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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31. 묵상글 (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사제 기념일. -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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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31.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사제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오늘 주님의 비유를 풀이하면 이렇습니다.
하늘나라는 보물입니다.
모든 것을 다 팔아 살만큼 대단한 보물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습니다.
그래서 눈이 없는 사람은 그것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면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으라!”라는 시편이 생각납니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하느님 나라가 얼마나 좋은지,
우리가 맛보고 깨달았다면 모든 것을 팔아서라도 그것을 살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맛보지 못하고 깨닫지도 못합니다.
왜냐면 그것은 세상 단맛들에 감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쓴맛 덕분에 천국 단맛을 찾게 해야 합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예레미야서는 우리에게 의미가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사람들의 저주를 받는 덕분에 하느님 말씀에서 위로를 받습니다.
“빚을 놓은 적도 없고 빚을 얻은 적도 없는데 모두 나를 저주합니다.
그러나 당신 말씀을 발견하고 그것을 받아먹었더니
그 말씀이 제게 기쁨이 되고 제 마음에 즐거움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칭찬과 사랑을 받을 수 없으니 방향을 하느님께 돌린 것입니다.
사람에게서 칭찬과 사랑을 받았다면 결코 하느님께 눈을 돌리지 않았을 겁니다.
한 사람에게서라도 칭찬과 사랑을 받았어도 하느님께 눈을 돌리지 않을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레미야처럼 인간의 저주를
주님의 강복으로 바꿔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저희들 행진단이 요즘 그렇습니다.
비가 오면 비를 은총의 비로 바꿔 듣습니다.
은총으로 바꾸지 않으면 자기만 손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너무 아름다운 것들을 보면 그것에 빠지는 일도 많습니다.
어제는 북한강 길을 걸었는데 물안개가 너무도 아름다웠습니다.
그때 물안개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유행가가 제 입에서 흘러나왔습니다.
그러다가 술에 취하듯 물안개의 아름다움에 흠뻑 취해
하느님을 찬미하지 않는 저를 보고는 슬펐고 그래서 이내 노래를 멈췄습니다.
그러면서 지혜서의 경구가 생각났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무지가 그 안에 들어찬 사람들은 본디 모두 아둔하여
눈에 보이는 좋은 것들을 보면서도 존재하시는 분을 보지 못하고
작품에 주의를 기울이면서도 그것을 만든 장인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런데 그 아름다움을 보는 기쁨에서 그것들을 신으로 생각하였다면
그 주님께서는 얼마나 훌륭하신지 그들은 알아야 한다.
아름다움을 만드신 분께서 그것들을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분의 업적을 줄곧 주의 깊게 탐구하다가
눈에 보이는 것들이 하도 아름다워 그 겉모양에 정신을 빼앗기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칭찬을 받을 때 정신을 차려야 하고,
아름다움을 볼 때 정신 차려야 하며,
좋은 것들이 우리 눈앞에 있을 때
그것들이 보물을 숨기는 밭이기에 오히려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하늘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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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31.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사제 기념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혼자 여행을 갔을 때입니다. 점심시간이 되어 인터넷 검색으로 맛집을 찾았습니다.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 짬뽕 맛집이 있었습니다. 메뉴는 딱 두 개였습니다. ‘짬뽕과 탕수육’. 그런데 사람이 많아도 너무 많았습니다. 그래도 ‘언제 이 집에 와서 짬뽕을 먹어보겠어?’라는 생각으로 줄을 섰고,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 제 차례가 되었습니다. 마침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 사람이 있어서 들어갔는데, “상 다 치우면 들어오라니까요.”라면서 짜증을 냅니다. 뻘쭘하게 앉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서서 상 다 치우는 것을 지켜보고 있어야 했습니다.
자리에 앉자, “무엇을 드릴까요?”라고 퉁명하게 묻습니다. “짬뽕과 탕수육만 있는 거죠?”라고 묻자, “메뉴 보면 알잖아요.”라고 대답하십니다. “물은 어디 있나요?”라고 물으니, 어디 있는지 가르쳐주지도 않고 “물을 셀프입니다.”라고 말만 합니다. 기분이 너무 안 좋았습니다. 한마디 하려다가 다시 오지 않을 집이라는 생각에 참았습니다. 음식은 맛있었을까요? 별로였습니다. 그냥 평범한 짬뽕 맛입니다. 기분도 좋지 않아서 두 젓가락 먹고 그냥 나왔습니다. 화났다는 것을 이것으로라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제 감정을 눈치챘는지 주인은 계산하면서 이렇게 말하더군요.
“죄송합니다. 오늘 손님이 너무 많아서 힘들었어요.”
더 짜증이 났습니다. 짜증의 원인이 손님이라니…. 결국 저 때문에 짜증이 났다는 말이 아닙니까?
누구나 남 탓하는 사람 곁에 있고 싶지 않습니다. 감사할 이유보다 자기 힘든 것만 생각하는데 어떻게 가까이 있을 수 있을까요? 맛집이 된 이유가 단순히 음식 맛 때문일까요? 근본적으로는 이 집을 찾는 손님 때문이 아닐까요? 나중에 보니 결국 폐업했습니다. 손님에게 감사하지 않으니 망하지 않으면 이상한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 식당 주인에게 중요한 것은 맛있는 음식을 먹으러 오는 손님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손님을 짜증의 대상으로 생각하니, 장사가 제대로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중요한 것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밭에 숨겨진 보물을 발견한 사람이 밭을 산다는 것, 좋은 진주를 발견한 상인이 가진 것을 모두 처분해서 그것을 샀다면서 가장 중요한 것을 어떻게든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좋은 것 발견하면 수단과 방법을 모두 동원해서 죄를 지어서라도 자기 것을 만들라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하고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고 그것을 자기 것을 만들기 위한 노력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이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사랑의 삶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랑을 마치 하나의 짐으로 생각하고 계속해서 남 탓만 했던 것이 아닐까요? 남 탓만 하다가는 우리도 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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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죽음은 삶의 적이 아니라 친구라는 생각이 가끔 든다. 언젠가 끝이 있다는 사실 덕분에 삶이 더 소중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존 릴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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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31.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사제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이 세상에서, 가장 값지고 소중한 것은 무엇일까?
