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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허선사
원효성사(元曉聖師)가 신라 불교의 새벽을 밝힌 법등이라면 경허선사(鏡虛禪師)는 근대 한국 불교, 특히 선(禪)의 중흥조라고 할 수 있는 대선사였다. 그런 까닭에 경허선사를 가리켜 ‘제2의 원효’, 또는 ‘길 위의 큰스님’이라고 부른다. 그는 평생토록 부처님의 가르침을 자신의 길로 삼아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고 다니며 중생과 애환을 함께 하고, 그들을 성불의 길로 이끌다가 중생의 바다에서 열반의 길로 떠났기 때문이다. 그의 생애는 참으로 성자(聖者) 원효를 연상시킬 만큼 한 편의 장엄한 일대 서사시였다.
그는 치열한 수행정신, 위대한 깨달음, 불법을 위한 끊임없는 정진과 만행(萬行)을 통해 서산대사(西山大師) 이래 쇠미해진 선맥(禪脈)을 중흥시킨 크나큰 공덕을 남긴 한국 근대 불교사의 거목이었다.
경허선사는 불과 아홉 살의 어린 나이에 청계산 청계사(淸溪寺)에서 사미승이 되었으며, 14세에 계룡산 동학사(東鶴寺)로 가서 불경을 공부하고, 23세 젊은 나이에 대강사로서 널리 이름을 떨쳤다. 그리고 34세에 처절한 고행 끝에 대오한 뒤 37세부터 전국 각지를 운수행각하며 선풍(禪風)을 드높였다. 또한 60세부터는 북녘 땅에서 머리를 기르고 저자를 누비며 중생제도를 위해 힘쓰다가 세수(歲壽) 67세를 일기로 만행으로 일관했던 위대했던 한 삶을 마쳤다.
경허선사가 머물던 절은 많지만 특히 계룡산 동학사에서 가장 오래 주석하고 있었으며, 그의 생애를 전해주는 중요한 자료로서는 선사의 법제자 한암(漢岩) 스님이 쓴 「선사경허화상행장」을 비롯하여, 1943년 중앙선원에서 펴낸 <경허집>에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이 지은 ‘약보’, 이능화(李能和)의 <조선불교통사>, 그리고 근래에 나온 윤청광의 <경허―길 위의 큰스님>, 이흥우의 <경허선사> 등이 있고, 경허선사를 주인공으로 한 실명소설로서 김정휴의 <소설 경허>, 최인호의 <길 없는 길> 등이 있다.
경허선사는 조선왕조가 망국의 내리막길로 접어들던 1846년(헌종 12년) 8월 24일 전주 자동리에서 가난한 선비 송두옥(宋斗玉)과 밀양 박씨 사이에서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여산(驪山). 어릴 때의 이름은 동욱(東旭)이고 법명은 성우(惺牛)요 경허는 법호이다.
그의 생년에 대해 그 동안 1846년생, 1849년생, 1857년생 등 세 가지 설이 있어 아직도 여러 자료에 각각 다르게 나와 있지만 선사 자신이 1900년에 찬술한 「서룡화상행장」에 따르면 당시 본인의 나이가 55세라고 밝힌 바 있으므로 1846년설이 정확한 것으로 보인다.
만해의 ‘약보’에 따르면 경허는 태어나서 사흘이 지나도록 울지를 않아 모두가 죽은 줄 알았는데 목욕을 시키자 비로소 우렁찬 울음을 터뜨려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다고 했다. 경허의 소년시절에 대해서는 알려진 사실이 거의 없다. 다만, 어려서부터 남이 하는 것을 보고 짚신삼기를 좋아했는데, 비록 몰락한 가문이지만 그래도 양반이라고 체면을 중시하던 아버지는 경허가 천한 사람들이나 하는 짚신 삼는 모습을 볼 때마다 호되게 야단을 쳤다고 한다.
