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803
3월21일[사순 제5주간 목요일]
--------------------------------
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
**cpbc방송미사**
https://youtu.be/W6wNMypAdoo
[서울대교구 최상훈 유스티노(등촌3동성당 부주임) 신부님 집전]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여러분의 죄가 얼마나 나쁜 죄였든지 상관없습니다. 어떠한 죄도 하느님의 사랑보다 크지 않습니다!>
머리에 재를 얹으며 ‘흙에서 났으니 흙으로 돌아가라.’고 외치던 재의 수요일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사순시기는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어떻게 다들 사순 판공 성사는 보셨나요? 사순시기와 대림시기, 적어도 두 번 고해성사를 보도록 강력히 초대하는 판공성사 문화는 우리 한국 가톨릭교회만이 지닌 특별한 전통입니다.
천주교 박해가 심했던 시절, 사제들은 여기저기 흩어져 숨어지내던 교우들을 연 1~2회 정도 방문하여 고해성사와 성체성사를 집전했습니다. 이런 전통이 정착된 것이 판공 성사입니다.
판공성사 때는 각 교우 앞으로 판공성사표가 배부되는데, 이는 교우들의 성사 생활 실태를 파악하는 기초 자료로 활용됩니다. 어떻게 성사를 강요할 수 있느냐며 불만을 하소연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법상 모든 교우들은 적어도 1년에 한 번 고해성사를 보게 되게 되어있는데, 따라서 판공성사만 빼먹지 않아도 고해성사와 관련된 신자로서 의무를 충족시키는 것이니, 참으로 바람직한 전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숙제나 의무로서의 판공성사가 아니라 기쁨과 축제로서의 판공성사가 되었으면 참 좋겠는데……. 그것이 참으로 여의치 않습니다.
아직도 많은 분이 마치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고해소 앞으로 나아갑니다. 매번 똑같은 죄를 짓고, 고백하고, 이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의구심을 품고 있는 분들도 많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고해성사의 참된 의미와 참맛을 알게 해주는 책, 고해성사에 대한 가치와 지평을 넓혀주는 책이 출간되었습니다. ‘고해성사의 일곱 가지 비밀’(비니 플린 저, 전경훈 역, 성바오로)
저자의 고해성사에 대해 은혜롭고 감미로운 체험들과 가르침을 듣고 있노라니, 빨리 고해성사를 봐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합니다.
“태양은 누구에게나 햇살을 비추어 빛과 열을 전합니다. 이같이 하느님은 늘 사랑하시고, 누구에게나 빛과 열을 전하십니다. 우리가 죄를 지어 하느님과 그분 사랑에서 우리 자신을 갈라놓을 때에도 하느님은 달라지지 않으십니다.
달라지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죄란 바로 그 사랑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죄는 나를 동굴 속으로 데려갑니다. 고해성사는 나를 동굴 밖으로 꺼내줍니다.”
“사제는 단지 사죄(赦罪)를 선언하기 위해 고해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 영적 안내자, 스승, 교육자의 역할을 맡도록 부름받은 것입니다. 풀려나고, 치유되고, 회복되고, 용서받는 것, 이것이야말로 고해소 안에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네가 고해소에 갈 때면, 내가 그곳에서 너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여라. 나는 단지 사제에게 감추어져 있을 뿐, 네 영혼 안에서 활동하는 것은 바로 나다. 너는 내 앞에서 죄를 고백하는 것이다. 사제는 가림막일 뿐이다. 내게 쓰임 받는 사제가 어떤 사제인지 따지지 마라. 고해성사 때 내게 하듯 네 영혼을 열어라. 그러면 나는 네 영혼을 내 빛으로 채울 것이다.”(파우스티나 성녀 일기)
“고해소에서 나올 때, 하느님의 현존이 나를 꿰뚫었고, 나는 하느님의 세 위격이 내 안에 머무심을 느꼈다. 아니, 알아차렸다.”(파우스티나 성녀 일기)
“과거에 지은 죄에 대한 기억들이, 심지어 이미 고해성사를 받았음에도 계속 되돌아와 머릿속을 맴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 죄가 정말로 용서받은 것인지 미심쩍어 합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절대 의심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죄는 분명히 용서받았을 뿐만이 아니라 없어졌습니다! 여러분의 죄가 얼마나 나쁜 죄였든지 상관없습니다. 어떠한 죄도 하느님의 사랑보다 크지 않습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wyy7iegKPkY
++++++++++++++++++
<죽음을 맛보지 않는 사람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이 말에 유다인들은 예수님보고 마귀 들렸다고 비난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라고 하시며 당신은 시공간을 초월하는 분이시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 돌을 던지려고 합니다. 당신이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는 나’다.”라고 하시며 하느님의 이름을 당신에게 적용했기 때문입니다. “있는 나”(I AM)는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일러준 당신의 이름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지키면 하느님의 본성이 되어 죽지 않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말씀을 지킨다’라는 뜻은 무엇일까요?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 안에 머문다는 뜻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면 왜 죽음을 맛보지 않을까요? 우리는 죽음의 개념에 대해 먼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TV레셀’ 유튜브 채널에 이미 전이가 일어나 손을 쓸 수 없는 ‘위암 4기 시한부 판정받은 600억 자산가의 고백’을 보았습니다. 이 사업가는 일만 하다 젊은 나이에 청천벽력과 같은 판정을 받습니다. 아픈 줄도 모르고 살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쓰러졌고 의사는 항암 안 하면 6개월, 하면 1년 정도 살 수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배를 열어보았는데 암이 온몸에 전이 되어 있어서 손을 쓸 수 없어 그냥 닫아야 했습니다. 이분에게 제일 안타까웠던 상황은 태중에 임신한 딸의 탄생을 볼 수 없을 수도 있겠다는 절망감이었습니다. “왜 아픈데 일만 계속하세요?”라는 질문에 “누워만 있으면 뭐 하겠어요?”로 대답합니다. 이분은 사는 마지막 날까지 일하다 죽겠다는 신념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약으로 버티며 10년을 매일 열심히 일하며 살고 있습니다. 이분에게 채널 대표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아이가 태어나는 것을 못 보고 죽을 수도 있다고 하셨는데, 어쨌건 아이가 태어났을 때 아이를 보았을 때의 기쁨과 시한부 판정을 벗어났을 때의 기쁨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무엇을 택하겠습니까?”
“아이가 태어났을 때가 더 기분 좋죠. 아픈 거 뭐 이런 거를 떠나서 아이가 태어났을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머리카락이 서요.”
이 사람은 죽음이란 것이 삶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삶이 끝나는 게 죽음이 아니라 삶의 일부입니다. 죽음의 고통이 자녀의 탄생 기쁨보다 작습니다. 그러면 이분은 죽음을 보지 않을 것입니다.
진짜 죽음은 가리옷 유다와 같은 죽음입니다. 죽음을 삶의 일부로 만들지 않고 삶이 끝나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죽기 싫어서 발버둥 치는 것은 죽음의 가치를 아직 삶과 연결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일상에서도 작은 죽음을 맞고 있습니다. 이 죽음들이 이웃을 위해 쓰였다면 그 마지막 죽음의 가치도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죽음은 한순간의 죽음이 아니라 일상의 작은 죽음의 마지막일 뿐입니다.
