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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새인들의 음모
막 3:1-12
1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쪽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
2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주시하고 있거늘
3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 가운데에 일어서라 하시고
4 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그들이 잠잠하거늘
5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 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6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니라
7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바다로 물러가시니 갈릴리에서 큰 무리가 따르며
8 유대와 예루살렘과 이두매와 요단 강 건너편과 또 두로와 시돈 근처에서 많은 무리가 그가 하신 큰 일을 듣고 나아오는지라
9 예수께서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작은 배를 대기하도록 제자들에게 명하셨으니
10 이는 많은 사람을 고치셨으므로 병으로 고생하는 자들이 예수를 만지고자 하여 몰려왔음이더라
11 더러운 귀신들도 어느 때든지 예수를 보면 그 앞에 엎드려 부르짖어 이르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하니
12 예수께서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많이 경고하시니라
막 3:1-12 / [오그라든 손을 펴주시다;마12:9-14,눅6:6-11]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곳에는 마침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와 있었다. 2) 그날이 안식일이었으므로 예수를 미워하는 사람들은 예수께서 그 사람을 어떻게 하실 것인가를 눈여겨 지켜 보고 있었다. 만일 그 사람을 고쳐 주신다면 예수를 고소할 속셈이었다. 3) 예수께서는 그 사람에게 `일어나 이 앞으로 나오너라' 하고 말씀하신 뒤 4) 사람들을 향해 `안식일에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안식일에 사람을 살리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 하고 물으셨다. 그러나 아무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5) 예수께서는 그들의 마음이 굳어져 있는 것을 탄식하시며 그 주위를 둘러보신 다음 그 사람에게 `네 손을 펴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 사람이 손을 펴자 그의 손은 전처럼 완전히 회복되었다. 6) 바리새파 사람들은 회당에서 나가 헤롯 당원들과 함께 어떻게 예수를 죽일까 그 방도를 모의하기 시작하였다. 7) [바닷가에 모여든 군중]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바닷가로 나가셨을 때 갈릴리 온 지역에서 모인 큰 무리가 따라왔다. 8) 유대와 예루살렘과 이두매와 요단강 건너편, 그리고 두로와 시돈 부근에서도 큰 무리가 모여 들었다. 예수께서 이적을 행하신다는 소문이 사방에 퍼져 나갔기 때문에 그것을 보려고 온 것이었다. 9) 예수께서는 밀어닥치는 군중을 피하려고 제자들에게 거룻배 한 척을 준비해 두라고 이르셨다. 10) 이는 예수께서 많은 사람을 고쳐 주셨으므로 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예수를 만지려고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11) 또한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들도 예수를 보기만 하면 그 앞에 엎드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하고 소리를 질러 댔다. 12)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자신이 누구라는 것을 세상에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명령하셨다.
안식일에 회당에서 손 마른 사람을 치유하는 것은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가르침과 배치되는 것이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시고, 누가 안식일의 주인인지를 보여주십니다.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마다 많은 사람들이 쫓아왔지만 예수께서 전하고자 한 것은 영적인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어느 것이 옳으냐(1-6)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시자 손 마른 사람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행동을 유심히 살피며 예수님을 고발할 명분을 찾고 있었습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은 오직 생사와 관련될 때에만 랍비들에 의해 허용되었습니다. 손 마른 사람의 경우는 여기에 해당되지 않았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그에게 병을 고침받기 위해 내일 찾아오라고 하셨다면 바리새인들의 가르침을 옳은 것으로 인정하는 것이고 상황에 굴복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회당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손 마른 사람’을 가운데 일으켜 세우시고 질문을 하십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이 질문은 바리새인만이 아니라 거기에 앉아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적용되는 질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잠잠하며 다만 예수님을 안식일을 어긴 자로 고소할 기회만 엿보고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손 마른 사람을 치유하는 것이 자신에게 위태로운 상황을 만들 수 있음에도 그를 치유하십니다. 예수님의 이와 같은 모습은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에게 두려움이 되었습니다. 서로 어울리지 않는 두 집단, 근본주의적 율법주의자인 바리새인들과 헤롯 왕조의 부활을 꿈꾸는 유대인 정치 집단인 헤롯당이 예수님을 제거하기 위해 연합합니다.
큰 무리가 따르며(7-12)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배격했지만, 군중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문자 그대로 사방에서 예수님을 보기 위해서 찾아왔습니다. 이 사람들은 각각 다른 동기와 이유를 가지고 찾아왔지만, 그들은 모두 예수님의 가르침 보다는 이적과 기사를 구경하고 고침을 받는데 더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 예수님은 당장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능력자로 이해될 뿐이었지 그 이상의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오직 악한 귀신들만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아보고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이 잠잠할 것을 명령하시는데, 사람들의 오해를 막고 예수님께서 앞으로 이루시고자 하시는 하나님 나라와 행하실 사역에 대해 가르쳐야 했기 때문입니다.
적용: 세상적인 가치관에 물들어 있다면 영적인 진리에 이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바리새인들처럼 자신이 원하는 것을 지키기 위해서 말씀에 대해 눈감고 있습니까? 아니면 자신이 원하는 것, 세상적인 것을 얻기 위해 하나님을 찾는 사람입니까?
옳은 것이 무엇인지 알고 그 깨달음을 따라 행하는 사람은 인생을 가치 있게 사는 사람입니다. 때로는 그 옳음 앞에서 망설이기도 하고 오히려 옳지 않은 판단으로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서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고 담대함으로 옳은 일을 선택하는 일이 점점 많아졌으면 합니다. 인간에게 필요한 가장 중요한 지식은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하면 악을 멀리하고 선을 더 많이 행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 R. 데카르트.
< 설 교 >
어느 것이 옳으냐?
마가복음 3:1-6 / 이동휘 목사
1. 재미있는 유머 하나 소개합니다. <3일 동안 굶은 호랑이가 있었습니다. 먹이를 찾아다니다가 드디어 어설프게 쭈그리고 있는 토끼를 보고 한방에 낚아챘습니다. 이때 토끼가 하는 말 “이거 놔 새꺄~~!!” 순간 어안이 벙벙한 호랑이는 얼결에 토끼를 놔주었습니다. 상상도 못할 황당한 말에 호랑이는 대단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다음날, 충격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로 방황하던 호랑이, 드디어 또 토끼를 발견하고 역시 한발로 낚아챘습니다. 그러자 토끼왈~~~ “나야 새꺄~~!!” 또 다시 충격에 휩싸인 호랑이는 그 토끼를 얼른 놔주었습니다. 그리고 다짐을 했습니다. 다시는 그런 실수를 하지 않겠다고....다음날 또 토끼를 잡았습니다. 이번엔 그 토끼가 아니었습니다. 분명히 다른 토끼였습니다. 그런데 호랑이는 그 토끼가 한말에 쇼크를 받아 그만 죽어 버렸습니다. 토끼가 한 말의 이유인즉... “소문 다 났어. 섀꺄~~!!”> 조선일보 <이규태 코너> “호랑이 죽이기”에 이런 글이 실려 있습니다.
