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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권호만barnabak
어린이가 영적 모델이 되다
마태복음18:1-7
여호와께서 예레미야를 통하여 하시는 말씀 가운데,
‘모세와 사무엘이 내 앞에 섰다 할지라도 내 마음은 이 백성을 향할 수 없다’(렘15:1)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여호와께서는 구약 시대의 대표적인 신앙인으로 모세와 사무엘을 예로 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모세와 사무엘이 그만큼 하나님을 잘 섬기는 신앙인의 모델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모델이 된다는 것은 가장 모범이 되고 모형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아파트를 분양하기 전에 먼저 모델하우스를 세웁니다.
모델 하우스는 앞으로 건설될 아파트와 구조가 똑같습니다.
그것을 보고 아파트를 분양받습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을 향하여 ‘너희는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말씀합니다.(고후2:15)
그리스도의 향기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성품과 삶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보이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델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주님께서 말씀하실 때 어린아이를 데려다가 모델로 세우시고 말씀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루는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질문을 합니다.
그 질문의 내용은 천국에서는 누가 크냐는 것입니다.
이 때 예수님은 한 어린 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어떤 사람이 천국에 들어갈 자인가? 천국에서는 누가 큰 사람인가? 나를 영접하는 자는 어떤 사람인가? 등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이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다.’
‘이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것이 나를 영접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한결같이 너희 앞에 있는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신앙생활의 영적모델이 되고 있습니다.
오늘은 오월 첫 번째 주일로서 어린이주일입니다.
어린이 주일을 지키는 것은 우리에게 선물로 맡겨주신 어린아이의 중요성을 깨닫고 그들을 어떻게 잘 키우고 믿음으로 성장시킬 것인가를 생각하며 기도하는 주일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른들이 어린이를 잘못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어느새 가르치는 자가 되어 있고 아이들은 배우는 자가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지도하는 자가 되어 있고 어린이들은 지도를 받아야 할 존재가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조금 더 완전한 자가 되어 있고 어린이는 아직도 부족한 자로 인식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늘 본문에서 그리스도인의 영적모델이 바로 어린이라고 말씀합니다.
어른들이 온전한 신앙인의 모습이 아니라 어린아이가 진정한 신앙의 모습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의 인격과 성품과 삶을 보여주는 진정한 모델이 바로 어린이라고 말씀합니다.
그 어린아이의 신앙과 모습을 배워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어린이주일에 어린이를 모델로 세우셔서 영적교훈을 하시는 주님을 생각하면서
어린이들을 통하여 배워야 할 신앙의 모습을 깨닫고 돌이켜 주님이 진정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주님은 어린아이가 어떤 모델이 된다고 말씀하십니까?
먼저, 어린아이는 천국에 들어가는 자의 모델이 됩니다.
3절 말씀을 보면,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어야 천국에 들어간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님은 ‘결단코’ 라는 말씀을 사용합니다.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절대로’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이것보다 더 분명한 말씀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어린아이와 같이 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되겠습니까?
물론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우리가 알고 믿는 대로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구절에서 말씀하시는 의도를 잘 보여주는 단어가 바로 ‘돌이켜’라는 구절입니다.
‘돌이키다’는 말은 마음의 변화, 행동양식의 변화를 뜻하는 말로서 완전한 방향전환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여기에서 어른들이 관심을 갖고 있는 ‘누가 크냐?’ ‘누가 잘났냐?’ 누가 더 똑똑하냐? 하는 생각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런 모습이 아니라 부모에게 절대 의존적이고 절대 순종하고 가르침을 단순하게 받아들이는 어린아이들의 태도를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믿음은 어린아이와 같이 순수하고 거짓이 없는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안드레예프의 「약속」이란 소설 속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여덟 살 먹은 한 꼬마가 몇몇의 아이들과 공원에 모여 전쟁놀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중 덩치가 가장 큰 아이가 꼬마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사령관을 할 테니 너는 중사를 맡아. 그리고 내가 와서 교대 명령을 내릴 때까지 넌 여기서 보초를 서.”
꼬마는 고개를 끄덕이고 계속 보초를 섰습니다.
날이 어두워져 공원이 문 닫을 시간이었지만 사령관은 오지 않았습니다.
중사를 맡은 꼬마는 배고프고 무섭기도 했지만 약속을 지키기 위해 떠나지 않고 보초를 섰습니다.
행인 한 명이 길을 지나가다 이 꼬마를 보고 자초지종을 물었습니다.
상황을 파악한 그는 어딘가에서 군복을 입은 소령을 꼬마 앞에 데리고 왔습니다.
소령은 꼬마를 보고 웃으며 말했습니다.
“중사, 소령으로서 지금 이 자리를 떠날 것을 명령한다.”
꼬마는 기뻐하며, “네, 명령에 따르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집으로 갔습니다.
중사를 맡았던 꼬마는 사령관과 한 약속을 지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순수한 마음과 진실한 마음으로 배가 고파도 사령관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순수하고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믿음으로 예수님을 믿을 때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는 천국에 들어가는 자의 모델이 됩니다.
둘째로, 어린아이는 천국에서 큰 자의 모델이 됩니다.
오늘 본문은 제자들의 ‘천국에서 누가 큽니까?’ 라는 질문으로 시작됩니다.
그때에 제자들이 천국에서 누가 크냐를 따지게 되었던 것은 당시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것을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가시는데 제자들은 왕이 되기 위해 가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자연히 자신들도 중요한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고 생각한 나머지 누가 크냐? 누가 더 좋은 자리, 더 높은 자리에 앉게 되느냐? 하는 것에 관심이 생겼습니다.