그렇게 종종 꾸지람하던 아버지도 일찍 돌아가시고 홀어머니만 남게 되자 가세는 더욱 궁핍해질 수밖에 없었다. 형이 먼저 출가를 하여 공주 마곡사(痲谷寺)에서 스님이 되었고, 경허 역시 9세 때 어머니를 따라 현재 경기도 의왕시 청계동 청계사로 가서 계허(桂虛) 스님을 은사로 하여 출가를 했다. 경허의 출가 동기는 불심이 두텁던 어머니의 감화도 감화였지만 먼저 출가한 형 태허(泰虛) 성원(惺圓)의 영향이 컸으리라고 짐작된다.
사미계를 받고 사미승이 되었지만 경허는 스님들 뒷바라지하며 온갖 자질구레한 잡일들 때문에 제대로 공부할 겨를이 없었다. 불경은커녕 문맹을 면할 틈조차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하기를 5년째 되던 해였다.
어느덧 경허의 나이 14세가 되었는데, 그해 여름 어느 선비 한 사람이 청계사로 찾아왔다가 사미승 경허가 글자조차 못 읽는 것을 보더니 심심풀이 삼아 글을 가르쳐주었다. 재주가 비상한 경허는 가르쳐주는 대로 금세 익혀 그 선비가 떠날 때에는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을 정도였다. 선비는 절을 떠나면서 계허 스님에게 경허의 비범한 재주를 칭찬하며 큰 절로 보내서 배우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그해 가을이 되자 경허는 선비의 말처럼 큰 절로 가서 배울 기회를 얻게 되었다. 계허 스님이 환속하면서 계룡산 동학사의 만화화상(萬化和尙)에게 경허를 추천하는 편지를 써주며 보냈던 것이다. 만화는 동학사를 중창하고 강원을 열어 수많은 학인을 길러내던, 당시 으뜸 가는 강백으로 손꼽히던 스님이었다.
1859년(철종 10년) 가을, 동학사로 찾아간 경허는 이후 10년간 만화화상의 문하에서 불경을 공부하고 불법의 진리를 깨우치기 위해 정진하게 된다. 만해 한용운은 경허선사의 ‘약보’에서 그때 경허가 ‘공부를 하는데 한가하지도 바쁘지도 않게 해도 남보다 열 배 백 배 앞섰다.’고 썼다.
경허는 잠이 많았다. 그날 학과만 끝나면 종일 잠만 잤다. 이런 경허를 보고 하루는 만화화상이 부르더니 이렇게 일렀다. “이놈 경허야. 너는 웬 잠이 그렇게 많은고? 내 평생 너같이 게으른 잠꾸러기는 처음 보는구나. 그렇게 온종일 잠만 자고 공부는 어느 천년에 마칠 터인고? 오늘은 이 <원각경(圓覺經)>에서 이 대목부터 여기 이 대목까지 모두 익히거라.” “예 스승님. 잘 알겠습니다.” 그러고 물러나온 경허는 스님이 시킨 대로 <원각경>의 10여 장을 한 번 읽어본 다음 또다시 잠에 빠져들어 태평스럽게 코를 골았다. 그런데 이튿날 아침 논강 시간이 되자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죄다 외워 만화화상을 비롯하여 모두를 놀라게 했다.
경허는 또한 천성이 소탈하고 담백하여 꾸밈이 없었다. 무더운 여름날에 다른 학승들은 모두가 스승에게 예의를 지키기 위해 옷을 단정히 입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공부를 했지만 경허는 웃통을 훌훌 벗어 제친 채 스승의 강론을 들었다고 하니 참으로 일찍부터 무애자재의 대선사다운 풍모를 보였던 것이다.
그는 동학사뿐만 아니라 경상도와 전라도의 여러 명산대찰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불학(佛學)은 물론 유학(儒學)과 노장(老莊) 사상까지 섭렵하여 불법의 진리 탐구에 정진하는 한편 학문의 경지를 넓혀 나갔다. 이에 따라 경허의 이름은 점차 나라 안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만해는 이에 대해 ‘널리 내․외전을 섭렵하여 정통하지 않은 것이 없어서 이름을 팔도에 떨쳤다.’고 전해주고 있다.
경허가 만화화상의 뒤를 이어 동학사 강원에서 강사가 된 것은 1868년(고종 5년), 그의 나이 23세 때였다. 사소한 잡사에 구애받지 않는 초탈한 성품, 당당한 체구에 우렁찬 음성을 지닌 약관의 강백 경허의 명성은 곧 전국적으로 퍼져나가 계룡산 동학사는 그의 강론을 듣고자 찾아온 수많은 학인으로 붐비게 되었다.
