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챗GPT가 아니라 생기부다
현재의 생기부는 학생 평가자료가 아닌 미사여구 가득한 공문서
생기부의 독립과 교사의 평가권과 작성권을 보장하라!
박새별 전교조광주지부 부지부장
“나는 한국의 고등학교 교사야. 지금부터 내가 제공한 키워드를 바탕으로 학생의 교과세부능력특기사항을 작성해. 모든 문장의 종결어미는 음./함./임. 으로 작성해. 문장에 주어가 드러나지 않게 작성해.”
학교생활기록부 작성 교사 연수에서 배운 문구이다. 이 프롬프트(명령문)를 학생 각각의 키워드를 넣어 챗GPT에 입력하면 그럴싸한 생기부 입력 문구가 완성된다. 예시로 넣은 키워드는 두어 줄 뿐인데 챗GPT는 교육부 입력 지침에 나온 대로 아주 긍정적인 말만 넣어서. 심지어 생기부 스타일로 서술 종결어미까지 맞춰서 클릭 한 번에 거의 완벽한 어구를 만들어냈다. ‘API 키’라는 일종의 자동화 도구를 유료로 사용하면 지금처럼 전교생 300여 명의 키워드를 채팅창에 일일이 넣을 필요도 없고 클릭 한 번에 300명분의 전교생 세부특기사항을 작성할 수 있다고 한다.
이 글은 AI로 생기부 작성에 도움을 받는 교사들을 비난하려는 글이 아니다. 세탁기를 놔두고 고집스럽게 방망이를 들고 냇가에 나가 빨래를 하는 것이 정성스럽다고 칭송만 할 일은 아니다.
실제로 챗GPT에 이미 많은 사람이 전문적으로 생기부 작성 도구를 개발해 두었고, 어느 교육청은 교육청이 직접 지원해 ‘행발자동화 도구’로 교사들이 AI를 이용해 생기부를 쓸 수 있게 사이트를 운영하고 있다. 어떤 디지털교과서는 특장점으로 생기부 자동 작성 기능을 탑재했다고 하고, 생기부 작성 AI 에듀테크 업체도 성업 중이다. 교육청과 학교도 마찬가지로 챗GPT를 이용한 생기부 작성하기 연수가 한창이다.
현재의 생기부는 학생 평가자료가 아닌 미사여구로 가득한 공문서
생기부 쓰는 시간을 줄일 수 있겠다며 감탄하면서도, 어느 순간 ‘이게 다 무슨 부질없는 일인가’하는 생각이 들면서 가슴이 답답해졌다. 말 잔치를 만들기 위해 언어생성형 AI까지 동원해서 작성해야 하는 서류작업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생활기록부는 교사의 평가권이 보장된 평가자료가 아니라 미사여구로 가득한 의무 작성 공문서가 되어버린 지 오래다.
우리나라 고교교육의 최대 목표는 ‘공정한 입시’이다. 원래 생활기록부의 ‘교과세부특기사항’은 특기할 만한 사항이 있는 경우에만 작성하고, 분량도 지금처럼 꽉꽉 채워야 한다는 압박 없이 미사여구 없이 간결하게 작성했다. 그러나 학생부종합전형이 ‘K-입시경쟁’에 종속되면서 생활기록부는 창작과 왜곡의 대상이 되었다.
교육부는 고등학교에서만 의무적으로 모든 학생에게 특기사항을 작성하도록 훈령으로 정하고 있다. 학종이 몇 차례 바뀌면서 생기부는 학종 전형에 반영되는 거의 유일한 자료가 되었다. 심지어 최근에는 내신성적만을 반영하는 교과 전형에도 대학들이 교과세부특기사항을 반영하기 시작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입시의 공정성 때문에 수업 내용과 방식은 동일해야 하고, 모든 평가 방법과 평가 기준도 동일해야 한다. 교사 1명이 많게는 300명의 학생을 가르치는데, 수업과 평가는 전부 똑같이 해야 한다. 그러나 생기부 기록은 모든 학생을 각기 다르게 작성해야 한다. 한 반에 약 30명의 학생이 있는데 각자 다른 내용을 기록하려면, 개인이 드러나는 생기부 용 활동-발표, 보고서, 팀 과제 등을 해야 쓸 말이 생긴다. ‘일타강사’처럼 강의식 수업만 했다간, 생활기록부에 단 한 줄도 쓸 말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학기말엔 학생 1명당 500자 분량의 기록을 만들어서 작성해야 하는 창작과 글쓰기가 시작된다.
반드시 긍정적인 말만 써야 한다. 수업 활동 참여도가 저조한 학생에게도 내용은 의무로 작성해야 하는데 좋은 말을 쓰라고 하니 ‘빠짐없이 수업에 출석하였음’ 등의 창조적 완곡어법을 사용한다. 대학입시에 반영되는 서류인데 학생의 부족한 부분, 앞으로 고쳐야 할 점, 또는 이것만 보충하면 정말 잘될 것 같아서 진심 어린 마음으로 교과에서 보완해야 할 점을 썼다간, 그야말로 학생의 인생을 망치는 악담이 된다.
그리고 생기부는 해당연도가 지나면 학생과 학부모에게 모두 공개되니, 아이가 졸업할 때까지 민원에 시달리게 된다. 이것이 지금 교사들이 갖고 있는 ‘평가권’의 민낯이자 ‘생기부 창작’의 현실이다. 교사 1명이 매 학기 작성하는 생기부 분량이 단편소설 한 권 분량이라고 하니, ‘고통스러운 글쓰기 창작’이라고도 부를만하다.
생기부의 독립과 교사의 평가권·작성권을 보장하라!
다른 국가들(일본, 미국, 독일, 프랑스, 호주)의 사례를 보면 학교생활기록부를 대입전형자료로 활용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또한 학생에 대한 교과 세부능력 서술을 작성하게 하는 경우(프랑스)에도 분량은 1줄 내외로 매우 짧게 미사여구 없이 작성한다. (박균열 외(2014), 학교생활기록부 기재방식 및 교육적 활용에 관한 국제 비교 연구)
이제는 입시와 생기부 문제를 다른 시각으로 다시 접근해야 한다. 학종전형에 공정성과 통일성의 잣대로 조각조각 계속해서 구멍을 기워갈 것이 아니라, 장기적인 시각으로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근본적으로는 학교 수업 내용과 고등학교 생활기록부 내용이 입시에 종속되어 끌려다니지 않고, 고등학교 교육과 그 기록물은 고등학교 과정의 교육목표를 달성해야 한다.
교육부는 교사들에게 챗GPT를 잘 이용해서 여전히 생활기록부를 미사여구로 제한 분량을 꽉꽉 채우는 꿀팁을 알려줄 게 아니라, 학교생활기록부라는 학생평가 기록이 이미 말잔치 뿐인 공문서가 되어버렸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교사의 진정한 평가권을 보장하여 학생에 대한 관찰 내용을 성공적인 대입이 아니라 교육적 목적에 맞게 필요한 만큼만 쓰게 해야 한다.
학생은 생기부에 좋은 내용 기록을 위해 챗GPT의 도움을 받아 과제와 발표를 하고, 선생님은 학생이 챗GPT로 작성한 내용을 또 GPT의 도움을 받아 쓰고 있다. 챗GPT가 이 우스운 상황의 핵심이 아니다. 교사와 학생 양쪽 모두 생기부의 노예이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이 아까운 시간과 노력을 진짜 학습, 진짜 평가에 쏟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