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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재 영정(益齋影幀)
진감여
- 국보 제110호 -
이제현은 당대의 명문장가로서 외교문서를 잘 썼으며, 정주학(程朱學)의 기초를 확립시켰고,
조맹부의 서체를 도입하여 유행시켰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전해오는 이 <익재 영정>은
우안8분면에 공수 자세를 취하고 의자에 앉아 있는 전신교의좌상이다. 화폭의 상단에 익재
자신이 지은 찬문이 적혀 있어 이 초상화가 그려지게 된 시기와 연유, 그리고 훗날 다시
이 작품을 보았을 때의 감회 등을 살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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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우(원 인종의 연호) 기미년에 나는 나이 33세로 절강지방에 향을 내리러 가는 충선왕을 시종하였다.
왕은 고항 진감여를 불러 보잘 것 없는 나의 얼굴을 그리게 하였으며, 탕북촌은 찬을 지었다.
북(연경)으로 돌아와 (이 초상화를) 남한테 빌려 주었다가 그 소재를 모르게 되어버렸다.
그 후 31년이 지난 뒤 국서를 받들고 연경에 갔다가, 이 초상화를 보게 되었다.
노장의 달라진 얼굴에 놀라고, 이합에도 때가 있을을 느꼈다. 그래서 한口운으로 하여금 붓을
잡게 하여 사십자의 시를 구점(九占 시를 초고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읇는 것)하여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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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헌 영정(晦軒影幀)
- 국보 제111호 -
고려중기의 문인 안향(安珦, 1243~1306)의 초상화이다.
수 차례에 걸쳐 원나라를 내왕하면서 주자학 도입에 큰 역할을 하였다.
이 <회헌 영정>은 고려시대 초상화가 희귀한 현 실정에서 볼 때
고려시대 양식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회헌 영정 (부분)
송시열 상(宋時烈 像)
- 국보 제239호 -
조선후기 진경문화(眞景文化)가 발달할 수 있는 사상적 토대를 마련해준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초상화이다. 그는 특히 사대부와 유학자들이 '일호불사(一毫不似)'론(論)과 '묘무이주(廟無二主)'론의
억압을 벗어나 초상화를 생활화 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를 마련해 주고 스스로 적지않은 초상화를 그리며
이를 적극적으로 실천하여 18세기의 진경시대에 초상화가 크게 발달할 수 있는 전기를 마련해 주었다.
천한 무리로 띳집에 살며
창 밝고 인적 고요할 제
주림을 참으며 책을 보건만
네 모습 초췌하고 네 학문 공소해
하늘의 명령 저버리고 성인의 말씀 모독했으니
진정으로 너는 책벌레에 불과하도다.
승정 기원후 신묘년(효종 2년, 1651)에 우암 노인이 화양서원에서 스스로 경계하다.
윤두서 상(尹斗緖 像)
- 국보 제240호 -
국중거부(國中巨富)로 일컬어지던 막대한 경제력과 문예(文藝)는 물론 잡학(雜學)에도 밝았던
박학풍(博學風)의 가학 전통위에 명청대(明淸代)의 다양한 학문과 예술까지 풍부하게 수용하고
창의적으로 소화한 뒤 조선후기 사실주의 회화의 새로운 장을 여는 선구적인 업적을 남겼는데,
이 자화상은 놀랍도록 빼어난 용모를 정교하고 엄격하게 묘사했을 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초상화의 전형을 벗어난 새로운 시각을 창의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조선후기 사실주의 회화의
선구자로서의 모습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기념비적 걸작으로 특히 주목되어 왔다.
6척도 안 되는 몸으로 세상을 초월한 뜻이 있고,
긴 수염 나부끼며 얼굴은 붉고 윤택해 이를 본 사람들은그가 도사나 검객인줄 알지만,
그 진실하고 겸손한 모습은
대개 행실이 성실한 군자에게도 부끄러울 것이 없네.
내 일찍이 그를 평해 이르기를
풍류는 옥산 고덕휘 같고 빼어난 기개는 승지 조맹부 같다고 하였으니,
진실로 천년 뒤에라도 그를 알고자 하는 자는
다시 먹과 채색으로 닮은 데서 찾을 필요 없으리.