그렇게 11년의 세월이 흘렀다. 1879년(고종 16년) 여름, 34세의 경허는 문득 처음 출가했던 청계사가 머리에 떠올랐고, 환속한 계허 스님도 생각났다. 들리는 말로는 서울 근처 어디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불현듯 계허 스님이 보고 싶어진 경허는 이튿날 강원의 학인들에게 그런 뜻을 전하고 길을 떠났다.
산을 내려와 서울로 올라가다가 천안 부근을 지날 때였다. 갑자기 하늘이 캄캄해지더니 장대 같은 소나기가 쏟아져 내렸다. 비를 피하려고 가장 가까운 집 처마 밑으로 뛰어갔는데 방문이 힘없이 열리더니 주인이 목만 내밀고 빨리 다른 데로 가라고 이르는 것이었다. 경허가 다른 집 처마 밑으로 갔더니 그 집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서너 집을 뛰어다니다가 곡절을 알아보니 그 마을에 요즘 무서운 전염병이 돌아 멀쩡히 서 있던 사람도 갑자기 죽어버리기 때문에 손님을 들일 수가 없어서 그렇다고 했다.
그때 조선왕조는 대원군(大院君)이 실각하고 왕비 민씨일족이 정권을 좌지우지하여 국정이 어지러워지고 민생은 도탄에 빠졌으며, 나라 밖에서는 일본이 노골적으로 침략의 마수를 뻗치던 참으로 외우내환의 시기였다.
백성에게만 호랑이처럼 무서웠고 외세에는 고양이 앞의 쥐처럼 무기력하고 무능했던 집권층에 의해 국권을 하나하나 빼앗겨가던 그 무렵,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876년(병자년)에는 전에 없던 대기근이 일어나 초근목피로 연명할 지경이 되었고, 1879년에는 일본에서 바다를 건너온 콜레라까지 기승을 떨쳐 가뜩이나 도탄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백성들의 삶을 한층 더 간고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경허가 지나가던 마을도 한창 콜레라가 휩쓸고 있어 사람들이 제대로 힘도 못 쓴 채 무더기로 죽어가던 중이었다.
그 순간 경허는 크나큰 충격을 받았다. ‘아아, 사람들이 이토록 허망하게 죽어가고 있는데, 나는 그 동안 무엇을 했던가. 머리에 든 것이 조금 있다고 해서, 남보다 조금 더 읽은 것이 많다고 해서, 강사랍시고 산중에서 부처님의 말씀만 앵무새처럼 잘도 떠벌이고 있었구나. 아아, 그 동안 내가 깨치고 얻은 것이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경허는 힘없이 발길을 돌려 동학사로 돌아오고 말았다. 그리고 학인들을 불러 강원을 폐쇄한다고 이르고 모두 각자의 인연을 찾아 떠나도록 했다. 그런 다음 경허는 깨달음을 얻기 전에는 다시 하늘을 보지 않겠노라 맹세하고는 조실방으로 들어갔다.
조실방에서 안으로 문을 닫아걸고 경허는 목숨을 건 피나는 참선 고행에 돌입하기 시작했다. 졸리면 송곳으로 넓적다리를 찌르고 칼을 턱 밑에 받치고 3개월간을 그렇게 용맹 정진했다. 경허선사가 깨달음을 구한 순간을 만해는 ‘약보’에서 이렇게 전한다.
-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하루는 사미승이 문 밖에서 물었다. “큰스님. 소가 되어도 고삐 뚫을 구멍이 없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하고 물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경허는 대지가 둘러빠지고 물아(物我)를 함께 잊으며 백 천 가지 법문과 무량한 묘한 이치가 당장 얼음 녹듯 하였다. ‘소가 되어도 고삐 뚫을 구멍이 없다’는 말을 듣는 순간 마침내 철벽 같은 관문을 뚫고 대각오도의 경지에 다다랐던 것이다. -
경허선사가 대각오도(大覺悟道)한 천년 고찰 동학사는 현재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계룡산 동쪽 기슭, 충남 공주군 반포면 학봉리에 있다. 동학사는 724년(신라 성덕왕 23년) 회의화상(懷義和尙)이 창건했으며, 당시에는 문수보살이 강림한 도량이라고 하여 절 이름을 청량사(淸凉寺)라고 했다. 920년(고려 태조 3년)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중건하고 국운을 기원했다고 하여 원당(願堂)으로도 불렸다. 그 뒤 조선 영조 때 화재로 전소된 것을 1814년(순조 14년) 금봉화상(錦峰和尙)이 옛 절터에 절을 재건하고 동학사라고 개칭했다고 한다.