《두 개의 산》에 이런 사연이 소개되었습니다. 오스트레일리아 브리즈번에 사는 그레그 선터라는 사람이 쓴 글입니다.
“4년 전에 21년을 부부로 함께 살았던 아내가 뇌종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내가 병 진단을 받고 세상을 떠나기까지 시간은 채 6개월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내의 죽음만큼이나 충격적이었던 사실은, 그 경험을 통해 내가 내면적인 성찰을 하면서 개인적으로 성장했고 또 각성했다는 점입니다. 내가 성장한 것의 정말 많은 부분이 아내의 죽음에 따른 결과였다는 깨달음에 나는 죄책감을 느낄 정도였습니다.
파커 파머는 《다시 집으로 가는 길》에서 심장이 찢어지는 것을 두 가지로 상상할 수 있다고 썼습니다. 하나는 심장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을 상상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심장이 활짝 열리면서 자기 자신과 세상의 고통과 기쁨, 절망과 희망을 더 많이 수용하게 되는 새로운 차원으로 나아가는 것을 상상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심장이 활짝 열리는 이미지는 아내가 죽은 뒤로 지금까지 내 인생의 추동력이 되어 왔습니다. 그것이 내 인생의 목적이 되어 왔습니다.”
그레그 선터라는 사람은 아내의 죽음을 통해 죽음이 나에게 미치는 긍정적인 영향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 사람도 의미 있는 죽음을 향해 달려갈 것입니다. 누군가의 마음의 문을 여는. 이 사람에게 죽음은 더는 죽음이 아닙니다. 삶의 일부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받아들인 이들은 자신도 그 십자가의 삶을 따라 살 것이기 때문에 삶과 단절되는 절망적인 죽음을 맛보지 않게 됩니다. 산청 성심원에서 평생을 가난한 이들과 함께해 오신 유의배 신부님의 방에는 이런 글귀가 있다고 합니다.
“살아 있는 동안 가난한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은 죽을 때 두려움이 없다.”
=====================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1)
댈러스로 와서 몇 가지 일들을 경험했습니다. 보일러에 가스가 새어나와서 새 보일러로 교체했습니다. 음식물 분쇄기가 고장 나서 새 분쇄기로 교체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누수가 있었고, 싱크대 바닥도 새것으로 교체했습니다. 37년 전에 크라운을 했던 안쪽 어금니도 통증이 있어서 치과에 갔더니 발치를 해야 한다고 해서 발치했습니다. 다행히 맨 안쪽이라서 새로 해 넣지는 않아도 된다고 합니다. 형제님들과 대화하는 중에 사제관이 나의 군기를 잡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형제님 중 한 분이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사제관이 신부님과 친하게 지내고 싶은 모양입니다. 덕분에 모두 새것으로 교체했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형제님의 이야기를 들으니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사제관이 저를 환영하기 위해서 그런 일들이 생겼다고 생각하니 마음도 한결 편해졌습니다. 맞습니다. 세상 일, 다 생각하기 나름입니다. 우산장수와 짚신장수 아들을 둔 어머니가 늘 걱정이 한 가득이었습니다. 비가 오면 짚신 장수 아들의 짚신이 안 팔릴까 걱정이었습니다. 해가 나면 우산 장수 아들의 우산이 안 팔릴까 걱정이었습니다. 따뜻한 이웃이 이렇게 말해 주었습니다. “비가 오면 우산 장수 아들의 우산이 잘 팔리니까 좋지요? 해가 나면 짚신 장수의 짚신이 잘 팔리니까 좋고요.” 맞습니다. 생각하나 바꾸면 몸도 마음도 한결 편해지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많은 것들을 주었습니다. 느닷없이 정든 고향을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어디로 가야 하나, 어디에 있어야 하나 아무런 목적도 없이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니 그저 따랐을 뿐입니다. 조카 롯과 함께 사는데 살림이 늘어나니 조카의 사람들과 자주 분쟁이 생겼습니다. 양들은 늘어나는데 땅이 좁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조카 롯에게 선택권을 주었습니다. 조카 롯은 비옥하고, 기름진 땅을 선택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척박하고, 모래가 많은 광야를 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신의 한 수였습니다. 조카 롯이 선택한 땅은 소돔과 고모라였습니다. 비록 기름지고 비옥했지만, 그곳에는 하느님의 뜻을 멀리하는 사람들이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은 낯선 손님을 정성껏 대접했습니다. 그러자 손님은 아브라함에게 자녀가 생길 것이라고 축복해 주었습니다. 아브라함은 100세에 아들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하느님께서는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늘이 노래졌을지도 모릅니다. 100세에 얻은 아들, 금쪽같은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시니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니 순종하였습니다.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기로 하였습니다. 생각하면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의 군기를 잡은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특별히 사랑을 주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모든 일들 속에서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영광을 생각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아브라함을 특별히 축복해 주셨습니다.
사랑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던 한 자매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분의 이야기를 들으면 제가 얼마나 행복한지 알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분은 결혼하고 몇 년 후에 남편께서 쓰러지셨다고 합니다. 우연히 성당에 가서 기도하고, 남편은 깨어났습니다. 깨어난 남편은 몸은 깨어나지 못했고, 오히려 깨어난 것이 원망스러울 정도로 힘들게 했다고 합니다. 말을 함부로 하고, 짜증을 내는 그런 남편을 23년간 수발하며 살았다고 합니다. 남편만으로도 힘에 벅찬데 시어머니께서도 쓰러지셔서 한집에 2명의 중환자를 돌봐야 하는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시어머니도 10년 이상 돌봐드려야 했던 그 분은, 왜 하느님께서 이런 시련을 주시는지 원망을 참 많이 했다고 합니다. 병중에 시어머니도 세례를 받아서 함께 묵주기도를 했지만, 원망과 고통은 쉽게 없어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시어머니께서 마지막으로 그분의 품에서 숨을 거두시는 순간 정말 많이 울었다고 합니다. 남편도 하느님 품으로 가셨고 조금 숨을 돌리나 했는데 이제는 본인이 암에 걸려서 큰 수술을 해야 했습니다. 남편 복도 없었고, 시어머니 복도 없었는데 자신까지 암에 걸렸으니 정말 하느님께 대한 원망이 컸다고 합니다. 수술을 마치고 병실에 돌아와서, 하느님께서 이렇게 많은 고통과 십자가를 주셨지만 그래도 행복했던 순간들이 많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 하신 말씀은 우리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고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도 우리의 물리법칙에 따라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과의 관계의 관점에서는 가능한 일입니다. 긴 겨울을 참아내며 꽃을 피워내는 나무처럼, 신앙인들은 십자가를 통해서 구원의 꽃을 피워야 하겠습니다.
+++++++++++++++++++++
(2)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시간을 직선으로 보는 관점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관점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과거는 지나간 시간이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이고, 지금은 현재입니다. 저도 직선의 시간에 익숙해져있습니다. 사무실에는 탁상용 달력이 있습니다.