금강전도(金剛全圖)
- 국보 제217호 -
일만 이천봉 드러난 뼈를 뉘라서 뜻을 써서 참모습을 그려내리
뭇향기는 동해 끝 해솟는 나뭇가지 까지 떠 날리고
쌓인 기운 웅혼하게 혼 누리에 서렸구나
암봉은 몇 송이 연꽃인 양 현묘한 도의 문을 가렸어라
설령 내가 발로 직접 밟아보자 한들 이제 다시 두루 걸어야 할 터
그 어찌 베게 맡에 기대어 실컷 봄만 같으리오!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
- 국보 제216호 -
삼각산 봄구름 비 보내 넉넉하니,
만 그루 소나무의 푸름 빛 그윽한 집을 두른다.
주인옹은 반드시 깊은 장막에 앉아 홀도 하도(河圖)와 낙서(洛書)를 완상하겠지.
심(深)은 수(垂)로도 쓴다.
- 임술 초여름 하한 만포가 쓰다. -
군선도병(群仙圖屛)
김홍도
- 국보 제139호 -
이 작품은 김홍도의 신선도로서 남아있는 작품 중 대표작이며
연대가 알려져 있는 신선도 중 가장 이른 시기의 작품이다(1776년)
또 8폭 병풍 전체를 하나의 호면으로 사용한 신선도 중 유일한 예이다.
국보 제135호
신윤복
1810년 경의 화첩으로, 유사한 주제 30점이 모두 같은 크기의 종이에 화사하고 섬세하게 구사한
수묵과 담채의 그림들이다. 1936년 위창 오세창이 작품마다 제목을 부여하였고, 별도의 발문을 남기기도 했다.
조선후기 풍속화의 전형을 김홍도가 완성했다면 신윤복은 이를 매듭지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
주사거배酒肆擧盃
아미타삼존도阿彌陀三尊圖
고려시대
- 국보 제218호 -
이 아미타삼존도는 관음보살이 대좌를 들고 허리를 굽히고 있는 점.
왕생자가 표현되어 있는 점 그리고 아미타여래가 머리에서 빛을 놓아
왕생자를 비추고 있는 점이 도쿄국립박물관, 호도지(法道寺) 등에 소장되어 있는
고려의 일반적인 내영도상과는 아주 다르다. 고려시대 경전의 내용을 가장 충실하게
표현한 아미타내영도라는 점에서 주목 할 필요가 있다.
부석사 조사당 벽화 浮石寺 朝師堂璧畵(부분)
(흙벽에 채색)
- 국보 제46호 -
이 벽화는 여성의 형상을 한 두 면과 무장상(武將像)의 네 면 즉,
모두 여섯 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조사당은 부석사 창건주인 의상대사의 진영을 모시기 위하여 세워진 건물로
이들 벽화는 당연히 호법의 기능으로 벽면을 장식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벽화들은 일제강점기 때
벽면에서 떼어냈다고만 전해질 뿐, 정확한 저간의 사정을 알 수 없고, 현재는 각각을 유리 액자에 넣어 보관하고 있다.
이 부석사 조사당 벽화는 원형을 많이 잃었으나 고려시대 벽화의 경향을 전해주는 매우 소중한 그림이다.
칠장사 오불회괘불탱
조선시대
- 국보 제296호 -
높이 6,56미터로 화승 법형이 으뜸 화원이 되어 조성한 작품이다.
화면을 삼등분하여 화엄종의 삼신불사상을 나타낸 상단과 법화종의 삼세불 중
약사불과 아미타불 2불을 중단에 배치함으로써, 삼신불과 삼세불이 혼합된 형식의 오불회를 표현하고 있다.
갑사 삼신불괘불탱
- 조선시대 -
비로자나불이 주존불이 되고 노사나불과 석가모니불 3불이 한 조를 형성한
비로자나삼신불 그림으로 한 폭에 그린 1폭식 삼신불 괘불화이다.
한 화면에 비로자나 삼신불이 완전하게 표현된 전형적인 삼신불회도 형식의 그림으로
길이가 12.47미터에 이르는 초대형 괘불화로, 화면을 3단으로 구분지어 중앙단의 삼신불을 중심으로
상. 하단에 걸쳐 각 불의 협시보살과 사천왕 및 기타 권속들을 거의 빈틈없이 배치하는 등 매우 복잡한 구성을 보인다.
