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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작 기도
주님...
나의 심령을 주께서 주장하사 온전히 주의 것 되게 하소서.
세상으로 달려가 죄를 먹고 마시려는 죄의 소욕 앞에 연약한 몸이오니 주의 보혈로 나를 덮으소서.
오염된 나의 영혼을 깨끗이 씻어 주시고 나의 죄를 말갛게 하옵소서.
주의 행하신 일을 눈을 열어 보게 하시고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분명히 알게 하옵소서.
나는 넘어지기 잘하는 심히 연약한 종이요 죄인이오니 나를 하감하사 오늘도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고 죄의 몸은 빠지고 잘리고 찍힌 자로서 세상이 아닌 주님께 적극적으로 드리나이다.
오직 주께만 나를 드리나이다.
나를 받아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본문 / 마 11:1-19
제목 : 흔들리는 세례 요한 속에 나의 모습이 오버랩 되다.
1.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마치고 나서 여러 마을에서 가르치고 전도하기 위해 그곳을 떠나셨습니다.
2.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냈습니다.
3. 그리고 예수님께 묻기를 장차 오실 분이 당신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릴까요?
4. 예수님이 대답하시기를 너희가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가서 말하여라.
5. 곧 소경이 보고, 걷지 못하는 자들이 걷고, 귀머거리가 듣고,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되고 있다고 전해라.
6. 누구든지 나로 인하여 걸려 넘어지지 않는 자는 복이 있다.
7. 요한의 제자들이 떠나니까 예수님께서 무리들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이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느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8. 아니면 너희들이 무엇을 보려고 나갔느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들을 보려고 나갔느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은 왕궁에 있다.
9. 그러면 너희들이 어찌하여 나갔느냐? 선지자를 보기 위함이냐? 맞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데 그는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다.
10. 성경에 말씀하기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네 앞에 준비하리라.” 하고 말씀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것이다.
1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 세례 요한보다 큰 자가 없다. 하지만 천국에서는 아무리 작은 자라도 요한보다 크다.
12.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공격을 받는데 공격하는 자가 천국을 차지한다.
13. 모든 선지자와 율법이 예언한 것은 요한까지이다.
14. 만일 너희가 이 예언을 받아들일 마음이 있다면,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가 바로 요한이다.
15. 들을 귀 있는 자는 모두 들어라.
16. 내가 이 세대의 사람들을 무엇에 비유할 수 있겠느냐? 이들은 마치 장터에 앉아 있는 아이들이 다른 아이들을 부르는 것과 같다.
17.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피리를 불었는데, 왜 춤을 추지 않았느냐? 우리가 슬픈 노래를 불렀는데, 왜 울지 않았느냐?
18. 요한은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다. 그러자 사람들이 그를 일컬어 귀신이 들렸다고 말하더구나.
19. 그런데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니까 나에게 말하기를 봐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며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한다. 그러나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는 것이 증명된다.
* 나의 묵상
세례 요한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세상에 드러내고 확증한 사역자였다.
요한이 요단강에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 때 예수님도 그에게 오셔서 세례를 받으려고 하셨다.
요한 왈,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하는데 어떻게 당신이 내게로 오십니까?”
그때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네가 나에게 세례를 주는 것이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라고 하신다.
그러자 세례 요한은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었다.
이렇게 세례를 베풀자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예수님 위에 임하셨다.
그리고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소리가 들렸다.
이 일이 있고 나서 세례 요한은 붙잡혀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이 감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갈릴리지역에서 천국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셨다.
(마 4:17)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요한은 옥에 갇혀 있었지만, 그의 제자들을 통해서 예수님의 사역을 다 듣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의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서 이렇게 묻는다.
“오실 그리스도가 당신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합니까?”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요한은 자신이 분명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보았고 세상에 등장시키는 일에 선포하고 확증하기도 하였다.
무엇보다 하나님으로부터 말씀하시는 음성도 들었던 자이다.
그런데도 요한은 예수가 그리스도인지 아닌지 묻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 세례 요한이 주의 길을 예비하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 오긴 했지만, 그가 기대하는 그리스도는 심판자였던 것이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메시야 사상은 메시야가 오시면 현실적으로 이스라엘을 회복시키고 다윗 왕국의 영광을 재현할 것으로 믿었다.
요한도 마찬가지로 자기 뒤에 오실 그리스도가 당시 로마의 압제 하에 있는 이스라엘을 회복시키고 로마 황제와 함께 자신을 가두고 있는 폭군 헤롯에게 심판을 할 것이라고 믿었으나, 그런 심판은 전혀 진행되지 않고 자신도 여전히 감옥에 갇혀 있는 것에 대한 불안함의 발로였을 것이다.
