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순예시모음 1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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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경운기와 호박꽃
유순애
아버지가 두고 가신
경운기,
의자에 앉아 계신
호박꽃, 넌출마다
애호박 몇 개 싣고
읍내 장터로 나가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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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늙은 호박
유순예
복숭아 나뭇가지 위
늙은 호박 한 덩이
묵상에 드셨다
애호박 때부터
사는 법을 수학한
수행자다
복숭아 나뭇가지 저만치
늙은 어머니
혼자 호미질하신다
어려서부터
체험 시를 써서 흙에 새기는
육필 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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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당신이 그곳에 계시는 동안
유순에
당신이 그곳에 계시는 동안
당신이 시집올 때부터 죽을 때까지 살던 이 집에서
당신이 좋아하던 고구마를 굽네요
당신과 함께 먹을 땐 달달하던 군고구마가 쓰디쓰네요
쓰디쓴 요기로 허기를 채우고
컨테이너 고방 외벽 곳곳에 찌든
녹을 문지르고 먼지를 털어내고 물걸레질을 하네요
당신만큼이나 늙고 찌든 외벽을 단장하네요
선친의 손재주를 빌려서 페인트칠도 시도하네요
지팡이 짚고 아장아장 걸어서 오시든
휠체어에 앉아서 흔들흔들 오시든
당신 돌아오시면 환하게 웃으라고
봄비 같은 겨울비 내리는 오늘
이 딸내미 혼자 낯선 일을 벌이네요
하염없이 내리는 겨울비는 훌쩍훌쩍 젖어드는데요
당신 계시는 그곳은 좀 어떤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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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땅땅거리다
유순예
으스러지도록 농사일만 하다 죽은
아버지 어머니가 두고 간
땅! 땅! 땅!
그 땅을 놀릴 수가 없기에 이 딸내미가 부쳐요
아버지 어머니 누워 있는
산소 밭에는 들깨를 심었고요
저온창고가 있는 밭 한쪽
너덜너덜한 비닐하우스 안
두 고랑은 쪽파를 심었고요
한 고랑은 양파를 심었고요
가상마다 진을 쳤던
잡초들은 확 뽑아버리고 월동 씨앗을 뿌렸고요
배추 상추 고수 고추 갓 시금치…
남새밭에서는 온갖 야채들이 서로 잘났다고 다투고요
나는 옴마처럼 안 살 것여!
앙탈 부리던 못된 것들이 곳곳에 처박혀서
눈물을 베고 잠이 들던 이 딸내미는
아버지 어머니를 꼭 닮은 농부가 되어가네요
땅! 땅! 땅!
이제야 저도 땅땅거리며 살게 되었네요
출처 : 시집 《당신이 그곳에 계시는 동안》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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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문화마실 진안
유순예
나는 문화를 먹고사는 예술가예요.
닫혀있는 것
머무르는 것
곰삭히는 것
싫었어요.
문화를 마실 줄 아는 손길들이
나를
커뮤니티 문화 공간으로 꾸며줬어요.
문화적 휴식이 있는 공간
삶이 풍요로워지는 공간
일상을 나누는 공간
예술가들의 창작 전시 공간
지역 주민들의 마실 공간
꿈나무들의 놀이터
나는 한때, 땀내 먹고사는 연습실 이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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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백합
유순예
기묘한 나의 향기에 끌렸어?
신들이 다녀가는 그 새벽
숨 가쁜 너의 몸짓언어가
심연(深淵)에 든 나의 동면을 깨웠어
모른 척해 달라는
너의 말은 이미 삭제했어
왔던 길 되돌아간
너를 기다리는 순결은 잡것과 음통했어
시든 꽃잎
죽은 향기
쓰레기장에 내다 버렸어
꽉 오므렸던 속내를 쫙 펼쳐 보이다
미쳐버린 건
꽃잎이 아닌 꽃술이야
미친 꽃술보다 먼저 미친 건
케케묵은 꽃대야
황홀했던 순간은 사랑이 아닌 오르가슴이야
변절하기 전에 차이는 게 사랑이야
마음 고쳐먹기 전에 대답해
떠나야 할 때 떠날 줄 아는 꽃가루의 유서를 읽어본 적 있어?