동학사는 1864년(고종 원년) 만화화상이 개창하고 경허화상이 강사로 이름을 높였으며, 현재는 국내 최고(最古)의 비구니들의 청정 수행도량으로 자리 잡고 있다.
3개월 만에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 경허선사는 제멋대로 덥수룩하게 자란 머리털과 수염을 깎고 목욕을 하였다. 그해 겨울을 동학사에서 보낸 그는 이듬해 봄에 보임장양(保任長養)을 하기 위해 친형인 태허가 어머니 박씨 부인을 모시고 주지로 있는 충남 서산시 고북면 장요리의 연암산 천장암(天藏庵)으로 갔다.
보임장양이란 오후보임(悟後保任) 또는 장양성태(長養聖胎)라고도 하는데, 고승들이 깨달음을 얻은 뒤에 다시 숲속이나 토굴 등 깊은 곳에 몸을 감추고 이름을 숨긴 채 물러나 오래도록 성태를 기르는 것을 가리킨다. 경허는 뒤에 ‘중 노릇 하는 법’이란 글을 통해 이렇게 보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 내 마음을 깨달은 후에 항상 그 마음을 보전하야 깨끗이 하고 고요히 하야 세상에 물들지 말고 닦아가면 한없는 좋은 일이 하도 많으니…… -
또 ‘심우송(尋牛頌)’에서도 비슷한 말을 남겼다.
- 얻기는 쉬우나 지키기는 어렵도다. 또한 조금 얻은 것에 만족하지 말고 모름지기 선지식(善知識)을 찾아가 단련하고 단련함이 좋으리라. -
천장사로 온 선사는 누더기 한 벌만 입은 채 골방에 들어가 장좌불와(長座不臥), 즉 결가부좌하고 앉아서 한 번도 눕지 않고 또다시 용맹정진에 돌입했다. 그가 다시 문을 열고 나온 것은 이듬해인 1880년(고종 18년) 6월이었다. 수행 도중 단 한 차례도 벗지 않아 이가 허옇게 들끓는 누더기를 벗어 던지며 경허선사는 이렇게 오도가(悟道歌)를 불렀다.
― 슬프도다, 어이하리오.
대저 의발(衣鉢)을 누구에게 전하리오.
사방을 둘러봐도 사람이 없구나.
사방을 둘러봐도 사람이 없구나.
의발을 누구에게 전하리오. ―
그리고 이렇게 게송을 읊었다.
― 홀연히 콧구멍 없다는 말을 듣고
삼천대천세계가 내 집임을 깨달았네.
유월 연암산 아랫길에
일없는 들사람 태평가를 부르는구나. ―
대오한 경허선사는 그때부터 어지러운 세상에서 고통 받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부처님의 가르침을 베풀기 위한 만행을 시작했다. 그런데 그의 교화는 처음부터 너무나 파격적이어서 그의 참된 모습과 깊은 뜻을 모르는 이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첫 법회는 어머니 박씨 부인을 위한 해탈법회였다. 대오한 경허가 어머니를 위해 처음으로 법회를 베푼다는 소식을 듣고 수많은 스님과 신도가 천장암 법당으로 모여들었다. 법상 위에 오른 경허가 시자에게 일렀다.
“우리 어머니를 모시고 오거라.”
