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근철 柳根哲(1926~2011)】「총 578억원, 전 재산 KAIST에 연구 기금으로 쾌척」
류근철(柳根哲, 1926 ~ 2011)은 대한민국의 제 1호 한의학 박사다. 이력 1926년 충청남도 천안군 동면(天安郡 東面)에서 출생한 류근철은 1976년 경희대학교에서 국내 최초로 한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모스크바국립공대 의공학 박사, KAIST 명예이학박사학위를 받았고 경희한방의료원 부원장, 러시아 모스크바국립공대 교수 등을 거치며 평생 한의사의 길을 걸었다. 1972년 세계 최초로 침 마취 맹장수술에 성공하는 등으로 국내외에서 특허도 취득했다. 고인은 2008년 KAIST에 578억원 상당의 부동산을 기부했는데, 국내 개인 기부 기록으로는 현재(2012년 12월)까지 깨지지 않고 있다. KAIST는 감사의 뜻으로 지난해 준공된 스포츠 컴플렉스 시설에 고인의 이름을 붙였고, 향후 세종시에 들어설 새 캠퍼스의 이름도 '류근철 캠퍼스'로 명명할 예정. 고인은 2009년부터 KAIST 인재ㆍ우주인 건강연구센터를 설립해 학생들의 건강을 돌보기도 했다.
류근철은 일제강점기의 충남 천안에서 태어나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냈다. 3.1 운동에 부모가 참가한 것으로 일본 헌병들의 감시가 심하여 다섯 살 때 천안에서 쫓겨나게 된다. 특히 어머니는 고문을 심하게 당하여 조현증을 앓기도 하였다. 천안에서 충북 충주 노은면으로 옮겨가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숨어 지냈다. 숨어 지내야 했기 때문에 학교에 보낼 형편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열한 살 때 무작정 가까운 초등학교에 찾아가 “공부 좀 시켜 달라” 고 간청하였고, 그해 ‘늦깎이 1학년’이 됐었다.
유년시절 공부를 무척 좋아하였으며, 리더십도 강한 편이었다. 당시 주워온 사과 궤짝으로 책상을 만들고 남포등 두 개를 천장에 매달아 불을 밝혀 집에 공부방을 꾸몄다. 그 공부방에서 30여명의 동네아이들과 함께 공부를 하였고, 때로는 상급생들과 공부방 회장 자리를 두고 다투기도 하였다. 헌 양은그릇이나 깨진 솥, 다 해진 고무신 같은 걸 주워 고물장수에게 팔아 그 돈으로 초등학생 때부터 일본에 책을 주문하였는데 주로 교과와 관련된 책이나 학술 잡지 등을 보았다. 어려서부터 만들기를 좋아하여 함석을 오려 만든 자동차나, 철사를 꼬아 만든 스케이트 등을 만들어냈다. 4학년 때부턴 ‘장인공(工)’ 자를 함석으로 오려 가슴에 붙이고 다녔다. 선생들은 핀잔을 줬지만 “ 난 공학박사가 될 거예요!” 하면서 고집을 피웠다고 한다.
중학교에 진학할 형편이 되지 않았기에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엔 일본으로가 제철회사에 취직하였다. 1년 반 정도 일본에서 머물며 중·고교 과정을 독학하였고, 스무 살이 되던 1945년에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며 이 때 의학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서울에서 의사 공부를 하는 동안 하루에 한 끼만 먹고, 물로 배를 채우는 생활을 하였다. 서른 살이 되던 해, 고생 끝에 한의대를 졸업하였다.
한의대 졸업 후 경희대 의대 부교수, 경희대 한방 병원 부원장을 역임하였고, 1973년 경희의료원에서 개최된 제 3차 세계침구학술대회에서 무약물 무통 침술법을 이용한 침술 마취 맹장수술에 성공하며 유명세를 타게 된다. 무약물 침술 마취수술에 있어 세계최초로 성공한 경우가 되었으며, 이러한 성과는 한국이 중국 보다 먼저 무약물 침술 마취에 대하여 특허를 선점하는 등의 결과를 이끌어 내는 데에 지대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또한 ‘동서의학중풍센터’를 만들어 양방과 한방의 협진을 처음 시도했다.