“한말(韓末)에만 해도 호랑이가 북악산 타고 경복궁까지 곧잘 침범했었다. 태종 때 일이다. 김덕생이라는 공신이요 명사수가 임금의 경호를 맡고 있었다. 어느 날 태종이 후원을 거니는데 맹호가 발소리를 죽이며 접근해 가는 것을 김덕생이 보게 되었다. 김덕생이 단 한발로 적중시켜 위기일발에서 임금을 구하였다. 두 번 공신이 될 뻔한 김덕생은 오히려 이 호랑이 사살로 대역죄에 몰렸다. 아무리 임금이 위기에 처했더라도 임금을 향해 활을 쏜다는 것은 시해 행위에 해당된다는 조정의 법리론이 우세했기 때문이다. 그는 호랑이 그림을 도처에 놓게 하여 백발백중 일실도 없음을 입증하였으나 끝내 사형을 당하고 말았다. 실리보다 도리에 더 비중을 두었던 시대의 ‘호랑이 사살사건’이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이것이 예수께서 자신을 죽이려 음모를 꾸미는 바리새인들에게 던진 질문입니다. 예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였습니다. 당시 회당(Synagogue)은 율법(토라-모세오경 :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을 읽고 가르치고 듣고 배우는 곳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의해 멸망하고 예루살렘 성전이 없어졌을 때 성전을 대신하는 기능을 대신했던 곳입니다. 그래서 예배와 기도, 그리고 율법을 가르치고 배우는 곳이 곧 회당이었습니다. 회당에는 회당장이 있어 예배를 책임지며, 율법을 범한 회원에게 태형(고후11:24)을 집행하기도 하며, 나팔소리로 안식일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일도 맡았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13:10-17에 보면, 예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 그곳에 열여덟 해 동안이나 병마에 시달리고 있는 여자가 있었는데, 허리가 꼬부라져서, 몸을 조금도 펼 수 없었습니다. 예수께서 가까이 불러 말씀하셨습니다.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느니라.” 그리고 그 여자에게 손을 얹어 기도하시자 곧 바로 18년 동안 꼬부라졌던 허리가 곧게 펴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이 광경을 목격하게 된 회당장이 화를 내며 회당에 모인 무리들에게 말합니다.
(눅13:14) 일해야 하는 날이 엿새가 있으니, 엿새 가운데서 어느 날에든지 와서, 고침을 받으시오. 그러나 안식일에는 그러지 마시오.
그러자 예수께서 그 회당장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눅13:15-16)너희 위선자들아, 너희는 저마다 안식일에도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 내어 끌고 나가서, 물을 먹이지 않느냐?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자가 열여덟 해 동안이나 사탄에게 매여 있었으니, 안식일에라도 이 매임에서 풀어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니, 그를 반대하던 사람들은 모두 부끄러워했고, 무리는 모두 예수께서 하신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두고 기뻐했습니다.
(눅13:17) (17)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매 모든 반대하는 자들은 부끄러워하고 온 무리는 그가 하시는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기뻐하니라
이렇게 예수께서는 회당에 가셔서 잘못 이해되고 있는 하나님 말씀들을 바르게 가르치실 뿐만 아니라, 그를 위해 실제 이적이나 기적, 능력 등을 나타내 보이시기도 하셨습니다. 자그마치 18년 동안이나 고통스러운 병을 앓던 여인이 치유된 일에 대하여 함께 기뻐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율법을 범했다고 비판하는 회당장의 태도는, 진정한 의미에서 율법의 수호자가 아니라, 율법으로 한 사람의 삶을 불행으로 몰아가는 모습이었습니다. 한 번은 예수께서 어느 안식일에 제자들과 함께 곡식이 무르익은 밭 사이를 걷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배가 고파 이삭을 따 먹었습니다. 이 일로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 규정을 어기고 있습니다.” 며 항의합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막2:27-28) (27)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28)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이 말씀은 율법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율법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시며, 율법의 바른 뜻을 깨우치시는 것이었습니다. 더 넓게 말하면, 사람을 위해 종교가 있는 것이지 종교를 위해 사람이 존재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2. 바로 이 말씀을 하신 후, 얼마 되지 않아 오늘 본문 사건이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안식일에 여느 때 처럼 회당에 들어가시자 한쪽 손 마른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한쪽 손 마른 사람”은 선천적으로 그러한 장애를 지닌 것이 아니라, 후천적인 것으로, 어떤 질병이나 사고로 인해 근육이 마비되고 손이 말라 버려 활동력이 완전히 상실된 사람을 말합니다. 그 사람은 미장이로서 그 손으로 생계를 꾸려 나가야만 했기 때문에, 그 손이 치유되지 아니하면 구걸하러 거리로 나갈 수밖에 없는 절박한 처지였습니다. 그래서 소문을 듣고 회당에 나가 자신의 병을 고쳐줄 것을 간절하게 호소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를 아시는 예수께서 그 손 마른 사람에게 “일어서라!” 고 말씀하시고, 회당에 모인 무리들에게 묻습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무리들이 묵묵부답(??不答), 잠잠하자 예수께서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둘러 보시고 그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손을 내밀라” 그가 손을 내밀자 그 마른 손이 곧 바로 원상태로 회복되었습니다. 안식일에 율법을 가르치는 회당에서 병든 자를 치유하시는 기적을 베푸신 것입니다. 이를 유심히 엿보고 있던 바리새인들이 곧 바로 나가서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했습니다. 예수께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물으실 때는 한 마디 없다가 막상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자 곧장 나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일 계획을 세운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가 율법, 안식일 법을 어겼다는 확실한 증거를 수집하고 그에 따라 예수를 처형하기 위해 송사할 준비를 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문제 삼은 율법 중 안식일에 대한 것은 출애굽기 20:8-11입니다.
(출20:8-11) (8)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9)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10)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11)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안식일에는 모든 일이 금지되어 있었으며, 병을 고친다는 것도 일하는 것으로 규정했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이 제 4계명을 아주 명확하게, 그리고 상세하게 규정했습니다. 병환자들에 대한 치료는 생명이 위험했을 때에만 주어졌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든다면, 만일 어느 사람이 담길을 걷다가 그 담이 무너져 그 밑에 깔렸다면, 그 사람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를 알아볼 정도만큼 벽을 치워버릴 수 있었습니다. 담벼락에 깔려있는 사람이 살아있다면 벽돌들을 치우는 것으로 일을 끝내야지 만약 그 다친 곳을 치료한다면 안식일 법을 어겼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에 죽었다면 그의 시체는 안식일 다음날까지 그곳에 방치했다가 안식일이 지난 후에 치울 수가 있습니다. 안식일에 성전에 가다 넘어져 다리가 부러졌더라고 치료해서는 안됩니다. 또 팔다리가 삐었을 경우, 그 통증을 가라앉히기 위해 삔 곳에 찬물을 붓게 되면 그것도 안식일을 범하는 죄가 됩니다. 손가락이 베었을 경우 그 상처에 붕대를 감을 수는 있지만 치료약을 바르면 안식일을 범하는 죄가 됩니다. 상처는 그것이 악화되는 것을 방지하는 선에서 그만 두어야지 그 상처가 좋아지게 하는 일체의 행위는 율법 위반입니다. 이렇게 해서 만약 그 상처가 안식일이 지나기 전 악화되어 그 사람이 죽는다 해도 그렇게 해야 안식일을 바르게 지키는 것이라는 것이 율법주의자의 율법 해석입니다. 다시 말하면 안식일을 엄격하게 지키기 위해서라면 생명마저도 지키려 하지 않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예수께서 말씀하신대로 바리새인들의 율법 해석은 오직 율법을 위한 것이지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의 생명, 사람의 행복한 삶을 위해 율법이 주어진 것인데, 오로지 율법을 위해 사람의 행복과 생명을 희생시키는 것으로,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참된 뜻을 크게 왜곡시킨 것이었습니다.
