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들과 아버지,
아버지가 죽은 뒤,
아들은 그의 죽음을
배웅하지 않았다.
각자의 정치적 야심 때문에
그들은 혈육지정을 잊고
경쟁자가 된다.
정치노선이 달랐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천륜을 거역한 그들의 엇갈린 운명.
그것은 곧 우리 역사의 비극이었다!
1. 뿌리가 드러난 노근란!~
정치적 입지를 잃은 대원군!~
1898년 2월.
흥선대원군이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아들 고종은 아버지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지 않았다.
"고종황제는 대원군의 문상을 가지 않아서 많은 비난을 받았다."
- 윤치호 일기(1898. 2. 26)
쏟아지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왜 고종은 아버지의 죽음을 외면했을까?
대체 무엇때문에 흥선대원군은 아들과 화해하지 못했을까?
흥선대원군에게 고종은 특별한 아들이었다.
12살에 고종을 왕위에 올려놓은 사람이 흥선대원군이었다.
하지만 흥선대원군이 세상을 떠날 때에는
아들과 아버지의 사이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벌어져 있었다.
19세기 격랑의 한가운데 서 있었던 왕과 왕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에게 고종은 과연 어떤 의미였을까?
또 고종에게 흥선대원군은 어떤 존재였을까?
1874년.
경기도 양주 직곡산장으로 거처를 옮긴 흥선대원군은
그의 삶에서 또 다른 큰 시련기를 맞고 있었다.
그의 나이 쉰 다섯.
정계에서 밀려낸 흥선대원군은 시위하듯 이곳 양주로 내려왔다.
난초를 그렸지만 예전같지 않았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당시 흥선대원군의 정치적 입지를 보여주는 난초 그림을 찾을 수 있다.
여섯폭의 난초그림으로 만든 병풍인데
대원군의 호 '석파(石坡)'가 선명히 적혀있다.
1874년작 <군란도>.
양주시절에 그린 흥선대원군의 작품이다.
눈길을 끄는 것은 화폭의 윗면.
뿌리를 드러낸 '노근란(露根蘭)'이 허공에 그려져 있다.
1870년에 그린 부드러운 대원군의 난초그림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뿌리를 드러낸 거친 노근란이 양주시절에는 어김없이 그려져 있다.
"화면 윗부분에 항상 노근란이 위치해 있습니다.
노근란이란
땅을 표현하지 않고 뿌리가 드러난 채로
마치 공중에 떠있는 듯이 묘사된 난초 그림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뿌리를 내릴 땅을 잃어버렸다는 의미는
혹시 직곡시절의 흥선대원군의 입장에서는
정치적 입지를 상실한 자신의 처지를 빗댄 것이 아닌가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 김정숙 교수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예술세계> 저자
흥선대원군에게 위기가 닥친 것은
고종을 대신해 섭정을 한 지 10년째 되던 해이다.
예상치 못한 상소 한 통이
대원군의 정치적 입지를 뒤흔드는 파란을 몰고 왔다.
"삼가 아뢰옵건데 전하께서는
친친의 서열에 있는 사람을 지위를 높이고 녹을 많이 주되
국정에는 간여하지 말도록 하소서.
親親之列者只當尊其位重其祿 勿使干預國政
(친친지열자지당존기위중기록 물사간예국정)"
- 면암 최익현
면암 최익현은
고종에게 친정을 펼치라며
지난 십여 년 동안 그 누구도 거론하지 못한
흥선대원군의 섭정을 탄핵한 것이다.
"사실 대원군은 아무런 정치적인 지위를 갖고 있는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어느날 왕이 이제는 내가 직접 권력을 행사하겠다고 했을 때,
그것에 대해 저항할 수 있는 아무런 법적 근거를 갖고 있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굉장히 허무하게 물러날 수 밖에 없는 그런 입장이 됩니다."
- 주진오 교수(상명대 역사콘텐츠학과)
대원군이 이용하던 궁궐 전용문이 폐쇄되었다.
대원군 탄핵 상소가 올라온 직후
고종이 직접 국정을 운영하겠다며 친정을 선포하고 이루어진 조처였다.
'영남만인소(嶺南萬人疏)' 사건.