달력에는 지나간 일정이 적혀있습니다. 지나간 일정을 보면서 제가 만났던 사람, 제가 했던 일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달력에는 앞으로의 일정도 적혀있습니다. 그것을 보고 해야 할 일을 준비합니다. 비행기 표를 예매하기도 하고, 서류를 준비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직선의 시간 속에서 ‘생, 노, 병, 사’의 과정을 경험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유대인들도 직선의 시간을 이야기합니다. 아브라함도 죽었고, 예언자들도 죽었다고 이야기합니다. 들판에 있는 묘지는 직선의 시간을 살다가 세상을 떠난 사람들을 보여줍니다.
시간을 순환으로 보는 관점도 있습니다. 직선으로 자라는 나무에는 원으로 자라는 나이테가 있습니다. 나이테가 있기에 나무는 곧게 자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순환하는 시간을 계절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은 매년 우리를 찾아옵니다. 일출과 일몰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낮과 밤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순환도로와 순환지하철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순환하는 시간은 흘러가는 직선이 아닙니다. 순환하는 시간은 끊임없이 돌아오는 곡선입니다.
교회의 전례는 순환하는 시간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대림을 통해서 2000년 전에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기다립니다. 사순을 통해서 주님의 수난을 기억합니다. 주님의 십자가와 죽음은 나를 구원하기 위한 희생임을 생각하며 감사드립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셨듯이, 주님을 믿는 우리들도 부활하리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땅과 후손’을 약속하십니다. 그 땅과 후손은 직선적인 시간에서의 땅과 후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면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땅과 후손입니다.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거룩함이 드러나는 땅입니다. 하느님의 계명을 충실히 지키면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후손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새로 태어나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계절이 매년 바뀌면서 우리에게 오듯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면,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면 우리가 머무는 곳은 하느님의 나라가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이야기하십니다. 그것도 직선으로 이어지는 영원한 생명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생명은 모두 죽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야기하시는 영원한 생명은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에게 주어집니다.
하느님 집 앞에서는 하루가 천년 같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삶은 순간도 영원과 같습니다. 바로 그런 삶을 꿈꾸면서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 하신 말씀은 우리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고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우리의 물리법칙에 따라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과 관계의 관점에서는 가능한 일입니다. 긴 겨울을 참아내며 꽃을 피워내는 나무처럼, 신앙인들은 십자가를 통해서 구원의 꽃을 피워야 하겠습니다.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8,51-59: 내 말을 잘 지키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51절).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고 따르는 이는 누구든지 이 죽음을 보지 않는다는 말씀이다. 말씀은 본성상 죽음이 보이지 않도록 막아준다. 이 말씀은 듣는 이들에게 빛을, 생명을 주시며 그 빛을 꺼뜨리지 않고 생명을 잃지 않는 사람은 결코 어둠을 보지 않고 죽음을 맛보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죽음으로 우리가 당해야 할 두 번째 죽음, 영원한 죽음, 지옥의 죽음, 저주받은 자들의 죽음, 악마와 그의 부하들이 받을 몫인 그 죽음을 보지 않게 해 주셨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도 죽었는데 당신이 그분보다 훌륭하다는 말이오?”(53절) 유다인들은 예수께서 당신을 아브라함과 예언자들보다 높다고 하신다고 비난하면서, “당신은 누구로 자처하는 것이오?”(53절) 하며 대든다. 예수께서는 “나를 영광스럽게 하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 너희가 ‘그분은 우리의 하느님이시다.’하고 말하는 바로 그분이시다.”(54절) 하시며 영광을 아버지께 돌리신다. 예수께서 당신 아버지라고 부르신 분을 그들이 하느님이라고 부르는 분이지만 그들은 그분을 알지 못한다. 그들이 하느님을 알았더라면 그분의 아들을 받아들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하지만 나는 그분을 안다. 나는 그분을 알고 또 그분의 말씀을 지킨다.”(55절) 유대인들이 자기들의 하느님이라고 했지만 잘 알지 못했던 분을 당신의 아버지라고 부르신다. 그들이 그분을 알았더라면 그분의 아들을 알았을 것이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말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분을 아시기 때문에 그분의 말씀을 지키시는 분이시다. “나는 그분을 알고 또 그분의 말씀을 지킨다.” 하셨다. 우리도 그분을 안다면 그분의 말씀을 지킬 것이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날을 보고 기뻐하였다.”(57절) “당신은 아직 쉰 살도 되지 않았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다는 말이요?”(57절) 아직도 그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58절) 하신다. 여기서 ‘전’은 지나간 시간을 의미하고 ‘부터 있었다.’라는 말씀은 현재를 의미한다. 하느님은 과거도 미래도 없고 항상 현재이시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하느님의 이름인 ‘야훼’의 뜻이 바로 ‘있는 나’이다. 그러므로 항상 계신 분이 당신을 드러내시고 가까이 오시고 당신 생명을 완성하시는 분은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에도 계셨고 후에도 계시다.
“그러자 그들은 돌을 들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몸을 숨겨 성전 밖으로 나가셨다.”(59절) 유대인들은 하느님을 모독하였다고 돌을 던지려고 한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올바로 보지 못하는 그들을 피해 다른 곳으로 가셔서 눈먼 이를 고쳐 주신다. 볼 수 있는 이들은 그분을 보지 못하고, 육체적으로 보지 못하는 이를 시력을 회복시켜 주신다. 우리도 말씀을 올바로 알아듣고 따르며 그분을 올바로 보고 알 수 있도록 항상 깨어있어야 할 것이다..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미리내 성모성심 수녀회)]
성주간이 가까워지면서 오늘 독서와 복음은 ‘계약’에 집중합니다. 독서는 아브라함과 맺으신 계약을 이야기하고, 복음은 예수님을 통하여 이루어질 새로운 계약을 이야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나는 나와 너 사이에, 그리고 네 뒤에 오는 후손들 사이에 대대로 내 계약을 영원한 계약으로 세워, 너와 네 뒤에 오는 후손들에게 하느님이 되어주겠다.”라고 약속하심으로써 이 계약이 후손들에게도 유효할 것임을 분명히 하십니다. 그리고 이 계약의 결과로 “많은 자손”과 “땅”이 약속됩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심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새 계약의 결과로 약속하십니다. 옛 계약이 많은 자손과 땅을 주겠다는 내용이었다면 새 계약은 영원한 생명을 주겠다는 내용으로 갱신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선언은 곧장 유다인들의 반발을 불러일으킵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도 죽었는데 당신이 그분보다 훌륭하다는 말이오? 예언자들도 죽었소.” 이에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날을 보리라고 즐거워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보고 기뻐하였다.”라고 하시며 당신께서 아브라함보다 우위에 계시고, 이제 아브라함과 맺으신 계약보다 훨씬 중요하고 강력한 계약이 체결될 것임을 선언하십니다.