또 하나 실례가 있는데 그것은 마카비(Maccabees) 독립전쟁(B.C.167-164)에서 패했을 때, 유대의 반란군 몇 사람이 동굴 속으로 도망쳤습니다. 수리아 병사들이 그들을 추격했고, 그들이 유대인에게 항복할 기회를 주었으나 유대인들은 응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의 역사가 요세푸스는 다음과 같이 그 사실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에 유대인들과 싸웠다. 그들은 동굴 속에 있는 유대인들을 불태워 죽였다. 유대인들은 동굴의 입구를 막으려 들지도 않고 저항도 하지 않았다. 유대인들은 그 날, 즉 안식일에는 자신들을 지키는 것을 거부하였다. 그들은 그러한 위기에 처해 있어서도 안식일 율법을 깨뜨릴 마음은 없었다. 우리의 율법은 우리에게 그 날, 안식일에는 쉬어라고 요구한다.” B.C.63년, 로마의 장군 폼페이(Pompey)가 예루살렘을 포위하였을 때, 방어자들은 성전의 경내에 피난했습니다. 그러나 폼페이 장군은 유대인의 신앙, 안식일에는 일체의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안식일에 그대로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이 때 유대인들은 전혀 방어하지 않고 그냥 앉아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러한 율법준수 관념은 안식일 자체를 절대화시켜 우상화하는 것으로 예수님의 말씀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입니다.
(막2:27-28) (27)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28)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3. 안식일보다 귀한 것이 사람의 생명입니다. 율법은 사람을 위해서 주어진 것입니다. 안식일은 생명을 죽이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유대 종교의 지도자들이 예수가 안식일을 지키는가 여부를 눈여겨 보았지만, 예수께서는 손 마른 불쌍한 사람을 고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옳으냐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 옳으냐고 묻지 않으셨습니다. 법보다 중요한 것이 생명인 까닭에 손 마른 사람을 한가운데 일어서게 하시고 그들에게 묻기를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막3:4)고 물으셨던 것입니다. 이 질문은, 안식일을 지킨다고 해서 병든 사람을 버려둔다면 그것이 곧 악행이고 더 나아가 사람의 생명을 죽이는 살인죄와 같다는 것입니다. 어느 율법 교사 하나가 예수를 시험하기 위해 “선생님, 율법 가운데 어느 계명이 중요합니까?” 고 물었습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하셨으니,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으뜸 가는 계명이니라. 둘째 계명도 이것과 같은데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여라.’ 한 것이니라. 이 두 계명에 모든 율법과 예언자들의 본 뜻이 달려 있느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마22:37-40) 한 마디로 간단히 말하면 모든 율법은 사랑으로 완성된다는 것입니다. 율법의 중심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을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그 율법을 완전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 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미국의 흔한 농담입니다. “2+2의 답이 뭐냐? 고 물었을 때, 수학 이론가는 “3과 5 사이 어디쯤에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고 대답할 것이고, 계리사는 “4 입니다.” 하고 대뜸 대답할 것이고, 변호사는 문을 닫고 아무도 엿듣는 이가 없음을 확인한 뒤에 “답을 어떻게 만들어 드릴까요?” 하고 말할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법과 그 실천은 거리가 먼 것을 풍자한 것입니다. 예수는 율법보다 인간을 더 중요시하셨고 그에 반하여 유대교 지도자들은 인간보다 율법을 더 우선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예수는 인간이 율법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율법이 인간을 위해 있는 것임을 선언했습니다.
(막2:27) 또 가라사대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한 여인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 의해 그 앞에 끌려왔습니다. 율법, 십계명 중 제 7계명을 범한 여인이었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간음한 사람은 남자든 여자든 끌어다 돌로 쳐죽이라고 했습니다.
(신22:21-24) (21) 그 처녀를 그의 아버지 집 문에서 끌어내고 그 성읍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죽일지니 이는 그가 그의 아버지 집에서 창기의 행동을 하여 이스라엘 중에서 악을 행하였음이라 너는 이와 같이 하여 너희 가운데서 악을 제할지니라 (22) 어떤 남자가 유부녀와 동침한 것이 드러나거든 그 동침한 남자와 그 여자를 둘 다 죽여 이스라엘 중에 악을 제할지니라 (23) 처녀인 여자가 남자와 약혼한 후에 어떤 남자가 그를 성읍 중에서 만나 동침하면 (24) 너희는 그들을 둘 다 성읍 문으로 끌어내고 그들을 돌로 쳐죽일 것이니 그 처녀는 성안에 있으면서도 소리 지르지 아니하였음이요 그 남자는 그 이웃의 아내를 욕보였음이라 너는 이같이 하여 너희 가운데에서 악을 제할지니라
간음은 중범죄로서 율법을 적용시키면 이 간음한 여인을 처형하는 데는 사실상 예수님의 동의는 필요없는 것이었습니다. 율법에 정한대로 끌어다 처형하면 그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자만을 예수께로 끌고 왔습니다. 그들이 노리는 함정은 예수가 여인을 용서하게 된다면, 결과적으로 율법을 무시하거나 파괴하는 것으로 몰아 예수 그리스도 역시 처벌할 근거를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그 간음한 여인에게 율법에 정한대로 처형하라고 한다면, 그간 예수께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그 사랑의 메시지에 흠집을 내 그를 포기하게 만들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원칙적으로 사형을 집행할 권한이 없었음으로 예수가 만약 사형을 선고하게 된다면, 그것은 로마 총독의 권한 침해라는 구실로 그들의 적개심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는 것이었습니다. 율법대로 하자면 간음한 여인에게 사형을 선고해야 하며, 또한 사형을 선고하게 되면 로마법을 침해하게 되어 고발당하게 될 것이고, 반대로 그 여인을 사랑으로 용서하라고 하면 유대의 율법을 위배하는 것이며 예수의 사랑의 정신은 무력한 것이 될 것이기 때문에, 이 간음한 여인을 미끼로 삼아 예수를 처벌할 구실로 삼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이러한 문제를 두 차례에 걸친 초월적인 지혜의 행위와 말씀으로 간단하게 해결하신 것이었습니다. 예수의 판결은 죄없는 자가 돌로 쳐죽이라는 율법의 집행입니다. 모세의 율법에는 증인이 먼저 죄인에게 손을 대어 그를 죽게 할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13:9-10) (9) 너는 용서 없이 그를 죽이되 죽일 때에 네가 먼저 그에게 손을 대고 후에 뭇 백성이 손을 대라 (10) 그는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너를 인도하여 내신 네 하나님 여호와에게서 너를 꾀어 떠나게 하려 한 자이니 너는 돌로 쳐죽이라...(신17:7) 이런 자를 죽임에는 증인이 먼저 그에게 손을 댄 후에 뭇 백성이 손을 댈지니라 너는 이와 같이 하여 너의 중에 악을 제할지니라.
