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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흙속의연꽃
2013. 3. 4.
법륜스님의 윤회관, 빠알리 니까야에 근거한 법문을 하시라!
법문을 잘 하는 스님들이 있다. 인터넷과 모바일로 보는 불교TV사이트에 수 십개의 법문모음이 올려져 있는데, 그 중 법문을 잘 한다고 보여지는 스님들이 있다. 종범스님, 성본스님, 설우스님 등이 대표적이다. 여기에 가장 대중적인 법문을 잘하는 스님을 들라면 단연 ‘법륜스님’이다.
“90%의 허황된 이야기를 걷어 내 버리고”
법륜스님의 법문, 즉문즉설을 모바일로 가장 편안한 자세로 들었다. 듣던 중에 귀가 번쩍 뜨이는 말이 들렸다. 다음과 같은 말이다.
내가 과학을 좋아 했는데 과학을 해서 내가 의도하지 않지 않게 승려가 되었는데, 스님이 되서 종교인이 됐는데, 과학을 좋하는 사람이 종교인이 됐으니까 과학을 포기하고 종교를 한게 아니라, 과학적 안목을 가지고 종교를 봤기 때문에 종교안에 있는 90%의 허황된 이야기를 걷어 내 버리고, 거기에 진실한 것만 봤단 말에요. 그러니까 과학자가 (될 사람이) 종교를 한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종교를 더 진실되게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래서 지금 여러분과 이런 대화를 하는 거 아니에요.
(법륜스님, 법륜스님의 즉문즉설, 제300회 자격지심 극복법
모바일로 듣고 불교tv 사이트에서 녹취한 것이다. 법문에 따르면 스님은 놀라운 이야기를 하였다. 불교에서 허황된 이야기를 거두었다고 한다. 스님이 판단하기에 허황된 이야기로 보여지는 90% 가량을 걷어 내고 법문을 한다고 한다. 이말을 듣자 섬뜻 하였다. 그것은 스님의 법문에서 윤회에 대한 부정적인 발언을 보았기 때문이다.
법륜스님의 윤회관
인터넷에 글쓰기를 하다보면 검색과정에서 이런 저런 정보를 접하게 된다. 그런 정보 중에 법륜스님의 윤회관이 한 때 문제가 된 적이 있었다. 그래서 인터넷토론사이트에서 이 문제가 다루어지기도 하였다. 그런데 스님의 법문에서 90% 허황된 이야기를 걷어 내었다고 하니 윤회와 관련된 것임에 틀림 없다고 보았다. 그래서 법륜스님과 윤회를 키워드로 하여 구글 검색 하였다. 그결과 법문의 내용과 유사한 내용을 발견하였다. 다음과 같은 이야기이다.
부처님이 내생이 있느니 업느니 이런 얘기 하는 게 부처님이겠어요? 그러면 천당이 있느니 없으니 하는 거와 차이가 뭐가 있어요? 똑 같은 얘기지. 천당이 있다면 여러분들이 증명을 하겠어요? 없다고 그러면 증명을 하겠어요? 내생이 있다면 증명을 하겠어요? 없다는 것을 증명을 하겠어요? 이런 걸 뭐라 그런다? 믿음에 속한다. 알았습니까? 있다고 믿는 사람은 있는 줄 아는 거고. 없다고 믿는 사람은 없는 줄 아는데. 있다고 믿어도 있는지 없는지 모르고. 없다고 믿어도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거요 이거는.
(즉문즉설_법륜스님(제382) 불교의 환생 법륜스님_즉문즉설(2010))
참으로 놀라운 이야기이다. 불자라면 당연히 윤회가 있는 것으로 믿고 있는데, ‘부처님이 그런 말을 했겠느냐’는 이야기이다. 또 ‘내생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겠느냐’고 반문한다. 그러면서 단지 믿음의 문제라 한다.
그리고 윤회와 내생이 있다고 믿는 자는 있을 것이고,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는 취지로 말한다. 마치 귀신이 있다고 믿는 사람은 귀신이 있다고 믿고, 귀신이 없다고 믿는 사람은 귀신이 없다고 믿는 것과 같은 말이다.
