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1
봄 기운이 완연한 따스했던 4월이였다.
나무에서는 가지마다 새싹이 돋았건만
온 나라에 금혼령이 내려져 발목이 묶여버린
처녀들의 마음은 괴롭기만 하였다.
"또 금혼령이 내려졌다면서요?
작년 세자저하 가례 간택령때도 우리 딸은 시집을 못 보냈는데..."
"이번엔 상감마마의 간택령이래잖아요, 글쎄"
"상감마마요..?
상감마마는 13년 전에 중전마마께서 승하하신 후로부터는
배필을 맞지 않으셔서 가례를 치르시지 않을 줄 알았는데
이게 왠 일이래요?"
"어쨌건, 이번에도 어차피 고위관료의 여식이 간택이 될 터이니
그 쪽 집만 안 됬죠, 뭐
상감마마께서는 벌써 칠순이 넘으셨으니 말이에요.
어린 딸을 과부로 남긴다는 게 얼마나 비참하겠어요, 안 그래요?"
"소월아. 저것이 무슨 말이더냐?"
"아씨께서는 오랫만에 출타하셔서 못 들으셨을 겁니다.
며칠 전 간택령을 알리는 방이 붙었다더군요.."
"그럼 저 아낙네들의 말처럼.. 칠순이 넘으신 상감마마의 배필을 간택한다는 것이 사실이냐..?"
"예. 수혜 아씨"
"후우.."
열 여섯을 겨우 넘긴 듯한 수혜라는 이름을 가진 비단 옷 차림의 이 여인은 한숨만 쉴 뿐이였다.
그리고 몸종과 함께 몇 발자국 걷더니 멈춰선 수혜.
'대체 무슨 생각으로 칠순이 넘은 나이에 새 장가를 드시겠다는 건지..'
"아씨, 왜 그러시옵니까요?"
대부분의 백성의 생각또한 수혜와 같았다.
간택령이 내려지면 온 나라의 처녀들은
금혼령때문에 간택령이 풀리기 전까지는 혼인을 할 수 없었다.
비록 이번에도 아마 고위관료의 여식이 간택이 될 터이지만 그 때마다 골치인 것은 서민들이였다.
이름은 있어도 가난한 선비가문도 양반은 양반이기에 여식을 간택에 내보내야할 때가 있었다.
그러나 간택에 드는 옷이라던지 패물의 비용은 어려운 형편에 짐만 될 뿐이였다.
게다가 양민들도 간택이 끝나기 전까지는 혼례를 올릴 수 없으니 답답하기만 했다.
"저어.. 수혜 아씨"
"왜 그러느냐?"
"그럼 아씨께서는 이번에도 간택때문에 입궁하시는 겁니까?"
"그렇겠지."
"아씨께선 작년 빈궁 재간택때 심한 여름감기때문에 고열로 고생하셔서
초간택때만 입궁하셨었잖아요.
허나, 소인은 궁을 더 구경하고 싶었어요.
그냥 궐문만 봐도 왠지 기분이 좋아졌거든요.
궁에 한번만 더 가보았으면.."
"도리에 맞지는 않으나 어쩔 수 없었지 않았느냐.
난 그 때 정신을 잃었으니..
그런데.. 그렇게도 입궁하는 게 좋으냐?"
"예!"
"너는 속이 좋아서 좋겠구나.
누구는 속이 타들어가는데 말이다.
그렇게 궁이 좋으면 궁녀나 되지 그랬느냐"
"에이.. 아씨도 참.."
몸종 소월에게 농담을 건네며 미소를 지으며
집 안으로 들어선 수혜에게 부엌어멈이 달려왔다.
"아이구 아씨"
"무슨 일인가."
"마님께서 찾으십니다요.
부엌에 계십니다."
"알았다."
음식을 하다 왔는지 한 손엔 주걱을 들고 대문에 들어선 수혜를 부르는 부엌어멈.
수혜와는 태어났을 때부터 함께 했기 때문에
집에 있는 노비 하나하나 수혜에게는 가족과는 다름 없었다.
"소월아, 넌 먼저 가서 쉬고 있거라
오늘 고단했을터이니.."
"장터 조금 돌아다녔다고 힘 빠질 소인이 아닙니다요.
괜찮습니다요."
소월이 장난스럽게 말하자 수혜는 입을 열었다.
"그래도 누가 너에게 다른 일을 시키기 전에 들어가 쉬란 말이다.
나중에 힘들다고 투정부리지 말고."
"예. 알았습니다요."
소월이 자신의 방이 있는 행랑쪽으로 사라지자
수혜도 부엌쪽으로 향했다.
- 02
부엌에선 점심이 준비되고 있는지 맛있는 냄새와 음식 익는 소리가 났고
한쪽구석엔 부엌어멈과 다른 여종들이 함께 나물을 다듬고 있었다.
그리고 수혜의 어머니인 유씨 부인은 부엌에서 음식의 맛을 보고 있었다.
"어머니, 부르셨습니까?"
다른 양반집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
안채의 제일 큰 어른이 직접 음식을 하고 있었다.
남들이 보면 반상의 법도도 모르냐며 수군댔을테지만 유씨부인은 좀 달랐다.
친정에서부터 진정한 안주인은
안방에서 조용히 수나 놓는 것이 아니란 것을 수혜의 외조부에게로부터 배워왔던 것이였다.
그리고 유씨부인의 인자한 성격을 그대로 보고 자란
수혜또한 어머니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종들에게 하대를 하지만 자기 또래인 소월에게는 동무처럼 대했고
나머지 종들에게는 어머니처럼 자애로웠다.
"그래..
출타는 잘하고 왔느냐.
너도 보았듯이 또 간택령이 내려졌다고 하더구나."
"예.."
역시나 간택에 관한 이야기였다.
수혜는 부엌에 들어서기 전부터 아버지인 정 대감이나 유씨 부인이
그 이야기를 할 것이라고는 짐작을 했었다.
수혜의 아버지는 좌의정이라는 높은 벼슬을 하고 있었고
자신도 간택에 당연히 나가야 할 의무가 있는 양반이였기 때문이였다.
"다 끓은 것 같구나.
난 잠시 수혜와 사랑채에 갔다올터이니 식사 준비를 마저 하거라."
"예, 마님"
유씨 부인은 걷어올린 소매를 내리고는
앞장서서 정 대감이 있는 사랑채로 발길을 옮겼다.
그리고 수혜가 그 뒤를 따랐다.
"대감, 소첩이옵니다."
"들게."
"수혜가 돌아왔습니다."
"잘 다녀왔느냐?
헌데.. 왜 얼굴이 그 모양이냐
아침만 해도 소월이와 장터에 놀러 간다며 좋아하더니.."
"대감, 그만 하시지요
수혜가 장터에서 방을 보았나봅니다."
"허면, 간택때문에 기분이 안 좋아진게냐?"
"아버님... 소녀는 그저 평범한 양반가문에 시집을 가고 싶사옵니다.
헌데 간택이라니요..."
"그래, 허나 그렇다고 하여 네가 간택이 된다는 것은 아니질 않느냐?
그도 그렇지만.. 이번엔 어쩔 수 없다.
저번에 좌의정의 여식인 네가 재간택에 빠졌다고 내 입장이 좀 난처해졌었다."
"..........."
수혜의 마음은 점점 타들어갔다.