그러나 중요한 것은 법에 따라 처형을 하되 처형하는 자 스스로가 죄없는 자이어야 한다는 조건이 있는 것입니다. 즉 자기 스스로를 심판하는 일 없이 심판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 간음한 여인에게 돌을 던지기 전에 먼저 자신에게 돌을 던질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율법 정신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돌을 던져 간음한 여인을 죽이라는 심판의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돌을 던지므로 나로 하여금 그와 같은 범죄를 범하지 않게 하기 위한 경계입니다. 한 사형수가 단두대로 끌려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다른 사람 대신 억울한 누명을 쓴 채 죽음을 맞이하게 된 사람이었습니다.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는데 이대로 죽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이 사형을 피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드디어 단두대에 다다랐습니다. 그런데 단두대에 올라가려는 바로 그 순간 그의 머리 속에서 한 가지 기발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사형당하기 전에 할 말이 있으니 잠깐만이라도 임금님을 뵙게 해 줄 수 없겠소?” 이제 곧 죽을 사람의 마지막 소원인지라 알현이 허락되었습니다. 임금님 앞에 선 그 죄수는 다짜고짜 품에서 금덩어리 하나를 꺼내 그 앞으로 내밀며 말했습니다. “이 금덩이는 보통 금덩이가 아니라 죄없는 사람이 심으면 싹이 나서 나중에는 금덩어리 열매가 열리는 진귀한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미 죄인이므로 심어도 소용이 없고, 또 이제 곧 죽어야 하니까 심을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죄 없으신 임금님께 바치고 세상을 떠나려 하는 것입니다.” 어리둥절하게 금덩이를 받아들은 임금이 생각했습니다. ‘나도 죄가 있으니 심어도 싹이 안 나올거야, 또 만일 심었다가 싹이 나오지 않는 날에는 백성들에게 임금님도 죄인이라고 손가락질 당할 것이 아닌가?’ 임금은 얼른 금덩이를 옆자리의 대신에게 넘겨주며 심어 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대신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는가 싶더니 옆에 있는 다른 대신에게 또 다시 얼른 넘겨주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 금덩이는 자꾸만 이 사람 저 사람의 손으로 밀려갔습니다. 결국엔 누구 하나 심으려는 자 없이 핑계만이 무성해졌습니다. 이 광경을 본 죄수는 “이 중에도 죄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는 것 같은데 왜 나만 죽이려 하십니까?” 하면서 자신의 무죄함을 거듭 호소했습니다. 그의 호소에 임금 이하 모든 대신들의 얼굴은 발갛게 달아올랐고, 결국 이 죽을 죄인은 사형을 면하게 되었습니다.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에게 돌을 던지기 전에 자신을 돌아볼 때, 양심의 가책을 받아 한 사람씩 한 사람씩 다 흩어졌습니다.
(요8:9)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이 때,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8:10-11) (10)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간음한 그 여인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예수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돌을 던지지 않으셨습니다. 그녀를 정죄치 않으셨습니다. 예수는 간음한 여인에게 이어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11절)는 전제하에 사죄를 선언하셨습니다. 율법으로 죄를 깨우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진리로 그 여인은 생명을 구하셨습니다.
(요 1: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롬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롬 7:7)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고전 15:56)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율법은 간음한 여인을 죽음의 깊은 어두움 가운데서 예수 앞에 이르게 했지만, 율법의 완성이시며 사랑의 실체이시고 세상의 빛이신 예수는 그 여인에게 새로운 생명과 빛으로 축복하셨습니다. 여인의 간음죄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용서하시고, 그 죄값을 자신이 십자가에 죽음으로 치루어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어 새로운 삶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율법을 완성하여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처럼 율법에 따라 죽어야 할 인간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시므로 그 죄인에게는 생명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이며 하나님의 지혜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고전1:18-24) (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19)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20)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우리 인생을 새롭게 하시며 의롭게 하시어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지혜, 그리고 영원한 생명이 여러분에게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죽이는 사람인가? 살리는 사람인가?
마가복음 3:1-6 / 조상호 목사
■ 한 달 전 일본에 사는 42세 된 양현옥씨가 오사카 지하철 선로에 떨어진 한 일본인을 살렸다는 기사가 일간신문에 실린 적이 있습니다. 양현옥씨는 4월19일 오후 8시20분쯤 오사카의 니혼바시(日本橋)역 승강장에서 열차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한 일본 노인이 누군가에게 떠밀려 선로에 떨어지는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양현옥씨는 위험을 무릎 쓰고 1.3 미터 아래 선로로 뛰어내렸습니다. 그는 이어서 뛰어내려온 다른 사람과 힘을 합쳐 노인을 구해냈습니다. 또 주위에 있던 다른 사람들이 긴급 정차버튼을 눌러 열차는 200여m 앞에서 급정차하여 노인은 목숨을 건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양씨는 그 노인을 살려준 후, 곧 바로 현장을 떠났습니다. 오랫동안 양현옥씨의 선행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가 양씨를 아는 어떤 사람이 그 사실을 니혼 바시역에 전하면서 양현옥씨의 선행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양현옥씨는 오사카 경제대학에서 경제학 석·박사 학위를 받고, 현재는 시간강사로 출강하고 있는 미래가 창창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자칫 잘못하면 역 구내로 달려오는 열차에 치여 자기 생명도 위험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 그는 선로에 뛰어내려 위험에 처한 일본 노인을 구한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 보면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을 종종 목격합니다. 비단 양현옥씨 뿐 아니라, 4년 6개월 전에 도쿄(東京)에서도 한국인 유학생 이수현씨가 선로에 떨어진 취객을 구하려다 목숨을 잃은 일이 있었습니다. 이수현씨 사건이 있은 지 1년 6개월이 지난 2002년 7월22일 오전, 행정학과 4년 휴학중인 장세환씨는 소매치기를 쫓다 고려대 교우회관 앞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숨졌습니다. 또 지난 4월15일 김해에서 발생된 중국 민항기 추락사고 때 25세 된 설익수씨는 기체 잔해에 눈이 찔리는 부상을 입은 상황에서 중상을 입은 다른 승객 20명을 구조했습니다. 언제 폭발할지도 모르는 비행기 잔해 안으로 뛰어 들어가 많은 승객들을 살린 것입니다. 또 지난 4월20일 저녁 서울 동대문 역에서 술에 만취한 50대 남자가 지하철 선로에 떨어져있는 것을 보고 서울고 3학년 정만채(19)군이 뛰어들어 구출한 일도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바로 이웃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내어놓은 사람들입니다.