그 후 경희의료원에서 퇴직한 후 병원을 개원하였다. 침 마취로 자궁근종 수술을 성공 시키는 등의 침술마취법으로 얻은 명성을 통하여 개원 후 한의학자로서 승승장구하게 된다. 병원 자리로 구입한 땅이 천정부지로 값이 뛰기 시작하면서 많은 부를 가지게 되었고, 그 때부터 그는 본격적으로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나눠야 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의료봉사현장에서 활발히 활동하던 도중 1996년 러시아로 떠난다. 모스크바 국립공과대학교에서 재활의학과 의공학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아 한의학자로는 처음으로 의공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사람이 되었으며 이후 모스크바 국립공과대학교의 의공학과 정교수로 발탁되었다.
한번 주머니에 들어온 돈은 절대 꺼내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돈을 모았다고 한다. 일단 은행에 저축하면 꺼내질 않았다. 병원 개업해 72년 최초로 침술로 제왕절개 수술 마취에 성공했다. 이후 번 돈으로 빌딩을 샀고 빌딩의 수요자가 많아 몇 번 옮기는 과정에서 재산이 불어났다. 그때부터 ‘이 돈은 내 돈이 아니구나’는 생각이 들어 10여 년 전부터 기부할 생각을 했다.
기부를 하기 위하여 기부할 곳을 상당한 기간 찾아다녔다고 한다. 한의학이 있는 것도 조국이 있기 때문이고 오늘날의 국력은 그 나라의 과학 기술 수준이라는 생각에서 자신의 돈이 우리나라의 과학 수준을 높여주는 데에 밑거름이 되길 바랐다고 한다. 2008년 개인 기부사상 최고액인 578억원을 KAIST에 내 놓으며 자신의 전 재산을 기부로 내 놓았고, 이 후 KAIST에서 생활하며 ‘닥터류 헬스클리닉’을 열어 ‘재능기부’도 행하였다. 2012년 1월 중순 뇌경색 진단을 받고 치료를 받다, 3월 8일 향년 85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류근철은 2008년 8월 국내 개인기부로는 사상 최고액인 578억원을 KAIST에 기부하였다. “2008년 KAIST를 방문했을 당시 면학에 열중해 있는 학생들을 보며 한국의 미래가 여기에 있구나 하는 확신을 가졌으며, 우리나라가 선진국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과학기술 발전이 필수적이고, 그 역할을 선도적으로 이끌어갈 수 있는 곳이 바로 KAIST라고 생각했다”고 하며 기부의 의견을 밝혔다. 기부하기로 한 재산은 서울 중구의 빌딩(평가액 500억원)과 경북 영양의 산 10만여평 등 부동산을 비롯해 벼루, 동양화 등 골동품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기부 이후 KAIST의 8평짜리 교수기숙사에 거주하며 재산뿐 아니라 ‘지식’까지도 기부하고 싶다며 2009년 3월 ‘KAIST 인재·우주인건강 연구센터’와 ‘닥터류 헬스클리닉’을 개소하고, 고령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병으로 쓰러지기 전날까지 학생들을 돌보며 무료 진료를 해오는 등 청년 같은 열정을 보였었다. 1990년대 후반에는 모스크바 국립공대 교수로 재직하면서도 의료 시설이 부족한 국내 지방 각지를 돌면서 무료 진료 활동을 펼쳐왔으며, 이 같은 공으로 충남 천안, 경남 산청시, 대전시로부터 명예시민증을 받은 바 있다. 2007년에는 고향인 충남 천안 천동초등학교에 4억5000만원을 기부해 다목적체육관, 실내골프연습장 등을 건립토록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