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마지막 선비: 강암(剛菴) 송성용(宋成鏞)선생
강암선생 ‘묵죽도’
강암(剛菴) 송성용(宋成鏞: 1913~1999)선생의 묵죽도(墨竹圖)를 보면 다음과 같은
‘금강경 야보송(金剛經 冶父頌)’중의 한 구절이 생각난다.
“ 대 그림자 뜰을 쓸어도
먼지하나 일지 않고
달이 물밑을 비추어도
물위엔 흔적조차 없네. ”
대숲에 이는 청량한 바람에 모든 것을 잊어버리게 되면서 시원한 마음의 모습이 저절로 드러나는 것 같다.
마치 대숲에 바람일 듯 시원함과 청량함이 가득 담겨져 있다.
강암(剛菴) 송성용(宋成鏞)선생은 20세기 호남을 대표하는 선비이자 서예가이다.
단순히 보이는 겉모습뿐만이 아니라 속까지도 모두 선비라는 말이 누구보다도
잘 어울리는 대쪽같은 선비였다. 마지막까지 한복을 곱게 입고 단정한 자세,
또렷한 정신으로 찍힌 사진들을 보면, 강암선생의 풍모를 다시 확인할 수가 있다.
강암선생 ‘묵죽도’
강암선생 ‘왕유시(행도수궁처 좌간운기시)’
강암선생은 전북 김제에서 구한말 호남의 유명한 유학자인
유재(裕齋) 송기면(宋基冕)선생(1882~1956)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호는 아석제인, 강암(剛菴)이라 했다.
어려서부터 글씨를 잘 썼으나, 부친이 서예가보다 학자가 되라는 권유로
공모전에 출품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부친께서 돌아가신 후에 처음으로
45세의 늦은 나이에 국전에 출품하여 연속해서 입선, 특선, 문공부장관상 등을 수상하였다.
국전에서 연속으로 서예, 사군자로 상을 받은 후 추천작가와 초대작가를 거쳐
심사 밎 운영위원도 역임하였으며, 각종공모전에서 20여회이상 심사를 하였고,
국내작가로는 처음으로 중국역사박물관에서 초대전을 가지기도 하였다.
또한 서예를 통한 교육사업을 위하여 연묵회를 창설하여 후진들을 가르쳤으며,
93년에는 재단법인 ‘강암서예학술재단’을 창설하여 소장작품과 재산을 전주시에 기부하고,
전주시에서는 ‘강암서예관(剛菴書藝館)’을 건립하여 개관하였다.
95년에는 서울에서 ‘강암(剛菴)은 역사다.’ 는 동아일보회고전을 개최하여 세상을 놀라게 하기도 하였다.
50세 이전까지는 주로 글씨를 즐겨 썼으나, 60세 이후부터는 글씨와 함께 사군자를 많이 그렸다.
사군자중에서도 대나무를 즐겨 그렸으며, 서예가이면서 대나무를 가장 잘 그리는 선비화가로
한국서단에 우뚝 서게 된다. 강암선생의 작품은 구도와 화제, 그리고, 농담과 기운 등이
잘 조화되어 특히 대나무에 관한 한 현대 한국의 문인화(文人畵)를 대표하고 있다.
옹골찬 산 계곡의 서늘한 바람처럼 강암선생의 묵죽도(墨竹圖)를 보고 있으면,
마치 대숲에 있는 듯한 청량한 기운이 저절로 스며들게 된다.
강암선생 ‘묵죽도’
강암선생의 묵죽도는 특히 대나무 그림과 글씨가 참 잘 어울린다.
옹골찬 대와 강암선생의 올곧은 글씨가 다르지 않고, 특히 대나무의 겉모습뿐만이 아니라,
대잎과 대속안의 텅빈 통영스러움이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강암선생의 묵죽도를 바라보면 대숲에 이는 청한(淸閑)한 기운이 전해지는 것 같아
마음이 시원해진다. 글씨와 그림이 잘 어울리고, 대잎으로 쓴 것 같은 꼿꼿함이 잘 드러나 보인다.