박씨 부인은 아들이 큰스님이 되어 자신을 위해 첫 법회를 연다고 하자 한없이 벅찬 가슴으로 옷을 갈아입고 법당으로 들어와 향을 피우고 앞자리에 앉았다. 법상 위에 주장자를 잡고 앉아 있던 경허는 한참을 묵묵히 지켜보더니 갑자기 벌떡 일어서서 하나하나 옷을 벗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이내 벌거숭이가 되고 마는 것이 아닌가. 그 모습을 본 신자들은 경악했다. 특히 여자들은 두 눈을 가린 채 찢어지는 비명을 지르며 다투어 법당 밖으로 도망쳤다. 벌거벗은 경허가 어머니에게 말했다.
“어머니, 저를 보십시오.”
박씨 부인이 보기에 세상에 이처럼 해괴한 망신이 또 없었다. 너무나 놀라고 화가 난 어머니가 소리쳤다.
“도대체 무슨 법회가 이럴 수 있단 말이냐? 세상에 별 망측한 꼴이 다 있구나!” 그리고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경허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주섬주섬 다시 옷을 입고 주장자를 세 번 내려치더니 법상에서 내려왔다. 그야말로 야단법석으로 끝난 경허의 이 첫 법회는 무슨 가르침을 준 것일까. 공부가 모자란 필자로서 대선사 경허의 깊고 넓은 뜻을 헤아릴 재주는 없지만, 어쩌면 오늘의 큰 깨달음은 곧 어머니께서 어린 시절 손을 잡고 청계사로 데려가 불문에 출가시켜주신 덕분이라는 나름대로의 효성이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
대오한 경허는 그 이듬해인 1882년부터 10여 년 동안을 천장암을 비롯하여 개심사 ․ 부석사 ․ 동학사 ․ 갑사 ․ 신원사 ․ 수덕사 ․ 법주사 ․ 정혜사 ․ 마곡사 ․ 장곡사 등 호서지역은 물론 영남의 범어사 ․ 해인사 ․ 통도사 ․ 동화사 ․ 표충사, 호남의 송광사 ․ 화엄사 ․ 천은사 ․ 실상사 ․ 쌍계사, 금강산의 마하연과 오대산의 월정사 등 방방곡곡의 명산고찰을 두루 찾아 선원(禪院)을 개설하여 새로운 선풍을 일으키는 한편, 자재무애의 설법으로 중생을 제도했다. 또한 이 시기에 깊고 넓은 지식과 뛰어난 문장으로 수행자들의 길잡이가 되는 <선문촬요(禪門撮要)>를 비롯하여 수많은 결사문 ․ 서문 ․ 행장과 찬(贊) ․ 기(記) 및 시가(詩歌)를 남겼다.
경허가 한 번 몸을 일으켜 선불교 중흥의 기치를 날리며 사자후를 토하자 그때까지 수행방법조차 몰라 고작해야 염불이나 하고 극락왕생이나 빌 줄밖에 모르던 조선 불교는 깊고 오랜 잠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숱한 빼어난 제자들이 그의 슬하에 모여들었으니 곧 경허의 뒤를 이어 각자 일문을 이루고 한국 근대 불교의 기틀을 다진 거목인 수월(水月) ․ 만공(滿空) ․ 한암(漢岩) ․ 침운(枕雲) ․ 혜월(慧月) 등이다. 경허와 제자들에 얽힌 수많은 일화들이 이제는 전설이 되다시피 했는데 지면 형편상 모두 열거할 수는 없고 몇 가지만 소개한다.
경허선사는 대오한 뒤 바로 한동안은 천장암에 머물고 있었다. 천장암 주지는 친형인 태허화상이었다. 하루는 어느 유지의 사십구재가 있었는데 태허가 장을 보아 법당에 떡과 과일이 푸짐했다. 그런데 재를 올리기도 전에 경허는 떡과 과일을 몽땅 바구니에 담더니 법당 밖에서 재 끝나기만 기다리고 있던 굶주린 아이들에게 모두 나누어주는 것이었다. 태허가 화가 치밀어 소리쳤다. “왜 재도 끝나기 전에 공양을 다 나누어주는 거냐?” 그러자 경허가 대꾸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참으로 재를 잘 지내는 것입니다.” 태허는 할 수 없이 사람을 시켜 공양물을 다시 사오게 하고 유지에게 사과를 했다. 그 유지가 느낀 바가 있어 이렇게 말했다. “아닙니다. 큰스님 덕분에 아버님 사십구재를 잘 지냈습니다. 그 보답으로 시주를 더 하겠습니다.”
