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804
3월22일[사순 제5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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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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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kjnDFFmmR7s
[예수회 김동일 안드레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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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우리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요즘 계속 봉독되는 복음은 예수님과 유다인들 사이에서 벌어진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논란입니다.
이제 지상에 머무실 날은 그리 오래 남지 않았는데, 끝까지 당신을 주님으로 고백하기는커녕 무시하고 죽이려고 돌까지 손에 드는 동족을 향한 예수님의 비애감은 혹독했을 것입니다.
유다인들은 9월 중순에서 10월 중순 사이에 초막절 축제를 성대하게 벌이는데...이 축제 후에 또 하나의 축제가 남아있습니다. 11월 중순부터 12월 중순까지 이어지는 봉헌 축제입니다.
점령군들로 인해 심각하게 훼손된 예루살렘 성전을 유다 마카베오가 독립 항쟁을 벌여 탈환한 뒤 실시된 성전 정화작업의 결실로 새롭게 건립한 제단을 하느님께 봉헌한 것을 기념하는 축제입니다.
존경하는 송봉모 토마스 모어 신부님 표현에 따르면 성전 봉헌 축제가 벌어지고 있던 때는 겨울이었는데, 예수님의 생애에서 겨울이 다가오고 있음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유다 지도자들의 불신과 거부의 찬바람이 이제는 파국을 향해 치달아 내년 봄 파스카에는 예수님이 돌아가실 것임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유다인들의 아레오파고스, 즉 토론의 장소라고 할수 있는 솔로몬 주랑을 거닐자 유다인들은 즉시 예수님을 둘러쌌습니다.
그들의 의도는 오직 하나! 예수님의 입에서 나는 메시아다라는 말을 끌어내어 로마에 고발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신적 정체를 말씀하실 때마다 귀를 막고 듣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신적 정체에 대해 처음부터 무시하고 불신한 것입니다.(송봉모, 요한복음 산책. 제3권, 바오로딸 참조)
유다인들과의 논쟁 중에 예수님께서는 거듭거듭 밝히셨습니다. 당신은 아버지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되어 이 세상에 오신 독생 성자 예수 그리스도이다. 아버지와 당신은 하나이다. 나를 보는 것은 곧 아버지를 보는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유다인들은 끝끝내 예수님을 거부하고 무시하고 손에 돌까지 들었습니다. 눈앞에까지 다가온 구원과 영생을 발로 차버렸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그저 그런 예언자 중에 한 사람입니까? 나와는 전혀 무관한 역사 속의 한 인물입니까? 나의 창조주요 구원자,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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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jFIByArWqB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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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일'은 정확히 어떤 일을 말하는가?>
오늘 복음에서 유다인들은 예수님께 돌을 던지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과 대등하게 여기실 뿐만 아니라 자신을 하느님으로 자처하고 우리도 그리될 수 있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너희 율법에 ‘내가 이르건대 너희는 신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으냐? 폐기될 수 없는 성경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을 신이라고 하였는데 ... 그러나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은 당신이 아버지처럼 하느님이 되시고 우리도 하느님임을 믿게 하는 것이라 하십니다. 이는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동물들의 이름을 지어주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이 일을 믿으면 당신이 아버지한테서 왔음을 믿게 되리라고 하십니다.
엄마가 엄마로 믿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떤 일을 해서가 아니라 이미 우리는 본성상 인간이 되었음을 믿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통제를 심하게 하면서 무언가를 해야만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는 존재라고 믿게 한다면 아이들은 엄마를 엄마로 인정할 수 없어집니다. 엄마는 아기가 탄생했을 때부터 온전한 인간이 되었다고 믿게 해야 합니다.
금쪽같은 내 새끼 182회에 “‘엄마라고? 내 엄마 아니야’ 망상에 빠진 금쪽이는 가족의 존재까지
의심 중”이란 사연이 나왔습니다. 5학년 때까지 인기도 많고 6학년 반장 전까지 흠잡을 게 없던 모범생 아이가 갑자기 환청과 망상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차를 탈 수도 없고 가족을 봐도 도망 다니고 기억력도 3~4주 없었습니다. 틱 증상도 보이고 있습니다. 심지어 가족에게 욕하며 살인자라고까지 말합니다. 병원에 가면서 핸들을 꺾고 탈출하려고까지 하였습니다. 아이는 울다가 웃다가 이상한 소리를 반복하기도 합니다. 엘리베이터에 타서 계속 열었다 닫기를 하면서 밤낮없이 꼬박 6일을 자지 않은 적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밤에 나가서 막 걷다가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엄마 왜 아무도 없을까?”라고 묻기도 합니다. 아이가 정말 엄마 말대로 귀신에 씌운 걸까요? 둘의 대화를 들어봅시다.
“내 엄마를 왜 죽였냐고!”
“기연아 약 먹어”
이 말에서 엄마는 아들이 인간 이하의 수준, 곧 약을 먹어야 정상이 되는 존재로 여기고 있음이
드러납니다. 기연이는 의심의 눈초리로 이렇게 묻습니다.
“... 엄마라고?”
“어?”
“그럼 과거에 뭐 했었는지 말해봐.”
“그럼 기연이 과거에 뭐 했었는지 말해봐.”
“‘뛰어, 뛰어, 뛰어, 뛰어, 뛰어’ 했던 거 기억나? 나 어렸을 때!”
“어, 엄마가 동영상 찍어줬잖아.”
“그때 같이 누구랑 있었지?”
엄마는 바로 대답합니다. 그런데 아이는 단호하게 결론을 내립니다.