영남 유생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안동에 한국국학진흥원이 소장하고 있는 이 문서는
당시 대원군 지지세력이 조직적으로 반발한 움직임을 담고 있다.
영남 유학생 만여 명이
대원군의 정계복귀를 요청하기 위해 만든 '만인소'의 초안.
대원군이 정계에서 밀려나 직곡으로 내려가자
집단상소로 고종을 압박하고 나선 것이다.
"전하께서 며칠 안으로 행차하셔서 빨리 환차하시길 청함으로써
위로는 독실히 봉양하는 뜻을 돈독히 하고,
아래로는 간절히 바라는 여론의 기대에 부응하십시오."
"아버지를 시골에 놔두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는 표면적 이유밑에는
대원군이 했던 정치적 역할을 다시 복구시키라는 요구가 깔려 있습니다."
- 박원재 교수(한국 유교문화박물관장)
공론정치를 중시하는 조선사회에서
만여 명이 집단 상소하는 '만인소'는
국왕도 어찌할 수 없는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만인소의 길이는 약 100미터.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의 서명과 이름을 일렬로 기록한 것이다.
영남유학생들은 이 같은 만인소를 세 차례나 올리며
고종의 불효를 질책했다.
유교국가에서 효를 내세운 논리앞에서
아무리 국왕이라 하지만 무작정 버티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고종은 굴복하지 않았다.
"윗사람을 범한 죄가 실로 크다.
복합상소를 올린 자들을 참형에 처하라."
(竝以犯上不道 外處斬 -병이범상부도 외처참)
- <고종실록, 1875. 6. 18>
주동자를 참형에 처하라는 지시까지 내리며 강경하게 대응했다.
정계복귀를 기다리며 양주에서 시위하듯 머문 지 2년.
끝내 아들 고종은 흥선대원군의 정계복귀를 허락치 않았다.
고종은 유생들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다.
하지만 두 사람의 관계가 처음부터 이렇게 대립적인 건 아니었다.
2. 운현궁의 봄 -대원군 섭정, 세도정치의 청산
" 나는 천리를 끌여들어 지척으로 삼고자 하며
태산을 깍아 평지를 만들고자 하며
남대문을 높여 3층으로 만들고자 합니다."
그렇다면 흥선대원군과 고종의 사이가 이렇게 벌어지게 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서울 종로구 운현궁.
운현궁은 흥선대원군의 정치 여정을 대변하는 공간이다.
이곳에서 고종을 낳았고,
12살의 어린 아들은 왕위에 올리려고 노력한다.
당시 왕실의 권위는 추락할대로 추락했다.
순조 때부터
60여 년에 걸친 세도정치로
조선의 정치는 곪을대로 곪아 있었다.
이때 철종이 후사없이 사망하자
흥선대원군은
신정왕후 조씨와 손을 잡고
자신의 둘째 아들을 왕위에 올렸다.
오랜 병석에 누워있던 철종이 승하한 것은 1863년 12월.
흥선대원군의 둘째 아들 고종이 용상을 이어받았다.
신정왕후가 수렴청정을 나섰지만
그 뒤에는 대원군이 있었다.
대원군과 조정대신들이 만난 상견례 자리에서
대원군이 던진 일설은 대신들을 충격에 빠트렸다.
"나는 천 리를 끌여들어 지척으로 삼고자 하며
태산을 깍아 평지를 만들고자 하며
남대문을 높여 3층으로 만들고자 합니다.
(吾欲引千里爲咫尺 吾欲伐(?)奉山爲平地 吾欲高南大門三層
오욕인천리위지척 오욕벌(?)봉산위평지 오욕고남대문삼층)"
태산처럼 비대해진 노론 세도정치를 청산하고
약해진 왕권을 강화하겠다는 것이었다.
대원군은 가장 먼저 조정의 최대권력기구로 비변사(備邊司)를 폐쇄했다.
비변사는
16세기 여진와 왜구의 침략에 대비한 임시기구였으나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인사, 재정, 사회, 군사 등 국정 전반의 최고 역할을 하며
왕권을 약화시킨다.
"특히 외척 세도 가문들의 정치적 기반이 되고
나중에 국왕조차 그 결과를 거스리기 어려워지는 막강한 권력 기구가 됩니다.