‘새로움’에 대한 불편함은 유다인들을 분노와 광기로 몰아갑니다. 돌을 들어 던지려고까지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도발을 뒤로하신 채 성전을 빠져나가십니다. 끝내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살과 피를 새 계약의 제물로 내놓으시지만, 이 새 계약으로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부활과 영원한 생명>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요한 8,51)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이제 우리는 당신이 마귀 들렸다는 것을 알았소. 아브라함도 죽고 예언자들도 그러하였는데, 당신은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맛보지 않을 것이다.‵ 하고 말하고 있소. 우리 조상 아브라함도 죽었는데 당신이 그분보다 훌륭하다는 말이오? 예언자들도 죽었소. 그런데 당신은 누구로 자처하는 것이오?’”(요한 8,52-53)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별 때문에 슬픔과 아픔을 겪고, 자기 자신의 죽음을 두려워하기도 하고, 그러면서 인생은 허무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기도 하고,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를 생각하기도 하고, 인생이란 무엇인가 묻기도 하고, 어떻게든 절망과 허무에서 벗어나려고 애를 쓰기도 합니다. 바로 그 ‘죽음에 대한 공포와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은 희망에서 종교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신앙’은 ‘희망’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기를, 죽음 너머에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새로운 세상이 기다리고 있기를 희망하면서, 그 희망을 이루어 줄 절대자를 찾으면서, 종교와 신앙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그 희망을 이루어 주시는 분이 바로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이라고 증언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서 찬미 받으시기를 빕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크신 자비로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시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우리에게 생생한 희망을 주셨고, 또한 썩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고 시들지 않는 상속 재산을 얻게 하셨습니다. 이 상속 재산은 여러분을 위하여 하늘에 보존되어 있습니다.”(1베드 1,3-4)
“여러분은 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시고 영광을 주시어, 여러분의 믿음과 희망이 하느님을 향하게 해 주셨습니다.”(1베드 1,21)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죽음은 끝이 아니라는 것을 믿게 되었고, 우리도 예수님처럼 부활해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기를 희망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혼자만을 위해서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또 당신이 바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수 있는 생명의 주님이시다는 것을 알려 주시려고, 또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는 하느님 나라로 우리를 데려가시려고 당신이 먼저 부활하셨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신앙인이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것은 바로 그 믿음과 희망 때문입니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라는 예수님 말씀은, 그 믿음과 희망을 보증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면서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사람입니다.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씀은, 지상에서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죽음은 영원한 생명으로 건너가는 관문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 말씀에 크게 반발하는데, 그것은 세속 사람들의 일반적인 심정을 나타내는 모습입니다. 인간들이 생로병사의 고통을 겪는 현실은 예수님께서 오신 뒤에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마귀 들렸다.’라는 말은, 미쳤다는 뜻입니다. <헛소리를 하고 있다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그들은 아브라함도 죽었고 예언자들도 죽었기 때문에 예수님 말씀은 미친 사람의 헛소리라고 말하고 있는데, “유대인들은 에녹과 엘리야 예언자의 일은 잊어버렸는가?”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창세기 5장에 ‘에녹’이 죽지 않고 승천한 것이 기록되어 있고(창세 5,24), 열왕기 하권 2장에는 엘리야 예언자의 승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2열왕 2,11) 예수님 말씀에 반발한 유대인들은 에녹과 엘리야의 일을 잊어버렸거나, 아니면, 그 일을 잊은 것이 아니라면 ‘영원한 생명’을 안 믿고 있었을 것입니다.
성경을 믿고 있는 신앙인들에게는, 인간은 누구나 한 번은 죽어야 한다는 말은 진실이 아닙니다. 에녹, 엘리야, 성모님의 승천 외에도, 살아 있는 동안에 예수님의 재림을 맞이하는 사람들은 죽음이라는 과정을 거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근거로 이 말을 합니다. 주님의 재림 때까지 남아 있게 될 우리 산 이들이 죽은 이들보다 앞서지는 않을 것입니다. 명령의 외침과 대천사의 목소리와 하느님의 나팔 소리가 울리면, 주님께서 친히 하늘에서 내려오실 것입니다. 그러면 먼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이들이 다시 살아나고, 그다음으로, 그때까지 남아 있게 될 우리 산 이들이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들려 올라가 공중에서 주님을 맞이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늘 주님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1테살 4,15-17)
어떻든 우리에게는, 유대인들의 말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믿고, 무엇을 희망하느냐가 중요할 뿐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1코린 15,19)라고 말하는데, 만일에 부활과 영원한 생명이 없다면, ‘모든 인간이’ 전부 다 불쌍하고 허무한 존재가 될 것입니다.
=====================
[서울대교구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님]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창세 12,1)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처음 부르실 때의 명령은 단순히 유목민의 자리 이동만이 아니라, 철저하게 삶의 근거를 끊어 버려야만 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를 실행에 옮겼으며, 이는 그대로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생활 장소의 변화에 따른 삶의 태도만 바뀐 것이 아니라, 믿음에 따른 실존 방식이 변화하였던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보면 이를 충실하게 수행한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하느님께서는 자손의 번성과 함께 이 약속이 대대로 이어지는 당신과의 영원한 계약을 맺으십니다. 이 계약의 본질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만물 안에서 그리고 그분께서 세우신 계약을 통해서 서로 조화롭게 살아가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우리가 기억하는 데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계약의 새로운 면을 드러내십니다. 하느님과의 계약을 쉽게 저버리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존재로서 사랑의 관계를 다시 맺으십니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맺으신 하느님의 계약을 완성하시며 영원한 생명을 강조하십니다. 이 새 계약의 완성은 우리를 죄로 말미암은 죽음에서 해방시켜 주며, 당신 말씀을 받아들여 믿음으로 지켜 나가는 이들을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합니다.
따라서 참으로 예수님을 따르려면 아브라함을 두고 그분과 논쟁을 펼친 유다인들처럼 관습적 사고에 얽매이기보다는 아브라함이 보였던 믿음에 따른 실존 방식의 변화를 보여 주어야만 합니다. 사순 시기는 바로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처음 약속하시고 예수님 안에서 완성하신 계약을 다시금 우리에게 일깨워 주시는 때입니다.
=====================
[서울대교구 김상우 바오로 신부님]
어제 복음에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칭호를 둘러싸고 유다인들과 예수님께서 벌이신 설전이 소개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아브라함과 예수님의 권위가 중심 주제로 떠오릅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도 죽었는데 당신이 그분보다 훌륭하다는 말이오? 예언자들도 죽었소. 그런데 당신은 누구로 자처하는 것이오?”라는 유다인들의 날 선 반응이 이를 잘 드러냅니다.
이들은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을 지극히 인간적인 방식으로만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아브라함을 넓은 지평에서 바라보십니다. 곧 세상 창조와 인류를 향한 구원의 역사라는 ‘큰 그림’ 속에서 당신과 아브라함의 관계를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
하느님의 말씀이시며 세상 창조의 원리가 되신 ‘로고스’이신 성자께서는 창조 이전부터 존재하셨기 때문에, 아브라함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위대하시고 훌륭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유다인들은 이처럼 위대한 구원의 진리를 눈앞에 두고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때때로 우리는 각자의 색안경을 끼고 근시안적으로 세상을 바라봅니다.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는 것들에서 인과 관계를 찾으려 하거나, 갑작스럽게 닥친 불행이나 위험을 왜곡된 관점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과 관점이 기복적이거나 인간적인 방식으로 좁아지기보다, 오히려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인류 구원의 역사라는 큰 그림 속에서 더 넓은 시야를 만들어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
[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찬미예수님
서품을 앞둔 신학생들은 해마다 겨울이 되면 많은 고민에 휩싸이게 됩니다. 독신서약서와 함께 서품을 요청하는 서류를 작성해야 하는데 내가 과연 서품을 받을 수 있는지, 그리스도의 도구로써 그분의 일을 잘 수행하는데 합당한지 고민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였고 과연 제가 서품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지 고민이 많았습니다. 그러한 와중에 당시 모셨던 주임신부님께서 저에게 한 가지 일화를 전해주셨습니다.