절대 최고의 가치를 지닌, 내 목숨을 내어주고서라도 얻고 싶은, 참된 행복, 참된 기쁨, 참된 보물, 그것은 대체 무엇이며, 어디에서 얻을 수 있을까?
오늘 <복음>에서는 우선 그 ‘보물’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려주십니다.
그것은 “밭에 묻혀있는 보물에 비길 수 있다.”(마태 13,44)
이는 그 ‘보물’이 멀리 하늘 위에 높이 매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땅에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이곳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나의 일터인 내 직장, 내 가정, 내 공동체가 바로 보물이 묻혀있는 “밭”이라는 말씀입니다. 곧 “보물”은 내가 있는 이곳에 ‘이미 묻혀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하늘나라는 바로 너희 가운데 있다.”(루가 17,21)
그렇지만, 그 보물은 누구나 발견하는 것은 아닙니다. 밭을 충실히 일구고 가꾸는 자만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어떤 장사꾼이 좋은 진주를 찾아다니는 것에 비길 수 있습니다.”(마태 13,45). 우리의 머리속, 관념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진주를 찾아다니는” 행동 안에 깃들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길을 찾는 발길 그 안에, 진리를 더듬는 손길 그 안에, 사랑을 찾아나서는 우리의 행위 그 안에서 찾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곧 하느님을 찾아나서는 신앙의 여정, 신앙의 행위 그 안에 깃들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그 진주는 누구나 발견하는 것은 아니라 열심히 찾아다니는 자만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가운데 이미 와 있는 이 “하늘나라”를 어떻게 얻을 수가 있을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그것을 샀다.”(마태 13,44.46)
이는 “하늘나라”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곧 우리가 비록 보물을 발견하고 찾았다 해도, 그것이 곧바로 우리의 것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진정 그 보물을 차지하려면, “먼저” “가진 것을 다 파는 일”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목숨가지 내놓으셨듯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먼저 비우지 않고는 채워지지 않는 법인가 봅니다. 그러나 비우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는” 일입니다. 사는 일이 본질이지, 비우는 일이 본질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모든 것을 합한 것보다 그 보물이 더 값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실제로, 중요한 것은 그것을 “사는” 일입니다. 비록 보물을 발견했다 해도, 또 가진 것을 다 팔았다 해도, 그 보물을 실제로 사들이기 전에는 아직 그 보물은 자신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살 때라야, 그것은 비로소 자신의 것이 됩니다. 하지만 보물이 없다면, 결코 그것을 살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분명한 것은 그 보물이 “먼저” 주어졌다는 사실이요, 그 보물이 우리를 이끈 것입니다. 이미 우리 가운데 있으면서(루카 17,21) 말입니다.
그러니 그 이끄심에 응답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리하여 그 보물을 차지하는 자가 참으로 복된 자입니다. 그 보물은 다름 아닌, 우리 주님 그리스도요, 그분의 나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하늘나라는 밭에 묻혀있는 보물에 비길 수 있다.”(마태 13,44)
주님!
밭을 일구는 제 손길이 당신의 나라를 찾아 발견하게 하소서.
발견하고서 가진 것을 다 팔아 사게 하소서.
그 모든 것을 합한 것보다 더 값지고
그 모든 것을 합해도 그보다 나을 수 없는
그것을 가지면 모든 것을 가진 것이기에
목숨을 내어주고서라도 바로 그것을 얻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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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31.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사제 기념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진정한 보물, 하느님만으로 충분하다
아무리 값진 보물이라고 해도 어떤 사람의 눈에는 보이고 어떤 이에게는 보이지 않습니다. 값진 진주를 찾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찾아다녀야 얻을 수 있습니다. 애쓰지 않는 사람이 보물을 발견할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에게 주어진 소중한 보물이고 따라서 보물을 얻기 위한 희생과 헌신이 요구됩니다(마태13,46).
값진 보물을 발견했으면 그것을 손에 넣기 위하여 그보다 못한 것들을 처분하게 됩니다. 새 옷을 장만하면 전에 입던 옷을 정리하게 되듯이 더 좋은 것을 얻으면 하나는 자연스럽게 정리됩니다. 하느님을 제대로 차지하면 다른 모든 것은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필리피 신자들에게 말합니다.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필리3,7-9). 내가 참으로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볼 때입니다.
마태복음 19장의 부자 청년 이야기를 보면,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겠다고 온 젊은이에게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하셨습니다. 그러나 젊은이는 이 말씀을 듣고 슬퍼하며 떠나갔습니다. 그는 주님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는 희망을 지니고 있었지만, 자기의 재산을 포기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주님 앞에서는 양다리 걸치기나 어중간은 없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큰 것을 위해 작은 것을 포기할 줄 아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무엇이 참으로 가치가 있는 것인가를 식별할 수 있는 지혜가 요구됩니다. “하느님을 버리기보다는 차라리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이, 훨씬 더 낫습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의 기도입니다. “아무것도 너를 슬프게 하지 말며 아무것도 너를 혼란케 하지 말지니 모든 것은 다 지나가는 것, 다 지나가는 것. 오 오 하느님은 불변하시니 인내함이 다 이기느니라.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은 모든 것을, 소유한 것이니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도다.” 결국, 하느님을 얻으면 모두를 얻은 것이요, 모든 것을 얻어도 하느님을 차지하지 못하면 아무것도 얻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느님의 나라를 성인들이나 가는 곳으로 어렵게만 생각한다면 아무 발전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허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마태6,33)을 구하고 그리하여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는 희망을 지녀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심판하러 오지 않으시고 오히려 구원하러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상황 안에서도 실망과 좌절보다는 하느님의 자비를 갈망해야 합니다.