이는 마치 회의론자들의 주장을 듣는 것 같다. 디가니까야 브라흐마잘라경(D1)에 회의론자의 주장중에 “나는 이러하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그러하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다르다고도 생각하지 않고, 아니라고도 생각하지도 않고, 아닌 것이 아니다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듯이, 마치 뱀장어가 요리 조리 빠져 나가듯 말하는 ‘궤변’을 말한다. 그래서 눈으로 귀로 확인 하기 전에는 믿을 수 없다는 말을 강하게 풍긴다.
법륜스님의 환생론
이전에 법륜스님은 환생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런 거는 있다 해도 증명할 수도 없고. 없다 해도 증명할 수도 없고. 또 설령 있으면 뭐하며, 없으면 뭐 어떠냐? 아무 관계가 인생살이에 없는 문제입니다. 이런 거를 헛생각 한다 이래요. 헛생각. 망상을 피운다. 헛생각 하면서 현재 인생을 낭비한다. 이런 얘기요.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이 내생이 있다 없다를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생각하면 이것도 불교를 전혀 모르는 소리다.
(즉문즉설_법륜스님(제382) 불교의 환생 법륜스님_즉문즉설(2010)
환생이라는 말은 힌두교적 용어이다. 티벳불교에서 ‘환생(reincarnation)’이라는 말을 사용하지만 초기불교에서는 ‘재생(rebirth)’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윤회의 주체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법륜스님은 환생이야기를 하면서 환생이라는 것이 증명할 수 없는 것이라 한다. 그리고 내생과 관련하여 ‘부처님이 있다 없다를 말한적이 없다’라고 단정적으로 말한다. 과연 그럴까?
스님이 되지 않았다면
법륜스님은 출가하기 이전에 재가법사로서 명성을 날렸다고 한다. 그 이전에는 수학과외 교사로 또한 명성을 날렸다고 SBS TV 프로에서 밝힌 바 있다. 그런 법륜스님의 어렸을 적 꿈은 과학자이었다고 한다. 아마도 스님이 되지 않았다면 훌륭한 과학자가 되었을지 모른다.
이와 같이 과학적인 마인드로 무장된 스님의 불교관에서 윤회나 내생과 같은 이야기는 허황된 이야기로 들렸는지 모른다. 죽어서 돌아온 사람이 없기에 천상이나 지옥과 같은 내생이야기를 하는 것은 과학적 사고방식을 가진 스님의 입장에서는 용납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의 문화현상이라고?
그래서 스님은 내생과 윤회에 대하여 인도라는 지역에서 출현한 하나의 문화 현상으로 이해해고 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런 것처럼 이 윤회 사상은 인도로부터 온 힌두교 사상입니다. 아시겠어요? 그런데 이게 지금 와서 주객이 전도 돼서 뭐가 돼버렸다? 불교자리를 이게 떡 차지하고 있어서. 마치 윤회를 인정하면 불교신자고. 윤회를 인정 안 하면 불교신자가 아닌 것처럼 지금 이런 위치를 차지해 버렸다. 그래서 이것은 윤회를 한다 안 한다가 불교의 가르침이 아니고. 이거는 인도의 사상이고. 이건 그냥 두고. 불교는 어리석음을 깨치면 법의 이치를 올바르게 알면 번뇌와 괴로움이 사라지고. 그러니까 종교인이라 그러면 이치에 더 분명한 사람이 되야 종교인이다 이 말이오.
(즉문즉설_법륜스님(제382) 불교의 환생 법륜스님_즉문즉설(2010))
법륜스님은 윤회사상에 대하여 인도에서 발생한 국부적 문화현상이라 한다. 그런 인도 문화가 불교에 유입된 것이 윤회사상이라 한다. 그래서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사상은 힌두교 사상이라고 단언한다.
불자들은 혼란스럽다
과학적 사고방식을 가진 법륜스님의 법문을 듣다 보면 불자들은 혼란스러워 진다. 전생과 내생, 업과 윤회가 당연시 되고 모두 받아들여지고 있는 입장에서 윤회는 불교의 가르침이 아니라니 불자들은 앞으로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지 혼돈을 일으키는 것이다. 앞으로 불자들은 오로지 눈에 보이는 것만 믿고, 과학적으로 실증이 가능한 것만 믿어야 할까?