나르키소스에게 거절당하고 메아리가 된 에코의 연서를 알아?
오묘한 너의 향기는 어디다 숨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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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봄눈
-뽀얀 편지
유순예
늙고 병든 니들 오매 병시중하는 것도 힘들 틴디
헐벗은 경운기 목욕시키고 봄옷까지 입혀주다니
고맙다
거그서는 저 경운기로 농사지어서
니들 멕이고 공부시켰다만
여그서는 가만히 누워만 있어도
밥이 나오고 술이 나온다
그러니 내 생각 그만허고
니들이나 재미지게 살다 오니라
니들 오매도 나보다 십사 년 더 살았으면 되았다
나헌티 시집와서 고상만 시키고 못 멕인 거
니들이 챙겨주니
고맙다
밤새 끼적거린 편지
봄눈 편에 내려보낸 거
아침밥 짓기 전에 읽는 모습 다 내려다봤다
해 뜨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봄눈처럼
이 아비를 오래 기억하지 않아도 괜찮다
니들 오매도 걱정 마라
만물은 찰나생멸(刹那生滅) 아니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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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신들린 탑이 낳은 설화
-진안 운산리 삼층석탑
유순예
나는 흰옷 입은 할아버지
신성한 것이 나뿐이겠는가
구전되는 이야기들이 하나뿐이겠는가
석탑이란 것이 나뿐이겠는가
돌이 되어서라도 전승하고 싶네
내 기운
돌탑이 되어서라도 지키고 싶네
내 자리
산이 높아 못 온다는 핑계, 대지 마시게
‘쉬이 쉬, 쉬이 쉬.……’
골바람 드나든다는 낭설, 믿지 마시게
과거와 미래가 공존하듯
문화와 관광이 공존하듯
신성한 내후사동 마을에서 대대손손 번성하시게
꿈에서나 생시에서나
웃는 얼굴 만나거든
그게 나인 줄 아시게
‘새, 세상, 새 세상……’
새들의 노랫소리 들리거든
그게 나인 줄 아시게
하마터먼
일본 땅 어디에선가 망향가를 부르며 울고 있을 뻔한
나는 흰옷 입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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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안녕 오미크론
유순예
딱 걸렸어 당신!
가문 땅에 쪼르륵 쪽쪽!
소낙비 몇 소절 쪽쪽거리는 소리 먹여 줘서
고마워, 오미크론!
몇날 며칠 밤낮으로 연애 시를 써서 뻐꾸기 날려댔지?
내 사랑 보부아르, 그곳에서 밤새 한잔하고 싶어
있는 그대로 나를 받아 줘, 사르트르가 되어 줄게
그대 중연(重淵)에 나를 익사시키지는 말아 줘
나를 사랑해 줄래?
죽어서도 사랑하겠다는 약속은 못 하겠어
다만 지금처럼 부비부비 하고 싶어!
숨통이 조이도록 끌어안더니
개떡 같은 이설(異說)로 찰떡같이 달라붙더니
은밀한 곳에 수억만 바이러스를 흩뿌리고 돌아갔지?
자가 격리, 재택 치료는 투덜투덜 끝냈어!
페스트의 밤은 지금도 밤마다 날밤 까고 있어
가문 땅에 질퍽질퍽
물소리 몇 소절 질퍽거리는 소리 먹여주고 간
오! 오미크론, 안녕!
후끈 달아올랐다 꺼진 불똥이든
독감보다 독한 독종이든
후유증이 당신을 역학조사할 거야
후끈 달아올랐다 꺼진 가슴앓이
되받아칠
변이 바이러스가 당신을 검역할 거야
딱 기다려,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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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어딨냐 애기야
유순예
어딨냐 애기야? , 우리 애기 어딨어!
어떤 애기요??
내가 방금 낳은 딸내미 말여?
아아 그 애기, 저기서 잘 놀고 있어요?
쬐깐한 것이 추워서 어찐다냐?
걱정 마세요 어르신?
거기는 지금 꽃 피는 봄이거든요
상하지 마비 상태로 요양원에 입소한 어머니
치매 행동이 심한 줄도 모르는 어머니
애기 아닌 애기가 되어버린 어머니
낳은 적 없는 딸아이 찾는다
나와라 애기야, 우리 애기 어딨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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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으름과 산밤
유순예
여든세 살 잡수신 어머니는 딸내미 주려고
밭 가상에서 자생하는 으름을 따다
먹어봐, 어서 먹어봐!