오랜만에 눈을 들어 벽에 걸린 강암선생의 묵죽도를 바라보니 대나무를 통해 피어나는
청한한 기운은 강암선생이 가신지 어언 이십여년이 되어가도 우리 주위에 가득 남아 있음을 알게 된다.
몇년전 가을 전주에 들러 강암선생의 서예관과 화랑에서 여러 진품들과 도록을 살펴 본 적이 있다.
특히 강암선생이 돌아가신 뒤 1년 후에 개최된 특별전도록을 통해본 강암선생의 세계는
정녕 이 시대 선비의 모습이 어떠하고, 어떻게 살아갔던가 하는 구체적인 모습을 살펴볼 수가 있어서 좋았다. 그것이 또한 곧 우리들의 살아가는 모습이어야 하기에 더욱 가슴 깊이 와 닿게 된다.
그중에서도 화제로 쓴 글들이 더욱 마음에 와 닿았다.
그 글씨중에 “기쁜 마음에는 시, 글씨, 그림이 있고, 지녀온 성품은 솔, 대나무, 매화와 같네
.(怡情有詩書畵 秉性如松竹梅)”는 내용이 있다. 그처럼 강암선생은 시서화(詩書畵)를 즐기며,
선비처럼 살다 가셨다. 그리고, “글씨와 그림은 정신과 기개가 담겨 있어야 고귀하다.
(用筆用墨 貴在神來氣束)”는 말처럼 강직한 성품을 바탕으로 절조가 서린 글씨와 그림을 남기고 가셨다.
특히 그중에서도 대나무그림은 강암선생의 진면목을 드러내는 진품들이다.
“대나무는 말할 줄 모르지만, 시원하게 온갖 시름 녹여준다(此君不解語 曠然銷百憂)”는
말처럼 강암선생에게 대나무는 누구보다도 변치 않는 군자였고, 평생을 같이한 친구였던 것 같다.
그리하여 대나무와 하나가 된 입장에서 대나무의 겉모습뿐만이 아니라,
대나무의 본질적인 절개와 청한함, 그리고, 그런 절조가 있는 그림으로 그려낼 수가 있었던 것 같다.
묵죽도의 화제중의 하나가 “대나무를 그린다는 것은 마치 문장으로는 맹자의 호연장(浩然章)이요,
글씨로는 구양수의 솔경체(率更醴)와 예천명(醴泉銘)과 같다. 순전히 기골(氣骨)을 위주로 삼는 것이지,
그 비슷하게 모방해서는 안된다. 겉모습을 모방할 수는 있지만, 그 이야기를 어떻게 쉽게 할 수 있겠는가?
(畵之於竹 如文之有鄒經浩然章 如書之有歐陽率更醴泉銘字
純以氣骨爲主 非模擬形似者 形可彷彿 誰然談何容易)”
한 잔의 차를 마시며 눈앞에 펼쳐지는 강암선생의 묵죽도(墨竹圖)를 보면서,
사계절 늘 푸른 대나무처럼 곧은 절개가 우리 주위에 가득하기를 바라게 된다.
강암선생 ‘묵죽도’
세상은 말한다.
오늘 노야老爺의 書가 藝와 道를 극極하였거니와 그 法이 또한 古體의 脈을 이어 千字文에 가 닿음이라. 春秋 七十八에 筆을 揮하시니 당년 八十 壽를 기리어 이 책을 엮는다. 종이를 이어 붙이지 않고 千 字를 한장에 통하였거니와, 그 천 자를 또한 한 墨에 이으심이 경외롭다, 글로써 근본을 열고 筆로써 서법을 전코자함이 老師의 평생이거니와,그 뜻이 一紙全張에 一筆揮之의 初有를 이루심이다.