화엄사 영산회괘불탱
- 조선시대 -
조선 전기 영산회상도으 대부분이 일본 등지에 산재된 반 면 임진왜란(1592)과 정묘재란(1627),
병자호란(1632)등의 전쟁을 치른 후 불교사찰의 재건으로 새로 조성된 조선후기 불화 중 화엄사
영산회괘불탱은 석가삼존이 모두 좌상인 점 등에서 15세기 영산회상도의 특징을 계승하고 있으며
18세기 석가삼존입상의 영산회괘불탱과는 구별 된다.
장곡사 미륵불괘불탱
- 조선시대 -
국보 제300호
'보관을 쓰고 꽃을 들고 있는 여래'를 본존으로 한 보관불형식에 속하는 작품 가운데 하나이다.
화폭 중앙에 8미터가 넘는 화폭에 꽉 찰 정도로 큼직하게 입상의 본존을 배치하고 본존의 양 옆으로
6여래와 6보살, 10대 제자, 사천왕과 범천, 제석천, 여러 천자및 천동 등 총38명의 권속들을
좌우대칭으로 배치하였다.
연가7년명 금동여래입상延嘉七年銘 金銅如來立像
- 국보 제119호(삼국시대) -
대좌와 광배 등 삼부작이 완전히 갖추어졌을 뿐만 아니라 광배 뒷면에는 긴 명문까지 새겨져 있어
초기 한국불교 조각사에서 가장 중요한 자료이다.
불상의 뒷면에는 명문이 새겨져 있어 귀중한 자료가 된다.
연가 7년이 되는 해에 고구려의 서울 평양 동사(東寺)의 주지 경(敬)과 연(演)을 비롯한
사제 40인이 함께, 편재 1천불을 만들어 세상에 널리 유통시키고자 하였는데
이것은 29번재 부처님이다.
금동계미명삼존불 金銅癸未銘三尊佛
- 국보 제72호(삼국시대) -
이 불상은 고구려 불교문화의 기반이 다져졌던 6세기 중엽 무렵(563)에
만들어진 삼국시대 금동제 일광삼존불의 대표작이다.
금동미륵보살반가상
- 국보 제78호(삼국시대) -
국보 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상과 더불어 삼국시대뿐 아니라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귀중한 불상이다. 미소 짓는 둥근 얼굴 모습이 매우 아름다우며, 전체적으로 탄력이 있으며
정돈된 음각선의 옷주름 선이 빚어내는 조형성과 어우러져 정적이면서도 사유하는 정신성이
두드러져 보이는 불상이다.
한편 이 반가상을 조성한 나라가 삼국 중 어디인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일치된 의견을 얻지 못하고 있는데, 그 첫 번째 이유는 이미 일제시대 초기인 1912년 경에
국보 83호 반가사유상과 더불어 현지에서 비밀 반출되어 조선총독부에 기증되는 과정에서 출토지나
관련된 자료를 잃어버려 제작국의 파악에 많은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금동미륵보살반가상
- 국보 제83호(삼국시대) -
금동제 반가상들 중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상이다.
반가상이라는 독특한 자세에도 불구하고 어색한 부분이 없이 자연스럽고 뛰어난 조각수법을 보여주어
석굴암 불상과 더불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매우 귀중한 불상이다.
머리에 삼면이 각각 중근 산 모양을 이루는 특이한 삼산관을 쓰고 있어서 금동삼산관사유상이라 불리기도 한다.
이 역시 삼국 중 어떤 나라의 불상인가에 대해선 결론이 나지 않았다.
이 반가사유상의 특징을 종합해 보면, 전체적으로 장식이 제거된 반면에 사실적이고
입체적인 조형성이 돋보이는 불상이라는 점이다.
이와같은 특징은 국보 78호 금동미륵보살반가상의 입체성보다
장식적인 선의 흐름이 강조되는 조형성과는 서로 반대되는 특징이다.
공주 의당 금동보살입상
- 국보 제247호(삼국시대) -
얼굴이 넓고 눈두덩이가 약간 부은 듯한 것은 삼국시대 7세기의 조각 양식을 따른 것이며,
천의(天衣)의 유연한 처리방식이나 무릎 밑에서 교차되는 점 등은
이 상이 백제의 말기에 해당되는 상임을 알 수 있다.
특히 넓적한 얼굴에 여유 있는 미소나 자연스럽게 늘어진 옷주름 처리는 백제불상의 특징을
따른 것이다. 그러나 영락장식이 목걸이에서 갈라져서 역 'Y'형으로 늘어진 형식이나
머리카락의 결이 빗을 듯이 정리된 모습은 이 시기의 다른 보살상에서는 보기드믄 특이한 형태이다.