그 주임신부님 역시 서품을 앞두고 있을 때 저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동기들 역시 마찬가지였나 봅니다. 그리하여 어느 날 저녁, 서품 전 서약서를 학장 신부님께 제출해야 하는데 서로 자신 없어 하다가 결국 정해진 시간에 아무도 서류를 내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확인한 학장 신부님은 당시 부제들을 모두 불러서는 “이 교만한 것들”이라고 소리 지르며 호되게 야단을 치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그분을 따르겠다고 모인 젊은이들이, 자신의 부족함을 느낄수록 주님께 의지하며 힘을 얻고 용기를 내야지 인간의 힘으로 모든 것을 고민하고 행하려 하니 그것이 곧 교만이 아니냐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그러한 자세로 사제가 된다면 예수님보다는 자기 자신을 내세우게 된다는 것 또한 당시 학장 신부님은 지적하셨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며 저는 다시금 사제가 되는 일을 내 힘으로 하고자 한 것은 아닌지 돌이켜 보게 되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지금의 저도 이와 같은 오류를 종종 범하는 것 같습니다. 신학생들을 가르치는 일, 본당에서 아이들과 함께 하는 일, 교사들 혹은 자모회와 함께 하는 모든 일이 자칫 제가 제 능력대로 하는 일만 같습니다.
그 와중에 부족한 것이 있으면 제 자신을 탓하게 되고 어떻게 하면 잘 해결할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됩니다. 사실 그럴수록 의지해야 하는 것이 하느님인데 그럴 생각을 미처 하지 못하고 제 자신에게만 머물러 있는 셈입니다. 뒤돌아보면 교만해도 이렇게 교만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나 자신을 영광스럽게 한다면 나의 영광은 아무것도 아니다. (...) 나는 그분을 알고 또 그분의 말씀을 지킨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시는 모든 일이 하느님으로부터 시작되어 그분의 이름으로 끝나리라는 것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이는 곧 당신이 하시는 일에 대한 확신과 사명감을 의미합니다. 모든 일의 뒤에는 이를 시작하신, 그리고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실 아버지 하느님이 계심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활동에 있어서 결정적인 원동력이 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최종 목적이 되었습니다.
오늘 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십니다. “나는 네가 나그네살이하는 이 땅, 곧 가나안 땅 전체를 너와 네 뒤에 오는 후손들에게 영원한 소유로 주고 그들에게 하느님이 되어주겠다.”
유다인들은 이 약속을 굳게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그들의 자부심은 쉽게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그들에게 “교만”이라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기보다는 그것이 언제 가시적으로 이루어지나 수동적으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의 마음 속에서 하느님은 사라지고 본인들의 힘으로 모든 성공을 이룰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고집과 아집에 둘러싸여 있으니 정작 하느님의 아들이 눈앞에 나타났음에도 그를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토록 기다리고 고대하던 구원자 예수님이 바로 앞에 서서 말씀하시는데 인간적인 권위와 개인의 능력에만 집중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이 우리가 저지르는 실수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강의를 준비하며 애쓰는 나의 노력에 조금 더 하느님께 대한 의지가 있었다면 주님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을 텐데’ 라는 생각도 들고 아이들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 주님의 도움을 청했다면 더 큰 사랑을 줄 수 있었을 텐데 모든 것이 저의 인간적 능력으로 하는 일이라고 여겼음이 참 부끄럽습니다.
그리고 지금, 아이들과 신자분들을 볼 수 없는 때에 이르러서야 모든 것이 주님의 은총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예수님의 힘에 얼마나 의지하고 있는지 스스로를 항상 살펴야 합니다. 입으로는 ‘예수님은 우리 교회의 머리이시며, 그분은 우리의 친구입니다’ 라고 하지만 정말 나 자신이 그분 사랑 안에 머무르고 있는지, 그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지, 점검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잘 이뤄지지 않으면 스스로 한계를 느끼고 나가 떨어지고 맙니다. 그 순간 주님께서는 우리를 계속해서 지지하고 뒷받침 하시던 손을 물리시며 꽤나 난처해 하실 것입니다.
오늘의 복음 말씀을 묵상하며, 내가 맡은 일들에 있어서 모든 것을 나의 힘으로만 해결하려고 하지는 않았는지 돌이켜 보아야 하겠습니다.
일상 안에서 인간적인 한계와 주변에 대한 원망을 느꼈다면 그것은 스스로의 교만이 다소 섞여 있었음을 인정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 진정으로 의지하는 사람은 인간적으로 상처를 받을지언정 쉽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우리의 부족함이 있더라도, 주변인들의 결함이 있을지라도, 결국 그 모든 것을 해결해 주시는 분이 우리의 하느님이심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지금 우리 모두가 처해있는 현실적인 상황이 힘들다면 특별히 더욱 주님께 의지하시며 모쪼록 힘내시길 바랍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알아주시며 우리를 영광스럽게 하시는 분이 바로 지혜롭고 자비로우시며 전능하신 아버지 하느님이십니다.
오늘의 영성체송과 같이, 그 전능하신 주님께서 우리 모두를 위하여 당신의 아들마저 아낌없이 내어주셨는데 이제 와서 우리에게 내어주시지 못할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내가 나 자신을 영광스럽게 한다면 나의 영광은 아무것도 아니다. 나를 영광스럽게 하시는 분은 내 아버지이시다”. 아멘.
=====================
[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8,51)
죽음은 인간에게 가장 불가피하고 불확실한 것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를 인식하고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죽음을 안다는 것은 곧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아는 것입니다. 곧 나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알게 됩니다. 많은 이들 가운데, 특히 에릭 프롬은 「죽음에 관하여」를, 셸리 케이컨은 《죽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저술하기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순간 우리 모두에게 죽음이 묻습니다. 그래서 《죽음이 물었다.》를 저술한 ‘아나 아란치스’는 이 책을 통해서 후회 없는 오늘을 위해, ‘이 순간 원하는 삶을 살고 있으며, 소중한 것들을 지키고 있냐,’고 우리에게 묻습니다. 그녀는 진심으로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이 인생을 최대한 누리며 살 기회를 놓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합니다. 그중 한 가지 이유가 바로 죽음을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데, 만일 우리가 죽음을 생각하지 않으면 현실에 안주하고, 삶을 허비하는데 거리낌이 없어집니다. 자신에게는 무한대의 내일이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의미 있는 관계를 만들고 주변 사람들과 지속적인 추억을 만드는 것 또한 잊기 쉽습니다. 또한, 나중에 후회로 이어질 가능성이 큰 결정을 내릴 가능성도 큽니다. 인생의 끝을 잊어버린 사람들은 소중한 시간을, 삶을 아름답게 만드는 데 쓰지 못하고, 그저 허비해 버리며 살아간다고 말하며 이 점을 안타까워합니다.