“아니야. 내 엄마 아니야!”
기연이는 당연히 아빠도 의심합니다. 형도 의심합니다. 밥을 먹다가 말합니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밥 먹기 힘들다. 진짜 맛없어. 예전에 그 맛이 아니잖아. 다 이상해.다 이상하다고. 나도 이상하게 보이지 엄마?”
엄마가 대답을 망설이자 “왜 대답이 늦어? 아빠, 내가 이상하게 보여?”라고 묻습니다.
“아빤 네가 좀 이상하게 보여.”
“그래? 나도 아빠 이상하게 보이고 형도 이상하게 보이고 엄마도 이상하게 보여.”
사실 아이는 엄마에게 복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이는 엄마에게 자기 마음을 표현해 본 적이
없습니다. 엄마에게 날이 서 있습니다. 자기에게 섭섭하게 했던 것을 그대로 합니다. 엄마가 자기를 온전한 인간으로 취급해주지 않았으니 자신도 엄마에게 그렇게 대하겠다는 것입니다.
엄마는 아이의 문제가 아이 탓이라고 여깁니다. 이미 온전한 인간이 되었다고 믿어주지 않습니다. 저는 다행히 어머니께서 “엄마는 일곱 살까지만 키워주는 거야. 이제부터는 다쳐도 네가 잘못해서
다친 거고, 잘해도 네가 잘해서 잘 된 거야!”라고 해 주셨습니다. 다시 말해 일곱 살에 이미 온전한 성인으로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다고 인정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때는 좀 섭섭하면서도 자존감이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어머니는 아이를 지독히도 통제하려 들며 뭐 말만 하면 “엄마는 네가 심리적으로 많이 아파 보여!”라고 합니다.
엄마는 어렸을 때 말도 못 하고 감정 표현도 못 하고 자기가 미운 아이였습니다. 늘 외로운 아이였습니다. 아이는 무서웠습니다. 사랑받지 못했었습니다. 엄마가 먼저 자존감을 회복해야 합니다. 이미 인간이 되어 저절로 클 수 있는 존재라고 믿게 해야 합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동물들에게 이름을 지어줄 때가 그랬습니다. 아기들이 비록 네 발로 걷더라도 엄마들은 언젠가 당연히 두 발로 걸을 것이라고 믿고 의심하지 않습니다. 또 말을 못하고 옹알이만 해도 언젠가는 저절로 말을 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렇게 믿어줘야 아이들이 불안하지 않습니다. 불안하면 세.육.마.에 빠져 나뿐인 아이, 곧 나쁜 아이가 됩니다.
이렇게 해 주는 것이 곧 어머니의 일이고 그것이 아버지로부터 파견되었다는 증거가 됩니다. 아이는 엄마에게 이런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엄마, 나 믿어줘서 고마워. 평생 믿어줘!”
누군가를 창조자로 믿게 하려면 그 누군가를 에덴동산에 살게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먼저 그렇게 하셨고 가톨릭교회를 그렇게 하라고 파견하셨습니다. 말씀을 받아들이고 성체만 영하면 이미 주님의 자녀이기에 우리는 선악과를 바치고 동물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일만 하면 되는 존재라고 알려줘야 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을 통해 사람들은 우리가 창조자로부터 파견된 존재임을 저절로 믿게 될 것입니다. 불안이 아니라 평화를 주는 존재만이 아버지에게서 파견된 어머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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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언론은 제2의 신이다.(Mass Media is the second God.)'이란 말이 있습니다. 언론이 현대 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이 말은 언론이 정보를 전달하는 것뿐만 아니라 사회적 가치관을 형성하고 영향을 미치는 데 큰 역할을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말은 언론이 사회적으로 매우 영향력이 크고 중요한 존재임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될 수 있습니다. 언론은 사람들에게 정보를 전달하는 것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의견을 형성하고 사회적 논의를 이끌어내는 역할을 합니다. 또한, 언론은 권력과 통제의 수단으로도 작용할 수 있으며, 이는 언론이 사회 전반에 미치는 영향력을 더욱 부각시킵니다. 하지만, 이러한 영향력에는 부정적인 면도 존재합니다. 언론이 편향적이거나 왜곡된 정보를 전달함으로써 사회적 분열을 야기하거나 잘못된 사회적 가치관을 형성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언론이 권력에 의해 조작되거나 통제되는 경우도 있어서, 그 영향력이 악용될 우려가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언론은 제2의 신이다"는 표현은 언론이 현대 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으로, 그 영향력과 책임성을 함께 고려해야 합니다.
