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년에 출간된 <흡혈귀의 비상>은 미셸 투르니에의 최초의 독서집이다. 이 책에는 40여 편 정도의 글이 실렸고, 문학잡지에 기고했던 글, 서평, 다른 작가들의 책에 실린 투르니에의 권두언 등 그 출처는 다양하다. 그리고 권말에는 투르니에가 자신의 스승으로 소개하는 다섯 사람에 대한 회상을 덧붙였다.
이 책은 아마도 소설가만이 쓸 수 있는 새로운 비평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의 작품을 선택하여 치밀한 분석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비평에 가깝지만, 그러나 이 책에는 ‘비평’이 아닌 ‘독서 노트’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그렇다고 해서 작품에 대한 간략한 소개와 소감을 적어놓은 일반적인 독서록도 아니다. 그 이유는 그의 비평이 작품 안에 매몰되어 있지 않고, 작품과 작가를 동시에 아우르며, 때로는 작가의 내밀한 사생활을 엿보고, 작가의 생애와 당대의 역사를 함께 통찰하는 자유로운 방식을 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하나의 작품을 읽어내기 위해 투르니에가 행한 독서의 방식은 그야말로 한 대작가의 삶을 고스란히 따라가는 것이다. 때문에 <흡혈귀의 비상>은 하나의 문학사회 고증서라고 볼 수 있을 정도로 한 작가와 작품에 대한 광범위한 사료들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올라 새롭게 해석되기 쉽지 않은 작품들이나 문학사 속에서만 거론될 뿐인 작가들의 작품에 새로운 피를 수혈함으로써, 작가는 물론 작품 속 주인공들의 삶을 통째로 생생하게 되살려놓는다. 이 책은 한 권의 독서노트이지만, 딱딱한 프랑스 문학사나 백과사전류의 프랑스 사회사를 읽는 것보다는 훨씬 생명감 있게 다가온다. 이 책은 미셸 투르니에가 새롭게 쓴 프랑스와 유럽의 문학사회사이다.
독자는 이 책을 통해서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셰익스피어’와 만나는 것을, 독일 시인의 자살에 얽힌 내적 고백들을, 뜨거운 낭만주의로 재해석되는 ‘보바리 부인’을, 헤세에 대한 유리알 같은 해석을, 토마스 만이라는 거대한 산맥에 대한 통시대적 고찰을, 사르트르에 빠져 있던 젊은 시절의 투르니에를, 밀림의 왕 타잔의 비밀들을 만난다. 또한, 페로의 동화들이 사무엘 베케트와 나란히 서기도 하고, 새로운 괴테를 만나며, 스탈 부인과 콜레트 같은 여인들이 일생을 지켜봐온 친구들처럼 독자에게 친근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이것은 분명 새로운 경험이다. 이 책을 통해 투르니에와 독자가 함께 만들어가는 독서는 하나의 작품을 해석하는 독서가 아니라, 작가의 사유의 뿌리를 매만지는 경험인 것이다.
투르니에의 ‘읽기’가 이렇게 깊고도 자유로운 것은, 투르니에 자신이 ‘읽는 사람’에게 무한한 자유와 힘을 실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흡혈귀의 비상>은 그 서문에 투르니에의 독서론을 담고 있는데, 독서론에서 투르니에는 독자의 능동적인 수용과 자유로운 해석을 강조하며, 작품의 의미와 가치에 대한 평가는 독자의 ‘공동창조’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설명한다.
책의 제목에 사용된 ‘흡혈귀’의 은유 자체가, 책과 독자 사이에 이루어지는 관계를 비유한다. 투르니에는 한 대담에서 이 제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 바 있다.
―선집(選集)의 제목을 <흡혈귀의 비상>이라고 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독서에 관한 성찰을 담은 첫 번째 에세의 제목입니다. 한 권의 책을 출판한다는 것은 흡혈귀들을 풀어놓는 것입니다. 책이란 피를 많이 흘려 마르고 굶주린 새들로, 그것들은 살과 피를 가진 존재, 즉 독자를 찾아 그 온기와 생명으로 제 배를 불리고자 미친 듯이 군중 속을 헤매어 다닙니다. 읽혀지지 않는 한, 책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쩌면 반만 존재한다고 해야할까요, 그것은 잠재적인 사물입니다. 마치 연주되지 않은 음악의 악보와 같습니다.