오늘날 법륜스님은 한국불교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스님이다. 전국 순회강연을 하면 구름청중을 몰고 다닐 정도로 인기가 높다. 그런 스님은 불교계 뿐만 아니라 한국사회에서도 역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 되었다. 그래서 스님의 트레이드 마크라 볼 수 있는 즉문즉설에 대하여 국민들 중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이다. 그런데 정작 스님의 법문을 들어 보면 비불교적 이야기가 적지 않게 발견 된다. 이런 현상에 대하여 몇 차례 글(법륜스님의 ‘소승교설에 대한 비판’에 대한 비판장애에 대한 법륜스님의 유물론적 견해
마치 윤회를 부정하는 듯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을 중심으로 하여 윤회와 내생과 관련된 검색을 해 보았다. 과학적 사고를 가진 스님의 위 법문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느 법문의 경우 윤회에 대하여 “전설따라 삼천리처럼 어때요 그걸 인용을 해가 ‘내가 권선징악적으로 불법을 좀 쉽게 이해하라’고 나온 이야기에요.( 제439회 윤회에 대하여)”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부처님의 윤회에 대한 이야기를 전설따라 삼천리나 권선징악적으로 표현 한 것이 놀랍다. 어떤 근거로 그렇게 이야기 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마치 윤회를 부정하는 듯이 들리기도 한다.
아지따 께사깜발린이 말하기를
윤회를 부정하는 자들이 단멸론자들이다. 단멸론자들은 부처님 당시 유물론자 또는 허무주의자라고 불리웠다. 육사외도 중의 하나인 아지따 께사깜발린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보시도 없고 제사도 없고 공양도 없고 선악에 대한 과보도 없고 이 세상도 없고 저 세상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아버지도 없고 홀연히 생겨나는 중생도 없고 이 세상에는 바르게 유행하며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알고 깨달아 천명하는 수행자나 성직자도 없다.
네가지 위대한 존재로 이루어진 사람의 그 목숨이 끝날 때에 흙은 흙의 성분으로 돌아가고 물은 물의 성분으로 돌아가고 불은 불의 성분으로 돌아가고 바람은 바람의 성분으로 돌아가고 모든 감각능력은 허공으로 돌아간다. 네 명의 인부가 상여에 죽은 자를 싣고 가서 화장터에 이르기까지 곡을 하지만 마침내 뼈는 표백되고 재물은 재가 된다.
보시는 어리석은 자의 가르침이고 영원히 존재한다는 것은 허황된 망설이다. 어리석은 자나 슬기로운 자나 몸이 파괴되어 죽은 후에는 단멸하여 존재하지 않게 된다.
(Natthidinna suttaṃ-보시도 없음의 경, 상윳따니까야 S24.5, 전재성님역)
이것이 허무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전형적인 견해이다. 오로지 지금 여기 현세만 있을 뿐 내생은 없다고 한다. 그래서 윤회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어디서 왔을까? 이에 대하여 “이 자아는 물질로 이루어지고, 네 가지 광대한 존재(4대)로 만들어지고, 부모에게서 생겨난 것으로(D1)”라고 답변할 것이다. 여기서 부모로부터 생겨 났다는 것은 ‘정액과 피에서 생겨난 것’이라는 뜻이다. 이렇게 철저하게 업을 부정한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법륜스님은 이와 유사한 법문을 한 바 있다. 장애가 있는 아이가 생겨 나는 원인에 대하여 “유전적인 문제이거나, 무슨 사고 때문이거나 그런 거죠. (큰 불행을 당하거나 신체 장애는 전생의 죄 때문인가?
인터넷 단멸론자들은
인터넷 단멸론자들은 우리 들이 부모로부터 왔다고 주장한다. 업에서 유래된 것이라 보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부모의 정자와 난자가 만나서 우리들이 태어 났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단멸론은 부처님 당시 “부모에게서 생겨난 것(D1)”이라는 말과 정확하게 일치 한다.
우리들이 부모에게서 생겨난 것은 변함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빠일리 니까야에 따르면 “업이 뭇 삶들을 차별하여 천하고 귀한 상태가 생겨납니다(M135)”라고 하였다. 분명히 업에 의하여 귀하고 천한 차별이 생긴다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업설을 말하지 않고 단지 과학적 지식에 따른 정자와 난자 이야기 또는 유전자 이야기를 한다면 단멸론자로 오해 받기 쉽다는 것이다.