냉수라도 들이키고 싶었다.
세상에 어느 여인이 나이 칠십이 넘은 사람과 혼인을 치루고 싶겠는가.
"나도 마음은 편하지 않구나..
이번엔 세자저하도 아닌.. 전하의 혼사니 말이다.
네가 간택이 되어 중전이 되면 좋겠지만..
난 아비로서 마음이 편치만은 않구나..
허나 네가 간택에 참여한다고 하여도 네가 간택이 된다는 건 아니지 않느냐.
법도는 지엄한 법... 간택에 나가거라."
"아버님.. 허나 소녀는.."
"미안하다. 너에게 더 할 말이 없다.
가서 간택 준비를 하거라."
".........."
'예'라고 대답을 해야했지만 수혜는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입을 열면 아버지의 말을 거스르는 말을 할까봐..
수혜가 절을 하고 방을 나가자
유씨부인은 나즈막히 말했다.
"대감, 우리는 그저 수혜가 간택이 되지 않기만을
빌고 또 비는 일 밖에 할 수 없겠지요.."
"지금이라도 수혜를 어디로 도망이라도 보내고 싶은 마음이네..
차라리 저번처럼 간택날 몸이라도 아파 몸져누워서 간택을 피해갔으면 좋으련만.."
유씨 부인은 끝내 눈물을 보였다.
정 대감 또한 괴로웠다.
수혜는 자신의 방안에 들어와 연상 앞에 앉았다.
수혜는 제발 이것이 꿈이기를 간절히 바랬다.
그저 병이 다 나아 오랜만에 바람이나 쐬러 나갔다가
뭔가에 홀린 거라고 생각해보려해도
자신은 결국 간택에 가야한다는 결론이 나와 수혜를 힘들게 하고 있었다.
수혜는 작년 간택령때 읽었던 책을 꺼내 연상에 펼쳐들었다.
그리고 백통 괴목장을 열었다.
안에는 간택령이 내려졌을 때 입으려고 지어둔 옷이 있었다.
비록 작년의 것이였지만 처음 초간택날 하루 입은 옷이라 새 옷이였다.
옷을 바라보는 수혜의 입에선 한숨섞인 한탄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내가 간택이 된다면......
아.. 이렇게 허무하게 궁에 들어가고 싶지는 않아.
게다가 할아버지 뻘인 전하의 비(妃)가 되기는 더더욱 싫고..'
정 대감과 유씨 부인 그리고 수혜는 그 날이 오지 않기를 바라고 바랬지만
날은 금새 흘러가 초간택, 재간택 모두 흘러가고 마지막 삼간택일이였다.
"어머니.. 아버님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소월이는 아씨 잘 모시고"
"예, 마님"
대문앞에서 가마에 오르는 수혜를 배웅해 주는 정대감과 유씨 부인은 마음이 착잡했다.
수혜와 가족과도 같았던 종들 하나하나까지도 모두 수혜를 안타까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가마가 출발하고 궁에 도착하는 그 순간까지도 수혜는 굳은 얼굴이였다.
"아씨, 당도했습니다요"
가마꾼이 가마를 내리자 수혜는 그동안 간택을 했던 곳으로 걸어갔다.
"소월아, 저번처럼 넌 여기서 기다리고 있거라."
초간택날 밟았던 문 앞 솥뚜껑을 지나쳐
발이 쳐져 있는 곳으로 들어가 방석 위에 앉았다.
"함 자를 말해주시옵소서."
"좌의정 가의 정 가 수혜이옵니다."
수혜에게 말을 건 상궁은 붓을 들고 뭔가를 적더니 고개를 숙이고는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내명부의 제일 웃 어른인 대비나 중전이 없었으므로 간택을 직접 하게 된
왕이 올 때까지 간택장안은 고요했다.
몇몇의 나인들이 호기심 어린눈으로 삼간택에 남은 세 처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옆 사람이 누구인지도, 누가 마지막 삼간택까지 남았는지도 수혜에겐 중요치 않았다.
다만, 피하고 싶었다. 마지막 삼간택만은 보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해서든지 몇 년안에 청상과부가 되버릴 국모는 되고 싶지 않았다.
- 03
"주상전하 납시오."
어디선가 나타난 내시의 외침에 모두 허리를 굽혔고
수혜도 다른 처자들과 함께 고개를 숙였다.
"먼저 후보를 호명하겠습니다.
예조판서 댁의 장 가(家) 연,
좌의정 댁의 정 가(家) 수혜
이조판서 댁의 연 가(家) ……."
그 무렵, 소월은 밖에서 자신의 주인과는 달리 주인이 간택이 되도록 간절히 빌고 있었다.
"비나이다 비나이다..우리 아씨께서 중전이 되시면 저는 앞으로 궁에 자주 올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부디 우리 아씨께오서 중전마마가 되게 해주세요. 비나이다 비나.."
몇 식경 째 같은 말을 중얼거리며 손까지 싹싹빌던 소월이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말을 멈췄다.
"그렇게 빌 필요 없다.
이미..... 간택이 되었으니"
"아씨, 벌써 끝나셨사옵니까?
간택이 되었다니요, 아씨가 되신 것이옵니까?"
"그래......"
"와아!"
"너무 기뻐하지는 말거라
사가에선 아무리 네가 내 몸종이였다고 해도
궁에선 널 들여보내 줄 이가 없을 것이다."
수혜의 말에 울상이 된 표정을 지은 소월은 살짝 토라진 듯 말했다.
"어서 가시지요."
집으로 향하는 가마가 출발하자 수혜의 눈에선 눈물이 주르륵 흘러 내렸다.
처음부터 이건 불리했다.
수혜는 아버지의 관직이 조금이라도 낮았더라면..
자신의 집이 조금이라도 가난했다면.. 간택이 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자
자신의 아버지가 너무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사실은 수혜의 생각과는 달랐다.
마지막 남은 삼간택에 뽑힌 처자들은 삼간택답게 아름답고 기품있는 처자들이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수혜는 더더욱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똑같은 연둣빛 당의였지만 수혜는 나뭇가지에 돋아난 새싹처럼 연둣빛이 잘 어울렸다.
가마가 집 앞에 당도하자 가마의 문을 여는 가마꾼들과 소월이 몰래
수혜는 눈물을 닦고선 대문 앞에 마중을 나와 있는
정 대감과 유씨 부인에게 인사를 고하곤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옷을 갈아입고는 쓰러지듯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자신은 이제 국모가 된다.
그렇지만..수혜는 기쁘기는 커녕 죽고 싶을 뿐이었다.
수혜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잠시 후 눈을 뜨고 허공에 혼잣말을 했다.
"나는 평범한 것이 좋았거늘...."
수혜가 말을 끝내자 조용히 방문이 열렸다.
"수혜야.."
"어머니.."
수혜는 이불속에서 나와 몸을 반쯤 일으켰다.
"간택이 되었다면 넌 이제 국모이니
난 이제 너의 이름을 부를 수 없겠구나."
"어머니..."
"미안하다. 하지만 원래 간택이란 게 그렇지 않니.
전하께서 중전자리가 오래 비워져 있어서
중전마마를 두시려고 간택령을 내리셨을 게야
전하께서는 후궁도 아니 계시질 않느냐."
"허나.. 슬프옵니다.
받아들이고 싶지 않습니다.
왜 하필 소녀이옵니까, 왜 하필.."