따라서 정치를 전면 개편하다고 했을 때
비변사를 폐지하지 않고서는
흥선대원군 자신이 생각하는 정치 쇄신을 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 연갑수 박사 (서울역사박물관, 학예연구부장)
<北譜(북보)>, <南譜(남보)>.
동시에 흥선대원군은 북인과 남인 계열의 인재들을 적은 명단을 만든다.
그리고 세도정치에서 소외된 그들 인재들을 골고루 등용하기 시작했다.
황현의 <매천야록(梅泉野錄)>에는
흥선대원군이 실시한 또 다른 개혁들이 세세히 실려있다.
정조임금도 손을 못댄 서원의 횡포.
교육기관인 서원은 백성들을 수탈하는 기구로 변질되어 있었다.
"서원은 평민들까지 제사 비용을 부담시키고
잡아다 껍질을 벗기고 골수를 빼내니 '남방의 좀'이라 불렸다."
흥선대원군은 서원 철폐를 지시한다.
"결국 화양동 서원은 철폐되었다."
유생들의 저항은 격렬했다.
서원철폐를 중단하지 않으면 죽음도 불사하겠다고 맞섰다.
대원군에게 분서갱유를 단행한 진시황제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하지만 대원군은 물러서지 않았다.
"백성들에게 해가 되는 것이 있다면
내 비록 공자가 다시 살아난다 하더라도 용서치 않겠다.
(苟有害於民者 雖孔子復生 吾不怒之
구유해어민자 수공자부생 오불노지)"
- <근세조선정감>
백성들의 허리를 휘게 하는 낡은 제도를 고치는
아버지의 정치는 그 자체로 국정 운영의 스승이었다.
3. 父子의 엇갈린 부국강병의 길 - 강화도조약, 개항!
그렇다면 두 사람이 어긋나기 시작하는 것은 언제부터일까?
"서양 오랑캐가 우리를 침범한 것은 매우 통분할 일이다.
만일 화친하려는 자가 있다면 나라를 팔았다는 법조문을 적용하여 처단할 것이다."
- <고종실록, 1871. 4. 25>
"1871년 신미양요가 일어난 직후까지도
고종의 그런 생각은 변함이 없다는 것을
홍순목(洪淳穆)과의 대화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 강상규 교수
신미양요.
미국의 로저스호가 무력시위를 하며
강화도에 상륙한 것은 1871년 4월이었다.
홍순목은 결사항전을 촉구했다.
조선군은 53명의 전사자를 내었고
고종도 쇄국 정책을 지지했다.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양이침범 비전즉화 주화매국)'
("서양오랑캐가 침입했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해하는 것이고,
화해를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다.")
대원군에 대한 백성들의 지지는 폭발적이었다.
유생들은 대원군을 나라의 큰어른 '대로(大老)'라는
극존칭을 사용하자고 청원했고
고종은 승인했다.
"사실은 그런 상황을 지켜보던 고종도 쇄국 정책을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미국과의 전쟁을 치루면서 서서히 외부의 정보를 구체적으로 접하게 되고
고종의 사고에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조금씩 다른 생각을 하게 됩니다."
- 강상규 교수
신미양요가 일어난 1년 후,
청나라에 다녀온 사신을 접한 고종은 이전과는 다른 모습이 된다.
"떠날 때 이미 언급한대로 상세히 사정을 살피고 왔는가?"
"그러하옵니다. 장차 왜와 중국이 개혁을 하게 된다고 합니다."
(倭人而來要與中國通貨- 왜인이래요여중국통화)
"그렇다면 장차 중국인들은 왜인들을 어떻게 대접하게 되는가?
(然則中國將何以接待倭人乎 - 연즉중국장하이접대왜인호)
- 일성록 1872. 4. 4
의례적인 질문을 하던 때와는 완전히 달랐다.
고종은 국제 정세의 변화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왜(倭)는 중국(淸)에 신하로서 복종하지 않는데,
왜 중국은 왜(倭)와의 교역을 반대하지 않는가?
장차 왜와 중국이 교역을 한다는데 그게 사실인가?"