보물이 있는 곳에 사람의 마음이 머물고 세상의 어떤 것도 다 보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쟁기를 잡고 뒤를 자꾸 돌아다보지 말고’(루카9,62) 내 삶의 자리에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참 보물을 찾으시길 바랍니다. “주님, 정녕 당신은 저의 등불이십니다. 주님께서는 저의 어둠을 밝혀 주십니다”(2사무22,29). 이제 당신이 밝혀 주시는 보물을 차지해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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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31.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사제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어느덧 7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미국의 라스베이거스에는 유명한 카지노가 있습니다. 카지노에서 게임을 하기도 하고, 공연을 보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카지노를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대박을 꿈꾸기 때문입니다. 그곳에 노다지가 묻혀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적당히 즐기면서, 공연을 보는 건 좋지만, 노다지를 찾겠다고 올인하면 자칫 몸도 상하고, 가진 재산도 모두 날리게 됩니다. 한마디로 패가망신하게 됩니다. 매일 복권을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대박을 꿈꾸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 노다지가 묻혀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적당히 즐기면 좋지만 복권에 올인하면 역시 몸도 상하고, 영적으로 메마르게 됩니다. 주식에 투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대박을 꿈꾸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노다지가 묻혀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달걀을 한 바구니에 담지 말라는 말처럼 투자는 분산해서 하면 좋다고 합니다. 적당한 투자는 좋지만, 주식에 올인하면 하루아침에 모든 걸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저는 카지노, 복권, 주식에 별 관심이 없습니다. 할 줄도 모르고, 일단 겁이 많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늘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숨겨 두고서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또 하늘나라는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과 같다. 그는 값진 진주를 하나 발견하자, 가서 가진 것을 모두 처분하여 그것을 샀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밭은 ‘카지노’가 아닙니다. ‘복권’도 아닙니다. ‘주식’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밭은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고기 잡던 어부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셨습니다. 교회를 박해하던 바오로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바오로는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밭은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고,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표징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밭은 ‘실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몸소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을 부른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건 아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 들어간다.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고 실천하는 사람이 바로 나의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
오늘은 이냐시오 성인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영신수련’이라는 보물을 우리에게 남겨 주셨습니다. 영신수련은 4주간에 걸쳐서 하느님의 사랑, 예수님의 생애를 묵상하는 길잡이입니다. 준비기도, 구할 은총, 주어진 성서말씀 묵상, 마침기도, 묵상내용 정리의 순서로 30일 동안 하루에 5시간 정도 기도하는 프로그램입니다. 저는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으로 10년 동안 신학생들과 함께 30일 피정을 하였습니다. 지금은 미국 있기 때문에 아쉽게도 30일 피정에 함께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영신수련은 그 내용이 모두 좋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핵심은 ‘원리와 기초’입니다. ‘사람은 하느님을 믿고 따름으로 구원을 받아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태어났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에게 이 세상 모든 걸 사용할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다만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데 유익하면 그것을 사용할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버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건강보다 질병을 택할 수도 있고, 부유함보다 가난함을 택할 수도 있고, 오래 사는 것보다, 단명함을 택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삶의 기준은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다미안 신부님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나병환자가 되는 길을 택하였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스스로 가난한 이가 되었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께서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순교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우리는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서 큰 노력을 기울입니다. 기꺼이 기러기 아빠가 되기도 합니다. 자녀들의 성공을 위해서 희생을 감수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고,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세상에서의 성공을 위한 노력보다 더 큰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의 손에 작은 가시가 박혀있으면 빼려고 노력합니다. 우리의 영혼에도 많은 가시가 박혀있습니다. ‘분노와 원망, 시기와 질투, 욕심과 교만’의 가시들입니다. 이런 가시가 박혀있으면 우리는 참된 기쁨을 느끼지 못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주님의 사랑을 보지 못합니다. 내 영혼의 쓰레기를 버리는 것, 이것이 바로 영신수련의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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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31.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사제 기념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은 로욜라의 이냐시오 축일입니다.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는 ‘예수희’의 창설자이기도 합니다.
벌써 몇 해가 지났습니다. 스페인 성지순례를 하는 도중 이냐시오 성인의 발자취를 걸을 수 있었습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귀족이며 군인이었습니다. 그는 나라와 백성을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치겠다고 충성을 맹세했습니다. 그런 충성심으로 전쟁에 참전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치명적인 부상으로 다시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그는 더 이상 군인으로서의 사명을 다할 수 없었습니다. 몸이 이미 망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때 그는 주님을 만납니다. 성경을 공부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의 충성을 눈에 보이는 세상을 호령하는 왕이 아닌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하느님께 봉헌합니다.
그는 산세가 험한 몬세랏까지 걸어갑니다. 성치 않은 다리로 걸어갑니다. 그리고 그는 그곳 동굴에 있는 ‘블랙 마돈나’ (검은 성모님) 앞에 자신의 칼을 내려놓습니다.
무장 해제입니다. 이제 진정 하늘의 왕을 섬기겠다고 스스로 선언한 것입니다.
이냐시오 성인의 삶과 오늘 복음은 너무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모든 것을 팔아 밭을 삽니다. 이냐시오 성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따라야 하는 주님이 왕이 아닌 하느님임을 안 순간부터 그는 자기 모든 삶을 하늘나라를 위해 봉헌하였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번 스스로가 부끄러워지는 순간입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다시금 마음을 다잡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우리 마음이 있는 곳에 우리 기쁨이 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있기에 우리가 기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할 수 있기에 기쁨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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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삶을 살 수 있다면….