편식과 과식은 건강에 해롭습니다. 언론에 의해서 잘못된 판단을 하지 않기 위해서는, 언론에 따라서 맹목적으로 판단하지 않기 위해서는 편향된 언론은 아닌지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색안경을 쓰고 보면 세상이 그렇게 보입니다. 파란색 안경을 쓰면 파랗게 보이고, 빨간색 안경을 쓰면 빨갛게 보이기 마련입니다. 권력에 의해서 사유화되는 언론이 가지는 피해는 상상을 초월하기도 합니다. 수많은 유대인들이 권력과 야합한 언론에 의해서 단죄되었고, 죽어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중에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인에게 돌을 던져라.’라고 하셨습니다. 언론의 힘에 의해서 아무런 죄의식 없이 사람들은 유대인들에게 돌을 던졌습니다. ‘매카시 광풍’이 있었습니다. 아무런 근거도 없이, 증거도 없이 매카시는 ‘우리 사회에는 공산주의자들이 있다.’라고 선동하였습니다. 언론은 그것을 공개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아무런 죄도 없이 공산주의자로 몰려서 심판을 받아야 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는 사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가 거룩하시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라고 하셨습니다. 언론의 힘에 의해서 사람들의 거룩함이 상실되고 말았습니다. 대한민국의 언론도 권력과 야합했던 역사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 폭도들이 소요를 일으켰다.’라고 보도했습니다. 합리적인 판단과 균형 잡힌 판단을 하기 위해서는 언론의 편식과 과식을 피해야 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예레미야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의로운 이를 시험하시고 마음과 속을 꿰뚫어 보시는 만군의 주님 당신께 제 송사를 맡겨 드렸으니 당신께서 저들에게 복수하시는 것을 보게 해 주소서.”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을 옳은 길로 인도하였지만 권력은 예레미야 예언자를 거짓 예언자라고 선동하였습니다. 선한 일을 한 사람이 단죄를 받고, 악인들이 부와 권력을 누리는 세상이라고 한탄하고 있습니다. 예언자들의 시대에도 권력에 야합한 언론은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아버지의 분부에 따라 너희에게 좋은 일을 많이 보여 주었다. 그 가운데에서 어떤 일로 나에게 돌을 던지려고 하느냐?”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많은 표징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을 단죄하고 있습니다.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거룩하신 분’이라고 외쳤던 군중들은 언론의 선동에 따라서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외쳤습니다.
예수님의 시대에도 깨어 있는 시민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요한은 표징을 하나도 일으키지 않았지만, 그가 저분에 관하여 한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우리가 진정을 따라야 할 신은 ‘언론’이 아닙니다. 우리가 진정을 따라야 할 신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믿어야 할 분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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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0,31-42: 요르단강 건너편으로 가시어
“나는 아버지의 분부에 따라 너희에게 좋은 일을 많이 보여 주었다. 그 가운데에서 어떤 일로 나에게 돌을 던지려고 하느냐?”(32절) “좋은 일을 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을 모독하였기 때문에 당신에게 돌을 던지려는 것이오. 당신은 사람이면서 하느님으로 자처하고 있소.”(33절) 그들은 그분이 하느님이심은 알지 못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처음에 인간이었다가 나중에 하느님이 된 분이 아니다. 그분은 처음부터 하느님이셨고, 나중에 인간이 되셨다. 하느님이 인간이 되신 것은 우리 인간을 당신과 같이 되게 하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말씀에 참여함으로써 하느님과 같이 되고, 아들과의 친교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들이 된다.
“성경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을 신이라고 하였는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시어 이 세상에 보내신 내가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하였다 해서, ‘당신은 하느님을 모독하고 있소.’하고 말할 수 있느냐?”(35-36절) 사람들이 하느님과 같이 될 수 있도록 하느님의 말씀이 세상에 오셨다면, 하느님과 함께 계시는 바로 그 하느님의 말씀이 하느님이 아닌 다른 무엇일 수 있는가?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 인간이 신(神)이 된다면, 그들이 참여하는 그분이 하느님이 아닐 수 있는가? 우리는 빛에 다가가 빛을 받고 하느님의 자녀들이 된다. 그러나 빛에서 물러나면 어둠 속에 있는 자가 된다.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를 신들이 되게 한다면 하느님의 말씀은 당연히 하느님이시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37-38절)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모든 일은 바로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이었으며 그분의 뜻을 온전히 이루신 것이었다. 그분이 하신 일들은 모두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일이었다. 그분이 아버지의 일들을 하시기 때문에 그분이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증거이다. 아들의 일은 아버지의 일임을 알아야 한다. 유다인들은 다시 예수님을 잡으려 하였지만, 그들의 손에서 벗어나 “요르단 강 건너편, 요한이 전에 세례를 주던 곳으로 물러가시어 그곳에 머무르셨다.”(40절) 예수님께서 유다를 떠나 다른 민족들에게로 가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유다인들에게서 다른 민족들로 건너가셨고, “많은 사람이 그분께 몰려와” 그리스도에 관하여 한 말을 듣고 “예수님을 믿었다.”(41-42절 참조) 우리도 항상 아버지의 일을 살면서 그분의 사랑받는 자녀들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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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미리내 성모성심 수녀회)]
성주간을 앞두고 오늘 독서와 복음은 ‘폭력’에 대한 내용들을 전합니다. 독서는 예레미야 예언자를 향하여 주변의 모든 이가 적대감을 드러내는 내용으로 시작됩니다. “군중(직역하면 ‘많은 사람’)이 수군대는 소리가 들립니다. …… 가까운 친구들마저 모두, 제가 쓰러지기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복음도 팽팽한 긴장과 불안으로 시작됩니다. “그때에 유다인들이 돌을 집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하였다.” 이유는 바로 전에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요한 10,30)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도발과 위협의 긴장감 속에서 예수님께서 물으십니다. “어떤 일로 나에게 돌을 던지려고 하느냐?” 유다인들은 “하느님을 모독하였기 때문에”라고 하면서 그 ‘모독’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제시합니다. “당신은 사람이면서 하느님으로 자처하고 있소.” 모독이라는 낱말은 그리스 말로 ‘블라스페미아’로, 상대의 명예를 훼손하고 치욕스럽게 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과연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명예를 훼손하시거나 치욕스럽게 하신 일이 있는지가 판단의 기준이 될 터인데, 그분께서는 오히려 당신께서 행하신 모든 기적과 가르침이 아버지를 증언하고 드러낸 일이었음을 주장하십니다. 이스라엘의 기득권자들을 긴장시키고 불안하게 한 사건들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음을 역으로 환기시키고 계신 것입니다.