(倭國本非臣腹於中國 則胡不禁制乃反以通貨爲約耶
왜국본비신복어중국 즉호불금제내반이통화위약야
倭人與中國將有通貨之說云 果然乎
왜인여중국장유통화지설운 과연호)
"대국의 민심은 이전에 비해 어떠한가?
공친왕이 서양을 끌려들여 나라를 해치게 한다는 데
신하와 백성들의 민심은 어떠한가?"
(恭親王招入洋夷 內?國家臣民 或不無憤?之心乎
공친왕초입양이 내?국가신민 혹불무분?지심호)
고종은 그해 말,
박규수(朴珪壽, 1807(순조 7)~1876(고종 13))를 청에 파견했다.
박규수는 고종이 가장 신임하는 신하였다.
고종은 박규수를 통해
중국이 더 이상 세계질서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과
조선도 고립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을 키워갔다.
"더 이상 중국이 맘대로 세상을 좌지우지 할 수 없다는 한계를 느끼게 된 것이고
중국에 편승하여 문제를 해결하려고만 했을 때
조선 역시 고립될 수밖에 없다는 위기감을 느끼게 됩니다."
- 강상규 교수
박규수의 귀국과 더불어 고종이 관심갖게 된 부분이 또 있다.
"황제께서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친정을 하면서
백성들의 바램에 부응을 하신다는데 과연 그러한신가?"
청나라의 어린 황제가 섭정에서 벗어나 친정을 한다는데 주목했다.
어느덧 고종의 나이 21세.
더 이상 섭정의 명분이 없었지만
대원군은 여전히 국정운영권을 놓지 않았다.
그러다 급기야 탄핵 대상이 되고 만 것이다.
대원군의 하야.
급변하는 정세에 눈뜨기 시작한 고종은 친정과 함께
아버지 흥선대원군과는 다른 자신의 길을 걸어가기 시작한다.
하지만 흥선대원군이 정계에서 물러났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서로 다른 생각은 끊임없이 격렬하게 충돌했다.
강화도 초지진은
고종과 흥선대원군의 서로 다른 정책이 정면으로 충돌한 현장이다.
초지진의 성벽과 소나무에는 포탄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다.
당시 군함이 대포로 공격한 흔적이다.
고종의 친정이 시작된 직후
일본의 국교 재개 요구가 국정 현안으로 떠올랐다.
일본의 국서를 수용해야 일본과의 무력 충돌을 피할 수 있다는 고종과 개화파의 주장은,
대원군파의 거센 반발에 부딪혔다.
19세기 조선의 대외관계를 수록해놓은 <용호한록(龍湖閑錄)>.
여기에 일본의 국서 접수에 대한 대외 입장도 상세하게 실려있다.
대원군은 무력을 앞세운 일본군의 요구를 받아주면 안 된다는 입장이었다.
정계를 은퇴한 후에도 대외 영향력은 막강했다.
결국 박규수가 대원군 설득에 나섰다.
"내 거듭 말하지만 일본이 정책을 수정하기 전에는
서양과 한통속인 일본의 국서를 접수해서는 안될 것이오."
- 흥선대원군
"만약 저들이 대포소리를 내게 되면
그 이후에는 비록 국서를 바꾸자고해도
나라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다시 기회는 없을 것입니다."
- 박규수
"외세가 무력을 앞세우고 와서 강요하는데
우리가 그것을 들어줄 수 있느냐 하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물론 가장 이상적인 방법은
우리가 주체가 되어
우리의 주권을 다 존중받으며 체결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그 당시 이미 현실적으로 불가능했습니다."
- 주진오 교수
1876년 2월 3일 강화도 진무영.
조선은 대원군이 포대를 설치한 강화도에서
무력을 앞세운 일본과 불평등한 최초의 근대 조약,
즉 강화도 조약을 체결했다.
1840년 아편전쟁
1853년 일본 개항
1860년 베이징 함락.
급박하게 돌아가는 정세속에서 점점 대원군과는 멀어져갔지만
고종은 세계 근대 문물과 교류해
하루속히 부국강병을 이루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통리기무아문>은
그러한 고종의 구상을 실현한 국제통상업무 전담기구였다.
"실질을 중시하고
여기에 온 힘을 기울이는 것이
나라를 다스리는데 가장 시급한 일이다. "
- <고종실록, 고종21년 6. 15>
해외시찰단을 파견할 때 고종은 개인 사재까지 내놓았다.