사실 ‘다시 삶을 살 수 있다면….’
이런 질문이 우리에게 무익할지 모릅니다.
지난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너무 잘 아는 ‘찰스 다윈’이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내가 삶을 다시 살 수 있다면 일주일에 몇 번은 시를 읽고 음악도 듣는다는 규칙을 정해 놓을 텐데. 이런 취미를 잃는 것은 행복을 잃는 거나 마찬가지야.-
삶을 다시 산다면 여러분은 어떤 것을 잃지 않고 하시겠습니까?
음악 듣기. 책 읽기. 좋아하는 사람과 산책하기….
하루 한 번은 크게 웃기. 맛있는 것 만들어서 나눠주기….
더 많이 잃기 전에 해보면 어떨까요?
다시 삶을 산다면 잃지 않고 하고 싶은 것을 오늘, 지금 다시 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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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31.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사제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보물찾기
“일상이 보물밭이다!”
“내 힘이시여, 당신께 이 눈이 쏠리오니,
하느님은 나의 성채시나이다.”(시편59,10)
오늘 역시 하늘 나라의 비유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하늘 나라의 비유를 통해 하늘 나라의 기쁨을 살 수 있는 비결을 배웁니다. 바로 보물의 비유와 진주의 비유나 대동소이합니다. 단숨에 읽혀지는 오늘 복음의 두 비유입니다.
“하늘 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숨겨두고서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하늘 나라는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과 같다. 그는 값진 진주를 하나 발견하자, 가서 가진 것을 모두 처분하여 그것을 샀다.”
진정 이런 하늘 나라의 보물을 발견한 이들이 참부자요 참행복한자요 참자유로운자입니다. 세상 모든 것을 상대화하는 모두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하늘 나라의 보물입니다. 사람 누구나 마음 깊이에는 이런 참보물을 찾는 갈망이 있습니다. 이 참보물을 찾지 못해 방황이요 불안이요 혼란입니다. 길을 찾는 마음, 희망을 찾는 마음, 빛을 찾는 마음은 바로 이런 참보물을 찾는 마음입니다.
평생 이 참보물을 찾지 않고, 찾지 못하고 살았다면 그 인생 얼마나 허망하고 억울하겠는지요! 참보물 찾아 행복한 인생 살아보라고 주어진 인생인데 말입니다. 이런 하늘 나라의 참보물을 찾지 못해 무지와 허무, 무의미의 어둠 속에 방황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무지와 허무에 대한 유일한 해답은 참보물의 발견이요 소유임을 깨닫습니다
희망이라 다 희망이 아니듯, 평화라 다 평화가 아니듯 보물이라 다 보물이 아닙니다. 거짓 보물이 아니라 참보물이, 가짜 보물이 아니라 참보물입니다. 참보물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 있습니다. 일상이 보물밭입니다. 여기서 보물을 찾지 못하면 다른 어디서도 찾지 못합니다. 다음 고백 그대로입니다. 선물을 보물로 바꿔 읽어도 그대로 통합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보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꽃자리 하늘 나라 천국이옵니다”
초등학교 어린 시절, 봄소풍이나 가을소풍때 소풍이 끝날 무렵에는 꼭 보물찾기 놀이가 있었습니다. 보물찾기가 시작되자 마자 보물 종이 쪽지를 발견하려 이리저리 뛰는 아이들이요, 보물 종이 쪽지를 발견했을 때, 설렘의 기쁨은 얼마나 황홀했던지요!
지금 생각하면 하잘 것 없는 보물이었지만 당시는 가슴을 가득 채워 설레게 했던 보물 종이 쪽지 였습니다. 이 보물 종이 쪽지를 하나도 찾지 못했을 때의 쓸쓸하고 허전함 또한 잊지 못할 것입니다. 보물찾기! 참 심오한 상징입니다. 새삼 우리는 보물찾기 인생을 살아갑니다. 날마다 죽는 그날까지, 살아있는 그날까지 참보물을 찾아야 합니다. 참보물을 찾는, 발견하는 기쁨과 행복이 참기쁨이요 참행복입니다.
일상이 보물밭입니다. 제가 볼 때 눈만 열리면 함께 하는 형제들이, 매일 만나는 이들이 보물입니다. ‘신의 한 수’라 할 수 있는 우리 수도형제들 하나하나가 이 세상 그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독특한 그 고유의 참보물입니다. 사람이 희망이듯 사람이 보물입니다. 아무리 자연환경 좋고, 건물이 좋고, 전통이 좋아도, 그 수도원 건물 안에 살아 있는 보물 수도자가 없다면 얼마나 쓸쓸하고 허전하겠는지요! 수도자를 그 무엇으로 대체할 수 있겠는지요!
이런 사람 보물, 아기 보물이 자리 잡고 있어야 할 자리에 애완견이 반려견이 자리하고 있는 병리적 쓸쓸한 현실에 개탄합니다. 결코 사람 보물을 대체할 수 없는 애완견, 반려견일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은 아이들만 보면, 젊은이들만 보면 너무 반갑고 사랑스러워 살아 있는 보물을 발견한 듯 신기하고 기쁩니다.
하느님은 보물찾기의 달인이요 대가요 최고의 전문가입니다. 하느님을 대변하는 가톨릭 교회 역시 그러합니다. 하느님이, 교회가 찾아 낸 최고의 보물이 바로 성인들입니다. 세상이 교회가 필요로 할 때 하느님은 성인 보물을 찾아 보내주십니다. 꽃의 색깔, 향기, 모양, 크기가 다 다르듯 성인도 그러합니다. 시대 마다, 환경 마다 보내 주신 성인 보물들은 다 다릅니다.