역시 천장암에 있을 때의 일이다. 경허의 명성을 듣고 많은 사람이 찾아와 법문을 청했는데 빈손으로 오면 종일 기다려도 말 한 마디 없다가 누구든 곡차(술)를 올리면 즐겨 마시고 약기운(?)이 떨어질 때까지 설법을 했다. 몇 번을 지켜보던 상좌 만공이 물었다.
“스승님께서는 모든 중생을 공평하게 대하셔야 할 터인데 왜 그렇게 차별을 하십니까?”
그러자 경허가 웃으며 대답했다.
“법문이란 술김에나 하는 거지 맑은 정신으로 하는 건 아닐세.”
경허가 충남 청양 칠갑산 장곡사에 주석할 때에도 만공이 모시고 있었다. 어느 날 마을 사람들이 곡차와 파전 따위를 마련하여 경허를 대접했다. 술자리가 무르익었을 때 만공이 말했다.
“스승님. 저는 술이 있으면 마시고 없으면 안 마십니다. 파전도 생기면 먹고 없으면 굳이 먹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자 경허가 이렇게 대꾸했다.
“오호, 그래? 너는 벌써 무애의 경지에 이르렀구나? 나는 그렇지 못해서 술이 먹고 싶으면 가장 좋은 밀씨를 구해 밭을 갈고 씨를 뿌려 김매고 가꾸어 익으면 누룩을 만들어 술을 빚고 걸러 마실 것이야. 또 파전도 먹고 싶으면 파씨를 사다가 밭을 갈아 파를 심고 거름을 주어 잘 가꾸어 익으면 파전을 부쳐서 먹을 것이야.”
이 말을 듣는 순간 만공은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고 등골이 오싹해지며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고 뒷날 술회했다.
또 하루는 경허가 만공을 데리고 탁발을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해는 기울어가고 갈 길은 먼데 시주받은 쌀은 바랑에 가득해 어린 만공은 죽을 지경이었다. 간신히 경허의 뒤를 좇아 어느 마을을 지나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 집에서 새색시가 물동이를 이고 나오는 것이 보였다. 그러자 앞장서 가던 경허가 느닷없이 달려들어 색시의 두 귀를 잡고 번개같이 입을 쪽 맞추는 것이 아닌가! 놀란 색시는 비명을 지르며 물동이를 떨어뜨렸다. 여자의 비명과 물동이 깨어지는 소리에 동네 사람들이 이 집 저 집에서 쫓아 나와 자초지종을 알고는 손에손에 몽둥이를 들고 두 중을 잡으려고 달려들었다. 경허가 먼저 걸음아 나 살려라 도망쳤고 만공도 잡히면 죽을 판이라 정신없이 뒤좇아 달음질쳤다. 순식간에 마을을 빠져나와 멀리 도망친 뒤 한숨을 돌리고 나자 경허가 껄껄 웃으며 물었다.
“어때? 죽어라 하고 뛰니까 바랑이 무거운 줄을 조금도 모르겠지?”
경허선사는 53세 때인 1898년(고종 25년)에 서산 부석사에서 만공을 데리고 부산 금정산 범어사(梵魚寺)에 가서 영남 최초의 선원을 개설했으며, 이듬해에는 가야산 해인사(海印寺) 조실로 초대받아 대장경간행불사를 증명하고, 수선사(修禪寺)를 창설하여 그 옛날 보조 지눌의 맥을 이어 정혜결사운동을 벌였다.
또 1990년에는 조계산 송광사(松廣寺) 점안식에 증명법사로 초청받아서 한동안 머물며 화엄사․천은사․쌍계사․실상사 등에 선원을 창설하고, 1902년에는 범어사에서 <선문촬요>를 편찬하였다. 다시 2년 뒤에는 해인사에서 대장경간행불사를 마무리짓고, 천장암에서 만공에게 전법게를 준 뒤 북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오대산 월정사(月靜寺), 안변 석왕사(釋王寺)를 거치며 설법한 경허선사는 이후 머리를 기르고 선비의 옷을 입고 이름을 박난주(朴蘭洲)라고 하며 관서와 관북지방을 떠돌며 때로는 인적 없는 곳에서 선정에 들기도 하고 때로는 저자에서 설법도 하며 중생을 제도했다.