법륜스님이 말하는 윤회란?
법륜스님이 단멸론으로 오해 받기 쉬운 이야기가 하나 더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전생이야기는 재미 있는 이야기이긴 합니다. 그러나 수행적 차원에서 현재 이전을 전생이라고 하고, 현재 이후를 내생이라 합니다. 그러면 과거 전생 이야기들도 다 수용됩니다. 그러나 뱃속에서 나올 때부터 현생이고, 이렇게 전생후생을 따지면 ‘그것은 일체유심조의 도리에 어긋난다’ 이말이에요.
(법륜스님, 즉문즉설, 제439회 윤회에 대하여)
법륜스님의 내생관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대목이다. 스님은 수행과 이야기를 구분한다. 전생이니 내생이니 윤회이니 하는 이야기는 인도에서 발생된 하나의 문화현상에 지나지 않은 것이고, 수행에 있어서 현재, 즉 지금 여기 이전이 전생이고, 지금 여기 이후가 내생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법문에서 “여기서 전생이란 것을 지금의 이전이라고만 해석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라고 강조한다.
단멸론 카페에서
이런 윤회관은 살아 있을 때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이와 유사한 이야기를 단멸론자들로 부터 볼 수 있다. 단멸론자들의 카페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올려져 있다.
어리석은 범부들은 윤회를 전생.금생.내생의 굴레를 끝없이 돌고 도는 것으로 알고 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삼세는 우리가 몸을 가지고 현실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영역을 금생, 이것을 바탕으로 지나간 기억들을 전생, 앞으로 다가올 삶에 대한 막연한 바람을 내생이라 하셨다.
다시 말하면 흘러가 기억속에 남아 있는 생을 전생이라 하고, 전생이라는 인식을 조건으로 하여 일어난 지금이라는 인식을 금생이라 하며, 다가올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추론하여 상정한 것을 내생이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전생.금생.내생이라 하는 것은 실재하는 것이 아닌 단지 인간들의 자아취착으로 만들어진 인식의 언어적 표현일 뿐이다.
또한 지금 우리가 몸을 가지고 현실에서 경험한다고 하는 것 역시도, 순간순간 생멸하는 인식의 연속일 뿐이다.
이렇게 순간순간 생멸하는 인식의 거듭됨을 윤회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지나간 과거 인식들의 쌓임을 잠재성향이라 한다.
( <깨달음에도 공식이 있다 163-164쪽 중 발췌함> , 단멸론자의 카페에서)
인터넷에서 활약하는 단멸론자들은 내생과 윤회를 부정한다. 부처님 당시 아지따 께사깜발린의 유물론과 거의 같은 주장을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감각적 인지주의와 과학적 실증주의
그런 단멸론자들의 교과서와 같은 책에 윤회에 대하여 “현실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영역을 금생, 이것을 바탕으로 지나간 기억들을 전생, 앞으로 다가올 삶에 대한 막연한 바람을 내생”이라고 정의 하였다. 이런 말을 부처님이 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빠알리 니까야 그 어디에도 이런 말을 찾아 볼 수 없다. 아무런 경전적 근거없이 자신의 견해를 밝혀 놓은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법륜스님의 윤회관과 매우 유사하다는 사실이다. 법륜스님이 법문에서 “현재 이전을 전생이라고 하고, 현재 이후를 내생”이라고 규정 하였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 모두가 법륜스님의 과학적 사고에 따른 불교관이라 볼 수 있다. 오로지 눈에 보이는 것만 믿는 ‘감각적 인지주의’와 오로지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만 믿는 ‘과학적 실증주의’, 이렇게 두 가지 축에 의하여 불교를 해석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현세열반론자인가?
법륜스님이나 단멸론자들의 주장을 보면 과연 빠알리 니까야를 한 번이라도 읽어 보고 그런 주장을 하는 것인지 의문스럽다. 한역 아함경에서도 수 없이 전생, 내생, 윤회에 대하여 언급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부정하려 한다면 ‘현세열반론자’ 또는 단멸론자로 오해 받기 쉬울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현세열반론자는 빠알리어로 딧따담마(Ditthadhamma)를 말하며 지금 여기에서 행복을 추구하는 삶을 말한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열반과 다른 ‘가짜열반’으로서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의 대상을 소유하고 구족하고 즐기는 삶(D1)”을 말한다.