오늘 하느님은 정말 기막힌 살아 있는 보물을 찾아 혼란한 세상, 교회에 보냈으니 바로 예수회의 창립자이자 초대 총장을 하며 예수회에 견고한 토대를 놓았던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사제입니다. 성인의 생애와 활약은 참으로 눈부십니다. 이런 보물을 찾아내신 하느님의 눈이 경탄스러울 뿐입니다.
당시 16세기는 종교개혁으로 교회가 큰 위기를 겪을 때 였고, 중세 초에 베네딕도 성인을 보내 교회를 구했고, 12세기 경에는 성 프란치스코를 통해 교회를 구했고, 16세기에는 성 이냐시오를 통해 종교개혁의 격랑으로부터 교회를 살렸습니다. 16세기 이후 가톨릭교회에서 예수회의 활약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현재 눈부신 활약을 펼치는 프란치스코 교황님도 예수회 출신입니다.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Ad Maiorem Dei Gloriam)
이냐시오 로욜라 성인의 표어이자 예수회의 표어입니다. 예수회 전 회원이 이 단일 목표를 향해 매진합니다. 이냐시오 로욜라의 파란만장한 더불어의 여정, 회심의 여정을 보면 하느님의 선택이 얼마나 탁월했는지 놀라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당시 이냐시오와 동료들이 세운 세가지 목표는 1.교육에 힘쓰고, 2.자주 성사를 받음으로써 교회를 개혁하고, 3.선교지에서 폭넓은 활동을 전개하며 이단과 싸운다는 것이었고 이것은 예수회 활동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교회의 후방에는 ‘베네딕도 수도회’가 있다면, 세상 한복판 최전방에는 일당백의 최정예의 전사들의 수도회인 ‘예수회’가 자리하고 있었으니 교회를 위한 기막힌 상호보완의 관계였음에 감탄합니다.
역시 믿는 이들의 삶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섭리임을 깨닫습니다. 성인 축일은 기념, 기억할뿐 아니라 우리 모두 살아 있는 교회의 보물이, 성인이 되어 살라고 있는 축일입니다. 우리 모두 성인이 되라 불림 받고 있으며, 인생 유일한 존재 의미이자 목표입니다.
성인들이 누구입니까? 보물중의 보물인, 유일한 참보물인 예수님을,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한, 만난 분들입니다. 우리 수도자들 역시 똑같습니다. 한두번 찾았다, 만났다 하여 끝나는 참보물 주님이 아니라 매일 일상의 보물밭에서 찾아 만나야 합니다. 참보물을 주님을 만날 때 무지의 눈이, 마음의 눈이 열려 세상 진짜 보물들을 알아 볼 수 있습니다. 이냐시오가 놀라운 보물이 된 것은 참보물 주님을 평생 찾고 만났기 때문입니다. 성인들의 이구동성의 고백은 다음일 것입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희망,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요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당신과 함께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오늘 제1독서 예레미야 예언자의 참보물인 하느님과의 관계가 감동깊게 적나라하게 표현됩니다. 살아있는 참보물인 하느님과 날로 깊어지는 신뢰와 사랑의 우정관계가 주님을 닮은 살아 있는 참보물 예레미야 예언자로 만들었음을 봅니다. 예레미야 예언자의 두 번째 고백중 주님과 주고받는 진솔한 대화가 감동적입니다.
“아, 불행한 이 몸! 어쩌자고 날 낳으셨나요? 모두 나를 저주합니다.”
곧 이어 반전입니다.
“당신 말씀을 발견하고 그것을 받아먹었더니, 그 말씀이 제게 기쁨이 되고, 제 마음에 즐거움이 되었습니다. 주 만군의 하느님, 제가 당신의 것이라 불리기 때문입니다.”
아, 또 반전입니다. 예언자의 회의, 고뇌, 아픔이 욥처럼 상상을 초월합니다.
“저를 가득 채운 당신의 분노 때문에, 당신 손에 눌려 홀로 앉아 있습니다. 어찌하여 제 고통은 끝이 없고, 제 상처는 치유를 마다하고 깊어만 갑니까? 당신께서는 저에게 가짜 시냇물처럼, 믿을 수 없는 물처럼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최종적 위로와 격려의 말씀입니다.
“네가 쓸모없는 말을 삼가고 값진 말을 하면, 너는 내 앞에 나의 대변인이 되리라. 내가 너를 요새의 청동 벽으로 만들어 주리라. 그들이 너를 대적하여 싸움을 걸겠지만, 너를 이겨내지 못하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구원하고 건져낼 것이기 때문이다.”
시공을 초월하여 언제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 계신 우리의 영원한 살아 있는 참보물 임마누엘 예수님이 우리 모두 당신을 닮은 참보물이 되어 살게 합니다. 평생 보물찾기 여정에 항구할 수 있게 하시니 바로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내 힘이시여 당신을 찬양하오니,
주는 내 성채, 나 하느님, 내 사랑이시니이다.”(시편59,1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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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31.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사제 기념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당신은 하늘나라입니다>
“하늘 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마태 13,44)
“하늘 나라는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과 같다.”(마태 13,45)
하늘나라를
가려도
하늘나라를
없애려도
하늘나라가
있기에
하늘나라를
믿고
하늘나라를
바라며
하늘나라를
사랑하여
하늘나라를
찾아서
오롯한 마음으로
길 떠나는
당신은
아직
하늘나라에
닿지 않았어도
이미
하늘나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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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31.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사제 기념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하늘 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숨겨 두고서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마태 13,44)
이 비유의 명백한 뜻과 영적 의미
밭으로 오는 사람, 다시 말해, 성경으로 오는 사람이나 또는 드러난 것과 숨겨진 것으로 이루어진 그리스도께로 오는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든 성경 안에서든, 감추어진 보물인 지혜를 찾습니다. 밭을 사기 위해 돌아가고, 성경을 뒤적이고, 그리스도를 이해하려고 애쓰는 동안에 보물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보물을 발견하면,성경의 비밀스러운 뜻이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지혜와 지식의 보물이 모든 이의 눈에 띄면 위험이 없지 않다고 생각하여 그것을 숨깁니다.
