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문회가 열리고 장관, 총리의 병역문제가 도마에 오를 때마다 그들의 염치없음에 분노를 느낀다. 무슨 이유로든 국민의 4대 의무에 속하는 병역을 미필했으면, 거기에 따른 책임도 져야 하는 것이 도리인데 그들의 변명에는 뻔뻔스러움 밖에는 비치는 것이 없다. 그들에게 똑바로 정신이 박혔다면, 병역미필을 미안해하면서 근신하며 공직취임을 사양하는 것이 도리일 것이다. 그러나 청문회에 나온 위인일수록, 우리도 알고 자신은 더 잘 아는, 이런저런 그럴듯한 변명이 많다. 이번 총리후보자의 경우, 그의 병역 미필의 이유가 너무나 석연치 않았다. 그 병으로 병역을 면제받을 정도였다면, 자가 치료는 어려웠을 듯, 그러기에 그것을 확인시켜줄 병원기록이라도 있을 법한데, 그런 자료조차 제출하지 못했다.
병역미필의 변명에서 오늘에 이른 처세술 짐작
헌법에 명시된 이런 병역의무는 돈 가진 자, 지위를 누리는 자들에 의해 사문화되어 갔다. 전시에는 도피성 유학까지 곁들여서 빈축을 사고 국민화합도 깨뜨렸다. 전후에도 빽이 있거나 고시에 합격하여 양양한 전도가 보이거나 기피 요령을 남다르게 터득한 이들에게 병역기피는 ‘전가의 보도’였다. 주변을 돌아보라, 멀쩡한 사람이 신체상의 이유로 병역을 피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그런 위인일수록 요령 잘 피워 출세하는 데는 남다른 촉각을 갖고 있다. 대한민국의 법치를 두고 ‘유전무죄 무전유죄’라고 내뱉은 어느 살인죄수의 독백처럼, 병역 미필 또한 이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런 미필자에게 요청되는 것은, 선거직 공직은 몰라도 임명직 공직에 가서는 안 된다는, 최소한의 염치다.
대한민국 고위직의 병역미필을 불쾌하게 되씹으면서, 젊었던 시절 배웠던 화랑도를 떠올린다. 신라 진흥왕은 민간의 향촌 조직이었던 청소년 조직을 국가적 차원으로 끌어올려 반관반민의 조직으로 개편했다. 이렇게 개편된 화랑도는 전사단적인 성격도 가졌다. 김인문이 『화랑세기』에서 이른바 “어진 재상(賢佐)과 충성스런 신하(忠臣)가 이로부터 빼어나고, 어진 장수(良將)와 용감한 군졸(勇卒)들이 이로 말미암아 생겨났다”고 상찬할 정도로 위대한 인물을 많이 배출했는데, 신라는 이들을 통해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루었다.
우리는 흔히 화랑도의 정신으로 원광법사가 가르쳤다는 ‘세속오계’를 꼽는다. 귀산과 췌항 두 청년이 수(隋)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가실사에 머물던 원광법사를 찾아가 받았다는 교훈이다. “충성으로써 임군을 섬기고(事君以忠), 효도로써 부모를 섬기며(事親以孝), 신의로써 친구를 사귀고(交友以信), 싸움에 임하여 물러서지 말며(臨戰無退), 생물을 죽일 때에는 가려서 죽이라(殺生有擇)”는 다섯 가지 교훈이다. 이 세속오계가 화랑도 훈련에서 실천윤리의 중요덕목으로서 강조되긴 했지만, 삼국통일의 싸움터에서는 무엇보다 “싸움에 임하여 물러서지 말라”는 것이 강조되었을 것이다. 말하자면 군인으로 목숨다해 병역의무를 충실히 하라는 것이다. 이 의무가 ‘신라 통일’을 이루었다고 본다.