"어차피 누군가는 간택되는 것이지 않으냐?
단지 그 중 너일 뿐이다."
유씨 부인이 수혜를 달래려 부드럽게 말했지만
수혜는 바닥만 바라보았다.
"알고 있사옵니다.
어차피.. 어차피... 저는 간택이 되었고
이건 전하가 아니오면 누구도 바꿀 수 없을 것이옵니다.
너무도 잘 아옵니다.
그래서.. 더 싫습니다."
유씨 부인은 수혜를 안았다.
어린 딸을 고생시키는 것 같아 정말 괴로웠다.
사실 어젯 밤 유씨 부인도 정 대감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어제 새벽녘엔 유씨 부인이 정화수를 떠 놓고 빌기까지 했다.
그런데도 결국, 수혜는 간택이 되어버렸다.
"힘들 것이다.
외로울 것이다.
허나, 이 어미는 너에게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구나."
"........어머니.."
"내일 대전 상궁이 들른다는구나.
아마 가례전에 별궁으로 입궁하라는 겔게야.
이번 가례는 약식으로 한다던데..."
".........."
"혼수는 심려치 말거라.
너는 간택이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힘들터이니."
"예..."
유씨 부인은 수혜를 다독이고는 방을 나가버렸다.
그리고 잠시 후,
"아씨, 소인 소월이옵니다."
"들거라."
소월이 들어오자 수혜도 소월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냐."
"아씨, 어차피 이제 간택이 되셨으니 소인과 놀러 나가시지요.
이제 입궁하시면 궁 밖엔 못 나오시지 않습니까."
"...그래 알았다. 채비를 하거라"
"예!"
소월은 자신이 놀러가고 싶었던 건 지 수혜의 허락이 떨어지자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수혜가 대문을 나서자 소월은 장터로 수혜를 이끌었다.
그리고 수혜가 영문도 모르고 소월을 따라가자 소월은 어느 패물을 파는 곳으로 들어갔다.
"아씨, 이제 소인과도 못 만나는 것 아니옵니까.
항상 동무처럼, 언니처럼 대해 주셔서 정말 감사했사옵니다.
이건, 저하고 어멈들이 돈을 모았습니다.
저희의 작은 성의이니 받아주셔요."
소월이 내미는 것은 작은 비녀였다.
비록 그것이 값비싼 보석은 아니였지만 수혜에게는 아주 값진 선물이였다.
"너.. 이거..
.... 받을 수 없다.
물론, 나는 기쁘지만..
허나, 그 돈은.. 그 돈은.. 열심히 피땀흘려 일한 것이 아니겠느냐.
어디서 이런 돈을..."
"아유, 개의치 마십시오.
자. 아씨 그럼 이제 어디로 놀러갈까요?"
소월은 수혜의 말을 잘라먹고는 수혜가 더 이상 뭐라 할 수 없도록 수혜를 잡아끌었다.
- 04
다음 날, 대전 상궁이 왔다간 후,
수혜의 집안은 한바탕 난리가 났다.
수혜의 혼수 준비하랴, 간택되었다는 소식에 찾아온 손님 대접하랴...
그러다 보니 시간은 금새 입궁해야하는 날이 되었고
수혜는 가례 전에 있는 훈육을 받으러 궁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수혜는 모든 것에 지쳤다.
매일 하는 예의범도같은 것들은 견딜만 했지만
자신은 이제 곧 청상이 될 것 같은 생각에 기분은 우울했다.
그 흔한 남편에게 받는 사랑조차 받아보지 못하고
죄 지은 사람마냥 궐 뒷편에서 조용히 지낸다는 것이 수혜는 싫었다.
상궁과 나인들도 수혜를 보며 불쌍하다는 듯 수군댔다.
그리고, 드디어 가례가 있는 날 아침이 되었다.
"일어나시지요, 이제는 일어나셔야 하옵니다."
"......."
수혜는 이른 아침부터 자신을 깨워대는 상궁을 보고
날짜를 헤아려 보니 오늘이 가례날이였다.
"아... 오늘이.."
"예, 중전마마.."
그리고 못 보던 상궁 몇이 방안으로 들어왔다.
"중전마마, 저희는 앞으로 중전마마를 뫼시게 될 상궁이옵니다.
소인은 김상궁이옵니다."
"소인은 최상궁이라 하옵니다."
곧, 상궁 하나는 수혜에게 대례복을 입히고
상궁 하나는 머리를 장식하고 나머지는 수혜의 얼굴에 분을 칠했다.
"다 된 것 같사옵니다.
사인교(가마의 일종)를 준비하도록 하겠사옵니다."
그리고 잠시 후 밖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마마, 사인교가 당도한 듯 싶사옵니다.
오르시지요."
상궁 둘의 도움으로 수혜가 가마에 올라타자
사인교는 출발했고, 수혜는 조심스레 옆에 난 작은 문을 열었다.
시원한 바람이 가마 안으로 들어오자
수혜는 몸이 차갑게 굳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경복궁의 남문인 광화문으로 들어가자
공기가 달라진 듯한 느낌이 들었고,
이윽고 사인교는 멈추어 섰다.
가마에서 내린 수혜는 살짝 놀라고 말았다.
거기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다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유씨 부인의 말대로 약식으로 검소하게 가례는 진행되었고
연회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수혜는 두려워졌다.
대충 행사가 마무리되자 이제 신하들 앞엔 맛있는 음식이 차려졌다.
그리고 그제서야 수혜는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자신의 옆엔 지난번에 본 왕이 있었고,
그리고 왕과 자신처럼 대례복을 입은 한 쌍의 남녀가 눈에 띄었다.
"아...."
수혜는 그들이 세자내외라는 사실을 알아챘다.
"아바마마, 경하드리옵니다."
"어마마마, 경하드리옵니다."
세자와 빈궁이 인사를 올리려는 듯 말을 꺼내자
수혜는 그들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었고,
놀랍게도 왕의 나이가 나이인지라 꽤 나이가 있을 줄 알았던 세자는
기껏해야 자신과 서너살밖에 차이나 보이지 않았다.
"그래, 고마..ㅂ..크..허억..."
왕이 대답하는 그 순간이였다.
그곳에 모인 모든 관리와 내시, 궁녀들은 기겁을 하고 말았다.
"아..아바마마!"
"전하!"
"저..전하!"
"어서 어의를 부르게! 어서!"
멀쩡하던 왕이 갑자기 정신을 잃어버린 것이였다.
연회는 술렁이며 소란해졌고
쓰러진 왕을 대전으로 옮김으로써 행복해야 할 연회는 흐지부지 끝나버렸다.
"아바마마께오서 갑자기 왜 이러시는겐가?"
세자가 걱정스레 묻자, 어의는 심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워낙 연세가 있으시다보니..
오늘 아침만 해도 아무런 증상이 없으셨사오나...
원래 고령이 되면 자주 일어나는 현상이옵니다."
"그럼 막을 방법은 없는겐가?"
"워낙... 노병이시라.."
수혜는 갑자기 닥친 이 상황에서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대례복 차림으로 시름시름 죽어가는 왕 옆에 앉아있자니
자신의 신세가 너무 한탄스러웠다.
청상이 될 거란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빨리 될 줄은 생각치도 못한 것이였다.
"중전마마."
".......?"
"처소로 돌아가시지요, 밤이 깊었습니다."