그는 그것을 감추고 자리를 뜹니다. 이제 그는 처음에 유대인들에게 맡겨진(로마 3,2 참조) 하느님의 계시를 하느님의 백성으로부터 받아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어떻게 하면 밭, 곧 성경을 살까 하고 열심히 일합니다. 그러니 그리스도께 배운 사람이 산 밭, 곧 하느님의 나라는 또 다른 비유에 따르면, 처음 그것을 받은 이들에게서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는 포도밭 (마태 21,43 참조)과 같습니다. 자기가 가진 것을 모두 팔아 믿음 안에서 그 밭을 산 사람은 예전에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버립니다. 그것들은 그의 미음을 어지럽히는 악의 원천이었습니다.
감추어진 보물이 있는 밭이 그리스도라면, 여러분도 똑같이 할 것입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은,말하지면 다른 식으로, 자신의 재산을 팔았습니다. 이처럼 자신의 재산을 팔고 버린 대신 조력자 하느님으로부터 고귀
한 다짐을 받은 그들은 보물이 숨겨져 있는 밭을 그에 합당한 비싼 값을 치르고 살 수 있습니다.
-오리게네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9
하느님 나라가 다가온 줄을 아시오
하느님 나라가 다가온 줄을 아시오(루카 21,31),
학자들은 강의 시간에 다음과 같이 의미심장한 물음을 던집니다: 영혼이 하느님을 아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하느님이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시는 것은 그분이 의로우시거나 강해서가 아닙니다. 하느님은 영혼이 넓어지기를 바라십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주는 것을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영혼에게 많은 것을 받을 기회를 주십니다. 그렇게 해야만 몸소 많은 것을 줄 기회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뜻 깊고 소중한 일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이러한 경지에 도달하기가 어렵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처음에는 자신과 만물을 여의는 것이 어려운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영적 진보를 이룬 사람이라면, 이보다 더 밝고 즐겁고 기쁜 삶이 없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언제나 그 사람 가까이 계셔서 자신을 일러 주십니다. 하느님은 영혼이 이르렀으면 하고 바라시는 그 경지로 영혼을 데려가십니다. 하느님은 당신을 아는 경지로 사람을 데려가기를 간절히 바라십니다. 이제까지 사람이 이만큼 무언가를 간절히 바란 적은 없었습니다. 하느님은 항상 준비하고 계시건만, 우리는 그렇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우리 가까이 계시건만,우리는 그분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하느님은 안에 계시건만, 우리는 밖에 있습니다. 하느님은 집에 계시건만, 우리는 외출 중입니다. 예언자는 “그 의인이 형의 분노를 피하여 도망칠 때 지혜가 그를 곧은 길로 인도해 주었다”(지혜 10,10)고 말합니다. 이렇께 함으로써 의인들은 가장 충만한 삶에 도달합니다.(212)
✝️ 수요일 그리스도인 일치의 날✝️
세계 교회사, 아우구스트 프란츤
제 2부 중세 그리스도교
제 3기 : 1050 ∼ 1300년
중세 중기 교회의 전성
제 6절: 청빈운동, 이단과 이단 신문
성서주의와 예수를 따름:
카타리파:
이상의 모든 그들에는 그리스도교적인 기초가 공통적이었는데 반하여, 카타리파 운동은 비그리스도교적이고 마니교적 • 이원론적인 뿌리에서 발생하였다. 9세기에 비잔탄을 거쳐 발칸 지방으로 이주하였던 아르메니아의 바울로치아누스파는 고대의 그노시스적인 관념들을 함께 가지고 왔다. 그런데 마케도니아의 시골 사제인 보고밀(Bogomil)은 10세기 전반에 이 관념들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다. 세상은 악마, 즉 구약의 악신에 의하여 창조되고 또 그에 의하여 지배되고 있는데, 그때 인간의 순수한 영혼도 나쁜 물질 안으로 추방되었다. 신약의 선신은 천사 중의 하나인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들에게 어떻게 해방되고 또한 “청정자”로서 그들의 참된 고향인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가를 가르치기 위해 파견하였다. 이를 위해서는 금욕과 완전히 세상을 단념하는 것이 필요하다. 나쁜 물질과의 모든 접촉은 불결을 낳고, 피조물 전체는 그 자체 안에서 죄를 짓게 된다. “완전자들”은 결혼이나 성교, 육식 외에도 온갖 종류의 수공업, 물질의 소유, 부를 매우 면밀주도하게 피해야 한다.
이러한 사상들은 상인과 귀향하는 십자군 참가자들을 통해 12세기에 서구로 도입되었고, 독일,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에 신속하게 전파되었다. 이 사상들은 그리스도교적인 사상과 결합되었다. 그 신봉자들은 가톨릭 교회의 방법대로 조직되어 교계제도를 만들고 교구를 조직하였다. 1167년에는 툴루즈 근방에서 카타리파의 대규모 교회회의가 개최되었다. 그들은 돈이 많고 범죄적인 재물과 밀착되어 있는 가톨릭 교회에 대하여, 그들 자신의 가난하고 모든 제물을 배척하는 교회룰 대립시켰다. 이로써 그들은 “복음적이고 가난한” 교회를 꿈꾸던 많은 급진적인 개혁가들의 생각에 너무나 잘 부합되었고, 그래서 그들은 소박한 민중 앞에 자신들 고유의 비그리스도교적 • 이원론적인 세상 경멸을 그리스도교적인 금욕의 이상형으로 내세울 수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모범적으로 금욕생활을 하는 이상적인 그리스도인으로 불렀다. 반면 가톨릭 교회를 사탄의 회당으로 부르고, 사제들을 위선적인 죄인으로 낙인을 찍고, 성사들은 악마의 소산이라고 설명하였다.