-강암천자문 발간사에서-
1913년 김제군 백산면에서 출생
▲ 제5회 대한민국 미술전람회부터 입선 과 특선
▲ 1964년 전주에서 첫 개인전
▲ 1981년 대만 국립박물관 초대전
▲ 1992년 강암서예학술재단 창립
▲ 1995년 강암서예관 개관, 동아일보 초대 강암회고전 개최
▲ 전라북도미술전람회 심사위원장,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심사위원, 동아미술제 심사위원,
서울 예술의 전당 자문위원, 간재사상연구회장 역임
▲ 전북문화상, 대한민국문화훈장 수상
강암 선생의 유산
한국 서예의 정수이자 원로 서예가인 강암 송성용 선생의 족적은 70여년 동안 혼신으로 쏟은 붓글씨와 사군자 등 다양한 작품세계에 흔연히 남아있지만 무엇보다 강암서예학술재단과 강암서예관을 꼽을 수 있다.
강암의 예술과 뜻을 이어 서예의 학문적 연구와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서 지난 93년 발족된 강암서예학술재단은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서예학술 진흥을 위해 설립된 재단이다.
이재단은 강암이 후진을 양성하고 서예진흥을 위해 평생 서예작품활동을 하면서 모은 재산 10억여원을 기반으로 설립됐으며 재단 운영의 투명성을 위해 진기풍 前전북일보 사장이 이사장으로, 서예가 김승방씨와 산민 이용, 우산 송하경 등 5명이 이사로 활동하고있다.
이재단은 서예전문서적인 「동양예술총론」을 발간하고 춘·추계 서예학술강연대회를 갖는 등 서예의 학술적 연구작업을 활성화하는 등 서예를 단순한 붓글씨 차원에서 일종의 학문으로 정착시키는데 주력하고 있다.
재단은 또 후진양성을 위해 매년 전국 중·고교생과 대학생들이 출품한 서예작품을 엄정 심사한 뒤 우수학생을 선발, 장학금 1천3백여만원을 지급하고 있고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전국대학생 서예대전을 열어 올해로 세번째를 맞고 있다. 서예인구 저변확대를 위해 강좌와 강연회를 매년 봄과 가을 두차례씩 개최하는가 하면 21세기 젊은 작가 30인전이나 전국 여류서예가전 등 국내외 기획전시회를 마련해 서예가들의 창작의욕을 고취하고 있다.
국내 최초의 서예전문 전시관인 강암서예관도 강암의 발자취가 남아있는 곳이다. 전주시 완산구 교동에 자리한 이 서예관은 서예관련 문화유산을 보존하려는 생각을 가진 강암이 평생을 걸쳐 수집한 서적과 그림, 인장 등 1천1백62점과 대지 1천1백93㎡를 지난 90년 전주시에 기증한 뒤 세워졌다.
강암의 서예에 대한 애틋한 사랑이 빚어낸 강암서예학술재단과 강암서예관은 서예를 「예술에서 학문으로」승격시키는데 견인차 역할을 한데다 서예작품에 대한 발굴과 보존이 빈약했던 우리 풍토에서 새로운 서예문화공간으로 자리잡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서예의 대가
어렸을적부터 몸이 약했던 강암은 여섯살이 되던 해부터 이곳 요교정사에서 어린 학동들과 함께 천자문을 읽기 시작해 한학을 깨쳤다. 열여섯살되던 해에는 결혼을 해 분가하여 살림을 차렸다. 강암의 아내 李道南은 역시 선친 유재와 함께 간재의 문하에서 공부했던 완주출신의 유학자 고재 이병은의 셋째딸이었다. 결혼후 강암은 장인 고재로부터 학문과 서도를 사사했다. 그는 선친과 장인으로부터 받은 성리학을 바탕으로 그위에서 격조 높은 서도의 경지를 세웠던 것이다. 평생토록 학문 교류를 이어왔던 처남 이도형과 사서삼경을 비롯한 동양의 고전을 두루 섭렵하기 시작한 것도 이즈음이었다. 이도형은 후에 전주시 교동으로 거처를 옮기고 밀려가는 시대와 함께 퇴락해가는 전주 향교를 재건시키는데 큰 힘을 기울였으며 역시 당대의 문장으로 인정받았던 선비였다. 이미 열여덟살 되던해에 처조부의 묘비를 써 주위로부터 서예의 출중함을 인정받기 시작했다. 그는 당시 신학문을 찾아 서울로 떠나는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오히려 선친으로부터 받은 유학정신과 서도의 높은 경지를 다져나갔다.