무기 제조 기술을 배울 유학생을 청의 천진 기기국에 보냈다.
별기군을 창설해 신식군대라 불렀다.
고종의 개화 정책에 반대도 컸다.
유림들의 위정척사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그 무렵 고종을 제거하려는 역모 사건이 발발한다.
놀랍게도 역모의 주동자는 고종의 이복형 이재선(李載先)다.
이른바 '이재선 역모사건'이다.
대원군 지지 세력들이 유림과 손을 잡고
고종을 제거하려다 거사 직전에 체포된 것이다.
"개방 정책을 추진하려고 것이 당시 보통 유교 지식인들에게는
대단히 위험한 발상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개방 정책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대원군 주변으로 모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 강상규 교수
어긋나도 한참 어긋나버린 대원군과 고종.
그렇다면 흥선대원군이 추구한 부국강병의 길은 무엇일까?
군사 장비를 기록해놓은 <훈국신조군기도설(訓局新造軍器圖說)>
여기에 서구 열강에 맞서 힘을 키우고자 했던 대원군의 노력이 담겨져 있다.
대원군 집권기에 개발한 신무기들도 실렸는데,
그중의 하나가 '수뢰포'이다.
수뢰포는 수중에다 설치해 적선을 폭파하는 무기,
설치하고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수뢰포 내부에 물이 차오르고
수압이 올라 터지는 수중시한폭탄이다.
"자주적인 나라, 부강한 나라를 바라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다만 거기로 가는 길이 다를 뿐이지요.
대원군이 원하는 것은
비록 더디고 힘들지라도 우리 힘으로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외세 침략을 결코 용납해선 안 된다는 것이구요."
- 주진오 교수
목표는 같았지만 고종과 대원군의 길은 달랐다.
대원군은 먼저 우리 노력으로 힘을 키워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고종의 개화 정책에 반대하는 세력의 중심엔
늘 흥선대원군이 있었다.
더구나 고종을 폐위시키려는 역모사건까지 일어나자
고종과 흥선대원군은 더욱 멀어졌다.
4. 임오군란, 청으로 납치되는 대원군.
남대문 시장에 <선혜청(宣惠廳)> 표시석.
<선혜청>은
선조 41년(1608)~고종 31년(1894)까지 운영된 것으로,
지방특산물 대신,
대동미(大同米)와 포(布), 동전(錢)을 받아드리던
대동법(大同法)을 운영한 관아다.
1882년. 6월.
이곳에서 군인들에게 밀린 월급으로 지급한 썩은 쌀이 도화선이 되어
임오군란(壬午軍亂)이 발생한다.
별기군이 생긴 이래
푸대접을 받아온 구식군대의 불만이 폭동으로 발전한것이다.
여기에 개화 정책에 불만을 품은 백성들까지 가세하면서 심각한 사태로 치달았다.
임오군란은 흥선대원군을 정계로 복귀시켰다.
사태를 수습할 수 없었던 고종이 부른 것이다.
6월 10일 아침.
흥선대원군은 그렇게 고종과 마주했다.
9년만에 마주친 부자간의 만남.
고종은 임오군란의 사태 해결을 부탁하며
흥선대원군에게 전권을 넘겨준다.
"내 능력이 모자란 탓에 이처럼 전례없는 변란에까지 이르렀으니 누구의 탓으로 돌리겠느냐
지금부터 크고 작은 공문 일체를 대원군에게 하라"
- <고종실록, 1882. 6. 10>
"실제 폭동이 일어난 직후에 대안으로 해결할 사람은 흥선대원군 밖에 없었습니다.
실제 사람들이 흥선대원군에게 몰려갔었구요."
- 연갑수 교수(서울역사박물관 학예연구부장)
대원군의 조치는 파격적인 것이었다.
물가 상승의 원인이 되는 화폐 발행을 중지시키는 등
먼저 불안한 민생 안정부터 시켜나갔다.
"5군영과 삼군부를 부활시킬 것이며,
통리기무아문을 폐지할 것이다."
대원군은
고종의 핵심 개화정책기구인 통리기무아문을 폐지하고
모든 것을 옛 제도로 돌려두었다.