이때 주님은 그 질문에 대답을 하지 않으시고 동문서답을 하십니다.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천국에 들어갈지 못 들어갈지도 모르는데 천국에서 누가 크냐? 하는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에 대한 말씀을 하신 주님은 어린 아이를 세우고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른들의 관심은 ‘누가 큰 자냐?’ 하는 것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제자들도 그랬고 오늘날도 똑같이 크기 경쟁을 하고 있습니다.
어느 나라가 큰 나라냐? 어느 교회가 한국에서 제일 큰 교회냐? 어느 목사님이 제일 큰 목사님이냐?
세계에서 제일 부자는 누구이며 한국의 제일 부자는 누구냐?
한국에서 제일 큰 권력자는 누구냐?
어른들의 관심은 누가 크냐? 얼마나 크냐? 나는 얼마나 큰 자냐? 이것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큰 자는 큰 자 끼리 지내면서 작은 자를 무시하고 외면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린아이들은 그런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미국에서 어른들이 보이는 모습은 피부색과 인종으로 나누어 살게 됩니다.
흑인은 흑인대로 백인은 백인대로 황인종은 황인종대로 그런데 아이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흑인과 백인과 황인종 어린이들이 그저 친구로 함께 살고 있고 함께 어울려 지내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교만도 무시도 따돌림도 없습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어린아이들이 천국에서 큰 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서학자인 윌리엄 바클레이는 “우리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점점 멀어질 수도 있다”고 지적합니다.
신앙의 연조와 신앙의 질이 같다고 볼 수 없다는 말입니다.
처음 믿었던 마음이 훨씬 더 순수 할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게 주님을 믿었던 마음이 훨씬 더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의 연조가 길어지고 직분이 높아질수록 순수한 마음을 잃어버려 복잡해지고 생각하지 말아야 될 생각들을 하게 될 때가 많습니다.
사실 처음 예수 믿고 신앙생활을 시작했을 때는 마음이 복잡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좋고 예배드리는 것이 너무도 기뻤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감격이 항상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앙의 연조가 길어지면서 복잡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때부터의 관심은 ‘누가 교회에서 더 큰가? 누가 더 영향력이 큰 가? 누가 더 똑똑한가?’ 에 두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럴 때에 주님은 천국에서 진정 큰 자로 인정하게 될 줄 믿습니다.
어린아이는 천국에서 진정 큰 자의 모델이 되고 있습니다.
셋째로, 어린아이는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의 모델이 됩니다.
5절에서 주님은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자신을 영접하는 것과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는 것을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아울러서 6절 말씀을 보면, “나를 믿는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만큼 어린 아이가 귀하고 존귀하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 당시도 그렇고 우리나라에 복음이 들어오기 전에도 그랬습니다만 그때 어린이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어린이와 여자는 사람 숫자에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숫자를 셀 때도 남자만 세었고 남자의 숫자가 모인 사람의 숫자였습니다.
어린아이는 어른들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어른들의 소유물 정도로 생각하였습니다.
우리나라의 어린이날을 제정한 분이 소파 방정환 선생이신데요,
이 분은 이런 잘못을 깨닫고 아이들의 인격을 존중하고 아이들을 귀하게 여기는 운동을 펼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어린이날을 제정하고 ‘어린이’라는 말을 사용하게 됩니다.
어린이라는 말은 ‘어리신 이, 어리신 분’이라는 뜻으로 존경의 의미가 담겨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벌써 2천여 년 전에 어린 아이를 가운데 세우시고 이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야 한다,
이런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것이 곧 나를 영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어린 아이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낫다고 말씀하셨으니 얼마나 파격적인 말씀이었습니까?
여러분, 예수님은 당시에 가장 작은 자로 여겨지고 인간적인 대우도 받지 못하는 아이들을 영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 약한 자를 영접하는 것이 곧 나를 영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큰 자만 영접하려고 합니다.
누가 크냐 하는 것이 우리의 관심이기에 영접하는 것도 큰 자만 영접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사람도 큰 자입니다.
돈이 많고, 권력이 크고, 배운 것도 많고, 일도 잘하고, 헌금도 잘하고, 봉사도 잘 하는 큰 자만 우리는 좋아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관심은 가장 작은 자에게, 가장 약한 자에게 있습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가장 작은 자를 영접하는 것이 나를 영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작은 자를 실족하게 하는 것을 별것 아닌 것으로 여기는 시대에 그런 자는 차라리 바다에 빠져 죽는 것이 낫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자세가 오늘 우리들의 자세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처럼 어린아이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존귀한 인격으로 대우하고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내 소유라는 잘못된 생각을 버릴 수 있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어린이는 우리 어른들의 영적인 모델입니다.
우리 어른들이 오히려 배워야 할 대상입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자의 모델이 됨을 알고 어린 아이와 같은 순수하고 전적으로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는 신앙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천국에서 큰 자가 되는 모델을 바라보면서 누가 크냐고 서로 싸우고 경쟁하고 그래서 편을 가르고 남을 시기하고 무시하는 잘못을 회개하면서 겸손한 어린이의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께 사랑받고 우리들에게도 사랑받고 귀하게 영접되어야 할 모델임을 기억하면서 정말 주님을 사랑하듯 사랑하고 귀하게 여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린아이들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더욱 주님을 닮아가는 영적인 어린아이가 되는 성도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우리 가정의 자녀들과 손주들에게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있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2024.05.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