"알았네."
최 상궁의 말에 수혜는 몸을 일으켰다.
어떻게 보면 다행이였고, 어떻게 보면 불행이였다.
지친 몸을 이끌고 처음으로 가 보는 자신의 처소 교태전으로 발길을 옮겼다.
"옷을 갈아입으시지요."
최 상궁의 말을 끝내고 미리 준비해 놓은 듯 당의를 꺼내어
수혜에게 내밀었고 수혜의 머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마마, 너무 심려치 마시옵소서
잘 될 것이옵니다."
"내게.. 잘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전하께오서.. 더 사신다는 것인가?
아니면 전하께오서......승하하신다는 겐가..."
"마마......"
"내 신세가 너무 불쌍하지 않는가?
내 지아비되는 사람은 나보다 예순 살은 더 많고,
내 아들과 며느리는...."
"중전마마.
마마의 마음을 소인이 어찌 알겠사옵니까.
허나...."
"이대로 전하께오서 승하하시면..
난 그대로 과부가 되겠지.
그리고 전하께오서 사신다면..
난....."
".............."
"차라리 그냥 이대로 전하께서 승하하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네.
물론, 그건 아주 독하고 나쁜 생각이지만...
전하께오서 승하하시던 사시던.. 난 결국은 행복할 수 없어.
어떻게 되더라도..."
수혜가 말을 마치자 무섭게 수혜의 눈에선 또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리고 말았다.
그리고 곁에 있던 최 상궁도 눈시울이 붉어졌다.
- 05
뜬 눈으로 밤을 새다시피한 수혜에게도 아침은 밝아왔다.
올라온 수라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쾡한 눈을 하고 있다가
뭔가 생각난 듯 수혜는 최 상궁을 불렀다.
"최 상궁 들게"
"예, 중전마마.."
"혹여, 세자..저하의 보령을 아는가?"
"저하라니요, 마마. 말씀 낮추시옵소서."
"불편해서 그렇네... 아는가?"
"열 여덟로 알고 있사옵니다."
수혜는 예상은 하고 있었으나
그래도 뜻밖이라는 듯 최 상궁을 바라보았다.
"13년 전에 승하하신 서양왕후 소생이시옵고,
전하의 유일한 핏줄이시옵니다. 하온데... 그것은 어찌.."
"그냥... 궁금했네.
어제 보기에 젊어보이기에.."
그리고 그 때,
밖에서 김 상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중전마마,
세자저하와 빈궁마마 드셨사옵니다."
"들라 이르시게."
방문이 열리자 어제 보았던 세자와 빈궁이 들어왔다.
어제 자세히 보지 못한 빈궁은 꽤 아름다웠고
역시 기품있는 자세로 절을 한 후 자리에 앉았다.
"어마마마, 소자 내외.... 문안드리옵니다."
역시 세자는 젊은 수혜에게 문안을 한다는 것이
어색한 지 말 끝을 흐렸다.
그건 수혜도 마찬가지였다.
그 곳에 앉아있는 세 사람 모두 불편하기만 했다.
"뭐라고.. 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수혜의 떨리는 목소리에 세자는 고개를 올려 수혜를 바라보았고,
빈궁은 그저 고개를 숙인 채 방바닥만을 보고 있었다.
"........"
"저는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하여, 소인의 아들 대신에....소인의 오라비가 되어주십시오."
"....어찌 그런 말씀을.."
"..............."
"................"
교태전 안은 침묵의 바다가 흐르고 있었다.
그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어마마마, 그럼 신첩 내외 이만 물러가겠나이다."
보다못한 빈궁이 세자의 등을 떠 밀듯 고하였다.
그리고 빈궁은 세자가 방에서 나갈 때까지 앉은 그 자리를 지키다 조용히 말했다.
"따로 드릴 말씀이 있사옵니다.
주위를 물러 주시지요."
빈궁의 말에 수혜는 최 상궁에게 눈짓을 했다.
그리고 궁녀들이 모두 물러가자 빈궁은 문까지 닫고는 자리에 앉았다.
"어차피 나이도 비슷한데 우리끼리 있을 때는 말을 놓기로 하지요."
갑자기 변한 빈궁의 말투에 수혜는 당황했다.
그들 사이엔 어색한 기류가 흘렀고 수혜는 잠자코 빈궁의 말을 듣는 수 밖에 없었다.
"난 우의정 김 수군의 여식이였는데 중전은 알고 계셨습니까?
지난 간택 때 중전과 난 아주 유력한 경쟁 후보였는데,
재간택때 부터 안 나오셨다지요?
아하~ 처음부터 빈궁인 이 자리를 밟지 않고
바로 중전이 되려 기다리신 것이옵니까?"
빈궁의 비꼬는 방자한 말투에 수혜는 커진 눈으로 조용히 빈궁을 응시했다.
"훗.
어쨌든 난 중전이 그렇게 있는 꼴은 도저히 못 봐주겠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중전을 내 윗전으로 두고 싶지는 않습니다.
내 말 알아들으셨습니까?"
"............"
"그런데 중전,
중전이 아주 후회할 만한 짓을 했습니다.
세자저하는 놓치기엔 아주 아까운 사내이니 말입니다.
물론, 아직은 여색에 관심이 없는 저하시지만, 조만간 내 사람이 될 겝니다.
속이 타시지요? 후후후"
"대체 왜... 나에게.."
"지금 중전께서 이 사람이 왜 중전께 이러느냐고 물으셨습니까?
그럼 그냥 이렇게 알아두시지요.
난 처음부터 중전이 맘에 안 들었습니다.
그럼, 앞으로 내 앞에서 잘 처신하시지요.
중전마마, 소인 이만 물러가옵니다. 후훗"
교태전에서 처음 맞는 아침부터 빈궁이 가시를 들이대니
그렇지 않아도 심기가 불편하였던 수혜는 더욱 힘들었다.
수혜는 아직 한번도 남과 원한을 맺은 일이 없는 터라
갑작스레 자신에게 칼을 들이대는 빈궁의 태도가 당황스러웠고,
앞으로 어떻게 대처해야하는지도 몰랐다.
그리고 미리 주위를 물리라 한 빈궁이기에 들은 이가 아무도 없어
도움을 청할 수도 없는 상황이였다.
한편, 댓돌에 올려진 신을 신고 있는 빈궁에게 최 상궁과 김 상궁이 다가왔다.
"말씀은 재미있게 하셨는지요."
"예. 아주 재밌는 담소를 나누었사옵니다.
주 상궁, 가세"
아까 전의 수혜를 대할 때의 방자함은 어디로 갔는지
공손한 목소리로 예의를 차리는 빈궁의 이중적인 모습은 누가 봐도
백년 묵은 불여우였다.
'훗. 중전, 난 중전과 이 사람을 비교해대는 사람들을 어려서부터 쭉 봐왔습니다.
중전같은 사람이 나약한 사람이 이 사람과 비교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후후후훗, 중전, 미안하네만 그런 늙은 노인네와 혼인을 한 바보같은 중전보다는
이 사람이 한 수 위입니다.'
빈궁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속으로는 수혜를 마음껏 비웃고 있었다.
- 06
빈궁이 나가자 곧, 최상궁이 들어왔다.
"중전마마, 왜 그러시옵니까?"
수혜의 공허한 눈빛을 본 최상궁이 걱정스레 말했다.