1) 죽이는 사람
그런데 이러한 사람들과 달리, 자신이 살기 위해 이웃을 죽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카드 빚을 갚기 위해서 길가는 죄 없는 여인들을 죽이고, 자동차에 뛰어들어 스스로 부상을 당해 보상금을 타내고, 유흥비가 떨어지자 밤중에 술에 취해 걸어가는 사람들을 돕는 척하며 주머니를 뒤져 지갑을 훔쳐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한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사람을 죽이는 사람들이었마가복음 2장을 보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모습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들르셨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 와서 움직일 수조차 없었습니다. 그때 네 사람이 지붕을 뜯어내고 중풍병자를 메어 주님께서 계신 곳으로 옮겨 왔습니다. 예수께서는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를 향해 “소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시자, 서기관들이 어떻게 반응한 줄 아십니까? 마가복음 2장 6절과 7절에는 그들의 행동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의논하기를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참람하도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주님께서 죄 용서해주시는 것을 문제 삼은 것입니다. 어떻게 함부로 죄인을 용서해 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세리인 마태의 집에서 식사를 하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이렇게 반응을 합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막2:16) 그들은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문제 삼았습니다. 어떻게 죄인들과 함께 밥을 먹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어떻게 로마의 앞잡이가 되어 같은 민족을 등쳐먹고 악한 짓을 일삼는 민족의 반역자들과 함께 앉아 있느냐는 것입니다. 또한 마가복음 2장 18절을 보면 이번에는 그들은 금식에 대한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 시비를 걸어왔습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지라 혹이 예수께 와서 말하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 하나이까” 지금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당하던 세리 마태가 구원받고 당신의 제자가 되자, 너무 기쁘셔서 마태의 집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데,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이것을 문제 삼고 있습니다. 우리와 요한의 제자들은 금식을 하고 있는데 어찌하여 당신과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또한 마가복음 2장 23절과 24절을 보면 이번에는 안식일의 문제를 가지고 다시 한번 예수님께 시비를 걸었습니다.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쌔 그 제자들이 길을 열며 이삭을 자르니,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저희가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안식일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잘라 먹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왜 거룩하게 지켜야 할 안식일에 노동을 했느냐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2장에 등장하는 네 가지 이야기의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무슨 공통점인 줄 아십니까? 네 부분이 똑같이 부정형 질문으로 되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왜 죄를 용서해 주었습니까? 왜 죄인들과 함께 밥을 먹었습니까? 왜 제자들이 금식을 하지 않습니까? 왜 제자들이 안식일에 일을 했습니까?”라고 하면서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물론 이 질문은 그들이 진리에 대해서 궁금하여주님께 던진 질문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주님 말씀대로 순종하기 위해서 던진 질문도 아니었습니다. 마가복음 2장에 나오는 그들의 질문을 보면, 어디에도 긍정적인 질문은 하나도 없습니다. “왜 이렇게 했습니까? 왜 저렇게 했습니까? 이렇게 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저렇게 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의 질문은 다 부정적인 질문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특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따지기 좋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정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손가락질 당하는 죄인들을 살리려고 하기 보다는, 오히려 죄인들을 향해 손가락질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람들을 회복시키려고 하기보다는 사람들을 망가뜨리려고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손가락질 당하고 세상으로부터 왕따 당하고 있는 세리가 회개하고 제자가 되었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때는 금식할 것이 아니라, 잔치를 벌여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 잘 하셨습니다. 한 영혼이 구원받을 때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우리가 잔치를 더 크게 벌이면 어떨까요?‘라고 말했어야 합니다. 또 하나님의 말씀을 배운 사람이라면, 안식일에 이삭을 잘라 먹은 사람들을 향해 “배가 무척이나 고팠나 봅니다. 얼마나 배가 고프셨으면 들판에서 이삭을 잘라 드셨을까요? 저희 집에 차가운 밥이 있는데 그거라도 드릴 테니 같이 가시지요?”라고 말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달랐습니다. 예수님께 따졌습니다. 제자들을 책망했습니다. 죄인들을 향해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이 사람들은 죄인들을 정죄하며 손가락질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생명을 살리려고 하기 보다는 죽이려고 하는, 아니 죽는 것을 그냥 보고만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저는 선교대회 참석차 한국 방문 중 비극적인 한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9일 저녁 그러니까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열방콘서트를 마치고 교회 계단 앞 십자가 탑 근처에서 오랜만에 우리 교회 출신 디아스포라 청년들을 만났습니다. 잠시 동안 대화하다가 시간이 없어 함께 자리를 같이 하지 못하는 세 형제들을 위해서는 교회 앞에서 간절히 기도해 주고, 남은 7명의 지체들과 함께 홍대 앞에서 치킨 집을 운영하는 조모 형제 가게로 가게 되었습니다. 이미 시간이 늦어 여의도에는 그 시간에 갈만한 장소도 없고, 이왕이면 디아스포라 형제 사업장의 매출을 올려주기 위해서 그곳으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다른 4명의 지체들은 택시를 타고 가고, 저와 또 다른 한 지체는 김민우형제가 부인과 함께 끌고 온 자동차로 가게 되었습니다. 교회를 떠나 서강대교 중간쯤 다다르게 되었는데, 갑자기 앞서 가던 자동차들이 속도를 줄이고 서행하는 것이었습니다. 눈을 돌려 전방을 보니 도로 한쪽이 차단되어 있고 그 옆에는 몇 대의 경찰차가 서 있고, 환하게 불이 켜져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반대쪽에서 앰블런스가 달려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그 현장을 지나갈 때 보니 두 켤레의 신발이 가지런히 다리 난간에 놓여 있었고 수많은 경찰들이 그 신발과 신발 주위를 자세히 조사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본 민우형제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 누가 자살했나 봐요? 바로 전에 자살한 것 같아요?” 다음 날 방송을 보니까 전날 밤에 우리가 보았던 그 현장이 나오면서 누군가가 그곳에서 자살했다고 합니다. 경찰은 시체를 찾기 위해 잠수부를 동원하여 서강대교 밑의 강바닥을 조사하고 있다는 뉴스가 흘러나왔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가정이지만 만약 제가 그 다리 위를 걸어가다가 그 시간에 다리 난간에서 자살하려는 사람을 보았다고 가정하겠습니다. 그러면 저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뛰어가서 그 사람의 멱살을 잡고 자살을 못하도록, 아니면 뺨을 때려서라도 자살하지 못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자살하는 현장을 그냥 지나쳤다면 여러분들은 저를 뭐라고 생각하겠습니까? 아마 여러분들은 저에게 이렇게 말할 지도 모릅니다. “목사가 되어 죽는 것을 그냥 보고 지나칠 수 있습니까? 뛰어가서 자살하지 못하게 말렸어야죠. 당신 목사 맞아요?“ 목사가 아니라 할지라도, 자살하려고 하는 사람을 보고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만약 죽는 것을 보고 그냥 지나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정상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그 사람은 자살방조죄를 저지른 사람으로 상종조차 해서는 안 될 사람입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우리 주위에는 죽어가는 사람을 그냥 못 척하는 크리스챤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실 우리 주위에 보면 죽어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비록 다리 난간에서 뛰어내리려고 하는 사람은 아닐 찌라도,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죽음으로 달려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무엇이 참 진리인지도 알지 못한 채, 죽음을 향해 운전해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만약 그들을 보고도 그냥 지나친다면 그 사람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지옥 불로 달려가는 죄인들을 살리려고 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들을 정죄하며 손가락질 했습니다. 생명을 살리려고 하기 보다는 죽는 것을 그냥 보고만 있었습니다. 물론 율법에 의하면 죄인을 정죄하는 일은 옳은 일입니다.
<사랑의 원자탄>이라는 별명이 붙은 손양원목사님은 옳은 일보다 위대한 일을 행하셨습니다. 사실 두 아들을 죽인 원수가 죽도록 내버려 두는 것은 옳은 일입니다. 그러나 손목사님은 그 옳은 일을 행하지 않고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원수를 살려내, 양아들로 삼는 위대한 일을 하셨습니다. 율법의 기준으로는 옳은 일이라 할지라도, 사랑의 기준으로 보면 옳은 일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율법의 기준으로 보면 지옥 불로 달려가는 사람을 내버려두는 것은 옳은 일입니다. 그러나 사랑의 기준으로 보면 지옥 불로 달려가는 사람을 내버려두는 것은 옳지 않은 일입니다.