고종은 힘겹게 추진해온 개화정책을 되돌리는 대원군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그러나 대원군의 집권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정국 수습에 나선 지 3일째 되던 날. 대원군은 청나라군에 납치되었다.
대원군은 누구에게 알리지도 못한 채
마산포에서 중국의 천진으로 끌려갔다.
"청나라 입장에서 만일 그대로 대원군이 권력을 잡는다면
개항 이후 그동안 청나라와의 긴밀한 협조 관계 속에
문호 개방을 하고 있었던 조선 정부의 동도서기(東道西技)적인 정책이 물거품이 되고
다시 옛날로 돌아가는 것에 대해 대단히 우려한 것입니다."
- 주진오 교수
천진으로 납치된 대원군의 상황을 보여주는 문서자료가 남아 있다.
3.5미터의 중국제 두루마리에 씌여진 '흥선대원군 체진 비망록'
이것은 대원군이 천진에 억류되어 있을 때 쓴 친필일기다.
"도착했을 때 원기가 다 빠지고 혀가 말려들어가고
기운이 쇠하여 앉지도, 먹지도 못하였다.
약은 고사하고 한모금 물을 주는 이가 없었다.
서러워 흐느끼니 눈물이 쏟아졌다."
대원군의 천진 억류생활은 눈물로 시작되었다.
비망록에는 리홍장이 대원군을 심문하는 과정을 적고 있다.
"6월 9일 민란을 누가 일으켰습니까?"
"백성들과 군인들이 일으킨 것 같소."
"민란의 우두머리는 누구입니까? 합하는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10년간 물러나 산장에 있으면서 국정에 관여하지 않았소.
4일 저녁에 알았고, 또 국왕이 급히 불러 입성했을 뿐이오."
"대원군이 청에 잡혀가기전에 이미 중국에 먼저 간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냐면 이들이 리홍장에게 대원군이 주동자이기 때문에 영원히 청에 억류하라 청합니다.
대원군이 이 사람들에게 이를 갈게 됩니다."
- 성대경(前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대원군이 청에 납치된 것은
고종이 개화를 위해 청에 파견한 사절단,
영선사의 김윤식, 어윤중 등의 정보제공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 길로 대원군은 천진에 억류된 것이다.
그렇다면 대원군의 억류사실을 통고받은 고종은 어떤 태도를 취했을까?
고종이 대원군의 송환을 요구하는 사절단을 여러번 보냈다고 한다.
그런데 사절단이 나눈 대화 문서인
<청계 중일한 관계사료(淸季 中日韓 關係史料)>엔 이상한 대목이 보인다.
"국왕이 대원군의 귀국을 요청했는데 진정에서 우러나온 것인가?"
"국왕께서 대원군의 귀국을 요청한 것은 실로 사사로운 정 때문에 나온 것입니다."
"대원군의 귀국한다면, 잠재적으로 또 다시 고종을 몰아낼 수도 있다는 위기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따라서 실제로는 대원군의 봉환에 고종의 심정은 달갑지 않았을 것입니다."
- 연갑수 교수
대원군이 청에 억류된 지 23일째인 8월 5일.
이번에는 고종이,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실시한 제도를 폐지한다.
고종은 대원군의 쇄국정책을 상징하는 척화비들을 모두 제거하도록 한다.
"이미 서양과 조약을 맺은 이상,
서원과 지방에 세운 척화비를 모두 뽑아버리도록 하라.
(京外所立斥洋碑刻 故竝行拔去
경외소립척양비각 고병행발거)"
- <고종실록. 1882. 8. 5>
쇄국과 개화의 갈림길에서
고종과 흥선대원군의 서로 다른 생각은
임오군란을 통해 다시 한번 극명하게 드러난다.
"사람의 그림자도 없다.
오직 마음 붙일 사람이라곤 문 지키는 사병밖에 없는데
불러도 대답이 없고 말을 해도 알아들을 수가 없다.
(人跡無矣 而惟有附心者 門左守卒 然 呼之不應 聞言難解
인적무의 이유유부심자 문좌수졸 연 호지부응 문언난해)
- <흥성대원군 체진 비망록>중에서
청에 납치된 흥선대원군은 조선으로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 없는 처지였다.