더 나아가서 그들은 똑같이 적대적인 태도로 국가와도 투쟁하며 황제를 사탄의 대리자로, 영주들을 그의 조수라고 불렀다. 남부 프랑스 특히 알비(Albi) 지방에서 - 여기서 알비파라는 이름이 나왔다 - 그들의 광범위한 전파는 그들을 곧 프랑스 왕권과의 싸움 준비를 끝낸 남작들과 제휴하게 하였다. 그 긴장은 피가 흐르는, 반은 종교적이고 반은 정치적인 알비파 전쟁(1209∼1229)에서 폭발하였다.(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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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31.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사제 기념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13,44)
오늘 복음의 핵심인 발견의 기쁨을 함께 나누기 전에, 고대 그리스의 수학자이자 과학자인 아르키메데스에 기인한 상징적인 감탄사 ‘유레카!’의 의미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유레카는 발견의 기쁨을 상징하는 표현으로 오래도록 이어져 왔습니다. 유레카라는 용어는 고대 그리스어에서 기원하며, 이 단어는 ‘찾다’ 또는 ‘발견하다’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동사 ‘heuriskein’에서 유래했습니다. 발견의 기쁨을 압축하는 유레카는 의미 있는 것을 발견하는 짜릿한 경험을 구체화하는 표현입니다. 아울러 유레카라는 감탄사는 의미 있는 발견에 도달하기 위해 요구되는 끊임없는 추구와 인내를 상징합니다. 그것은 위대한 업적들이 종종 변함없는 헌신, 지칠 줄 모르는 노력, 그리고 포기하기를 거부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는 것을 상기시킵니다. 역사적 의미를 넘어, 유레카는 모든 분야, 곧 과학기술부터 예술, 문학, 종교 그리고 일상생활에 이르기까지 어떤 분야에서든 돌파구와 영감의 순간이 일어날 수 있다, 는 점을 상기시켜 주는 역할을 합니다. 유레카의 정신은 우리가 열린 마음으로 도전에 접근하고, 호기심을 포용하며, 해결책과 개인적 성장을 추구하는 데 있어 끈기를 유지하도록 격려합니다. 이렇게 유레카는 시간을 초월한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다양한 영역에 걸쳐 개인들에게 계속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발견의 기쁨, 의미 있는 돌파구에 필요한 끈기, 지적이거나 영적 성취의 본질적인 기쁨을 담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하느님 나라를 발견한 사람이 지녀야 할 태도를 가르쳐 주는 보물의 비유와 진주 상인의 비유를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물을 우연히 발견하든 또는 진주를 애써 찾다가 얻었든 귀중한 것을 발견한 이들은 한결같이 “가진 것을 다 팔아” (13,44), “가진 것을 모두 처분하여” (13,46) 구매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보물이나 진주가, 자신들이 소유한 것을 다 처분해서 구입할 만큼 투자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들이 비록 모든 것을 처분함을 통해 여러 가지 불편하고 어려운 점도 없지는 않았겠지만, 자신들이 찾길 원하던 귀한 것을 획득했다는 기쁨이 더 컸기에 그런 결단을 내린 것으로 생각됩니다. 아무리 귀한 것이라도 그 귀함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겐 별로 의미가 없지만, 아주 하찮은 것이라도 그 귀함을 아는 사람에게는 큰 기쁨과 함께 모든 것을 팔아서라도 그것을 얻고 싶은 것입니다.
이렇게 하늘나라는 마치 보물과 진주를 발견하고 지금껏 소중하게 여겼던 모든 것을 다 매각하고 처분해서 구매할 만큼의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하늘나라의 가치를 아는 사람만이 하늘나라를 발견했을 때, 그것을 발견하고 찾은 기쁨이 너무 행복했기에 기꺼이 자신의 전 소유를 다 팔아 그것을 사는 결단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보물과 진주를 발견하고 그것을 구매하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린 사람들이 바로 하늘나라의 놀라운 가치를 대면한 제자들이며, 그들은 그 가치에 압도되어 오로지 하느님의 사랑과 그 사랑에 적절한 삶을 살아가고자 전 존재를 바쳐 투신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외칩니다.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고귀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필3,8)
이런 발견의 기쁨을 누리길 바라면서, 다음 노랫말로 기도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와 바꿀 수는 없네. 이 세상 부귀영화와 권세도, 이 세상 모든 영예와 행복도,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신 예수의 크옵신 사랑이여. 세상 즐거움 다버리고 세상 명예도 버렸네. 주 예수 그리스도와 바꿀 수는 없네. 세상 어떤 것과도.』 (성가61 주 예수와 바꿀 수는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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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31.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사제 기념일.
■ 신앙인의 삶은 멋진 보물찾기 / 굿뉴스 게시판
박윤식 [big-llight] 2024. 07. 30 21:43 ㅣNo.174631
하느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한 번도 똑같이 창조하시지 않았단다. 그러기에 나는 예나 지금이나, 또 어디서나 유일무이한 존재이다. 이제껏 나와 똑같은 이는 단 하나도 없었을 게다. 이건 그분께서 뜻하시는 나만의 주어진 분명한 삶의 길이 있다는 뜻일 게다. 그러기에 내 삶의 불평과 원망보다는, 나에게만 주신 하느님의 선물을 받아들이는 게 더 중요하다. 기쁨뿐 아니라 슬픔 속에도 반드시 각자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보물’이 분명히 숨겨져 있으리라.