새로움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은 언제나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여 살기를 내뿜습니다. 논리가 통하지 않으니 물리적 학대와 폭력으로 해결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다르지 않습니다. 누군가를 향하여 돌을 던지려 아무도 모르게 손을 움켜쥔 채 살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손에 움켜쥐고 있던 돌을 조용히 내려놓을 시간입니다. 성주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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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좋은 일>
“유다인들이 돌을 집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아버지의 분부에 따라 너희에게 좋은 일을 많이 보여 주었다. 그 가운데에서 어떤 일로 나에게 돌을 던지려고 하느냐?’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좋은 일을 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을 모독하였기 때문에 당신에게 돌을 던지려는 것이오. 당신은 사람이면서 하느님으로 자처하고 있소.’ 하고 대답하자, ..."(요한 10,31-33)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 그러면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0,37-38)
여기서 ‘좋은 일’은 ‘선한 일’, 즉 ‘하느님의 일’을 뜻합니다. “좋은 일을 하였기 때문이 아니라”라고 번역되어 있는 유대인들의 말은, “당신이 하는 일은 좋은 일로 보이지 않는다.” ㅣ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으로 보이지도 않고,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만 하기 때문에 돌을 던지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앞의 30절에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 말씀을 듣자마자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앞의 5장에도 비슷한 상황과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그러한 일을 하셨다고 하여, 그분을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이 때문에 유다인들은 더욱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다. 그분께서 안식일을 어기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당신 아버지라고 하시면서 당신 자신을 하느님과 대등하게 만드셨기 때문이다."(요한 5,16-18)
“나에게는 요한의 증언보다 더 큰 증언이 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완수하도록 맡기신 일들이다. 그래서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이다.”(요한 5,36)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는 일을 먼저 보라고 사람들을 타이르십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들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메시아이시며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증명하는 증거입니다. 따라서 아버지와 당신의 관계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은 하느님을 모독한 일이 아닌 것이 됩니다. 그렇지만 그 일들이 하느님의 일이고 인간들을 구원하는 일이라는 것을 믿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과 일을 부정하기만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런 자들은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습니다. 이 논쟁에서, 앞의 9장에 있는, 앞을 못 보다가 예수님 덕분에 눈을 뜨게 된 사람의 말이 연상됩니다.
“바리사이들은 눈이 멀었던 그 사람을 다시 불러,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시오. 우리는 그자가 죄인임을 알고 있소.’ 하고 말하였다. 그 사람이 대답하였다. ‘그분이 죄인인지 아닌지 저는 모릅니다. 그러나 이 한 가지, 제가 눈이 멀었는데 이제는 보게 되었다는 것은 압니다.’"(요한 9,24-25)
“그분이 제 눈을 뜨게 해 주셨는데 여러분은 그분이 어디에서 오셨는지 모르신다니, 그것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죄인들의 말을 들어 주지 않으신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러나 누가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뜻을 실천하면, 그 사람의 말은 들어 주십니다. 태어날 때부터 눈이 먼 사람의 눈을 누가 뜨게 해 주었다는 말을 일찍이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분이 하느님에게서 오지 않으셨으면 아무것도 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요한 9,30-33)
기적을 체험한 당사자가 “이 일은 분명히 하느님의 기적이다.”라고 증언하고, 또 “하느님의 기적을 일으키신 분이니 그분은 하느님에게서 오신 분이다.”라고 변호하는데, 유대인들은 기적 자체를 부정합니다. 그러면서 당사자의 증언을 인정하지 않고, 정당한 증인인 그를 ‘밖으로’ 쫓아냅니다. <‘밖으로’ 쫓아냈다는 말은, 회당에서 쫓아냈다는 뜻이고, 유대교 공동체에서 추방했다는 뜻입니다. 요즘 용어로 말하면 그를 ‘파문’한 것입니다.>
그 사람은 자기가 직접 체험한 일이기 때문에 파문당하는 것을 각오하면서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변호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그의 믿음은(확신은) 논리가 아니라 체험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는 한낱 사람일 뿐이다.” 라는 생각에 단단히 사로잡혀 있어서, 기적을 체험한 당사자가 ‘하느님의 일’이라고 증언하는데도 “그것은 속임수일 뿐이다.”라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도 그랬습니다.
“나리, 저 사기꾼이 살아 있을 때, ‘나는 사흘 만에 되살아날 것이다.’ 하고 말한 것을 저희는 기억합니다. 그러니 셋째 날까지 무덤을 지키도록 명령하십시오.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훔쳐 내고서는, ‘그분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다.’ 하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이 마지막 기만이 처음 것보다 더 해로울 것입니다."(마태 27,63-64)
그런데 사실, 오늘날의 우리가 옛날의 유대인들을 비판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 아니고, “지금 나는(우리는) 예수님께서 나를(우리를) 위해서 하시는 일을 얼마나 잘 믿고, 잘 받아들이고 있는가?”, 바로 그것이 중요합니다. 기적을 직접 체험했으면서도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하거나 또는 운이 좋았다고만 생각하는 경우도 있고, 다른 사람의 증언을 들어도 혼자만의 착각이나 망상이라고 비웃는 경우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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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겨냥한 유다인들의 집단 폭력의 곤경에 빠지십니다.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을 드러내시는 예수님의 ‘좋은 일’이 오히려 당대의 종교 관습과 제도에서 비롯된 정치 세력에게 위협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유다인들은 하느님에게서 비롯된 영원한 생명을 알려 주시는 예수님의 ‘좋은 일’이 두려워 그분을 신성 모독으로 단죄하며 죽이려 합니다.