청에 발이 묶인 흥선대원군은 이제 더 이상 예전에 서슬 퍼런 대원군이 아니었다.
단지 말이 통하는 내 나라로 돌아가길 간절히 원하는 평범한 인간이었다.
5. 일본 경복궁 점령
- 손자를 통해 아들 고종을 쫓아내려 하다!~
그런데 임오군란은 대원군이 청에 납치되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일본과 청이
한반도에 경쟁력으로 큰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직접적으로 개입하자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도 왜곡되기 시작하다.
<고종실록>에는
임오군란 직후에 대원군을 받드는 특별규정이 실려있다.
이른바 '대원군 존봉의절(大院君 尊奉儀節)'이다.
'가마는 8명이 메는 것으로 한다.'
'흉배는 거북의 무늬를 쓴다.'
'품대는 청색의 가죽에 수정을 박은 것을 한다.'
- <고종실록. 1882. 6. 12>
대원군이 타고 다닐 가마의 종류부터
흉배의 무늬에 이르기까지 너무나 사소한 규정까지 적고 있다.
1885년 8월.
청의 억류생활에서 3년만에 귀국한 흥선대원군은 예전과 달라져 있었다.
쇄국을 주장하던 그가 외국사절단을 연이어 초대한다.
그러나 그로부터 몇일뒤 운형궁 대문을 밖에서 걸어 잠그는 차단봉이 설치된다.
'대원군 존봉의절'에 새로운 규정이 추가된 것이다.
'대문에 차단봉을 설치한다.' - <고종실록. 1885. 9. 10>
대문 밖에는 관원을 배치 시켜
고종의 허가없이 외부인이 대원군을 만날 수 없도록 통제했다.
"조정의 신하들은 명을 전하는 것 외에 사적으로 만날 수 없다."
대원군이 귀국하자마자 이루어진 가택연금.
사람들로 붐비던 운현궁은 인적이 끊어졌다.
<매천야록>에는
이 당시 대원군을 암살하려는 자객이 운현궁에 침입하고
원인조차 알 수 없는 폭발사고가 일어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대체 무엇 때문에 이토록 가혹한 일들이 발생했는가?
"고종은 이때 계속 해서 청나라에 대해 저항적인 태도를 보입니다.
대원군이외에 고종을 견제할 수 있는 다른 세력이 없지요.
그래서 청나라는 대원군을 돌려보내 고종의 반청 움직임을 제어하려고 한 것입니다.
대원군이 돌아온 것은 고종의 정책에 저지, 대항이었습니다."
- 주진오 교수
청의 내정간섭이 심해지자
고종은 러시아와의 외교관계를 강화해
조선의 독립을 유지하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를 눈치챈 청나라가 대원군을 돌려보내 고종을 견제케 한 것이다.
"저들(중)이 우리와 마음을 함께 하고 힘을 합치자고 하지만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
우리도 부국강병책을 시행하는 것이 필요할 따름이다."
- <승정원일기. 고종19년. 2. 17>
심지어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청의 원세개는 고종 폐위론까지 거론했다.
<이문충공전집>.
리홍장의 문집에 당시 원세개가 고종 폐위를 내세운 편지 내용이 실려있다.
"고종을 폐위시키고 이씨 중에서 현명한 사람을 왕으로 옹립했으면 합니다.
이러한 취지를 이하응에게 전하고 서로 돕는다면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흥선대원군의 귀국과 함께 조선의 운명은 걷잡을 수 없는 국면으로 치닫고 있었다.
또한 농민군을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침투한 청나라와 일본 군대가 조선에서 대치하고 있었다.
1894년 7월 23일. 새벽.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한다.
일본은 조선군을 무장해제 시킨 뒤
친일 개화파 정권을 수립한 후 대원군을 끌어들인다.
일본이 조선의 심장부를 장악한 상태에서 이루어진
고종과 흥선대원군의 기막힌 만남.
"이제부터 일체의 정책을 대원군과 의결하도록 하라." - <고종실록. 1894. 7. 24>
"그가 생각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왕권이 주도하는 나라입니다.
개화파 관료가 주도하는 나라가 아니고
일본에 좌우되는 나라는 더욱 아니었습니다.