아라한 선언
부처님이 말씀 하신 윤회는 빠알리 니까야에 수도 없이 나온다. 가장 대표적인 정형구가 다음과 같은 아라한 선언일 것이다.
Khīṇā jāti, 키나 자띠
vusitaṃ brahmacariyaṃ, 우시땅 브라흐마짜리양
kataṃ karaṇīyaṃ, 까땅 까라니양
nāparaṃ itthattāyā 나빠랑 잇탓따야
태어남은 부수어지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다.
해야 할 일을 다 마치고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
아라한 선언은 아라한의 궁극적인 앎에 관해 서술할 때 사용되는 정형구이다. ‘태어남은 부수어졌다’는 의미는 청정한 삶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각주에 따르면, 출세간적 진리인 사성제의 네가지 길이 완성된 것을 말한다. 따라서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라고 번역하였는데, 이는 ‘더 이상 이런 상태는 없다(nāparaṃ itthattāyā)’라는 뜻이다.
이는 번뇌의 파괴를 위해 다시 닦아야 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고, 그래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존재의 다발(온)이후에 일어나는 존재의 다발의 지속은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다섯 가지 존재의 다발(오온)은 마치 뿌리 잘린 나무처럼 되어 버린다. 마지막 의식이 정지함으로써 연료 없는 불꽃처럼 꺼질 것이라는 말이다.
윤회에 대하여 언급한 경
그렇다면 부처님이 직접적으로 윤회에 대하여 언급한 경들은 어떤 것이 있을까. 상윳따니까야 아나마딱가상윳따(S15)가 있다. ‘시작을 알 수 없는 것의 모음’이라고 번역 되어 있다.
전재성 박사의 논문 ‘왜 빠알리 니까야를 읽어야 하는가(불교평론, 2000년 가을호)’에 따르면 ‘아함경에도 나오지 않는 경전’이라 하였다. 이는 오로지 빠알리 니까야에만 있는 모음이라는 것이다.
아나마딱가상윳따(S15)에는 윤회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언급 되어 있다. 어떤 내용일까.
[세존]
“수행승이여, 예를 들어 큰 바위산이 하나 있는데 길이가 일 요자나이고 넓이가 일 요자나이고 높이가 일 요자나이며 간격이 없고 균열이 없고 견고한데, 어떤 사람이 그것을 백년에 한 번씩 까씨국의 옷으로 스치고 지나간다면, 수행승이여, 그 큰 바위산이 그러한 방법으로 소모되어 없어져버리는 기간이 있다. 한 겁은 그것보다 더욱 긴 시간이다.
수행승이여, 이와 같이 겁은 긴 시간이다. 수행승이여, 이와 같이 긴 겁이지만 우리는 수 겁을 윤회하고 수백 겁을 윤회하고 수천 겁을 윤회하고 수만 겁을 윤회하며 살아온 것이다.
(빱바따경-Pabbatasutta-산의 경, 상윳따니까야 S15:5,전재성님역)
부처님은 가로, 세로, 높이가 일 요자나(약 14Km)되는 바위산이 닳아 없어지는 기간 보다 더 긴 세월이 일겁이라 하였다. 그런데 뭇삶들은 일겁도 아니고 수만겁을 윤회하며 살아 왔다고 말씀하신다. 그런 윤회의 시작은 알 수 없는 것이라 한다. 단지 무명에 덥힌 뭇삶들이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해 온 것이라 한다. 이와 같이 부처님은 내생과 윤회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언급하였다.
스스로 탐구해서 불교를 알았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눈에 보이는 것만 믿고, 과학적으로 실증 가능한 것만 믿는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 했다고 볼 수 있을까? 그래서일까 법륜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떤 형식을 떠나서 불교안에서 어떤 종파도 아니고, 불교와 기독교라는 것도 넘고, 불교와 과학도 넘어서 우리가 이렇게 자유로운 대화를 할 수 있는 거다. 그래서 어떤 대학가서 배운 것도 아니고, 어떤 사람에게 배운 것도 아니에요. 결국은 탐구, 자기가 스스로 탐구 하면서..