그러나 돌을 든 유다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확실히 알려 주십니다. “내가 이르건대 너희는 신이며, 모두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이다.”(시편 82[81],6)
예수님께서는 모든 이의 신성에 관하여 말씀하시면서 믿는 이가 지니는 신적인 권위는 하느님께서 증명하셨다고 강조하십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율법을 인용하신 것은 유다인들과 대립하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유다인을 넘어 세상 모든 이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면 신이 되고 신의 자녀가 될 수 있음을 일깨워 주시려는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하느님의 자녀’의 지위로 올려놓으십니다.
세례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분부에 따라 하신 좋은 일’을 해야 합니다. “나를 보내신 분께서는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혼자 버려두지 않으신다. 내가 언제나 그분 마음에 드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요한 8,29)
사순 시기에 하느님의 자녀로서 마땅히 해야 할 ‘좋은 일’이란 내 뜻대로가 아니라 하느님 마음에 드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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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김훈일 세례자요한 신부님]
<불신앙>
같은 하느님을 믿으면서도 그 신앙의 여정은 제각각입니다. 신앙생활의 내용을 살펴보면 네 가지 모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첫째 성당을 다니고 있지만 불신앙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어려움에 닥치면 하느님께 의지하기보다 무당들을 찾아 점을 보거나 부적을 씁니다.
두 번째로 명목상의 신앙인들입니다. 기본적인 의무만 다할 뿐 세상에서의 삶과 성당에서의 모습이 전혀 다른 사람들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변화되지 못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세 번째는 기적을 찾는 신앙인들입니다. 늘 큰 기적이 일어났다고 하는 곳이나 좋은 피정만을 찾아서 자극을 받으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느님을 체험한 신앙인들입니다. 하느님을 만난 그리스도인은 많은 신앙 경험을 통해 더 이상 보지 않고도 전적으로 하느님께 의탁하는 사람들입니다.
아프리카의 어느 원주민들은 물살이 센 강을 건널 때 어깨에 큰 돌을 메고 건넌다고 합니다. 그 무거운 돌이 무게중심이 되어 물살에 떠내려가지 않고 무사히 건널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삶이 때로는 우리에게 부담이 되고 무겁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구세주라는 사실을 의심 없이 믿고, 내 삶의 무게중심으로 살아간다면 험한 세상살이에 휩싸이지 않고 바르게 인생길을 걸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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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상우 바오로 신부님]
사순 제5주간에 읽게 되는 복음은 유다인들과 예수님 사이의 긴장 관계가 점차 고조되는 방향으로 진행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돌을 집어 던지려고까지 합니다. 이 같은 위급한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다음의 긴 담화를 하시는 모습이 그려집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 그러면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
유다인들은 왜 예수님께 돌을 던지려고 합니까? 요한 복음에 나오는 유다인들은 그 이유를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모독하셨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사람이면서 하느님이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이는 신성 모독이라는 논리입니다.
요한 복음서에서는 ‘기적’이라는 낱말 대신, ‘표징’이라는 낱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다른 공관 복음서들이 예수님의 ‘기적’ 행위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다면, 요한 복음서는 기적이 ‘표징’으로서 담고 있는 의미에 더 집중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보고, 그분께서 하느님께서 파견하신 분이심을 깨달을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일상에서 겪는 여러 가지 일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찾고자 합니다.
그 작은 일들 안에서 하느님의 표징을 찾으려 끊임없이 애를 씁니다. 우리 각자에게 선물처럼 주어진 오늘 하루의 일들 안에서 하느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려는지 그 의미를 곰곰이, 차분하게 성찰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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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좋은 일을 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을 모독하였기 때문에 돌을 던지는 것이오. 당신은 사람이면서 하느님으로 자처하고 있소.”(10,33)
가끔 방송 매체에 ‘○○ 끝장 토론’이란 타이틀을 달고 하는 프로그램이 있더군요. 결론을 짓자는 의미이지만 대부분 자기주장을 일방적으로 토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더라고요. 계속된 예수님과 유대인 사이의 논쟁은 오늘도 이어지는데, 그 발단은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돌을 던지려고 하자, 예수님께서 “나는 아버지의 분부에 따라 너희에게 좋은 일을 많이 보여 주었다. 그 가운데에서 어떤 일로 나에게 돌을 던지려고 하느냐?”(10,32)는 물음에 대한 답변 형식으로 유대인들의 주장이 쏟아집니다. “좋은 일을 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을 모독하였기 때문에 돌을 던지려는 것이오. 당신은 사람이면서 하느님으로 자처하고 있소.”(10,33)라는 말로 자신들이 하려는 행위의 정당성을 주장합니다. 한 가지 사실에 대해 전혀 다른 시선과 접근임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의문은 왜 예수님은 그들의 속내를 꿰뚫어 알고 계심에도 굳이 설명하고 설득하려 했을까? 결론을 낼 수 없는, 어떤 교집합도 타협점도 찾을 수 없는 영원한 평행선의 관계인데 왜!, 의문의 결론은 결국 그들에게 향한 증언이라기보다 바로 당신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인, 우리에게 향해 하신 말씀임을 “그곳에서(요르단강 건너편에서;10,39 참조)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었다.” (10,42)라는 언급에서 해답을 얻습니다.
