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곳이 많이 있습니다
옛날, 우리가 어려웠던 시절, 먹고사는 문제가 가장 시급했던 그 시절,
성당에서 나눠주는 밀가루와 가루우유를 얻어먹으며 하루하루를 버텼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파란 눈의 외국인 선교사들은 그 일 외에,
이 땅에 많은 시설들을 들여왔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대규모 농장을 설립하기도 했고, 학교와 병원을 지어 운영도 하였습니다.
어릴 때,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생각했습니다.
‘먹고사는 문제가 더 시급했을 텐데 왜 학교와 병원을 지어 운영했을까?
그 돈으로 영양이 더 풍부한 음식을 구해주는 게 훨씬 유익하지 않았을까?’
그러다 신부가 되어 볼리비아로 갔습니다.
출발 전 상상했던 것보다 더 가난한 나라였습니다. 옛날에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아이들은 골목에서 공을 차고, 성당 마당에 모여서 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학교에
들어가지 않은 아이들뿐만 아니라, 고등학생들까지 그렇게 지내고 있었습니다.
한국 아이들은 학교에 있을 시간에 그 아이들은 골목이나 집, 성당에 모여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교실도 부족하고, 교사도 부족해서 고등학생들까지도
제대로 된 수업을 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아이들에게 물었습니다.
“학교에서 공부하고 싶지 않니?” 그러자 아이들 대부분이 대답했습니다.
“학교에서 공부하고 싶어요.”
그리고 위령의 날, 공동묘지에 미사를 봉헌하러 갔습니다.
볼리비아도 유럽의 여러 나라들처럼 마을 안에 공동묘지가 있습니다.
그곳에서 뜻밖의 상황을 봤습니다.
거기에는 50~100cm 정도의 작은 무덤들이 엄청나게 많았습니다.
의료시설도 의사도 부족한 그곳에서 아기들은 장염과 같이 별것도 아닌
작은 병에도 쉽게 목숨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들을 보면서 그 옛날 우리나라에 들어온 선교사들이 왜 먼저 학교와 병원을
지어 운영했는지 깨달았습니다. 학교를 지어 아이들이 공부할 수 있도록 했고,
병원을 지어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목숨을 잃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했습니다.
저를 포함한 많은 선교사가 같은 상황을 겪었고, 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여러 원조단체에 도움도 청했습니다. 그러나 볼리비아보다
더 도움이 필요한 곳이 많았기에 우리에게까지 순서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이 세상에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을 도울 수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에게는 별로 큰 것도 아닌 것이 그들에게는 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직접 도와주지는 못하지만,
그들을 직접 도와주는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작은 도움이
그들에게는 큰 힘이 되고, 하느님께는 영광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글 : 서준영 요한 신부 – 대구대교구 해외선교위원장
재물의 가치와 하느님 나라의 가치
몇 년 전, 우연한 기회로 ‘대형교회 분열 사건’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사건 파악과 대응을 위해 교회를 처음 방문했을 때는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교회의 규모에 깜짝 놀랐습니다.
해당 교회는 기존 담임목사를 지지하는 측(교회 측)과
개혁을 요구하는 이들을 지지하는 측(개혁 측)으로 신도들이 양분되어 있었습니다.
이들은 서로 본당과 지역 교회를 차지하기 위해, 상호 간 폭력, 명예훼손,
각종 비방, 예배 방해를 일삼았고, 이로 인해 고소와 소송이 남발하였습니다.
서로 자신들이 ‘진정한 교회’라고 주장하면서도
상대방을 대하는 태도는 전혀 ‘교회스럽지 않아’ 안타까웠습니다.
개혁 측은 ‘담임목사가 교회의 돈을 횡령했고 아들에게 담임목사직을 세습하면서
비리로 축적한 재산을 물려준다.’라는 의혹을 제기하며 개혁을 요구했습니다.
반면 교회 측은 교회의 엄청난 재산을 탐낸 개혁 측 지도부가
이를 나눠 가지기 위해 교회를 분열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어느 측 주장이 진실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결국 분열의 핵심 원인 중 하나가 ‘재물’인 것 같아 씁쓸했습니다.
엄청난 높이의 교회 종탑에서 비싼 넥타이를 맨 목회자가 멀리 십자가를 지고
광야로 힘겹게 걸어가는 예수님을 향해 “어이~ 그쪽은 돈이 안 돼”라고 외치는
모습이 그려진 일간지 만평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재물의 중요성을 매 순간 절실히 느끼고 있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재물의 필요성은 당연한 것이지요. 구약성경에서도
경제적인 부와 물질적 재화를 이를 베푸신 하느님의 축복으로 여기기에,
부와 재화는 그 자체로 비난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의 가치보다 돈의 가치가 최우선이 되는 사회,
인간의 존엄성보다 돈의 지배가 당연시되는 사회가 문제입니다.
이러한 물신주의가 교회 안으로 밀고 들어오게 되면
신앙이 무너지고 교회는 분열할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하느님에게서 받은 재화는 모든 이의 공동 이익과 권리에 속한다고
가르칩니다. 곧, 재물은 개인적인 것이라 해도 ‘사회적 성격’을 지녔기에
다른 사람들, 특히 가난한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서도 적절히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 대형교회가 막대한 재산을 축적하는 것을 넘어,
주변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아낌없이 사용해 하느님 나라의 가치를
조금 더 실천했다면 어땠을까요?
그 대형교회 사건을 보면서 제가 천주교 신자라는 게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은, 아직까지 우리 교회가 돈의 가치보다는
하느님 나라의 가치를 최우선하고 있다는 것의 방증이 아닐까 싶습니다.
글 : 성진욱 베드로 – 법무법인 해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