(<마가진 리테레르>, 179호)
무용하고 없어서는 안 되는, 이라고 장 콕토는 시에 대해서 말했다. 작가와 창조적 예술가에게 이 모순적인 상태로부터 유래하는 결과들은 셀 수 없이 많다. 존경받고 사랑받고 칭송되지만, 또한 기생충과 돌팔이 약장수처럼 은밀히 경멸당한다. 음악가, 소설가, 희곡작가 그리고 시인들은 모두 어릿광대들인 것이다! 모순은 경제적인 차원에도 있다. 하나의 작품은 얼마큼의 가치가 있을까? 예술가는 어떻게 그리고 얼마나 대가를 받아야 할까?`이 질문들에, 받아들일 수 있는 대답은 두 가지뿐이다. 전무 아니면 무한. 셰익스피어, 발자크, 발레리에게 어떻게 돈을 지불할 것인가? 그들이 그들의 ‘고객들’에게 제공한 ‘서비스’를 누구도 결코 수치로 환원할 수 없을 것이며, 따라서 그들에게 모든 것을 줄 수는 없으므로, 만일 그들이 우리 곁으로 다시 돌아온다면 최선의 답은 아마도 그들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는 것이 될 것이다.
-본문 68-69쪽에서
한 권의 책은 한 명의 저자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무한한 수의 저자들을 갖는다. 그것은 그 책을 읽은 사람, 읽는 사람, 읽을 사람들 전체가 창조 행위에 있어서 책을 쓴 사람에게 마땅히 보태어지는 까닭이다. 쓰여졌으나 읽히지 않은 책은 온전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반(半)존재만을 가졌을 뿐이다. 그것은 하나의 잠재성이며, 존재하기 위해 열심히 도움을 요청하고 있는, 알맹이가 없이 텅 빈 불행한 존재이다. 작가는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며, 한 권의 책을 출판할 때 그는 익명의 남녀의 무리 속으로 종이로 만들어진 새떼를, 피에 굶주려 야윈 흡혈조들을 풀어놓는 것이다. 그 새들은 닥치는 대로 독자를 찾아 흩어진다. 한 권의 책이 독자를 덮치면, 그것은 곧 독자의 체온과 꿈들로 부푼다. 그것은 활짝 피어나고, 무르익어, 마침내 자기 자신이 된다. 그것은 작가의 의도들과 독자의 환상들이 구별할 수 없게 뒤섞여 있는`―`어린아이의 얼굴에 아빠의 모습과 엄마의 모습이 섞여 있듯이`―`풍부한 상상의 세계이다. 마침내 독서가 끝나면, 소진되어 독자에게서 버림받은 그 책은 제 상상력을 수태시키려 다른 생명을 기다릴 것이며, 그 소명을 실현할 기회를 만나면, 마치 수탉이 무수한 암탉의 뒤꽁무니를 쫓아다니듯, 이 손에서 저 손으로 넘나들 것이다.
-본문 12-13쪽에서
사진가 에밀 졸라
루이스 캐롤에게 있어서 사진은 그가 굉장히 좋아했던 어린 소녀들과의 육체적인 접촉을 대신하는 것이었다. 졸라에게 있어서 그것은 가족의 생활이라는 역활을 한다. 그는 집요하게 ㅡ 거의 게걸스럽게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ㅡ 가정부 쟌느 로즈로의 사진을 찍고, 우리는 그녀의 아름다움이 활짝 피어났다가 세월과 함께 약간 물렁해지는 것을 보게된다. 그에게 있어 사진은 탐험하면서 창조해야 할 처녀지ㅡ 바로 문학이 그러하듯이 ㅡ 가 아니라, 결국 하나의 시선과 하나의 기억을 붙들어 담아두기 위한 편안한 도구였기 때문이다. 졸라가 자신의 머리와 상상력으로 글을 썼던 것이라면, 사진을 찍는 것은 그의 마음으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