“그 가운에서 어떤 일로 나에게 돌을 던지려고 하느냐?”(10,31) 그 까닭은 바로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모독하고 하느님이신 것처럼 스스로 자처하였기 때문에 돌을 던지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일찍부터 “내가 내 자신을 위하여 증언하면 내 증언은 유효하지 못하며 내가 누구인가를 증언해 주는 것은 ‘내가 하고 있는 일과 나를 보내신 아버지와 성경이 자신을 증언해 준다.”(5,36.37.39) 하고 밝히셨음에도 그들은 이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를 두고 예수님은 “너희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5,42)라고 단정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재차 예수님은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을 믿어라. 그러면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10,38) 하고 말씀하십니다. 흔히 자녀는 부모의 말을 닮기보다 행동을 보고 닮는다, 는 말처럼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파견되셔서 늘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하며,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5,19)고 선언하셨으며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10,38)라는 말씀을 통해서 아버지와 아들이신 당신은 하나임을 드러내십니다.
예수님의 부활 이후,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은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이며 그리스도의 형제이다, 는 사실을 인정하기에 어느 그리스도인이 “나는 하느님의 아들(딸)이다.”(10,36)고 말한다고 해서 돌을 집어 던질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하는 일이 우리가 하느님의 아들과 딸임을 증언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를 믿지 않은 사람들에게서 돌은 아니더라도 비난과 핀잔의 소리는 면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다른 한 편에선 예수님께 돌을 집어 던지려 했지만, 그들의 손에서 벗어 나신 예수님께 몰려와서 예수님이 하신 일, 표징을 보고 믿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우리도 오늘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통해 그분께 몰려가 당신은 참 하느님이시며 참사람임을 고백하는 하루가 됩시다. “주님, 당신 말씀은 영이며 생명이시옵니다. 당신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나이다.” (복음환호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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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느 자매님한테서 들은 말입니다.
“신부님, 저는 사는 게 재미없어요. 매일 매일 똑같은 삶의 반복이에요. 지루하고 무얼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중년의 나이를 넘기면서 이런 말씀 하시는 분이 많아진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지루함과 무기력함이 과연 나이 탓일까요? 오히려 삶의 태도에서 올 때가 많습니다. 어떤 회합에서 “그거 내가 다 해봤는데 소용없어요.”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정말로 소용없는 것이 아닙니다. 새로운 것이 없다는 고정관념 때문에 그 어떤 것도 새롭지 않은 것이고, 현재의 삶을 과거의 방식대로만 살려고 하기에 지루할 뿐입니다.
어떻게 삶을 대하는가가 중요했습니다. 사람들은 제게 “그렇게 책 많이 읽으면 지루하지 않으세요?”라고 물으십니다. 저 역시 학창 시절에는 책 읽는 것을 지루하게 여겼고 또 재미없어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너무 재미있습니다. 공부가 이렇게 재미있는지 중년의 나이가 되어서 비로소 깨달은 것입니다.
주님을 받아들이는 마음도 그렇지 않을까요? 신앙 생활하는 것이 지루하다고 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과거의 한 체험을 계속 가지고 계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렇게 과거에 머무는 것이 아닌, 너무 재미있고 신날 것이라며 미래를 바라보며 살 수 있어야 합니다. 나이 먹는 것은 변함없는 진리이지만, 삶의 태도를 바꿔서 멋지게 사는 것은 언제든지 내가 만들어 갈 수 있지 않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무엄하게도 주님께 돌을 던지려는 유다인들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분명 좋은 일을 많이 보여 주었지만, 그들은 그 일들은 보려고 하지 않고 자기 방식만을 고집하고 있습니다. 삶의 태도를 바꾸지 않고 계속해서 사람들을 죄인으로만 만들고 있고, 심지어 하느님마저도 죄인으로 만드는 어리석음 안에 머뭅니다.
크고 전능하신 주님의 다양한 활동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을 작고 부족한 나의 머릿속에 가두어서는 안 됩니다. 이런 삶의 태도를 바꿀 수 있을 때, 일상 안에서 멋지고 신나는 삶을 살아가면서 주님과 함께하는 미래를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당시의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합니다. 거부하는 몸짓이었고, 죽이려는 적의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직접 모범으로 보여주셨던 사랑으로 주님을 잡아야 합니다. 이런 믿음을 통해서만 우리는 살 수 있습니다. 재미없는 삶이 아닌 너무나 신나고 재미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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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느님과 나>
요한 10,31-42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배척하다)
그때에 유다인들이 돌을 집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아버지의 분부에 따라 너희에게 좋은 일을 많이 보여 주었다. 그 가운데에서 어떤 일로 나에게 돌을 던지려고 하느냐?”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좋은 일을 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을 모독하였기 때문에 당신에게 돌을 던지려는 것이오. 당신은 사람이면서 하느님으로 자처하고 있소.”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율법에 ‘내가 이르건대 너희는 신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느냐? 폐기될 수 없는 성경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을 신이라고 하였는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시어 이 세상에 보내신 내가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하였다 해서, ‘당신은 하느님을 모독하고 있소.’ 하고 말할 수 있느냐?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 그러면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 그러자 유다인들이 다시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손을 벗어나셨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요르단 강 건너편, 요한이 전에 세례를 주던 곳으로 물러가시어 그곳에 머무르셨다. 그러자 많은 사람이 그분께 몰려와 서로 말하였다. “요한은 표징을 하나도 일으키지 않았지만, 그가 저분에 관하여 한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그곳에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었다.