"무얼 말인가? 어제 가례로.. 좀 힘들어서 그러네."
"그러셨사옵니까..?
피곤하시더라도 강녕전엔 들리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강녕전...? 전하..께 말인가."
"예.. 마마
그래도 명색이.. 지아비와 지어미 사이 아니옵니까."
최 상궁이 수혜 앞에서 말을 꺼내기 민망한지 말을 흐렸다.
"....알았네.
헌데 전하께오선.. 아직도 정신이 돌아오지 않으신겐가?"
"송구하옵니다."
"대전으로 가겠네. 채비를 하게.."
"예.. 마마"
"그리고... 고맙네. 최 상궁.."
"무엇을..?"
"내겐 앞으로 궁은 너무 외로운 곳일게야..
하여, 나는 최 상궁을 어머니처럼 생각할 것이야.
이 감옥과 같은 궁에서 믿을 만한 사람은 최 상궁 뿐이네.."
수혜는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났고
최 상궁은 그녀가 나간 빈 방에 잠시 서서
이 말을 작게 하고는 상궁 몇과 나인들을 거느리고 수혜를 따라 나섰다.
"송구..하옵니다.. 중전마마..
그리고... 감사하옵니다."
의관 몇이 방 밖 대청까지 일렬로 앉아 고개를 숙인 것을 본 수혜는
자신도 모르게 당의 속에 넣은 손으로 치마자락을 꼭 쥐었다.
그리고 방 안으로 들어가자 핏기없이 누워있는 왕이 보였다.
"차도는 있는겐가."
"크게 달라진 것은 없사옵니다.
아마.. 오늘 밤이 고비일 듯 싶사옵니다."
"대체.. 병이 무엇인가.
정말 단순한 노병인겐가"
"예.. 마마..
허나 그 동안 몸이 허약하시어 잔병치레가 많으셨는지라.."
수혜는 어의의 말을 듣고 조용히 시선을 어의에서 왕으로 옮겼다.
곧 숨이 끊어질 듯 위태위태하기만 한 숨소리에 수혜는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수혜는 자신이 어렸을 적 돌아가신 외조부가 떠올랐다.
자신이 갓난아이였을 때부터 남 달리 자신을 귀여워 해주시던
외조부의 죽음을 바로 눈 앞에서 봤을 때는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듯 싶었다.
지금이 그 때인 듯 싶었다.
수혜의 외조부가 돌아가시던 그 때처럼 방안에는 같은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수혜는 어렸을 적 느꼈던 그 기운을 감지하고는
차마 왕의 죽음을 눈 앞에서 볼 수 없어 일어났다.
그러나.. 수혜가 돌아선 순간... 옆에 있던 어의의 통곡에 수혜는 차마 뒤를 바라볼 수 없었다.
어의의 통곡이 들리자 대청에 있던 의관들과 궁녀들..
그리고 대전밖까지 온 궁인이 통곡을 했다.
수혜는 어찌해야 할 지 막막했다.
그를 보자 외조부 생각이 났지만.. 지금 그는 자신의 지아비였다.
비록 어제 가례를 올렸으나 자신은 이 나라의 국모였고
단 하루만에 청상 과부가 되어버렸다.
예상했던 일이였지만 그래도 착잡하고 슬펐다.
죽기 하루 전, 자신을 아내로 맞고 먼저 가 버린 늙은 왕이 원망스럽기도 했지만
자신이 이대로 과부가 되어버린 것, 그리고 자신 앞에서 사람 하나가 죽어갔다는 것,
어렸을 적 돌아가신 외조부가 떠오르는 것...
모든 것이 수혜의 머릿속에서 복잡하게 떠다니고 있었고
수혜의 눈에선 여러 감정이 섞인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
"최 상궁.."
"예.. 중전마마.."
수혜는 궁인들과 같이 통곡을 하던 최 상궁에게 힘없이 말했다.
"지금 이 자리를 뜨면 난.. 나쁜 지어미가 되는 건가
아니, 한 나라의 백성이자 어머니로써.. 잘못된 행동인가.
나는 이제 어쩌하면 좋은가......"
"중전마마.."
"중전마마!"
방금 전까지 통곡을 하던 궁인들이 수혜의 가냘픈 목소리를 듣고는 수혜를 부르며 통곡을 했다.
그리고 수혜가 망연자실한 채로 그 자리에 스르륵 주저 앉아 버렸을 때
소식을 듣고 달려온 건지 세자와 빈궁이 들어왔다.
아까 아침의 그 일 때문인지 수혜는 빈궁을 보기 어색했고,
빈궁은 그저 대청에 무릎을 꿇고 통곡을 하는 세자옆에서 훌쩍였다.
"아바마마!
소자를 남겨두고 먼저 가시면 어찌하옵니까!"
온 궁안에는 통곡소리로 가득 찼고
수혜는 외조부가 떠 올라 더 이상은 강녕전안에 있을 수 없었다.
"최 상궁.. 가세나.."
통곡하고 있는 사람들을 지나쳐 고개를 숙이고 걷자니
수혜는 자신이 왠지 이 세상 사람 같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다.
...........
........................
"최 상궁은 잠시 들어오게"
교태전으로 돌아와서 수혜는 최 상궁을 불러내어놓고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마마, 많이 곤하신 듯 하옵니다.
침수를 봐 드릴까요."
"난 참 모진 사람이지 않는가.
지아비라는 사람이 죽었는데도
그렇게 차갑게 돌아서다니..."
"마마.. 그런 것이 아니옵니다."
"전하를 뵐때면 돌아가신 내 외조부님이 생각났네..
그래서... 그래서....."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흘려대는 수혜를 보며
최 상궁은 침묵을 유지한 채 고개를 떨구었다.
"마마.. 송구하옵니다.
소인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옵니다.."
"이제.. 나는 어떡하면 좋으냐.
나는.. 이제.. 어떡하면..."
수혜는 그저 눈물만 흘렸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고작 이렇게 앉아서 눈물을 흘리는 것 하나였다.
- 07
다음 날 아침이 되었지만 수혜의 몸은 녹초였다.
이틀 동안 수혜는 제대로 잠을 청하지 못하였기 때문이였다.
여러가지 복잡한 생각이 머릿 속을 가득 메우고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아직도 밖에서 왕의 죽음을 알리는 통곡소리와
빈소를 차리는 바쁜 사람들 때문일 것이다.
수혜만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였다.
궁녀들은 궁녀들대로 고통스러웠다.
며칠 전엔 아무리 약식이였다고는 하지만 며칠 전은 왕의 혼삿날이였고,
그 다음 날은 왕이 승하하였고, 승하한 왕을 이을 세자의 즉위까지 준비해야했던 것이였다.
"마마, 소인 최 상궁이옵니다.
기침 하셨사옵니까?'
"들어오게.."
최 상궁은 상복차림으로 역시 상복을 입은 김 상궁과 궁녀 넷 정도를 데리고 들어왔다.
"마마, 오늘은 바쁘시옵니다.
전하의 빈소에 절을 올리시고 이제 대비가 되시기에..
마마께오서 옥새를 받아 며칠 후에 있을 즉위식 때까지 보관하셔야 하옵니다."
"알았네.. 허면 상복을.. 입으면 되는건가?"
"예, 마마.."
"최 상궁, 잠깐!"
"예?"
"그럼.. 난 이제 뭔가..?"