‘통일전쟁’에서 화랑들은 ‘임전무퇴’의 덕목을 두 가지 측면에서 실천했다. 솔선수범과 살신성인(자기희생)으로 자기 목숨을 내던졌다. 백제 정벌군 총사령관 김유신이 5만 군대를 거느리고 탄현을 넘어 황산 뻘로 나아갔을 때, 계백은 결사대 5천을 거느리고 싸움에 임했다. 이 전투에서 신라군은 중과부적(10:1)의 유리한 전세에도 불구하고 4전 4패했다. 이때 김유신의 동생 부사령관 김흠춘(흠순)이 자기 아들 화랑 반굴을 내보내 전사시켰다. 또 부사령관 김품일이 자기 아들 16살 난 화랑 관창을 내보내 목숨을 바쳤다. 관창이 처음 사로잡히자 계백은 그의 목을 베지 않고 살려 주었다. 관창은 다시 홀로 적진으로 나가 싸우다 사로잡혀 죽었다. 반굴과 관창의 죽음을 본 신라군은 그제서야 앞다투어 목숨을 내놓고 싸워 이 전선을 돌파하고 부여성으로 들어갔다. 16세 소년 관창은 전장에 나가지 않아도 되었고, 반굴도 아버지의 그늘에 숨을 수 있었다. 그러나 화랑 출신의 부사령관들이나 그 아들들은 지도자로서의 자기희생을 먼저 보였다. 이것이 나라의 승리와 공동체의 일치를 가져오는 비결이다. 그들의 지도력이야말로 화랑도식의 ‘노블레스 오블리쥬’였다.
화랑 출신의 김유신은 어땠나? 고구려 중심의 역사인식을 했던 단재는 다른 역사가들과는 달리 김유신을 탐탁지 않게 평가했다. 김유신은 화랑 출신으로 뛰어난 전략가요 용기가 특출한 군인이어서 ‘태종’ ‘문무’ 왕을 도와 백제 고구려와 싸운 후에 은퇴했다. 동맹국이었던 당(唐)이 한반도에 대한 야심을 노골화하자 신라는 당시 세계적 패권국인 당나라를 상대로 6년간 싸웠다. 지금의 한국이 중국을 상대로 싸운 것이나 다름없다. 이 무렵 김유신이 그의 아들 원술을 어떻게 교육했는가, 그걸 전하는 일화가 있다. 이 역시 화랑의 임전무퇴의 군인정신을 보여준다.
국가에 충성과 국방, 헛된 강조보다 스스로 실천을
672년 8월, 지금의 임진강 지역의 석문 전투에서 원술이 거느린 부대가 참패했다. 원술은 부하들의 권고로, 임전무퇴의 계율을 내팽개친 채, 생명을 보전하여 부모의 집을 찾았다. 그러나 김유신은 사지에서 돌아온 아들 원술을 대면하지 않았다. 우리 같으면 얼싸안고 죽은 자식 살아왔다고 위로라도 했을 법한데, 왜 그랬을까. 673년 7월 김유신이 죽자 원술이 그의 어머니를 찾았다. 그러나 어머니 지소부인 또한 그 남편의 유지를 받들어 아들 원술을 집에 들이지 않았다. 삼국통일에 임했던 신라 지배층의 군역에 대한 자세가 이러했기에 그들이 백제 고구려에 승리하고 당나라를 물리칠 수 있었다. 비록 부모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원술이었지만 역사에서는 살아남는다. 675년 당나라 이근행이 거느린 20만을 상대로 신라는 매소(초)성에서 혈투를 벌였다. 신라는 이 싸움에서 승리함으로 당나라를 이 땅에서 몰아낼 수 있었다. 이 전투에서 김원술은 대승하여 전날의 치욕을 씻었다. 이게 ‘삼국통일’에 임했던 신라 지도층의 자세요, 젊은이들의 기개였다. 또한 통일을 앞둔 우리의 정신자세여야 할 것이다. ‘통일’ ‘통일’을 외치지만, 대통령 국무총리 장관들이 줄줄이 병역미필인 대한민국과는 좋은 대조가 된다.
우리는 병역을 미필한 장관후보자나 국무총리 후보자가 얼마나 유능하고 애국심이 충일한지 잘 모른다. 그들에게는 직책만 맡겨준다면, 과거의 병역미필의 과오를 속죄하는 뜻에서라도 신명을 바쳐 살신성인하겠다는 각오가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병역미필 사유를 듣는 국민은 늘 들어온 한결같은 변명조의 그 언설이 역겹기만 하다. 그들이야말로 병역미필의 변명에서 묻어나는 그 처세술로 지금까지 출세의 길에 오른 사람들이 아닌가. MB 정권이나 이 정권은 국가에 대한 충성과 국방을 유난히 강조하고 있다. 가상하다. 대통령 이하 고위 공직자들 상당수와 청와대 벙커에 들어간 이들 대부분이 병역미필인 이 뻔뻔스런 안보환경에서 그런 헛소리 같은 충성요구를 허공에 대고 짖어댄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런 것이 바로 ‘우이독경’ ‘마이동풍’을 끌어들인다. 차라리 병역미필자는 고위 공직에 결코 임용되지 못한다는 그 단순명쾌한 메시지 하나만 실천해도 백 마디 훈시보다 더 효과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또한 국민화합에도 무상의 효과를 드러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