<하느님과 나>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시어 이 세상에 보내신 나”(요한 10,36)
하느님께서 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계시는 분입니다
계시니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 계시니 내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나를 있게 하시는 분입니다
나를 있게 하시니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당신 닮게 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나를 당신 닮게 하시는 분입니다
나를 당신 닮게 하시니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이 세상에 보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나를 이 세상에 보내시는 분입니다
나를 이 세상에 보내시니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 계시니 내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니 내가 그분을 닮습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시니 내가 이 세상에 옵니다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보내신 내가 있는 만큼
나를 보내신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계십니다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보내신 내가 하는 만큼
나를 보내신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서 하십니다
하느님 아니시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니듯이
나 아니면 하느님께서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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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우리는 주님의 연장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엉뚱한 소리를 하는 사람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를 무시하고 지나칠 때도 있지만 가끔은 버릇을 고쳐 주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아니 버릇을 고쳐 주기보다도 혼을 내주고 싶은 마음이 더 큽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엉뚱한 소리를 통해서도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남을 탓하지 않고 그를 품어줄 수 있는 마음을 키우지 못한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로 삼게 됩니다. 남의 허물과 부족함을 보기보다 자신의 죄를 깨닫고 성찰합니다. 그야말로 회개의 삶을 삽니다.
유다인들은 돌을 집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행세를 하며 신성을 모독하였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유다인들이 그렇게 행동한 것도 이해가 됩니다. 사람은 사람이고, 하느님은 하느님이기 때문입니다. 감히 인간 주제에 하느님의 행세를 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사실 인간이 아무리 훌륭해도 하느님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 예수가 하느님의 행세를 하였으니, 돌을 맞을 일을 한 것입니다. 자업자득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하느님이 될 수는 없지만, 하느님께서 인간이 될 수는 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인간으로 내려오신 것입니다. 이를 육화의 신비, 강생의 신비라고 합니다. 강생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인간이 되시기까지 한 사랑의 절정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같이 완전할 수는 없지만 완전하신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완전함으로 이끌기 위해서 먼저 우리의 처지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한없는 사랑으로 아버지 하느님의 일을 하심으로써 아버지께서 예수님 안에 계시고 예수님께서 하느님 안에 계심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사랑으로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에페 1,4) 그러므로 우리도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하고 이웃 사랑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증언해야 합니다.
분명, 사람이 하느님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하느님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하느님과 하나가 되었다면 영적으로 하느님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사람답게 살수 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다가와 구원의 희망을 안겨 주었듯이 우리도 사랑으로 이웃에게 다가가서 기쁨과 평화, 위로와 희망, 구원을 주어야 합니다.
그리한다면 바로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이요, 신입니다.’(요한10,35) 주님께서는 당신의 구원사업을 하시되 우리를 도구로 삼으시고 우리를 기대하고 희망하십니다. 우리는 주님의 연장입니다.
주님의 일을 함으로써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물고, 주님께서 내 안에 계심을 증언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이는 행복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전하는 이는 더 행복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행복 하십시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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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 중심의 삶>
-내적 힘의 원천인 말씀과 믿음-
“저의 힘이신 주님,
당신을 사랑하나이다.
주님은 저의 반석, 저의 산성,
저의 구원자시옵니다.”(시편 18,2-3ㄱ)
브라질 교회의 6차 사회주간(3,20-22)에 교황님 보내 메시지 “가난한 이들 안에서 예수님 얼굴을 보도록 하자”라는 말씀과 한 이민자를 품에 안으며 하신 솔직한 위로의 말씀이 감동이었습니다.
“나 역시 더 좋은 미래를 찾아 떠난 이민자들의 아이였다."(I too am a child of migrants who set out in search of a better future.)
바로 이런 솔직함이 교황님의 위대한 점입니다. 하느님 떠난 인간 영혼은, 정신은, 마음은 얼마나 허약한지요. 생명이자 빛이신, 꿈이자 희망이신 주님을 잊을 때, 잃을 때 급속히 어둠 속에 무너지는 사람들입니다. 이래서 인간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이라 하는 것입니다. 어제 방문했던 분과의 대화가 잊혀지지 않습니다.
“진리대로 산다는 것이 참 힘듭니다.”
“힘들 것 없습니다. 진리를 사랑하십시오. 예수님이 진리입니다. 진리가 너희를 참으로 자유롭게 합니다. 진리이신 예수님을 사랑할 때 날로 우리도 예수님을 닮아 진리가 되어가고 자유로워집니다. 더불어 튼튼해지는 영혼이요 정신이요 마음입니다. 참으로 진리이신 주님을 사랑할 때 희망과 기쁨, 감사가 뒤따를 것입니다.”
진리의 사람, 말씀의 사람, 하느님의 사람이 제1독서의 예레미야 예언자와 요한복음의 예수님입니다. 두분 다 무지의 악한 세력에 포위되어 악전고투의 절망적 상황입니다만, 하느님 중심의 믿음의 삶은 참으로 견고합니다. 내적 힘의 원천은 바로 말씀과 믿음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예레미야의 다섯 번째 고백에 속합니다. 오늘 예레미야서 독서 앞부분은 생략됩니다만 아까워 인용합니다.
“‘그분을 기억하지 않고, 더 이상 말하지 않으리라.’ 작정하여도, 뼛속에 가두어 둔 주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니 제가 그것을 간직하기에 지쳐 더 이상 견뎌내지 못하겠습니다.”