일본에 질질 끌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본인이 입궐해서 권력을 보다 바람직한 방향으로 잡아
일본에 대해 맞설 건 맞서고 그럴 수 있다는 대원군의 의지, 신념이 있었습니다."
- 주진오 교수
당시 <주한 일본공사 문서>에서 그 증거를 찾았다.
대원군이 평양에 주둔하고 있던 청나라에 지원군 파병을 요청하는 밀서가 실려있다.
"엎드려 바라옵건데, 많은 원병을 보내시어 우리를 보호해 주시고
일본에 붙어 매국하는 무리들을 제거해 주시기를 피눈물로 기원합니다."
- 흥선대원군 친서
그 뿐만이 아니라 대원군은 동학농민군에게도 밀서를 보낸 것이 확인된다.
"지금 왜구가 대궐에 침범하여 나라가 위기에 처했으니
너희들이 만약 오지 않으면 이 재앙을 어찌 하겠느냐."
대원군은 청나라군을 남하하게 하고, 동학군을 북상시켜
경복궁을 점령하고 있는 일본군을 쫓아내고
정권을 되찾겠다는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대원군의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실제 대원군파는 친일 개화파 인사 암살에 나서기도 했다.
그러나 대원군의 거사 계획은 일본군 축출에서 끝나지 않았다.
당시 역모사건 이름에 '이준용(李埈鎔)'이 등장한다.
놀랍게도 왕위 찬탈 음모로 기소된 이준용은
흥선대원군의 손자였다.
그렇다면 대원군은 고종을 끌어내리고 손자 이준용을 왕으로 세우려 한 것 일까?
"고종이야말로 그동안 나라를 망친 주범이라고 본 것입니다.
거기다 민씨 세력들까지말입니다.
민씨 세력을 전부 정치에서 몰아내고 유배보내고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제 자신이 고종이 망쳐놓은 나라를 다시 바로 세워놓겠다는 그런 생각이었습니다."
- 주진오 교수
6. 운현궁의 쓸쓸한 봄!~
대원군의 모든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오히려 일본에 이용당함으로써 아들 고종과 돌이킬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흥선대원군은
명성황후 시해사건(1895 을미사변)에 누명까지 쓴 채
운현궁에 유폐되었다.
이 시기 대원군의 상황을 생생히 전하는 뮈텔 주교의 일기가 발견되었다.
"최근 대원군이 그의 아들인 국왕과 화해를 하기 위해
나에게 중재를 해달라고 요청해 왔으나,
나는 이 제안을 거절했다."
- <뮈텔 주교 일기, 1897. 3. 8>
또 뮈텔 주교의 일기에는
대원군이 고종을 얼마나 애타게 만나려 했는지 적혀 있다.
"대원군이 또 미치광이 같은 짓을 했다.
집 주위에 근무하던 포졸을 때려 포승에 묶여 끌려갔다.
거기서 대원군은 대궐로 가서 왕을 만나는데 성공했다.
아마도 그것이 그가 바라던 전부였을 것이다."
-<뮈텔 주교 일기. 1897. 7. 그믐날>
1898. 6. 20.
흥선대원군은 이른 아홉의 나이로 눈을 감는다.
죽음앞에서
아들과 화해하려 했지만 끝내 하지 못했다.
흥선대원군은
부국강병의 꿈도, 아들도 잃고,
한줌 흙으로 돌아갔다.
흥선대원군과 고종이 살다간 구한말은
마치 뜨거운 불과 차디찬 물이 만나는 듯한 거대한 전환기였다.
아버지 흥선대원군도,
아들 고종도,
부국강병의 꿈을 이루기 위해 달렸다.
하지만 타협할 줄 몰랐던 흥선대원군이 아들과 대립하며 갈등하는 사이
그토록 갈구하던 부국강병의 길은 놓치고 말았다.
어쩌면 흥선대원군의 비극은
아들의 능력을 믿지 못한 아버지가
아들이 해야 할 정치마저 대신하려 한데서 비롯된 것 아닐까?
세상이 이미 달라지고 있었는데
그가 바라보고 지키려고 한 것은 오직 과거 아니었던가!
그리고 그것은 우리 역사의 비극이기도 했다.
- 한국사 전(傳)을 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