여러분들에게 묻습니다. 여러분들은 지옥 불로 달려가는 사람을 살리려고 하기보다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처럼 죽는 것을 내버려 두는 사람들은 아닙니까? 사람들의 허물만을 드러내며 그 사람들을 향해 손가락질만 하며 정죄하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의사가 존경받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사람을 살리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철로에 떨어져 있는 사람을, 교통사고가 날 뻔한 사람을, 죽음 직전의 사람을 구한 사람을 존경하는 이유를 아십니까? 사람을 살렸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같은 사람이 한 사람도 없기를 바랍니다. 이웃을 정죄하며 죽이는 사람들이 이 자리에 단 한 사람도 없기를 바랍니다. 율법의 잣대로 사사건건 따지려고 하기 보다는 할 수만 있으면 사랑의 기준으로 품어주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살리는 사람
본문에는 생명을 죽이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달리, 생명을 살리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달리 생명을 살리는 분이십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한편 손 마른 사람이 있었습니다. ‘한편 손 마른 사람’이란 한 손을 사용하지 못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는 정상적인 생활하기에 매우 불편을 느꼈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 여러 가지 잡일을 하는 소사 일을 하는 분이 계셨습니다. 그 분은 고등학교 다닐 때, 학교 수학여행을 갔다가 한쪽 손목 밑 부분이 완전히 절단이 나는 불의의 사고를 당했습니다. 학교에서는 졸업할 때까지 학비를 보조해주고 졸업 후에도 계속해서 그 학교에서 허드렛일을 하게 하면서 생활할 수 있게 배려해 주었습니다. 그 분은 잘려나간 한 쪽 손에 의수를 끼고 살았습니다. 아무리 더운 여름에도 긴 팔소매가 있는 옷을 입고 다녔습니다. 일을 할 때는 한 손으로만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얼마나 불편했겠습니까? 그 분은 항상 그늘진 얼굴을 하고 다니며 하루 종일 말하는 경우가 별로 없었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 분은 다친 팔로 인한 육신의 고통과 마음의 고통이 매우 심했던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한편 손 마른 사람도 아마 그랬을 것입니다. 일상생활에 불편을 느낀 나머지, 회당에 앉아 있는 어떤 사람들보다 더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예배하고 하나님의 치유의 역사를 기대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와는 정반대의 마음으로 회당 안에 앉아 있는 종교지도자들이 있었습니다. 2절을 보겠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송사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엿보거늘”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 관심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데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고자 하는 소원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잡아 죽이기 위해 예수님의 허점을 찾아내기 위해서 회당에 앉아 있었습니다. 회당 안에는 어둠의 기운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분위기를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을 고쳐주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고소당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당신의 사역을 주저하며 피했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해야 할 일을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손 마른 사람을 회당 한 가운데 일어서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있던 종교 지도자들에게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고 질문하시며 사람의 생명보다, 형식을 더 중요시하는 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저희 마음의 완악함을 보시고 분노하셨습니다. 그리고 손 마른 사람에게 "네 손을 내밀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그가 오랫동안 드러내놓고 싶지 않은 손을 내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내밀라고 한 그 손은 그가 참으로 오랫동안 부끄러워했던 손이었습니다. 그에게 오랫동안 아픔과 슬픔을 안겨다 주었던 손이었습니다. 남들에게 드러내기를 꺼려했던 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손을 내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손 마른 사람이 어떻게 했습니까? 제가 5절 하반절을 읽겠습니다. “....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그는 자기의 핸디캡인 그 부끄러운 손을 예수님께 내밀었습니다. 결국 그의 손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회복되었습니다. 마른 손이 생기를 되찾아 정상적인 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육체의 핸디캡으로 인해 받은 마음의 상처도 회복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주님은 회복시키시는 분이신 줄로 믿습니다. 주님은 살리시는 분이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질문합니다. 여러분들은 바리새인들처럼 죽이는 사람들입니까? 아니면 예수님처럼 살리는 사람들입니까? 여러분들은 유대인들처럼 이웃을 향해 정죄하며 손가락질 하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예수님처럼 상처받은 사람을 회복시키는 사람들입니까? 여러분들은 여러분 자신만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입니까? 아니면 타인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입니까? 여러분, 예수 믿고 구원받은 우리들에게는 축복할 수 있는 권세가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복은 하나님께서 주시지만, 우리에게는 복을 빌어 줄 수 있는 축복권(祝福權)이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부모에게는 자녀를 양육할 수 있는 권세뿐 아니라, 축복할 수 있는 권세도 있는 줄로 믿습니다.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은 "왕 같은 제사장들"(벧전 2:9)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축복할 수 있는 권세가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많은 크리스챤들이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다보니 자신이 가진 축복권과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 권세를 잊어버리고 살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솔로몬 왕은 잠언 11장 25절에서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 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 지리라"고 말씀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윤택하게 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더욱 윤택하게 해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일을 책임져 주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 교회는 오는 8월7일이 되면 12주년을 맞이합니다. 저는 오래 전부터 12주년이 되는 우리 교회가 무엇을 하면 좋을까 기도하다가 교회의 주인이 되시는 주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일을 해야겠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오는 창립 12주년을 <홈컴밍 데이>로 정하여 주위에 주님을 알지 못하는 분들을 초청하여 복음을 듣게 하려고 합니다. 초청된 분들에게는 고급 탁상시계를 드리려고 합니다. 이미 한국에서 배로 부쳤습니다.