그렇습니다. 삶과 죽음은 신비롭지만, 피할 수 없는 자연 순환의 일부입니다. 어떤 누구도 삶과 죽음을 통제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삶의 순간순간마다 삶과 죽음을 염두에 두고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것뿐입니다. 모든 인간의 삶과 죽음은 존중받아야 합니다. 좋은 관계를 이어가고, 마음이 시키는 일을 하고, 성공이든 실패든 우리를 인간으로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가능한 한 많이 배우고, 상황에 상관없이 매일 개인적인 성장을 위해 노력함으로써 남은 삶을 의미 있게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스스로 하여금 '삶'이라는 여행에서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영향과 멋진 영감을 줄 수 있는 존재로 거듭나게 하는 밑거름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보면, 예수님과 유대인들 사이의 논쟁은 極과 極의 절정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이제 우리는 당신이 마귀 들렸다는 것을 알았소.”(8,52)라고 단정 짓자, 예수님은 “내가 그분 ‘하느님’을 알지 못한다고 말하면 나도 너희와 같은 거짓말쟁이가 될 것이다.” (8,55) 고 응수하십니다. 사실 진리의 문제는 타협이 있을 수 없고 中道가 없습니다. 예수님과 유대인들 사이의 논쟁은 참 진리와 거짓 억측과의 싸움이며, 이는 지금도 자행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8,51)라는 말씀의 의도는 글자 그대로 죽을 운명을 지니고 태어난 인간의 육체적인 죽음에서 영원히 해방된다는 의미로 우리는 이해하고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부활을 믿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도, 인정할 수도 없는 말이었습니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 고 말씀하신 주님께서는 먼저 진리이며 생명이신 아버지의 말씀을 몸소 지키신 분이셨고, 이제 당신의 말씀을 지키고 믿고 따르는 사람은 죽음의 죽음 곧 영원한 죽음에서 해방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 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17,3)라는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의 의도가 확연히 밝혀집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8,58)는 자기 증언은 “우리 조상아브라함도 죽고, 예언자들도 죽었소. 그런데 당신은 누구로 자처하는 것이오?”(8,53)라는 유대인들의 항변에 대한 답변이었던 것입니다. ‘세상적인 시간의 틀에 묶여 있었기에 쉰 살도 되지 않은 예수님께서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는 말은 터무니없는 억지로 들렸을지도 모릅니다. 이 문장에서 ‘예수님은 전에 있었다.’ 하지 않으시고 ‘전부터 있었다,’고 표현하셨는데, 이는 전혀 다른 뉘앙스와 시간을 표지하고 있습니다. ‘전에 있었다,’는 표현은 시간의 과거완료이지만, ‘전부터 있었다,’는 ‘과거인 어제도 계셨고 현재인 지금까지도 계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진리는 과거도 미래도 아닌 언제나 현재, 지금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으로 인해 논쟁은 끝난 것이었기에, 그들은 돌을 들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했지만, 예수님은 몸을 숨겨 성전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날을 보리라고 즐거워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보고 기뻐하였다.”(8,56)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제리 올스만’이라는 사진작가가 있습니다. 플로리다 대학교에서 사진을 강의할 때, 수업 첫날 수강생들을 두 그룹으로 나눴습니다. 첫 번째 그룹의 학생들에게는 한 학기 동안 사진의 ‘양’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했습니다. 제출하는 사진의 질은 전혀 보지 않고, 오로지 촬영한 사진의 양으로만 성적을 매긴다고 말했습니다. 즉, 100장 낸 학생은 A학점, 90장은 B학점, 80점은 C학점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두 번째 그룹의 학생들에게는 한 학기 동안 사진의 ‘질’에 초점을 맞추라고 했습니다. 촬영한 사진의 우수성을 기준으로 성적을 줄 것이기에, 단 한 장의 사진만 제출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A 학점을 받기 위해 완벽에 가까운 작품을 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학기를 마치고 최고의 작품은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놀랍게도 양에 치중했던 첫 번째 그룹에서 모두 나왔다고 합니다. 수많은 사진을 찍으면서 실수를 반복했고 이 실수를 통해 기술을 배우고 재능을 익혀서 최고의 작품을 만들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느님과 가까워지는 방법을 도저히 모르겠다는 분이 많습니다. 참 신앙인이 되고 싶은데 생각뿐이지 행동이 되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기도도 제대로 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고도 하십니다. 왜 그럴까요? 최고의 신앙만을, 그리고 완벽한 신앙생활만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특별하고 놀라운 기적 체험을 통해 신앙인이 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일상 삶 안에서 하느님과 대화를 많이 하고, 하느님과의 만남 시간을 늘리는 사람만이 참 신앙인에 가까워질 것입니다.
완벽한 사랑을 우리는 처음부터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작은 사랑을 계속 실천하면서 최고의 사랑, 완벽한 사랑으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에게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자기만의 사고에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이라는 하나의 작품만을 바라보고 있으니, 또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신 하느님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은 그들의 구원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잘못된 생각에 갇혀서 구원의 길에서 벗어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기에 힘주어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들으려고도 하지 않으면서 예수님과 함께하기를 거부합니다.
우리 역시 자기만의 최고 가치를 내세우고 있습니다. 돈이 될 수도 있고, 세상의 지위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과 함께하는 삶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양한 하느님 체험을 통해서만 주님과 진정으로 하나 될 수 있습니다.
=====================
[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삶과 죽음>
요한 8,51-59 (아브라함 전부터 계신 분)
그때에 예수님께서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이제 우리는 당신이 마귀 들렸다는 것을 알았소. 아브라함도 죽고 예언자들도 그러하였는데, 당신은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맛보지 않을 것이다.’ 하고 말하고 있소. 우리 조상 아브라함도 죽었는데 당신이 그분보다 훌륭하다는 말이오? 예언자들도 죽었소. 그런데 당신은 누구로 자처하는 것이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나 자신을 영광스럽게 한다면 나의 영광은 아무것도 아니다. 나를 영광스럽게 하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 너희가 ‘그분은 우리의 하느님이시다.’ 하고 말하는 바로 그분이시다.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하지만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을 알지 못한다고 말하면 나도 너희와 같은 거짓말쟁이가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분을 알고 또 그분의 말씀을 지킨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날을 보리라고 즐거워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보고 기뻐하였다.”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당신은 아직 쉰 살도 되지 않았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다는 말이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 그러자 그들은 돌을 들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몸을 숨겨 성전 밖으로 나가셨다.