스물다섯살때부터는 사군자에 눈을 떴다. 당시 매화와 죽을 잘그려 당대의 문인화가로 꼽혔던 김용진으로부터 사군자의 필법을 받았으며 김진우를 찾아가 서죽법(書竹法)강론을 듣기도 했다. 그의 학문과 서예 연마를 향한 열정은 중단되지 않았다. 정읍과 부안 개암사 장성 등지의 학문도량은 그가 당시 찾아다녔던 곳이다. 6·25 직후부터 그의 명성은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1956년 그는 주위의 권유로 대한민국 제5회 미술전람회에 행서와 묵죽을 출품해 입선했다. 당시 심사위원들은 그의 솜씨가 단순한 서학도의 솜씨가 아니라 어떤 파벌과도 연줄이 없는 점을 높이 평가했다고 한다. 66년에는 문교부장관상을 수상했으며 1970년대에는 자신이 출품했던 국전의 심사위원을 역임하는 등 서단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강암은 한편으로 유학의 도를 세우는 데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1960년에는 성균관 사성으로 피선되었으며 이후 유도회전북본부 위원장과 성균관 전학을 차례로 거쳤고 간재학회(艮齋學會) 회장직을 맡아 유학의 전통과 학맥을 이어가는 일에도 열정을 쏟았다.
강암의 서예는 1965년 전주시 완산구 교동 지금 살고 있는 곳으로 이주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국전 특선과 문교부장관상 수상이 이어졌던 67년에는 문하생들을 중심으로 연묵회를 조직, 전북 서예의 틀을 만들어냈다. 연묵회는 오늘의 한국서단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수많은 서예가들이 활동하는 단체가 되었다.
슬하의 4남2녀도 걸출하다. 장남 하철씨(前 전주시장·부지사), 차남 하경씨(서예가·성균관대 교수), 3남 하춘씨(소설가·고려대 교수), 4남 하진씨(행자부 민간협력과장) 등이 각계에서 활약하고 있으며, 2녀 현숙씨도 서예가로서 역량을 발휘하고 있다.
강암의 서예는 서예의 오체가 두루 고전에 의거하면서도 현대적 감각을 지녔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초년에 구양순첩에서 楷書를 익혔으며 董其昌에서는 행서를, 한예의 금석탁본으로는 예서를 배웠다. 중년이후에는 안진경을 비롯한 청대 대가를 두루 거쳤다. 추사의 운필법 또한 섭렵했다. 서죽법(書竹法)으로는 정판교와 오창순의 죽법을 깨쳤다.
오늘에 이른 강암의 서예는 고전의 현대화로 대변된다. 그의 서예는 「졸박한 멋과 극히 자연스러운 이미지, 칼날같은 강기가 아니라 바위를 닳게 하는 유수(流水)와 같은 리듬의 필력, 어떤 법식이나 자기류의 개성미에 매인 것도 아니고 정법에 머물면서도, 또한 정법에서 벗어나서도 속기의 자취를 찾을 수 없게한다」는 평을 받는다.
지난 95년 서울 일민문화관에서 열린 초대전에서 그의 생애와 작품세계에는 이런 찬사가 올려졌다. 「강암은 역사다.」 그 역사는 이곳 전북에서 오늘까지도 건재하다.
출처 : 전북일보, 전북인물 50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