"무엇이냐니요.. 이제 대비마마가 되오시는 것이옵니다."
수혜는 최 상궁의 말에 씁쓸한 미소를 짓고는 궁녀들의 도움을 받아 상복으로 갈아입었다.
영조의 가체 금지령 이후로부터는 평상시에는 만드는 과정이 까다롭고
값이 비싼 가체를 사용하는 것이 아닌 첩지에 비녀를 꽂는 머리를 해야했지만
궁중의 특별한 행사나 대례에서는 가체를 올렸다.
최 상궁은 수혜에게 화장을 옇게 한 후 왕비를 뜻하는 봉황 첩지 대신
나무로 된 가벼운 첩지를 달았고 상복과 어울리는 평소에 하던 금 비녀 대신 은 비녀를 꽂으려 했다.
"최 상궁, 그 비녀대신 이 비녀를 꽂아 주게.."
수혜가 최 상궁에게 내민 것은 며칠 전 장터에서 소월이 내민 아무 장식이 없는 은비녀였다.
상궁이 하는 것처럼 소박하고 초라해보였으나 왠지 모를 기품이 서려있어
최 상궁은 명을 거역하지 않았다.
"예, 마마"
원래 준비된 비녀보다는 작았지만 비녀가 머리에 꽂히자
사가로 돌아간 기분이 들어 수혜는 잠시동안 기분이 좋아졌다.
"전하의 빈소는 어디인가?"
"제가 모시겠사옵니다.
밖에 사인교가 대기중이옵니다. 나오시지요."
하얀 상복차림으로 교태전 밖을 나오니
온 세상이 하얀 세상이였다.
이제 여름이 되어 상복은 모시로 된 옷감이였는데
이걸 다 짓느라 고생했을 침방 나인들이 은근히 걱정이 되는 수혜였다.
사실, 그랬다.
자신이 중전이 되어놓고도 어제 가례 도중 그렇게 왕이 쓰러지는 바람에
자신은 제대로 내명부의 윗전 노릇을 해 보지도 못했다.
내명부에게 가벼운 인사를 받는 것 조차....
수혜는 상중이였기에 왕과 중전, 대비, 세자 내외만이 탈 수 있는
화려한 연 대신 가례를 치룰 때 탔던 사인교를 탔다.
오로지 검은 색과 하얀 색으로 된 사인교라
폐비들이 타는 보교같아서 기분이 약간은 꺼림칙했지만
그래도 올라타니 여느 사인교와 다를 게 없었다.
가마가 내려지자 수혜는 최 상궁이 안내하는 대로 한 전각안으로 들어섰고
안은 짙은 향 냄새로 진동을 하고 있었다.
빈소가 차려져있는 곳으로 들어가니 향 냄새와 연기는 더 심해졌고,
수혜는 이 곳이 이승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수혜는 말 없이 절을 두 번 올렸고,
절을 다 올린 후 그 자리에 앉아 고개를 숙였다.
'부부의 연을 맺은 것은 짧으나..
이렇게 먼저 가시면 혼자 남은 신첩은 어찌하옵니까?
신첩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약한 존재이온데
이렇게 남겨두시면 어찌하옵니까?
차라리.. 처음부터 신첩을 간택하지 마시는 것이였사옵니다.
신첩같이 나약하지 않은 강인한 사람을 간택하시는 것이였사옵니다.'
속으로 얼마를 부르짖었을까.
수혜는 조용히 일어섰고, 처음과 같이 아무 말도 안한 채 절을 올리고는
빈소를 빠져 나와 사인교에 올랐다.
"마마, 교태전에 당도하였사옵니다."
최 상궁의 말과 함께 사인교는 내려졌다.
여름인데도 흰 눈이 내린 것 같이 하얀 상복을 입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씁쓸한 미소를 짓고는 수혜는 교태전으로 들어갔다.
엿새 후...
궁인들은 하얀 상복이 아닌 원래의 옷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수혜는 궁녀들에게 가례 날처럼 꾸며지고 있었다.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것 같네"
"마마.... 허면.. 그리 생각하시옵소서..
마마는.. 마마는.. 며칠 새 안 좋은 악몽을 꾸시고 계신 것이옵니다..."
"그래.. 악몽... 악몽.....
이건 다... 나쁜 꿈일 뿐이겠지..?"
최 상궁의 말에 수혜는 자신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마마, 다 되었사옵니다."
김 상궁의 말이 끝나고 최 상궁은 수혜의 뒤에서 교태전 대청을 걸으며 말했다.
"마마.. 아무리 전하의 삼년상이 끝나지 않았다고는 하오나,
오늘은 저하께오서 새 보위에 오르시는 날이오니
오늘 하루, 지금 잠시만 상복 대신 대례복을 입는 것이옵니다.
물론 저희도 마마도 연회가 끝이 나면 다시 상복을 입어야 할테지만 말이옵니다.
그리고 옥새도 이 안에 잘 있사옵니다."
최 상궁은 청상이 된 수혜의 심정을 고려해 최대한 조심스럽게 말했다.
- 08
"..............."
최 상궁의 말에도 수혜가 아무 반응이 없자
최 상궁은 괜히 말을 꺼냈다고 생각했다.
아까의 사인교와는 달리 화려하게 장식된 연에 오르니
상중이 아닌 듯 싶을 정도로 그 행렬은 웅장했다.
수혜는 점점 갈수록 주눅드는 기분이 들었다.
그도 그럴것이 약식으로 거행된 가례와는 달리 정식으로 진행되는 즉위식이라
준비된 규모가 어제보다 훨씬 컸기 때문이였다.
수혜가 도착했을 때는 모든 것이 이미 준비를 끝내고 수혜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비마마 드셨사옵니다."
자신이 대비가 되었다는 사실에 수혜는
씁쓸한 미소를 짓고는 앞쪽으로 걸어가다 앞 자리에서 자신의 아버지를 보았다.
허나 지금은 인사를 나눌 수 없기에 수혜는 아버지와 눈을 한번 마주친 후 지나쳐야했다.
수혜가 자리에 앉자 본격적으로 즉위식이 거행되었고
수혜는 눈 앞의 상황이 먼 나라 이야기로만 느껴졌다.
저 멀리서 세자와 빈궁이 걸어오자 수혜는 최 상궁이 이끄는 대로
그들 쪽으로 내려와 맞이했다.
그리고 빈궁은 아무도 모르게 정면에 있는
수혜를 향해 살짝 야멸찬 비소를 짓고는 금새 표정을 바꾸어내었다.
세자 내외가 앞으로 다가오자, 수혜도 의자에서 일어나 계단을 내려왔다.
최 상궁이 들고 있던 보따리를 수혜에게 건네자,
수혜는 보따리를 풀어 옥새를 꺼내었다.
그리고 옥새를 민서(民恕, 세자의 휘)에게 넘겨주니 민서는 옥새를 받고
이제 중전이 된 빈궁과 함께 자리로 올라갔다.
"과인은 앞으로 승하하신 선왕께 전혀 부족함없는 성군이 되겠으며,
그대들은 나를 따라 이 나라 조선을 도우라!"
"전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이 나라 조선은 그 동안 외세의 침략에 맞서면서도
지금까지 이 자리를 지켜내왔다.
과인도 그 것을 이어받아 조선을 더욱 부강한 나라를 만들 것이다!"
"주상 전하! 천세! 만세!"