아는 집사님의 배려로 값싸게 구입했고, 탁상시계 전면에 <창립 12주년 홈컴밍데이>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습니다. 홈컴밍데이에 초청되어 오신 분들에게는 이 시계를 나누어 드리려고 합니다. 그리고 초청을 많이 한 분들에게도 역시 푸짐함 상품을 드리려고 합니다. 이제 오늘 나누어 드린 <2005 태신자 작정카드>를 가지고 가셔서 2주 동안 기도하신 후 작성하시기 바랍니다. 작성하실 때는 그 사람이 믿을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든지, 믿을 가능성이 없는 사람이든지 상관 말고 기입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제출하신 명단에 오른 사람을 책임지라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단지 홈컴밍데이에 초청하고 싶은 사람을 카드에 적어 7월 첫째 주에 가져오셔서 안내실에, 혹은 헌금시간에 제출해주시면 됩니다. 그러면 매일 새벽기도회 시간에 여러분들이 제출하신 카드에 적힌 이름을 불러가면서 7월 한 달 동안 기도할 것입니다. 그리고 샘모임 시간에, 샘지기 모임 시간에, 제자훈련 시간에, 사역훈련 시간에 기회가 닿는 대로 기도할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기록한 <태신자 작정 카드>가 ‘쉰들러 리스트(Schindler's List)’가 되었으면 하는 소원이 있습니다. 쉰들러 리스트에 대해서 들어보신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영화로도 만들어져서 수많은 감동을 주었던 실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이 점령한 폴란드의 어느 마을을 배경으로 합니다. 자신의 성공을 추구하는 기회주의자 쉰들러는 유태인이 경영하는 그릇 공장을 인수하게 됩니다. 그는 공장을 인수하기 위해 나찌 당원이 되고 독일군에게 뇌물을 바치는 등 갖은 방법을 동원합니다. 그러나 냉혹한 기회주의자였던 쉰들러는 유태인 회계사와 친분을 맺으면서 유태인 학살에 대한 양심의 소리를 듣기 시작합니다. 독일인들은 유태인의 시체를 태우기 위해 시체 태우는 큰 공장을 몇 채씩 지어놓고, 그 공장을 24시간 가동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태인들은 감옥에서 가스실로 들어가 죽기 위해 1년, 2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독일인들이 온 유태인 가족을 벌거벗겨 가스실에 넣어 죽입니다. 그는 유태인 어머니와 어린아이가 꼭 껴안고 죽어 가는 그 모습을 바라보고 참으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그 비참한 장면을 보고 유태인을 구하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그 당시 독일인 관리들이 타락했기에 돈을 주면 가스실로 갈 유태인들을 구해 내어 다른 곳으로 피신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는 독일군 장교에게 빼내는 사람 숫자대로 뇌물을 주는 방법으로 유태인들을 구해내려는 계획을 세웁니다. 그리고 자기가 구해낼 유태인들의 명단, 이른바 "쉰들러 리스트"를 만듭니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1,200명의 유태인을 구해내게 됩니다. 그는 유대인들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전 재산을 다 썼습니다. 그의 마지막 돈을 다 털어 기차를 태워서 떠나보낸 후, 그는 선로를 터벅터벅 걸어오다가 무심코 자기의 손가락에 끼어진 금반지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소리칩니다. "내가 이것을 왜 끼고 있지? 이 금반지를 팔았더라면 한사람의 생명을 더 구할 수 있었을 텐데... 이것을 내가 왜 끼고 있지?" 통곡하며 절규하는 이 사람이 바로 쉰들러(Schindler)입니다. 잊을 수 없는 장면입니다. 쉰들러는 유태인과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살리고자 자신의 재물을 다 털었습니다. 자신이 게을러서, 좀더 돈이 있었더라면 더 많은 생명을 건질 수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한 자신을 향해 통곡하며 몸부림을 쳤습니다. 그런데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것을 믿고 있는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지금도 세상에서 방황하는 영혼들, 죽어 가는 영혼들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서두에서 양현옥씨의 이야기로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사고가 난지 20여일 만인 지난 5월 10일 오사카 미나미(南)경찰서에서 감사장을 받게 된 양현옥씨는 함께 구조에 참여한 다른 일본인 사람들에게 공을 돌리면서 이러한 말을 했다고 합니다. “우선 구조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우선 구조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라는 이러한 마음이 있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에게도 "우리의 쉰들러 리스트"가 있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지옥으로 달려가고 있는 영혼을 구원해 내야할 "나의 쉰들러 리스트"가 있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지금까지는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가지고 나 하나만을 위해서, 우리 자녀만을 위해서, 우리 남편과 아내만을 위해서, 우리 가정만을 위해서 살았다면 이제는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나를 통해 누구를 인도하기를 원하시는지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쉰들러 리스트처럼 여러분들의 쉰들러 리스트를 만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쉰들러처럼 애절한 마음으로 우리가 죽은 영혼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할 때, 하나님의 큰 은혜와 축복이 우리의 삶의 현장에 풍성하게 임할 줄로 믿습니다. 죽어가는 영혼들을 그냥 방치하지 않고 주님 앞으로 인도해 올 때, 하나님의 큰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질 줄로 믿습니다.
사랑이 없기에
마가복음 3:1-6 / 이수영 목사
오늘 본문은 이미 노출되기 시작한 예수님과 바리새인들 사이에서의 이견과 대립이 첨예화되게 된 사건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드러난 예수님과 바리새인들 사이의 이견은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주는 일이 가한지 아닌지에 관한 것입니다. 아마도 가버나움일 것이라고 여겨지는데, 어느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런데 그 때 거기에 한쪽 손이 마른 한 사람이 들어와 있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또 예외 없이 바리새인들이 있었습니다. 이미 예수님의 병 고치는 능력을 알고 있었던 바리새인들은 회당 안에 예수님도 계시고 한쪽 손 마른 사람도 있는 것을 보고는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고치실지 아닐지 예의주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예의주시하고 있었던 것은 그 날이 안식일이었으므로 만일 예수님께서 그 한쪽 손이 마른 한 사람을 고쳐주신다면 안식일을 범한 죄로 예수님을 고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들의 생각을 알고 계셨던(눅6:8) 예수님은 그 한쪽 손 마른 사람에게 회당의 한 가운데에 일어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그 사람을 회당 가운데 세우실 뿐 아니라 숨어서 예수님을 엿보던 바리새인들과 그들의 마음 속에 숨어있는 생각을 만인 앞에 끌어내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는 것은 십계명에 속하는 것이고, 그래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은 성회로 모여 예배하는 것 외에 일체의 노동을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안식일을 철저히 지키겠다는 그들의 열심은 심지어는 아프거나 다쳤어도 생명에 위협이 되지 않는 한은 의원을 찾거나 치료행위를 하는 것조차 삼가는 데까지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라 여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에 있어서는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은 아무 일도 안 하며 안식일을 지내는 것이고, 안식일에 "악을 행하는 것"은 안식일임에도 불구하고 무엇인가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물으시면서 바리새인들의 사고를 근본적으로 뒤흔들어 놓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물으실 때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은 "생명을 구하는 것"을 말하고, "안식일에 악을 행하는 것"은 "사람을 죽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미 바리새인들이 속으로 하고 있던 생각을 다 알고 계셨던 예수님께서는 단도직입적으로 그들의 숨은 생각이 과연 그들이 그토록 중히 여기고 내세우는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인지를 답해보라고 압박하신 것입니다. 즉 안식일에 불쌍한 사람을 고쳐주는 일은 안식일을 범하는 악한 일이라고 여기는 그들이 실상 자신들은 안식일준수를 내세우며 속으로 예수님을 죽일 구실을 찾고 있는 것이 과연 안식일을 잘 지키는 선한 일인지를 답하라고 요구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예상 밖의 질문과 공세에 바리새인들은 무척 당황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답을 못하고 잠잠히 있었습니다. 그들이 양심이 찔려서 답을 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들의 완악한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마음이 완악하다는 것은 악한 일에 대한 뉘우침이나 양심의 가책이 없고 생각을 바꾸지 않는 고집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마음의 완악함을 보시며 탄식하시고 분노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한쪽 손 마른 사람에게 "네 손을 내밀라" 하시며 그 손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은 회당에서 나갔고 곧바로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예수님을 잡아 죽일까 의논했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에.