더구나 그리스도라고 하는 예수는 심판보다는 구원을 선포하시는 것이 아닌가?(11:4-6)
(요 3: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이런 이유로 인하여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잘못된 메시야 사상에 대해서 4-6절과 같이 수정해 주신 것이다.
(4-6)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세례 요한은 그가 확신을 가지고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었는데, 그의 행동은 그의 기대와 전혀 달랐기 때문에 오히려 예수로 인하여 걸림이 되고 오해를 하게 된 것이다.
둘째는, 세례 요한이 옥에 갇혀 있는 고통이 지속됨으로 말미암아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에 대한 확신이 불확실성으로 변했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율법과 선지자는 세례 요한까지라고 하였다.
따라서 세례 요한은 구약에도 속하고 신약에도 속하는 중간 단계를 지나는 사람이지만,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보지 못하고 죽임당하고 만다.
비록 세례 요한이 메시야이신 예수님의 오시는 길을 예비하는 역할을 맡기는 했지만, 그가 메시야로써 옥에 갇혀 있는 자신을 넉넉히 석방시켜 줄 것이라고 믿었으나 전혀 그런 기색이 보이지 않자 그는 초조해지기 시작하고 마침내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에 대한 확신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요한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으로 인하여 오히려 걸려 넘어지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유가 첫 번째이든 두 번째이든 세례 요한 안에 우리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어, 그의 모습과 나의 모습이 오버랩 된다.
고난 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 고난이 시작될 때에는 주를 믿는 믿음으로 넉넉히 이겨낼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러나 그 시간이 점점 길어지고 전혀 회복의 기미가 보이지 않을 때는 초조해지기 시작한다.
그래서 자신의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하고 정말 예수가 그리스도가 맞는지에 대한 회의가 들게 된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드는 생각도 세례 요한과 똑같이 “당신이 그리스도 맞습니까? 아니면 다른 분이 그리스도입니까?” 하고 묻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지만 상황에 따라 끊임없이 그 믿음, 즉 예수가 나의 주되심에 대한 믿음이 흔들린다.
고난이 오래가면 갈수록 그런 현상은 심화되곤 한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은 오히려 이런 고난을 통하여 더욱 견고해져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피로 세워진 새 언약 백성이다.
따라서 나에게 닥치는 어떠한 상황도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주님께서 주시는 것임을 믿고 그 고난의 상황을 수용해야 한다.
주님이 주시는 고난은 우리를 향하신 심판이지만, 그 심판은 진멸이 아니라 징계이다.
주님의 징계는 우리를 죽이려고 주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안에 있는 온갖 영적 육적 불순물들을 고난의 풀무불에 집어넣고 다 태워서 정결케 한 다음에 순전한 모습으로 다시 세우시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인 것이다.
이런 고난을 우리가 믿음으로 잘 받고 수용하면 그것이 내게 선물이 되지만, 그런 주님의 섭리를 깨닫지 못하고 끊임없이 해결해 달라고 하면 부르짖는 기도에 응답하셔서 고난을 해결해 주실 수 있을지 모르나 유익은 전혀 없게 된다.
그런 상황이 바로 사사시대 400년의 삶이었다.
그들은 부르짖음의 공식에 입각해서 살았다.
범죄하여 징계를 받으면 잘못했다고 회개하며 부르짖는다.
그러면 주님께서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구원해 주신다.
그런데 회개하고 구원을 받으면 다시는 그런 죄에 빠지지 않아야 되는데 머지않아 그 죄를 되풀이 하는 것이다.
그래서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그 일을 반복하면 구원은 받을 수 있을지 모르나 그들의 영적 상태는 갈수록 나빠질 수밖에 없다.
그 결과 사사시대 마지막에는 제사장들과 레위인들까지 철저하게 타락하여 하나님을 심히 아프게 하였다.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일들, 즉 소경이 보고 귀머거리가 듣고 걷지 못하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회복되고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것은 다름 아니라 영생을 누리는 것을 의미한다.
단순히 육신의 질병을 고치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그저 가난한 자들이 부자 되는 것이 복음이 아니라는 말이다.
고치고 회복된 자리에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을 시위해 주시기 위한 주님의 특별하신 섭리인 것이다.
오늘 우리는 누구나 고난을 당한다.
그 고난으로부터 또한 회복을 경험하기도 한다.
그런 것처럼 우리는 죽어서 가는 천국만을 사모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우리의 삶이 영생을 누려야 한다.