(법륜스님, 법륜스님의 즉문즉설, 제300회 자격지심 극복법
결국 법륜스님은 스스로 탐구해서 불교를 안 것이다. 경전을 통해서 라기 보다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나름대로 불교를 해석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 불교 내의 종파를 뛰어 넘은 것이고, 불교 뿐만 아니라 기독교도 뛰어 넘은 것이라 하였다.
그런 불교는 철저하게 과학적 사유에 기반을 둔 불교일 것이다. 일종의 현세적 불교, 실용주의적 불교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윤회에 대하여 인도라는 지역에서 일어난 하나의 문화현상 정도로 취급 하고, 마치 전설따라 삼천리와 같은 이야기, 권선징악적 이야기로 치부 하는 것이다.
그런 스님에게 있어서 윤회는 불교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말하고, 인도에서 불교가 동아시아와 한국에 까지 들어 오다 보니 같이 묻어 들어 온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윤회나 재생, 환생, 내생 같은 이야기를 하면 주객이 전도 되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 윤회 사상은 인도로부터 온 흰두교 사상입니다. 아시겠어요?”라고 단언 하는 것이다.
빠알리 니까야에 근거한 법문을 하시라!
법륜스님은 오늘날 불교인은 물론 국민들로부터 가장 존경 받고 우리시대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중의 한 분이다. 그래서 스님의 말 한마디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데, 부처님의 가르침 가운데 가장 중요한 윤회를 부정하는 듯한 발언은 매우 유감이다. 그러다 보니 단멸론자들의 발언이나 회의론자들의 발언과 잘 구분이 안 가는 경우도 있다.
철저하게 현세주의자라고 볼 수 있는 법륜스님의 법문이 현실에서 부딪치는 문제에 대한 해법을 잘 제시해 주고 있지만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에 대한 전달은 미흡하다. 이는 불교의 교리를 법륜스님의 방식으로 해석하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철저하게 감각적 인지주의와 과학적 실증주의에 기반 하고 있다고 보여 진다.
그런 스님의 가르침이 모두 옳은 것은 아니다. 스님의 개인적인 견해가 들어간 가르침이라면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과 동떨어진 것이다. 그 어떤 가르침도 빠알리 니까야에 근거하지 않으면 개인적인 견해에 지나지 않는다. 부디 법륜스님은 빠알리 니까야에 근거한 법문을 하시라!
2013-03-04
진흙속의연꽃
첫댓글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_()_()_()_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나는 이 글을 읽은 후에,
이 글에서 소개한 법륜스님의 법문을 동영상에서 찾아 들어 보았다.
법륜스님의 법문을 다 들을 필요도 없이 반쯤 보다가 끊고 이 글을 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법륜스님은 내가 짐작했던대로 정확하게 말씀하고 계셨다.
윤회에 관해서 나더러 말해라고 법륜스님처럼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내가 짐작했던 그대로, 내가 생각했던 그대로 법륜스님은 아주 정확하게
윤회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셨기 때문에 법문을 다 들을 필요도 없어서
중간 쯤 보다가 말았다.
법륜스님은 정확하게 부처님의 정법에 근거하여 말씀하셨다.
법륜스님은 윤회를 부정하신 게 아니다.
본질과 현상,
이 두 가지 측면에서 볼 때,
현상에서는 윤회가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불교에서는 현상을 흔히 경계라고 표현하는데,
경계는 어찌해서 생겨나는가?
마음이 일어날 때 경계가 생겨 난다.
즉, 좋고 나쁘다는 분별심이 일어날 때,
경계가 생겨나는 것이지,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데 도대체 경계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래서 일체가 유심조라고 하지 않는가?
심지어 불자라면 누구나 처음 접하게 되는 반야심경에서도
무색, 무수상행식이라고 했다.(아래로)
즉 본질에서 보면 인식의 대상도, 인식의 주체도 없다는 것이다.
인식의 주,객체가 없는데 무엇이 윤회를 한단 말인가?
그러나,
중생은 끝없이 분별심을 일으켜 경계에 끄달린다.
좋다 나쁘다, 크다 작다, 높다 낮다, 있다 없다라는 분별심을 일으키는 한,
우리는 끝없이 윤회하게 된다.
그러나 그러한 분별심이 한낱 망상임을 알아차리고,
본질, 이른바 본래면목 자리를 찾아가서 해탈을 얻어서 다시는 윤회하지 말자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