"만세! 만세!"
세자, 아니 이제 왕이 된 민서가 '조선 성군의 서약'을 읊고는
군왕을 뜻하는 검을 허리에 차자 흥겨운 연회가 시작되었다.
춤 추는 무희들을 말 없이 바라보던 수혜는 자리에서 일어나
민서와 중전에게로 다가갔다.
"몸이 좋지 않아
먼저 들어가겠사옵니다."
"존대를 쓰지.ㅁ.."
"대비 마마.
신첩 중전이 되었사온데 축하조차 안 해 주실것이옵니까?
신첩 섭섭하옵니다."
민서는 더 이상 존대를 쓰지 말라고 하고 싶었다.
수혜의 눈에는 아득한 슬픔만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였다.
허나, 중전이 된 빈궁이 먼저 민서의 말을 가로채어 수혜에게 말했다.
그리고 중전의 말에 수혜는 힘없이 말했다.
"경하...드리옵니다."
수혜는 마지못해 경하를 올리고는 뒤돌아 섰다.
"대비마마..
원래는 소인들은 중궁전 소속이오라 중궁전에 가야하오나,
저희는 계속 중전마마를 뫼실 것이옵니다."
"고맙네..
최 상궁, 김 상궁.."
수혜는 김 상궁의 말에 희미한 미소를 짓고는
무작정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나는 이제 어느 처소로 가야하는 건가?"
"마마.......
송구하옵니다."
"송구하옵니다."
김 상궁, 최 상궁 모두 수혜의 절망적인 목소리에 눈물을 글썽였다.
"나는 괜찮네.
다만.. 내 새로운 처소가 궁금했을 뿐일세."
"이 쪽이옵니다. 마마..."
김 상궁과 최 상궁이 안내한 곳을 따라가 보니,
그 곳은 주위에 나무가 빽빽히 들어서 있는
숲 속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 아담한 전각이였다.
"수혜당...
수혜.. 내 이름.... 내 이름..."
수혜는 아름드리 나무로 둘러싸인
외부와 고립된 것 같은 이 곳이 자신의 처지 같았다.
"대비마마...."
"그 뜻은 다르지만.. 내 이름과 같구나.
수혜.. 수혜.."
"예.. 마마.
마마의 전각이옵니다."
"이 전각은 누가 지었느냐?"
"소인은 잘 모르옵고.
오래 전 어느 나무를 좋아하던 한 후궁마마께오서 자신의 처소에
나무를 하나 둘 심다보니 이렇게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인 곳이 되었다고 하옵니다."
"원래 대비는 이런 곳에서 지내는가?"
"그것은 아니옵니다.
원래는 중궁전이나 대전보다는 작지만 그래도 엄연한 전(殿)에서 지내시는 것이오나,
중전마마께오서 친히..이곳으로..."
최 상궁은 말 끝을 흐렸다.
- 09
"중전께오서...."
"마마..."
"아니네 나는 좋네.
중전이 나를 많이 배려해 준것이니 염려말게.
전에 내가 나무가 좋다고 했었네.
아마 그 것때문에...
.....어찌됬든 좋지 않은가?
전각이름도 내 이름이고..
난 여기가 마음에 드네.."
바람이 불었다.
초여름인데도 뼈 속까지 시린 바람..
그 바람은 수혜의 마음 속을 휩쓸고 지나갔다.
수혜의 마음은 시려웠다.
무언가에 의지할 수도, 버텨낼 수도 없는 수혜였기에..
말하고 있는 입은 미소를 짓고 있지만 눈에선 눈물이 흐르는 것일 것이다.
수혜..
수혜의 이름은 순수할 수(粹), 별 반짝일 혜(暳)였다.
하지만 수혜의 처소인 수혜당의 이름은 나무 수(樹) 은혜 혜(惠)로
나무의 은혜라는 수혜와는 전혀 연관이 없는 이름이였지만
수혜는 말이 같기에 그 것 하나만으로도 의지가 되었는지 활짝 큰 미소를 지었다.
여전히 눈에선 눈물을 흘리며....
다음 날, 대전은 보위에 오른 민서를 제외한 그 곳에 모인 모든 관료, 궁인
모두 너나할 것 없이 상복을 차려입은 채 조회가 시작되었다.
"과인은 오늘부터 법도대로 선왕이신 부왕의 빈소 옆에 움막을 꾸려
스무 엿새를 보내야 하오.
허니, 경들도 잘 알듯이 영의정, 우의정, 좌의정은
내가 자리를 비운 스무 엿새동안 날 대신하여 나라를 잘 꾸려가주길 바라오."
그 말을 끝으로 조회는 해산되었고, 대전에 있던 신료들도 하나 둘씩 대전을 나갔다.
남은 것은 원로 대신인 영의정, 우의정, 좌의정 뿐이였다.
그들은 본래 맡은 대로 앞으로 주야로 숙직을 하게 될 승정원으로 향했다.
허나 셋 중 한 사람인 좌의정은 잠깐 뒷간에 다녀온다며 어디론가로 발길을 옮겼다.
한편, 수혜당...
"여긴 나무 향이 참 좋구나.
풀 냄새도 나고..."
"예.. 마마"
수혜가 수혜당에서 지낸 지 이틀..
방도 다섯 개 뿐이고 있는 궁녀도 최 상궁과 김 상궁, 그리고 나인 대여섯뿐이여서 아주 아담한 곳이였다.
그리고 수혜는 아침부터 수혜당을 둘러싼 아름드리 여러 나무들을 보느라
수혜당을 다섯바퀴 정도 돌며 걷고 있었다.
"대..대비마마.."
어디선가 낯익은 듯한 목소리에
수혜가 수혜당 마당으로 통하는 유일한 문인 은덕(恩悳)문을 바라보자
그 곳엔 자신의 아버지인 좌의정이 서 있었다.
"아버님!"
"대비마마.. 송구하옵니다.
소인이 부덕하여 대비마마를 이렇게 고생시키고..."
"아버님, 며칠 새 많이 수척해지셨사옵니다.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김 상궁, 다과 좀 준비해주게."
아버지인 좌의정을 보며 수척해졌다 말하는 수혜는
자신은 어떤지 모르고 있었다.
수혜또한 며칠 새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수라도 제대로 뜨지 않아
몰골이 말이 아니였다.
그리고 하나뿐인 딸을 궐에 보내어 청상으로 만들어 버린
그 아비의 마음또한 어찌 편하리.
정 대감또한 궐 안의 수혜와 같이 며칠 동안 잠을 못 이루고 식사도 제대로 뜨지 못했다.
게다가 유씨 부인은 앓아 눕기까지 했으니..
이 부부은 딸이 안쓰럽기도 하고, 죄 지은 마음이였을 것이다.
"좌정하시지요."
"아닙니다. 마마께오서 어찌.."
"그래도 아버지는 아버지시옵니다.
좌정하시지요."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옵니다.
마마께오서 좌정하시지요."
"법도가 그리 중요하시단 말씀이십니까?
아버님도 참.."
오랫만에 아버지를 만나 기쁜 지 수혜의 얼굴엔 웃음꽃이 피었다.
"소신이 이번에 스무 엿새동안 승정원에서 숙직을 하게되었사옵니다.
그 연유는 마마께오서도 아시겠지요."
"예.. 아옵니다.
아버님, 몸 조심하시지요..
