에게 정죄되고 있는 것은 재물의 남용, 과소비와 가난한 이웃들에 대한 무관심과 정죄와 외면이었다. 이 비유는 당시의 바리새인들이 이웃을 향하여 나타내었던 그 냉혹한 태도를 의미하고 있는데 이후 저들이 받을 하나님의 심판이 어떠한가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부자와 나사로 사이에는 큰 구렁텅이가 있다고 했는데 직역하면 ‘큰 구렁이 영원히 고정되어 있다.’라는 말이다. ‘구렁’이라는 말 ‘카스마’는 ‘벌어진 틈’을 말한다. 이러한 지형은 팔레스틴 사막에서 종종 볼 수 있는 것으로 장마철 외에는 물이 전혀 없는 골짜기인 ‘와디’를 말한다. 우리말로 하면 큰 협곡이다. 부자와 나사로 사이에는 더 이상 왕래할 수가 없는데 이는 이 땅에서는 회개할 기회가 있지만 죽은 후에는 더 이상 기회가 없다는 것과, 죽음에 의해 결정된 각자의 처소는 그 어떤 권세와 능력으로도 변경될 수 없다는 것이다.
유대인들 중에는 죽은 사람을 통하여 산 사람에게 전갈을 보낼 수 있다고 믿었다. 사울 왕이 무당을 찾아가서 사무엘 선지자를 불러올리라고 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그러나 성경은 사람이 죽고 나면 그 영혼은 더 이상 지상 세계와 교통하지 못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부자는 자신이 여전히 부자이고 나사로는 그의 종에 불과하다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나사로를 그의 형제들에게 보내어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형제들이 지옥에 오지 않도록 해달라고 하였다. 부자는 죽어서 음부에 들어가서야 비로소 심판의 엄정함과 무서움을 깨닫고 그의 가족이 구원을 받도록 요청한 것이다. 그가 그의 형제들에게 나사로를 보내달라고 한 것 역시 그가 이기심에 사로잡혀 있음을 알 수 있다. 부자의 요구에 대해 아브라함은 그의 형제들이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들으라고 했다. ‘들을지니라’라는 말 ‘아쿠오’는 단순히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깨닫고 이해하는 것, 듣고 순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순종하라는 것이다. 부자는 죽었던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 그의 형제들에게 가서 증언한다면 형제들이 나사로를 하나님의 사자로서 믿을 것이라고 했지만 예수께서는 가난한 자들을 돌보아야 할 의무를 끊임없이 강조한 모세나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은 사람은 설령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이 가서 말을 한다 해도 듣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다. 저들의 이기적인 삶의 방식은 완악한 심령으로 이미 굳어져 버렸기 때문에 부활하신 예수의 말도 듣지 않았던 것이다. 부자는 다시 한 번 아브라함에게 죽은 자가 가서 전하면 저들이 회개할 것이라고 강조했지만 그러나 기적 자체에만 연연하는 자는 그 기적이 드러내고자 하는 참된 진리에는 도리어 무관심해지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부자의 이중적 폐단을 제시하면서 그의 부탁을 거절한다. 첫째는 저들이 현재 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과, 둘째는 미래의 가능성 즉 죽음에서 부활하는 사람이 전하는 말을 들어도 역시 가난한 이웃을 사랑하라는 신앙적 삶을 살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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