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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 질식당하지 않기 위하여, 『우리는 매일 슬픔 한 조각을 삼킨다』
2010 데상브르 상 수상작. 삶에 점철된 고통과 부조리를 냉철하게 직시하고자 했던, 이른바 모럴리스트로 불릴 만한 사상가 10인의 문장들로 빚어낸 ‘생의 슬픔’에 관한 철학 에세이다. 그 사상가들은 프리드리히 니체, 페르난두 페소아, 마르셀 프루스트,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미셸 몽테뉴 등이다.
저자는 이들의 문장에 기대어 현대의 노예적 인간, 우울과 애도의 차이, 권태와 쾌락, 이성이라는 환상, 상실과 죽음, 사랑 등에 대하여 자신만의 철학적 사유를 펼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 삶에 잡힌 주름과 살아가는 일의 괴로움을 재치 있고 신랄하게 드러내 보여줌으로써, 무책임한 낙관론에 마비되지 않고 인간의 현실을 또렷하게 응시하도록 생의 감각을 일깨운다. 저자는 이 책으로 2010년, 세계에 대한 비판적 진보적 사유를 보여준 작가에게 주어지는 데상브르 상을 수상했다.
본문 이미지
1. 프리드리히 니체
“하루의 3분의 2를 자기 마음대로 쓰지 못하는 사람은 노예다.”
2. 페르난두 페소아
“교양 있되 정념 없는 삶, 언제라도 권태에 빠질 수 있을 만큼 느리지만 결코 그렇게 되지는 않을 만큼 심사숙고하는 삶을 살라.”
3. 마르셀 프루스트
“관념은 슬픔의 대용품이다.”
4.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인생 이야기는 항상 고통의 이야기다.”
5. 『전도서』
“너무 의롭게 살지도 말고, 너무 슬기롭게 살지도 말아라. 왜 스스로를 망치려 하는가?”
6. 미셸 드 몽테뉴
“우리 생애의 목적은 죽음이다.”
7. 세바스티앵 샹포르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철학은 유쾌한 풍자와 멸시 어린 관용을 조화시키는 것이다.”
8. 지그문트 프로이트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다.’ 인생과 역사의 이 가르침을 앞에 두고 누가 감히 반박할 수 있겠는가?”
9. 클레망 로세
“‘난잡한’ 상태가 만물의 근본 상태다.”
10.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
“사랑은 두 고독을 맞바꾸려는 시도다.”
저자 : 프레데리크 시프테 (Frederic Schiffter)
프랑스의 철학교사이자 작가. 1956년에 당시 프랑스령이었던 오트볼타(현 부르키나파소)에서 태어났고, 아홉 살에 아버지를 여읜 후 어머니와 프랑스 비아리츠에 정착했다. 이 책(원제 Philosophie sentimentale)으로 2010년 데상브르 상을 수상했으며, 『철학자들의 미사여구와 젠체하는 태도에 관하여Sur le blabla et lechichi des philosophes』 『자질 없는 철학자Le Philosophe sansqualites』 『우울한 사상가들의 매력Le Charme des penseurs tristes』 등을 썼다. 시프테는 시오랑, 쇼펜하우어, 몽테뉴 등 인간과 생의 본질을 냉철하게 직시하고자 했던 사상가들에게 영향을 받았다. 스스로를 염세주의자라 정의하고, 현실의 고통스러운 측면을 외면한 채 무책임한 낙관론을 설파하는 자들을 비판하는 입장을 취한다. 그는 이러한 신념을 바탕으로 자유롭고 과감하게 자신만의 철학적 사유를 펼치면서, 특히 인간 삶의 고통과 부조리에 주목하는 글을 쓰고 있다.
“삶은 곧 고통이라는 것에 대한 증언 행위가 글쓰기라면,
고통 없는 삶을 누린 자의 증언은 아무 가치도 없다.”
“환희가 내게는 모욕이다.
인간이 배우는 본질적인 것은 전부 불행의 경험에서 온다.”
한 프랑스 철학자가 써내려간 슬픔에 관한 십계명
이 책은 삶에 점철된 고통과 부조리를 냉철하게 직시하고자 했던, 이른바 모럴리스트로 불릴 만한 사상가 10인의 문장들로 빚어낸 ‘생의 슬픔’에 관한 철학 에세이다. 그 사상가들은 프리드리히 니체, 페르난두 페소아, 마르셀 프루스트,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미셸 몽테뉴 등이다. 저자는 이들의 문장에 기대어 현대의 노예적 인간, 우울과 애도의 차이, 권태와 쾌락, 이성이라는 환상, 상실과 죽음, 사랑 등에 대하여 자신만의 철학적 사유를 펼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 삶에 잡힌 주름과 살아가는 일의 괴로움을 재치 있고 신랄하게 드러내 보여줌으로써, 무책임한 낙관론에 마비되지 않고 인간의 현실을 또렷하게 응시하도록 생의 감각을 일깨운다. 저자는 이 책으로 2010년, 세계에 대한 비판적 진보적 사유를 보여준 작가에게 주어지는 데상브르 상을 수상했다.
“하루의 3분의 2를 자기 마음대로 쓰지 못하는 사람은 노예다.”