<삶과 죽음>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요한 8,51)
삶은 하얗다
하얀 삶
이어서
하얀 죽음
죽어도 삶이다
죽음은 검다
검은 죽음
앞서서
검은 삶
살아도 죽음이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우리의 마음 둘 곳은>
창세기를 보면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2,7).고 적고 있습니다. 사람이 있기 전에 생명의 숨이 있었고 그 숨을 통하여 우리가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사람보다 앞서신 보이지 않는 분이 생명을 불어넣지 않으면 흙의 먼지로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숨을 받아 생명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특별히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고,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습니다.’(요한 1,1-2) 그 말씀이 사람이 되어 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그분은 창조 이전에, 더더욱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계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죽이려 하였습니다. 유다인들은 아브라함을 권위 있는 분으로 존경하였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미지의 세계로 떠났고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있었다.’고 선언하였습니다. 그러니 유다인들에게는 조상에 대한 모욕이고 신성모독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죽이려 하였습니다.
그들은 지금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에서 나왔음을”(히브 11,3)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사실 내가 모르는 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 것을 먼저 내려놓고 가르침을 받아들이면 주님을 더 깊이 알게 되고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줄 것입니다.”(필리 4,6-7)
따라서 주님의 권위를 받아들임으로써 생명을 풍요롭게 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믿음이 있어서 주님을 따랐다기보다 따름으로써 믿음이 굳건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돌을 들어 던지려 할 때 그들과 맞서지 않으시고 몸을 숨겨 성전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억지를 이기는 길은 잠시 여유를 주는 것입니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입니다. 때를 기다리며 자리를 비켜주는 모습은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서로의 격한 감정을 삭이기 위해서는 때로 자리를 뜨는 것도 약입니다. 서로의 관계 안에서 서로의 다른점을 인정한다는 것이 말 같이 쉽지 않지만 그래도 끊임없이 노력해야 할 부분입니다. 마음이 흔들릴 때는 잠시 주님과 함께 자리를 비우십시오!
나보다 더 나를 잘 아시는 주님의 권위 앞에 머리 조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따르는 일이 때로는 인간적인 좌절과 실패를 느끼게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차지하면 결코 실패가 아닙니다. 그것은 잠깐 지나가는 세상의 성공에 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권위도 중요하지만, 하느님의 권위 앞에 순명한 아브라함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을 통하여 하느님을 보아야 하고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부디 세상의 권위를 쫓지 말고 천상의 권위에 머물러 기쁨과 평화를 누리시길 바랍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람과 계약을 맺으십니다. 아브라함으로 이름을 바꿔주시며 “많은 민족의 아버지”로, 만들어 주시고 “자손을 많이 낳을 축복”을 허락하시며 “그들의 하느님이 되어주실 것”을 선언하셨습니다.
이 계약은 백성을 사랑하기 때문에 맺어주신 일방적 계약입니다. 하느님 측에서 본다면 손해를 보는 계약입니다.
그러나 그 계약을 영원히 기억하시며 축복해 주십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느님께서 오늘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 둘 곳은 분명합니다.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시는 주 하느님이십니다. “오늘 너희는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시편 95,7) 주님 말씀을 듣고 충실히 지켜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떠남의 여정>
-늘 새로운 시작-
“잘 살다 잘 죽는 것입니다.”
수십년전 어느 목사님의 “신부님의 소원이 뭐냐?”는 물음에 대한 즉각적인 답에 내심 만족했고 지금 또한 그러합니다. 잘 살아야 잘 떠날 수 있습니다. 잘 떠남의 은총이요 축복입니다. 그러니 하루하루 선물같은 삶에 감사하며 기쁘게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정신과 의사들은 말합니다.
“마음이 청춘이면 몸도 청춘이 된다. 꿈과 열정이 사라지면 죽음이다. 이 나이에 무슨...이라는 소극적인 생각은 절대 금물이다. 노령에도 뇌세포는 증식한다. 죽을 때까지 공부하라. 확실히 늙음은 나이보다도 마음의 문제이다.”
사는 동안 하루하루 진실히, 성실히, 절실히 살아야 하겠지만, 늘 떠남을 염두에 두고 늘 준비하며 사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잘 떠나는 뒷 모습은 참 아름답고 향기로운 추억으로 길이 남습니다. 이런 잘 떠남의 선물보다 이웃에게 좋은 선물은 없을 것입니다. 오래전 “꽃마다 반갑고 아름다운 것”이란 자작시가 생각납니다.
“꽃마다
그리도 반갑고 아름다운 건
잠시동안 폈다지기 때문이다.
일년내내
피어있는 꽃이라면 누가 반갑다 아름답다 하겠는가?
인생이
그리도 반갑고
슬프도록 아름다운 건
잠시동안 살다 떠나기 때문이다.
영원히
사는 인생이라면 누가 반갑다 아름답다 하겠는가?
아, 꽃지므로 꽃 좋은 줄 알겠다
죽음이 있어 삶이 선물인 줄 알겠다.
짧은 인생
날마다 꽃처럼 반갑고 아름답게 살다 떠날 일이다.
내 영원한 고향
주님의 집을 향해”-2006.4
또 하나 “떠남의 여정”을 노래한 제 좌우명 기도, “하루하루 살았습니다”중 한대목을 나누고 싶습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끊임없이, 한결같이
하느님 사랑의 바다를 향해 흐르는 강이 되어 살았습니다.
때로는 좁은폭으로 또 넓은폭으로
때로는 완만하게 떠 격류로 흐르기도 하면서
결코 끊어지지 않고 계속 흐르는 하느님 사랑의 강이 되어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오늘 우리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은 사부 성 베네딕도 별세 축일을 지냅니다. 성인의 아름답고 거룩한 죽음을 기리는 날입니다. 이런 아름답고 거룩한 죽음보다 더 좋은 선물은 없고 우리들 또한 보고 배웁니다. 베네딕도 성인의 평생 삶은 “떠남의 여정”으로 요약할 수 있고, 마지막 죽음의 떠남은 아름다운 떠남의 절정입니다.
언젠가 갑작스런 거룩한 죽음이 아니라, 평소 하느님을 향한 떠남의 여정에 충실한 결과임을 깨닫습니다.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의 <베네딕도 전기> 제37장은 전부 성인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죽음에 할애되고 있습니다. 한 단락만 인용합니다.
“그분은 열병에 걸리셨고 병세가 날로 심해지자 제자들에게 당신을 성당으로 옮겨 달라고 하셨다. 그분은 거기서 주님의 성체와 성혈을 영하심으로써 당신의 임종을 준비하시고, 쇠약해진 몸을 제자들의 손에 의지한 채 하늘을 향해 손을 들고 기도를 하는 가운데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늘 하느님을 믿고 사랑하며, 하느님께 궁극의 희망을 두고 살았기에, 주님의 전사답게 하늘 향해 기도중 아름다운 선종의 죽음입니다. 어디로 떠날지 모른다면 어찌 이런 아름다운 선종의 죽음이 가능하겠는지요. 어느 분이 아름다운 수의를 입은, 믿지 않았던 죽은 친구를 떠나 보내며 탄식했다는 일화가 문득 생각납니다.
“옷은 잘 입었는데 갈데가 없구나. 어디로 가나?”