권하고
쉰여덟 살 철부지 딸내미는 어머니 드리려고
산에서 자생하는 산밤을 삶아서
잡숴봐, 어서 잡숴봐!
권하는
가을, 초가을이다
이렇게 예쁜 것을 어떻게 먹어!
이렇게 야문 것을 어떻게 먹어!
산밭에서 나고 자란 품성이 고결한
으름과 산밤
무르고 단단한 것의 화합이다
출처 : 시집 《당신이 그곳에 계시는 동안》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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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치매꽃
유순예
너도 나처럼 늙어 봐라
이제 좀 살만하니까
말 하는 법도 잊어버리고
옷 입는 법도 잊어버리고
부뚜막 앞에 쪼그려 앉아 감자밥 짓던
먼 기억들마저 가물가물하다
울었거나 웃었거나
아들이 아버지로 보이고
거울 속의 내가 어머니로 보이고
어느 시점에서 멈춰버린
기억들은 꽃으로 변했으니
시들 때까지
마를 때까지
지금처럼 오락가락 살기로 했다
너도 나처럼 피어 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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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태평봉수대 산천초목에 외치다
유순예
혼자 얼마나 외로울까
‘막걸리라도 사들고 와서 따라드릴 걸’
후회할 짬도 없이
태평봉수대는 많은 것을 보여준다.
봉수군도 없이
산맥과 산맥 사이에 용담호를 들여앉혔다.
아홉 개의 봉오리 가족들이 모여 사는 구봉산을 손짓한다.
산 마을과 산 마을을 이어주는 산길에게 눈인사를 보낸다.
야무진 겉모습과는 다르게
이름 모를 들꽃 세 송이 기르는 모습이 애잔하다.
이끼 머금은 돌이 곰삭은 말을 다독이는 모습이 숙연하다.
돌과 돌 틈새를 에돌아가는 바람이 쉬쉬 거린다.
태평하게 보이지만 태평하지 않은
태평봉수대, 산천초목에 외친다.
횃불과 연기 없어도
나 여기 이렇게 살아 있다.
말발굽 소리 사라졌어도
나 여기 이렇게 버젓이 살아 있다.
코로나 19 바이러스, 그따윌랑 걱정마라.
마이산 정기를 불러
운장산 정기를 불러
싸리나무들을 불러 모아, 회초리부대를 몰고 가서
역병, 그따윌랑 한방에 물리칠 것이다.
태평하게 보이지만 태평하지 않은
태평봉수대, 산천초목을 내려다보며
혼자 얼마나 외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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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피 순댓국
유순예
피처럼 검붉게 살다 가신 당신
당신이 사 주시던
피 순댓국
피처럼 검붉게 살고 있는
당신 부인이 사 주시네요
땡볕 놉 얻어서 농사지은 푸새들 내다 판
피 같은 돈으로
핏줄에게 피 순댓국 먹이시네요
고추 따야 한다 배추 심어야 한다
눈만 뜨면 싸우다가도
한쪽이 몸져누우면 애걸복걸하시던
부부 인연 끊은 지 십여 년
피처럼 검붉게 살다 가신 당신
당신은 먹지 않아도 배부른 세상에서
지그시 내려다보시고
피처럼 검붉게 살고 있는
당신 부인은 먹어도 허기지는 세상에서
넌지시 올려다보시는
핏빛 그리움 한 대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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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한 밥
유순예
남의 살갗이 그리울때
혼자 고기 이인 분을 시킨다
주인 아낙이 구워주는
남의 살점이 노릇노릇 구워지고 있을 때
몇몇, 지인에게 전화를 한다
산행중이다
운전중이다
독서중이다
알맹이는 없고 쭉정이들뿐이다
타박타박 타고 있는 남의 살점을 타박하고 싶을때
혼자 고기 이인 분을 먹어 치운다
끼니때가 지난 뒤에 먹는 밥인지
누에가 마지막으로 먹는 밥인지
헛갈리는
한 밥을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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