현대의 노예적 인간들에 대하여
먹고 사는 일은 고되고 애달프다. 자본가는 제멋대로 노동자를 부리고, 노동자는 개인적 삶을 소진해가며 일하지만 사는 건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다. 저자는 “하루의 3분의 2를 자기 마음대로 쓰지 못하는 사람은 노예다”라는 니체의 문장을 빌려 노동하는 인간의 비애로 서두를 연다. 계산해보자. 법적 근로시간은 하루 8시간이지만 거기에 수고로운 출퇴근 시간도 더해야 하며, 집에 돌아오면 힘들기로는 직장 일에 뒤지지 않으면서 표도 잘 안 나는 가사노동이 기다리고 있다. 이렇게 내 것이 아닌 시간을 제하면 고작 수면 시간이 남는데, 이조차 그 옛날 프롤레타리아들을 재촉하던 사이렌 소리 같은 기상 알람으로 중단된다. 이 현대적 노예의 초상에 속하지 않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 것인가.
저자는 인간들이 현재 노예 상태에 있음을 자각하지 못하고, 계급과 시스템의 부조리를 문제삼기보다 오히려 노예적 삶을 적극적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지적한다. 저자가 볼 때 사람들은 자신의 인간다움을 망가뜨리는 노동을 감내하면서 괴로워하지 않는다. 남들과 다르게 사는 것에 대한 선천적인 공포와 전체에 포함되고자 하는 욕구로 인해 자신을 망각하고 일에 몰두한다. 더욱이 신노예들은 학교나 현장에서 오직 장사를 위해 양성된 인간이기 때문에 부끄러움도 모르고 ‘상품’의 운명을 드높이는 데만 혈안이다. 니체라면 이것을 노예근성이라 할 것이다. 온 삶이 직업적 언어와 행동에 물들어 일터에 대한 소속감으로 충만한 인간에게 영혼이 무너지는 대참사가 일어난다면 그것은 해고통지서를 받는 일이다. 그제야 그는 자신이 그저 언제든지 대체 가능한 가변적인 병력에 불과했음을 깨닫는다.
“난잡한 상태가 만물의 근본 상태다.”
세상은 질서정연한 코스모스가 아닌 혼돈의 카오스
이성적 동물인 인간은 자신이 속한 세상에서 법칙, 목적성, 이유 따위를 찾으며 자신의 삶은 순리대로 나아갈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고는 자식의 죽음, 동족의 폭력, 실직, 지독한 암세포를 예고 없이 맞닥뜨리면 그제야 세상이 무너진 것 같다고 느낀다. 그러나 저자는 ‘무너진 것은 세상이 아니라 인간의 환상’이라는 말로 우리의 착각을 환기한다. “자연은 영원한 시소”라는 몽테뉴의 말대로, 인생은 탄생과 죽음, 번영과 비참, 건강과 질병, 사랑과 배신 사이에서 흔들리는 감각들의 연속일 뿐이다. 세상의 본질이 이러할진대, 모든 것을 꼬치꼬치 따지고 이성에 연연하는 인간, 역사와 세계에 끈덕지게 의미를 부여하려는 목적론자는 우스꽝스러울 뿐이다. “세상은 혼란의 악다구니이며 그 세상 속 삶은 고통”이라는 저자의 확고한 염세주의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행복이라 일컫는 순간에조차 우리는 그것이 곧 사라질 것을 느끼며, 또다시 불행이 닥쳐올 것을 안다. 샹포르의 비유대로 “아름다움과 완전함만을 바라보며” 엄연히 존재하는 고통을 외면하기보다, 우리의 숨이 끊어질 때까지 계속되는 생의 괴로움을 직시하는 편이 저자에게는 현명한 인간이다.
“교양 있되 정념 없는 삶을 살라”
고독하고 권태로운 삶을 추구하기
저자는 프랑스의 한가로운 해안 도시 비아리츠의 한 고등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친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생산관계에서 교사는 하찮은 위치를 차지하지만, 공업이나 상업의 중간관리직에 비하면 그렇게 혐오스러운 직업은 아니라는 것이다. 일부 사람들은 교사를 한직이라고 폄하하지만, 교사 형편에 큰 욕심만 없다면 경제적으로 해결하지 못할 일은 드물며, 학교에 출근하지 않는 날이 일 년에 넉 달이 넘는다는 그의 삶을 부러워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시간에 저자는 사랑, 몽상, 낮잠, 완벽한 부동(不動)을 즐긴다. 모든 번잡스러운 일에서 물러나 유유자적하게 자신만의 시간을 즐겼던 고대 철학자들의 삶을 최대한 따르는 것이다. 언뜻 그가 얄밉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이것이 바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삶이 아닐까.
저자는 현대의 여가 활동, 즉 과시적인 스포츠, 여행, 파티, 최첨단 통신 기기 따위에 탐닉하는 일이 인간의 진정한 휴식을 빼앗는 노동의 연장임을 상기시킨다. 몰개성적인 욕망을 좇는 군중으로부터 떨어져나와 자신의 내면으로 침잠하는 고독한 시간이야말로 진정한 여가라는 것이다. “언제라도 권태에 빠질 수 있을 만큼 느리지만 결코 그렇게 되지는 않을 만큼 심사숙고하는 삶을 살라”는 페소아의 문장은 자신의 슬픔을 돌아볼 여유조차 없이 삶을 꾸려나가기 바쁜 현대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