사실 인생은 마치 보물찾기를 하는 것과 같다. 각자 좋아하는 걸 찾으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여러 재능을 최대한 사용한다. 그게 돈, 재주, 온갖 게 다 될 게다. 그렇지만 실상 따지고 보면 찾으려는 게 다 다르다. 그렇지만 사실을 잘 알고 보면 가장 귀한 보물은 주님이시고 그분에게서 비롯되는 그 기쁨은 정말 누가 뭐래도 영원할 게다. 그런데 그 기쁨을 누리려면 그에 상응한 것을 버려야만 한다. 그분을 모시는 그 기쁨을 얻는 데 버려야 할 게 과연 무엇일까?
“하늘 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이다. 보물을 발견한 이는 그것을 숨기고는 돌아가 가진 것을 팔아 그 밭을 산다. 또 그 나라는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과 같다. 그는 값진 진주를 발견하자, 가진 것을 처분하여 그것을 샀다.”(마태 13,44-46 참조) 예수님은 밭에 숨겨진 보물이시며 감추어진 진주이시다. 우리는 그것을 끊임없이 바라지만, 욕심에 눈이 가려 제대로 보질 못한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 하나가 바로 주변에 있는 보물들을 알아보는 것이다. 우리 주변에는 참으로 값진 귀한 보물이 많다. 사랑하는 가족이 있고, 나와 함께 삶을 나누는 수많은 이가 있다. 신앙 안에도 우리가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기도와 성사의 은총들이 가득하다. 다만 그것들이 너무 가까이에서 익숙해져 그 소중함과 가치를 망각하는 듯하다. 더 높은 가치와 소중한 행복을 찾으려면, 그 무언가를 포기해야만 한다. 나가는 게 있어야 들어오기 마련이니까.
‘기쁜 소식’이지 죽음을 알리는 부고나 파산 소식이 아니다. 그분께서 말씀하시는 기쁨은 헛된 가치에서 눈을 돌리고 진정으로 고귀한 것을 향해 우리의 시선을 돌리라는 초대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세상의 것을 포기해야 하지만, 그 자체가 그리 의미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세상 것은 그때뿐이다. 세상의 가치는 지나가는 것일 뿐, 우리는 그것을 훨씬 뛰어넘어야만 할게다.
신앙은 습관이 아니다. 매일의 고백이고 다짐이다. ‘주님, 다시 시작합니다. 또다시 출발하렵니다.’라는 선언이 기도의 핵심이 되어야 할 게다. 하루의 출발이 이런 기도라면 삶은 차츰 기쁨으로 바뀌리라. 하지만 이런 그분을 향하려는 변화의 기도가 없으면, 믿음은 여전히 밭에 묻힌 보물로 남으리라. 가진 것 팔아 멋진 보물을 찾자. 믿음이 ‘짐’으로 바뀐다면 참으로 안타깝다.
이렇게 하늘 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이다. 그것을 발견한 이는 다시 숨기고는 기뻐하며 돌아가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또 그 나라는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과 같다. 그는 진주 하나를 발견하자, 가진 것을 다 처분해 그것을 산다. 이처럼 우리가 그분 사명을 받아들이고 그것만을 수행할 때에, 비로소 그분을 알아 뵐 수 있을 게다. 우리는 기쁜 보물이요, 진주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참 빛이신 하느님을 만나 그분과 함께 영원히 함께 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찾은 보물이다. 인생은 멋진 보물찾기, 정성을 쏟으면 누구나가 값진 보물을 찾을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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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31.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사제 기념일.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밭에 숨겨진 보물”의 비유는 ‘우연히’ 발견된 보물입니다.
다시 말하면 밭을 가는 사람은 보물을 ‘찾으려는 의지’가 없었습니다. 밭을 갈다 우연히 모습을 드러낸 보물을 찾게 된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도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선물’처럼 다가옵니다.
보물의 가치를 알아본 사람만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팔아 보물을 차지하게 되는 것처럼, 하느님 나라의 소중함을 알아본 이들만이 그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의 비유는 밭에 숨겨진 보물의 비유와는 성격이 다릅니다. 상인은 주도적으로 ‘좋은 진주’를 찾아 나섭니다. 그리고 좋은 진주를 발견하자 자신이 가진 것을 모두 팔아 그 진주를 차지합니다.
하느님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찾고 열망하는 이들에게는 반드시 발견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바로 좋은 진주를 찾고자 길을 나선 것과 같습니다.
기도하는 삶, 하느님 말씀이 이루어진다는 믿음과 함께 그 말씀을 이웃에게 실천하는 삶, 주님께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청하는 삶, 미사 안에서 살아 계신 예수님을 만나는 삶, 이 모든 것이 하느님 나라라는 좋은 진주를 찾아 나선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우리에게 선물처럼 우연히 그 실체를 드러내기도 하고, 또 신앙생활로 우리 삶 안에서 발견되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가진 것을 모두 처분하여 그것을 샀다.”
보물과 진주를 발견한 이들이 그 가치를 알아보고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팔아 그것들을 차지한 것처럼, 하느님에 대한 ‘참된 믿음’을 가진 이들만이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려고 할 것입니다.
하느님 말씀을 사랑하는 신앙인이 됩시다.
“성경은 전부 하느님의 영감으로 쓰인 것으로, 가르치고 꾸짖고 바로잡고 의롭게 살도록 교육하는 데에 유익합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사람이 온갖 선행을 할 능력을 갖춘 유능한 사람이 되게 해 줍니다”(2티모 3,16-17).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하느님 말씀은 우리의 믿음이 하느님 나라를 차지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 줄 수 있는 힘을 분명히 가지고 있습니다.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가진 것을 모두 처분하여 그것을 샀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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