우리는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을 비롯하여 하나님의 율법을 철저히 준수하려는 열심에 찬 사람들이 안식일도 범하고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까지도 범하는 무서운 범법자들로 돌변하고 마는 이 광경 앞에서 참으로 놀랍고 두려운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만든 것입니까? 이 물음에 우리는 "사랑이 없기에"라고 답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비판하시고 공격하신 핵심이 무엇이었습니까? 그 답을 우리는 예수님의 다음과 같은 말씀 속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마23:23). 예수님의 이 말씀대로 바리새인들은 긍휼 즉 사랑을 버렸기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율법의 껍데기만 붙잡고 있었지 율법에 있어서 더 중요한 것을 내버렸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문자만 알고 있었지 율법의 참 정신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외식하는 자 즉 위선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또 그렇게 되면 아무리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잘 드려도 되돌아올 것은 화(禍)밖에 없는 것입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마23:23)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분노하신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입니다. 하나는 남의 고통에 대한 그들의 무감각이고, 다른 하나는 근본정신보다 문자를 더 중요시하는 율법주의 사고체계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의 바리새인들에게서 한쪽 손이 마른 사람에 대한 일말의 애정이나 동정심이나 관심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한쪽 손이 말랐다는 것은 한 손이 성장을 하지 않고 비쩍 말라있었음을 의미할 것입니다. 그 손은 마음대로 쓸 수 없었고, 쓰지 못하니 굳어지고 비틀어져 있었을 것입니다. 한 손이 그렇게 되니 온 몸도 같이 뒤틀린 자세가 되었을 것입니다. 단지 한 손만 불편한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온 몸이 불편하고 마음도 편하지 않고 우울해졌을 것입니다. 고칠 수만 있다면 한 순간이라도 빨리 고치는 것이 그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기쁨과 행복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아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에게는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있는 사람은 사랑을 필요로 하는 사람의 입장에 서서 생각할 줄 압니다. 그와 같은 마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는 사람은 법을 찾고 절차를 따지며 때를 기다리라 합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법을 찾고 절차를 따지며 때를 기다리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참 신앙은 법을 찾고 절차를 따지며 때를 기다려야 할 일과 그것을 넘어설 수 있고 넘어서야 할 일을 가릴 줄 아는 지혜와 따뜻한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무엇이 하나님께서 더 기뻐하시는 일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에게는 그것이 없었습니다. 모든 계명을 주신 하나님의 근본 뜻은 사랑하라는 데에 있다는 진리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모든 율법은 사랑에 의해서 완성된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들 자신이 사랑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남의 허물을 보지 못하게 만들며 남의 장점만을 찾게 만듭니다. 그러나 미움은 남의 작은 실수를 크게 보이게 만들고 남의 허물만 살피게 하는 법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사랑이 없었기에 한쪽 손 마른 사람이 고침을 받는 일에는 하등의 관심도 없이 오직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범하는지 아닌지만 엿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자세는 결국 안식일에 예수님을 잡아 죽일 음모를 불신앙적 집단들과 함께 꾸미는 데로 나아가게 만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한쪽 손 마른 사람의 손을 고쳐주심으로써 당신이 안식일의 주인이심을 드러내시고 안식일준수의 참 의미를 새롭게 밝혀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쪽 손 마른 사람도 살리시고 안식일도 살리신 것입니다. 다른 모든 계명도 그렇듯이 안식일을 바르게 지키는 것은 그 날을 사랑으로 가득 채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한 하루가 되게 하고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실 일을 행하며 그 가운데 사랑을 베푸는 일로 그날을 지내는 것입니다. 한쪽 손 마른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 손 고침을 얻을 목적으로 회당을 찾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안식일에 예배드리러 회당에 와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먼저 예수님에게 손 고쳐 달라고 간청한 것 아닙니다. 주님께서 먼저 그를 불러 세우시고 그에게 손을 내밀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그 말씀에 순종했을 뿐입니다. 예수님도 그 사람도 돈을 벌 목적이나 오락을 즐기려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순수한 사랑의 동기 이외에는 거기에서 아무 것도 발동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노여우시게 하거나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어떤 일도 없었습니다. 오직 한 쪽 손 마른 사람이 고침을 받는 은혜의 역사만 있었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아니었다면 그런 은혜의 역사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런 은혜의 역사 앞에서 못마땅해 할 만큼 바리새인들은 눈이 어두웠고 마음이 완악해져 있었던 것입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사랑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힘입니다. 반면에 사랑의 결핍은 사람을 가장 사람답지 못하게 만드는 요인입니다. 사랑의 결핍은 모든 것을 비정상적으로 만들어놓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의 결핍은 문제들을 해결불가능의 상태로 몰고 가기도 하고, 어디서나 상황을 악화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답하기를 피한 바리새인들은 회당에서 나가자마자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했습니다. 헤롯당이란 어떤 종교적 분파나 조직된 정치단체가 아니라 헤롯가와 팔레스타인 땅에서의 그들의 정치적 지배를 지지하며 그들 편에 붙어 있던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었을 것입니다. 헤롯당은 헬라문화의 영향과 로마의 정치에 대해 타협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신약성경 속에서 헤롯당은 언제나 바리새인들과의 협력관계 속에서 나타납니다. 이것은 의외의 관계입니다. 왜냐하면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은 공통되는 것이 거의 없고 오히려 서로 대립적이어야 할 집단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바리새인들이 헤롯당과 손을 잡은 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예수님에 대한 적대감 때문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에 대한 적대감으로 눈이 멀자 그들이 손잡아서는 안 될 자들과 쉽게 손을 잡는 자기모순적이고 자기기만적인 행태를 보이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과 종교적인 갈등관계에 있던 예수님을 헤롯당과 손잡고 더러운 정치의 힘을 빌려 제거하고자 하는 비열함을 드러낸 것입니다. 헤롯당은 헤롯의 이혼과 부도덕한 재혼을 비판한 세례 요한을 미워했고 따라서 그 세례 요한을 인정하시고 칭찬하신 예수님에 대해서도 악감정을 갖고 있었을 것입니다. 또 헤롯가문이 로마에 충성하며 그 대가로 팔레스타인의 지배권을 영구히 보존하기를 바라는 그들로서는 그렇지 않아도 자칭 메시야라 하는 자들이 나타나 종종 유대인들을 선동하여 내란을 일으킴으로써 헤롯왕조를 위협해온 터에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고 따르는 유대인들이 또 민족봉기라도 일으킬까 내심 불안해하고 있었기에 예수님에게 좋은 감정을 가질 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그것을 이용하려한 것입니다. 이것도 사랑이 없기에 저지른 해서는 안 될 일이었습니다. 사랑의 결핍은 이렇게 상상도 할 수 없는 비정상적인 일을 가능하게 하는 악마적 힘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나 신자들 사이에서도 이런 일은 얼마든지 벌어집니다. 교회 안에서나 신자들 사이에서 법과 절차와 때를 따르는 일은 중요하지만 사랑의 결핍으로 해서 바리새인들의 집단이 되고 마는 위험을 경계해야 합니다. 교회가 정작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들은 하지 않으며 오직 염탐과 비난과 정죄와 모의만 무성한 회당이 되지 않도록 힘써야 합니다. 사람을 살리는 일에는 관심 없고 결국 주님을 죽이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자행하는 범죄집단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이 없으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13:1-3) 했습니다.
"사랑이 없으면"이란 글 한 토막을 읽어 봅니다:
사랑이 없는 의무감은 무뚝뚝하게 만듭니다.
사랑이 없는 책임감은 냉엄하게 만듭니다.
사랑이 없는 정의는 무자비하게 만듭니다.
사랑이 없는 교육은 반항하게 만듭니다.
사랑이 없는 지성은 교활하게 만듭니다.
사랑이 없는 친절은 위선적이게 만듭니다.
사랑이 없는 명령은 비열하게 만듭니다.
사랑이 없는 지식은 군림하게 만듭니다.
사랑이 없는 힘은 난폭하게 만듭니다.
사랑이 없는 명예는 오만하게 만듭니다.
사랑이 없는 부는 탐욕스럽게 만듭니다.
사랑이 없는 믿음은 광신적이게 만듭니다.
사랑이 없는 삶은 미련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무엇입니까? 사랑이 없을 때 우리는 율법으로 사람을 죽이고, 또 우리 자신을 죽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4:7-8) 했습니다. 열심히 사랑하며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함으로써 서로의 허물을 덮어주고 서로의 좋은 점만을 찾으며 기쁨이 넘치는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