건강 해칠까 심려되옵니다."
"소신은 괜찮사옵니다."
그리고 그때, 다과상이 들어오자,
수혜는 사가에서처럼 차를 잔에 따르고는 정 대감에게 건네었다.
"드시지요, 대궐의 차는 각 지방에서 최상품만을 들여오니
드실만 하실 것이옵니다.
헌데.... 어색하옵니다.
아버님께오서... 소녀에게 이렇게 존대를 쓰시니.."
"소녀라니요.. 이젠 이 나라 조선의....... 대비시옵니다.."
정 대감이 한참을 뜸 들이더니 겨우 꺼낸 말은 대비였다.
수혜는 눈물이 살짝 고였지만 큰 웃음을 지었다.
"그러 던가요?
눈을 떠보니 대비가 되어 있기에.."
"헌데... 왜 마마께오서 이런 조그만 당(堂)에 기거하시는 것이옵니까?
전(殿)으로 가시지 않고요."
"이름이.. 좋지 않사옵니까.
수혜.. 수혜이옵니다. 나무의 은혜라는 뜻을 가진...
무슨 은혜였을까요.
대체 무슨 은혜였기에.. 문도 은덕(恩德)이라 하여 은혜라는 뜻을 지녔고,
전각 이름도 나무의 은혜라 하였을까요..
아버님.. 이 곳은 참으로 좋은 곳이옵니다.
이렇게 싱그러운 잎사귀를 가진 나무들이 팔을 건네고
향긋한 꽃향기가 풍기는 이 곳은.. 제겐 과분할 정도로 좋은 곳이옵니다.
꼭... 방이 넓고 커야 좋은 것이겠사옵니까?
저는 이 곳이 좋습니다. 이곳은 은혜를 갚는 곳이옵니다.
아마.. 이런 곳에서 살게 된 은혜가 아니올런지요.."
"대비마마..."
좌의정은 애달프게 청상이 되버린 여린 딸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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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비마마..."
"어머니는 잘 계시옵니까?
제 안부를 좀 전해주시겠사옵니까?"
"실은.. 마마께오서 가례를 치루던 그 날... 낮부터 방 안에서 꼼짝을 안하더니..
결국 앓아 누웠사옵니다.
허나, 심려 마시옵소서.. 단순한 고뿔이오니 얼른 털고 일어날겝니다."
"송구하옵니다.
제게 힘이 있었더라면...
약 한 첩 정도는..."
"그러지 마옵소서..
저희 내외는 그저 마마께 폐를 끼치고 싶지 않사옵니다.
허니, 심려마시옵고, 수라나 제때 잘 챙기시옵소서."
그 말을 마치고선 좌의정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버님, 벌써 가시려고요..?"
"예, 소신은 이제 큰 일을 맡았지 않았사옵니까?
몸 조심하시옵소서. 마마.."
"예.. 아버님도 몸 조심하시옵소서.."
한편, 민서는 종묘옆에 있는 움막에서 자식의 도리를 하고 있었다.
"전하, 소신 영의정 최 헌이옵니다."
"들라."
"이제 즉위도 하셨으니 대비마마께오선 중(中)에 사신을 보내야하옵니다.
헌데 대비마마께오서는 저렇게 조용하시니.."
"가례가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아 혼란스러울 것이오.
과인이 알아서 할터이니 이만 물러가시오."
"하오나, 전하..
그것은 대비마마의 관할이시옵니다."
"과인이 직접 이야기할 것이니 이만 물러가라 하지않소."
"예...."
영의정이 물러가자 민서도 일어난 채 움막을 나왔다.
그리고 조금은 빠른 걸음으로 대비전으로 향하는 민서였다.
잠시 후, 민서는 원래의 대비전인 자운전(紫雲殿)에 당도하였다.
허나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공허함에 옆에 있던 내관에게 물었다.
"어찌하여 아무도 없는 것인가?"
"전하,
망극하오나.. 중전마마께오서 대비마마의 처소를 바꾸셨다하옵니다."
"그게 사실이더냐? 바꾼 처소는 어디더냐?
왜 진작 말을 하지 않았느냐?"
민서가 내관에게 꼬치꼬치 캐묻자 내관은 당황한 듯 말을 더듬었다.
"그..그것이... 바뀐 처소는 소..소인도 잘 모르옵고.."
"교태전으로 갈 것이다."
민서는 미간을 약간 좁힌 채 중전에게로 가기 시작했다.
잠시 후..
"중전마마..
주상전하 드셨사옵니다."
"어서 뫼시게"
중전은 날카롭게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드디어 내게 넘어온 것이야. 후후후훗'
"전하, 어이하여 드셨나이까?"
"중전, 왜 내게 아무 기별없이 어마마마의 처소를 바꾼 것이오!"
"예? 아... 그것은.. 일단 좌정하시지요."
"됐소, 지금 왜 내게 아무 기별이 없었냐고 묻고 있질 않소."
"전하, 내명부의 일은 신첩의 권한이옵니다."
"어마마마는 중전의 윗전이시오.
어마마마 또한 중전처럼 무품이라지만 그래도 어찌 그러실 수가 있소!"
"전하, 모두 신첩의 불찰이옵니다..
허나 대비마마께오서 옮겨달라시기에.."
"그 곳이 어디오."
"중궁전 안 쪽으로 들어가시다보면 정자가 하나 있을것이옵니다.
그 정자 뒤이옵니다."
중전의 말에 더 이상 뭐라 하지도 않고 그대로 문 쪽으로 향하는 민서였다.
"전하! 어찌하여 대비마마를 찾아계시는 것이옵니까!"
막 문을 나서려는 민서를 중전이 붙잡았다.
"중(中)의 사신 문제로 의논할 것이 있소.
중전, 중전에게또한 어머니시오.
그렇지 않아도 적적하실 분께 어찌 그러시는게요."
"전하..."
민서는 중전에게 타이르듯 말하고 차갑게 뒤돌아섰다.
'정수혜...
네 년이 전하께 동정이라도 받고 싶은 모양인데.
그 전에 이미 전하는 내 것이 될게다.
내가 꼭.. 그리 만들고 말 것이다.
네 년따위는 다가갈 수도 없게...
더 이상은.. 내 것을 탐하려 들지 말거라..!'
"이 곳은... 전(殿)이 아니라 당(堂)이 아닌가.
어찌 어마마마는 이런 곳으로.."
민서는 의아해하며 수혜당으로 들었다.
"마마.. 주상 전하 납시셨사옵니다."
민서가 들어간 그 방은 왠만한 후궁의 방보다 더 작았다.
민서가 들어오자 수혜는 일어났고 민서에게 고개를 숙였다.
"앉으시지요, 소자보다 윗전이시옵니다."
"그러시지 마시지요..
보령은 제가 더 적사옵니다."
수혜의 고집에 결국 민서가 연상 앞에 앉았다.
"원래, 선왕이 승하하고 새 왕이 즉위를 하면
선왕의 존호와 시호, 그리고 새로 즉위를 했다는 것을 중(中)에 사신을 보내 통보를 해야합니다."
"예.."
"그것은 대비의 관할이니.. 어마마마께오서 하셔야합니다."
"예..."
"허나,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소자가 할 것입니다."
단호한 민서의 말에 방안은 정적이 맴돌았다.
첫댓글 히햐~ 흥미진진합니다^^
재밌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