오늘 성인의 별세 축일 미사전례중 말씀 배치도 떠남의 여정에 잘 맞춰져 있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주님의 인도하에 하느님의 복이 되어 떠나는 아브람의 모습이 정말 멋집니다. 온전히 하느님께 믿음과 희망, 사랑을 둔 아브람의 떠남입니다.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줄 땅으로 가거라.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내리며, 너의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그러면 너는 복이 될 것이다. …… 세상의 모든 종족들이 너를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아브람은 주님께서 이르신 대로 주님의 복이 되어 길을 떠나 떠남의 여정에 오르니 이때 그의 나이는 일흔 다섯 살이니 제 나이와 같네요. 말 그대로 죽을 때까지 은퇴가 없는 영원한 현역의 아브람의 삶입니다. 이어지는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고별기도는 얼마나 거룩하고 아름다운지요! 오늘 요한복음 17장은 십자가의 죽음에 앞서 세상을 떠나기 전 아버지께 바치는 유언과도 같은 느낌의 장엄한 고별기도가 소개됩니다. 1.자신을 위한 기도, 2.제자들을 위한 기도에 이어 오늘 복음에 소개되는 3.믿는 이들 모두를 위한 기도입니다.
한마디로 오늘 복음의 고별기도를 요약하면 믿는 이들 모두가 당신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해 달라는 기도이며,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떠나 보내시며 참 좋은 최고의 선물인 이 미사를 우리 인류에게 남겨 주심으로 아드님의 소원을 들어주셨습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떠남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성체를 영할 때 마다 속으로 불러보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성가 177장 2절입니다.
“참 기쁨이 넘치는 그곳 주님 계신 곳,
내 모든 근심 슬픔을 다 위로하여 주시네.
약속한 땅이여, 오 아름다운 대지여
영원히 머무를 젖과 꿀이 흐르는 그곳,
이 빵을 먹는 자는 그 복지 얻으리,
아 영원한 생명의 빵은 내 주의 몸이라.” 아멘.
=====================
[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하느님을 보면>
“나를 보아라. 너와 맺는 내 계약은 이것이다. 나는 네가 매우 많은 자손을 낳아 여러 민족이 되게 하겠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날을 보리라고 즐거워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보고 기뻐하였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아브라함을 모두 얘기합니다. 창세기는 아브라함이 하느님과 계약을 맺는 얘기이고, 복음은 그 아브라함이 보리라고 희망하며 즐거워했던 그분 메시아가 바로 당신이라는 얘기입니다.
독서와 복음에는 ‘보는 것’과 관련된 표현도 나옵니다. “나를 보아라.”라는 하느님의 말씀과
“나의 날을 보리라 즐거워하였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창세기의 “나를 보아라.”라는 말씀대로 아브라함이 하느님을 봤더니 먼 훗날 당신의 오심까지 내다볼 수 있게 되었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는 왜 아브라함을 이렇게 추켜세우시겠습니까?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하느님을 보라고 초대하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저는 하느님을 보는 것을 묵상했는데 하느님을 본다는 것은 하늘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을 보면 땅만 보지 않고 하늘도 봅니다. 하느님을 보면 자기만 보지 않고 꽃도 봅니다.
하느님을 보면 우리나라만 보지 않고 다른 나라도 봅니다. 하느님을 보면 그리스도교만 보지 않고 타 종교도 봅니다. 그러니까 여기만 보지 않고 저기도 보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보면 지금만 보지 않고 미래도 내다봅니다. 하느님을 보면 절망만 보지 않고 희망도 바라봅니다.
하느님을 보면 죄만 보지 않고 은총도 봅니다. 하느님을 보면 죽음만 보지 않고 부활도 봅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을 봤기에 하느님 말씀대로 살던 곳을 떠나고 경계를 넘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살던 곳을 떠나고 경계를 넘을 수 있었기에 자기 민족만이 아니라 민족들의 아버지가 될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을 봤기에 장소적 경계뿐 아니라 시간적인 경계도 넘을 수 있었고 미래 메시아 시대도 내다볼 수 있었던 겁니다.
주님께서 아브라함의 이런 경지를 얘기하니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마귀 들렸다고 합니다.
하느님을 보지 않는 사람은 이렇게 마귀나 봅니다.
=====================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요한8,51)
<육에서 해방되자!>
오늘 복음(요한8,51-59)은 '예수님께서 아브라함 전부터 계신 분으로 소개되는 말씀'입니다. 유다인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거부합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예수님께 돌을 들어 던지려고 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그분의 말씀과 행동을 따라가면 죽음을 겪지 않고 영원히 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하는 죽음은 누구나 예외없이 이 세상에서 맞이하게 되는 생물학적 죽음이 아니라, 생물학적 죽음 저 너머에서 맞이하게 될 영적 죽음인 영원한 죽음을 의미합니다.
유다인들은 보이는 것 안에 갇혀 있었고, 육적인 것과 이 세상 것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그 너머에 있는 것을 볼 수도, 이해할 수도 없었습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 아브라함 전부터 계신 하느님이심을 믿지 못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많은 민족들의 아버지로 세우셨습니다. 그를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처럼 믿는 이들에게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과 아브라함 사이에 맺어진 계약입니다.
'새 계약의 중재자!'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들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새 계약의 중재자로 보내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이라는 근본적인 복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주님부활대축일이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몸과 마음의 허물을 깨끗이 씻어내고 주님의 파스카 축제를 함께 기뻐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많은 성당에서 몸과 마음의 허물을 씻어내는 판공성사가 거행되고 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우리가 믿고 있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신 하느님께서는 참으로 자비로우신 분이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자비이신 하느님께로 나아가 다시 태어납시다!
"오늘 너희는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복음 환호송)
=====================
[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PatZt8VKxwM
=====================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나를 영광스럽게 하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요한 8, 54)
파릇파릇
생명의 새순이
영광스럽게
돋아납니다.
영광스럽게
쏟아지는
빛나는
새순이며
은총입니다.
매순간이
살아있는
은총의
진심어린
감사입니다.
어떤 삶이
영광스럽고
좋은 삶인지를
저 자신에게
묻습니다.
삶의 기쁨을
삶의 의미를
하느님에게서
찾는 삶입니다.
우리를
가장 깊이
사랑하시는 분은
언제나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가
빛나고
아름다운
영광스러운
관계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은
영원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에서
빛나고 아름다운
이름을 만납니다.
예수님을 통해
서로에게
빵이 되어주는
복음의 빛을
만납니다.
영광스럽게
하는 삶이란
빵이 되는
삶입니다.
빵으로
시작하시는
영광의
삶입니다.
빵으로
끊어지지 않는
영광스러운
생명의 관계입니다.
생명이란
원래
하느님의 것임을
뜨겁게 배웁니다.
영광스럽게
하시는
하느님께
삶을 익힙니다.
우리의
어리석음을 뚫고
저마다
행복해야 할
이유를
알려주십니다.
다시
되살아나는
행복이며
삶의
기쁨입니다.
영광스럽고
위대한 사건은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어
오셨고
사람이 되신
하느님께서
빵이 되시고
십자가가 되시고
부활이 되시는
사랑입니다.
그 참된 사랑을
하느님에게서
만나는
영광스러운
사순의
아침입니다.
아름답고
성실하신
사랑을 만나는
우리의
영광입니다.
=====================
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