금동보살입상
- 국보 제183호(삼국시대) -
양감이 풍부한 사실적인 얼굴과 유연하고 가느다란 신체에서 뛰어난 조각기법을 느낄 수 있는
우수한 금동보살상이다. 통통한 양 뺨과 둥근 특선이 아름답고 이목구비의 표현도 자연스럽다.
부드러운 미소를 띤 입가와 가늘게 뜨고 있는 두 눈. 반듯한 콧날은 살아 있는 사람의 얼굴처럼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위로 들어 올린 오른손은 동그랗게 오무려서 엄지와 검지 손가락으로 연꽃 봉오리 같이 생긴
보주를 들고 있는데, 이와같은 표현은 부여 규암면에서 출토된 백제 금동보살입상(국보 제293)과 유사하다.
불국사 금동비로자나불좌상
- 국보 제26호(통일신라 8세기 후반) -
높이 177센티미터에 이르는 대형 금동불이다.
양감이 풍부한 이목구비와 곧추 세운 상체에 손을 가슴 앞으로 모아 한 손가락을 펴고
이를 손바닥으로 감싸는 지권인(智拳印으 수인이 특징적이지만 왼손의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는
일반적인 방식과는 반대의 손 모습을 하고 있다.
편단우견의 법의는 풍만한 몸에 밀착되어 신체를 강조하였으며, 단순하면서도 일률적인 옷주름은
중간에서 끊겨 있지만 주름 사이의 양감 처리는 매우 우수하다. 결과부좌한 무릎은 매우 넓어
안정감이 있으며 앞으로 튀어나온 가슴의 팽창감도 뛰어나다.
목조삼존불감
- 국보 제42호 통일신라(8~9세기) -
석가불과 문수, 보현보살로 구성된 석가삼존불감은 송광사 목조불감이 현존하는 유일한 예이다.
불감의 조각은 매우 섬세하며 석가삼존불과 그 권속들이 복잡하게 새겨져 있는데 전체적으로
대단히 정교하다. 이 불감은 당대(唐代)의 조형적인 요소가 거의 망라된 다양한 특징이 나타나며
매우 사실적이고 정교한 조각기법을 보이고 있다.
부석사 소조여래좌상
- 국보 제45호 고려시대(11세기) -
무랑수전의 본존불로 모셔진 높이 278센티미터의 소조상이다.
전각의 정면이 아닌 측면의 높은 불단 위에 앉아 있다. 즉 동쪽에서 서쪽을 바라보는 위치인데
이는 우리나라가 사는 사바세계에서 서쪽으로 무수한 불국토를 지나면 극락세계가 있음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구조이다. 이 불상은 우리가 죽은 뒤의 내세와 관련되어 있는 아미타불상이다.
아미타불은 대체로 설법인(設法印)을 취하지만 이 불상은 오른손은 향마촉지인을,
왼손은 선정인(禪定印)으 자세를 취하고 있다. 단순하게 손의 형상만으로 본다면 이 불상은
석가불을 의미한다 즉 손의 모습은 석가모니의 깨달음의 순간을, 무량수전이라는 전각의 이름과
그 봉안 위치는 아미타불ㅇ르 상징하는 이중적이고 복잡한 교리와 신앙의 모습을 담고 있는 것이다.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좌상
- 국보 제221호 (조선시대 -
이 문수동자상은 세조의 따님이 발원하여 조성한 왕실발원 불교조각으로 당대 최고의 걸작이다.
더구나 이 상의 복장에서 조선 초기 불교 및 불교예술과 복식연구에 귀중한 자료들이 쏟아져 나와
그 진가를 더욱 높여 주었다.
가슴이 발달하고 허리가 잘록하면서 둥글고 양감 있게 표현한 상체는 여성적인 보살형이어서
일반동자상과는 다른 편인데 이것은 아마도 동자형 보살상을 표현하는 방법이 아닌가 한다.
얼굴은 동자형, 신체는 보살형으로 나타내어 동자형 문수보살상을 표현하고자 한
의도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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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내용 모두는
지난 2007년 12월 20일 '문화재청 동산문화재과' 에서 발행한
"한국의 국보" 중 내용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