그 영생을 누리는 삶이야말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확신하는 최고의 증거인 것이다.
나는 위에서 소개한 요한이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오해한 두 가지 원인에 다 해당되는 자이다.
첫째, 예수님을 믿으면 이 땅에서 복을 받아 하는 일이 잘 된다고 믿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에, 아주 특별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자녀들이 잘 사는 것을 아버지도 원하신다고 믿었고 또한 그렇게 가르치기도 하였다.
철저하게 보상신앙, 인본주의, 번영신앙을 가르쳤었다.
나도 그렇게 믿었고 성도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쳤으니 그 신앙의 여정이 어떻게 견고할 수 있겠는가?
조금만 어려움이 와도 흔들리고 혼미하고 갈등하며 오해하곤 하였다.
예수 믿는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예수 믿는데 이런 고난이 오면 세상 사람들에게 무엇을 예수를 전하지?
이런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곤 하였다.
그래서 이런 갈등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나의 믿음이란 예수 믿어 땅의 복을 받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렇게 믿어도 믿는 것이니까 죽어서 천국은 당연히 가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런 나는 진짜로는 예수를 믿는 자가 아니라 예수라는 우상을 섬기는 자였던 것이다.
두 번째 원인도 마찬가지다.
고난이 찾아오면 아무리 견고한 믿음이라도 흔들리곤 하였다.
그것은 창세전으로 올라가는 믿음이 아니라 만물 안에 속하여 만물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창세전의 세계는 변하거나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만물 안에 있는 것은 그 무엇이든 사라지고 변하는 쇠락의 법칙의 적용을 받는다.
그래서 나는 변하지 않고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는 별 관심이 없었고 떨어지고 쇠하는 풀과 풀의 꽃에만 치심하는 자였던 것이다.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요한도 삶의 고난 속에서 주님을 오해하고 넘어지는데 나는 어떠하겠는가?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신다.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는데 그 천국에서는 아무리 작은 자라도 세례 요한보다 크다고 말이다.
내가 복음을 모를 때는 주님을 믿어도 세상의 가치관을 가지고 철저하게 썩을 것에 대한 보상을 받는 것이 믿음인 줄 알았으나 이제는 참 복음을 듣고 날마다 생명으로 살아간다.
그래서 땅의 것에 치심 하지 않고 날마다 창세전의 세계로 올라가 그 나라를 사모하며 말씀과 함께 주님과 깊은 교제와 사귐을 갖는다.
그것이 아들의 생명으로 날마다 영생을 살아가는 누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천국을 침노한다는 것은 이 땅에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영적 싸움을 말한다.
영생은 투혼이다.
나 자신의 삶을 온전히 주님께 드리고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는 삶이 영생을 사는 투혼이다.
(벧전 5:8-10)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이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고난을 믿음으로 넉넉히 받아들이고 승리한 자를 주님을 부르셔서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다.
그 영광은 죽어서 천국에서 맛보는 영광 이전에 고난을 승리한 이 땅에서 먼저 맛보는 영광이다.
이 영광은 하나님의 아들이 보신 영광이며 또한 내가 보는 영광이기도 하다.
오늘도 그 영광을 보게 하시는 주님께 영광과 감사를 올려 드린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천하의 세례 요한도 왜곡된 눈을 가지고 주님을 보았고, 결코 짧지 않은 투옥 생활을 통해 자신의 믿음이 흔들리는 것을 보게 되나이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나는 세례 요한의 믿음은 흔들리지 않고 요동하지 않으며 견고한 자로만 생각했었으나, 주님의 길을 예비한 세례 요한도 우리와 성정이 같은 자이옵니다.
그 안에서 나의 연약한 모습, 흔들리는 믿음을 보나이다.
나도 순간순간 주님을 향하여 이렇게 질문합니다.
“정녕 주님이 나와 함께하고 계십니까?”
도무지 주님이 보이지 않고, 나 혼자만 있는 것 같은 고통 속에서 끊임없이 던졌던 질문이었습니다.
주님...
그러나 주님은 나를 이렇게 평가하십니다.
지극히 작은 자라도 천국에서는 세례 요한보다 크다.
그리고 오늘도 나를 영혼의 좌소에 두시고 주님의 호흡으로 주님의 향기를 맡게 하시나이다.
샤론의 꽃으로 오신 주님의 향기에 흠뻑 취하여 주님의 품에서 주님과 깊은 교제와 사귐을 갖는 나는 진정 행복자입니다.
오늘도 주님 주시는 고난의 무덤은 나를 살리는 산실이오니 그곳에서 새 생명으로 일으킴을 받아 주의 영광을 보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