금강산을 유람할 때에는 175수에 이르는 연작시 ‘금강산유산가’를 짓기도 했다. 이 연작시말고도 경허는 450수에 이르는 선시(禪詩)를 남기기도 했으니 그는 선승이면서 뛰어난 시승이기도 했다. 그래서 일세의 시인 만해도 <경허집> 서문에서 ‘문장마다 선(禪)이요, 구절마다 법이어서 실로 기이한 문장이요 기이한 시’라고 찬탄해 마지않았다.
경허가 평안도 강계에 이르른 것은 1905년께로 보인다. 그곳에서 서당을 열어 학동들을 가르치는 한편 틈나는 대로 설법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폈으며, 얼마 뒤에는 갑산으로 옮겨 같은 교화활동을 계속하다가 1912년 4월 25일 입적하니 세수 67세, 법랍 59세였다. 입적하기 전에 경허선사는 다음과 같은 열반송을 쓴 뒤 그 밑에 일원상(一圓相)―○을 그렸다고 한다.
― 마음달 외로이 둥그니
빛이 만상을 삼켰구나.
빛과 경계를 함께 잊으니
다시 이것은 무엇인가. ―
술 마시고 고기 먹고 원효 이래 최대의 파격적인 만행으로 숱한 일화를 남긴 경허선사의 무애행에 대해 한암선사는 뒷사람들을 경계하기 위해 이런 글을 남겼다.
- ……그러나 후대의 학인들이 화상의 법화(法化)를 배우는 것은 옳으나 화상의 행리(行履)를 배우는 것은 불가하리니 사람들이 믿어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
즉, 경허의 만행은 큰 깨달음에서 나온 무애행이며 범부들이 모방할 것은 아니라는 뜻인데, 수행은 모자라면서도 득도한 척 행세하며 술 마시고 고기 먹고 음행까지 범하는 가짜 중들을 미리 경계한 말이라고 하겠다.
한암선사는 경허선사의 법맥에 대해 ‘행장’에서 청허(淸虛)―편양(鞭羊)―풍담(楓潭)―월담(月潭)―환성(喚惺)―호암(虎巖)―청봉(靑峰)―율봉(栗峰)―금허(錦虛)―용암(龍巖)―경허라고 밝혔다. 또 다른 기록에는 용암 다음에 영월(永月)―만화(萬化) 두 선사가 더 있다. 또한 ‘행장’은 경허의 법제자로 침운 ․ 혜월 ․ 만공 ․ 한암 등 네 명을 들고 있다.
경허선사가 입적한 뒤 그의 시신은 마을 사람들에 의해 갑산 난덕산에 매장되었는데, 이듬해 수월의 소식을 듣고 찾아온 만공과 혜월에 의해 다비된 뒤 수습된 뼛가루는 갑산의 강과 산과 들에 골고루 뿌려졌다고 한다.
돌이켜보건대 선(禪)과 교(敎)는 별개가 아니다. 모두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르게 깨닫고 바르게 실천하는 방편의 두 얼굴이지 다름 아니다. 경(經) ․ 율(律) ․ 논(論) 삼장(三藏)과 계(戒) ․ 정(定) ․ 혜(慧) 삼학(三學)에 통달하지 못하고 자칭 고승이 되었다면 그의 공부는 사상누각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일찍이 부처님께서 이렇게 가르치시지 않았던가.
“비구들이여. 만일 저 재목이 양쪽 언덕에 붙지 아니하고 중류에서 잠기지도 아니하고 육지에 올라와 사람에게 잡히지도 않으며 비인(非人)에게 잡히지도 아니하고 소용들이에 말려들지도 않고 속이 썩지도 않는다면 저 재목은 바다에 들어가 머물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강물의 흐름은 바다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비구들이여. 너희들도 또한 그와 같이 하면 열반의 바다에 들어가 머물게 될 것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정견(正見)과 중도(中道)로서의 끊임없는 정진(精進)은 반드시 열반으로 인도하는 까닭이다.”
황원갑 <고승과 명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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