바로 이 말씀이 예레미야의 내적 힘의 원천임을 봅니다. 말씀의 힘은 믿음의 힘입니다. “마고로 비싸빕”은 예레미야의 별명입니다. “사방에서 공포가!”라는 뜻인데 이 말을 외쳤기에 이런 별명이 붙은 듯 합니다. 참으로 가까운 친구들 마져 예레미야가 쓰러지기만 바라는 악전고투의 상황입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을 돌파해 나갈 수 있음은 바로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예레미야의 주님 고백과 하느님 찬양이 우리에게도 용기백배 힘을 줍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저와 힘센 용사처럼 제 곁에 계시니 저를 박해하는 자들이 우세하지 못하리이다. 의로운 이를 시험하시고, 마음과 속을 꿰뚫어 보시는 주님, 당신께 제 송사를 맡겨 드립니다.”
하느님 고백에 곧장 이어지는 하느님 찬양입니다.
“주님께 노래불러라!
주님을 찬양하여라!
그분께서 가난한 이들의 목숨을 악인들의 손에서 건지셨다.”
가난한 영혼들을 참으로 강하게 하는 것은 하느님 찬양뿐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 찬양과 더불어 날로 견고해지는 하느님 중심의 믿음의 삶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평생 하루하루 날마다 끊임없이 찬양과 감사의 시편성무일도를 통해 주님 향한 믿음과 희망을, 사랑을 고백합니다. 고백과 함께 가는 믿음이요 내적 힘입니다.
예레미야 예언자의 사면초가의 상황은 그대로 예수님에게도 재현됩니다. 흡사 무지의 악과 싸우는 모습입니다. 유다인들은 하느님을 모독한다며 예수님에게 돌을 던지려 합니다. 무지에 닫힌 마음의 눈은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시어 세상에 보내신 예수님을 알아 보지 못합니다. 주님은 무지의 편견에 눈먼 유다인들을 다시 일깨우십니다. 그대로 오늘의 우리를 향한 말씀같습니다.
“내가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 그러면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
새삼 강조되는 믿음입니다. 무지에 대한 답은 믿음뿐임을 깨닫습니다.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주님의 무한한 사랑의 업적을 통해 주님을 깨달아 알 수 있기에 믿음이 우선입니다. 믿으면 압니다. 믿으면 보입니다. 얼마전 써놓은 “모든 날이 다 좋다”라는 자작 고백시도 생각납니다.
“햇빛 밝은 날은
햇빛 밝은 날대로
비오는 날은
비오는 날대로
흐린 날은
흐린 날대로
모든 날이 다 좋다
주님 늘 힘께 계시기에!”
-2023.1.21.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 매일매일이 좋은날이라는 고백 역시 낙관적 믿음의 표현입니다. 이런 믿음 또한 은총이요 믿음과 더불어 주님을 깨달아 알아 가면서 무지로부터의 해방이요 날로 자유로워지는 영혼입니다. 예수님은 이들 적대자들을 피신하지만 눈밝은 이들은 곳곳에서 주님을 찾아와 “요한은 표징을 하나도 일으키시지 않았지만, 그가 저분에 관하여 한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고백하며 믿습니다.
결국은 믿음입니다. “믿음으로”라는 성가 480장도 한번 힘차게 불러보시기 바랍니다. 하느님 중심의 믿음이 우리를 살게 하는 내적 힘의 원천입니다. 말씀을 사랑하여 말씀을 실천할 때 더불어 굳건해지는 하느님 중심의 믿음의 은총입니다. 예레미야와 예수님은 우리 믿음의 모범입니다. 오늘 다산의 어록과 중용에 나오는 맹자의 말씀 중 덕은 믿음으로 바꿔읽어도 무방하겠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유익한 공부는 덕을 쌓아가는 것이다. 덕이 있는 사람곁에는 반드시 사람들이 모인다.”-다산
“큰덕을 지닌 사람은 반드시 지위를 얻고, 녹을 받고, 명성을 얻고, 장수를 누린다. 큰덕을 지닌 사람은 반드시 천명을 얻는다.”-중용
믿음의 큰 덕을 쌓아가는 공부가 진짜 공부입니다. 은총과 함께 가는 노력입니다. 믿음의 은총과 더불어 평소 믿음의 훈련이, 노력이 절대적임을 깨닫습니다. 날마다 온맘을 다해 바치는 공동전례기도의 선택과 훈련의 습관화와 더불어 날로 성장, 성숙해가는 은총의 믿음입니다.
우리의 모든 수행생활에서 은총은 전제로하고 한결같은, 끊임없는 선택과 훈련, 습관화가 얼마나 절대적인지 깨닫습니다. 좋은 덕목의 자발적 선택과 더불어 훈련과 습관이 영성생활에 참으로 긴요합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하느님 중심의 믿음의 삶에 결정적 도움을 줍니다.
“곤경중에 나 주님 부르고,
하느님께 도움 청하였더니,
당신 성전에서 내 목소리 들으셨네.
부르짖는 내 소리 그분 귀에 다다랐네.“(시편18,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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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목적인 사랑과 바탕인 믿음>
“군중이 수군대는 소리가 들립니다. ‘저기 마고르 미싸빕이 지나간다! 그를 고발하여라. 우리도 그를 고발하겠다.’ 그러나 주님께서 힘센 용사처럼 제 곁에 계시니 저를 박해하는 자들이 비틀거리고 우세하지 못하리이다.”
‘마고르 미싸빕’은 사면초가 상태인 사람, 외톨이, 요즘 말로 왕따란 뜻입니다. 전에도 이에 대해 묵상하면서 저의 비겁함을 고백한 적이 있는데 오늘은 저의 비겁함의 고백보다는 ‘마고르 미싸빕’의 대단함을,
그래서 우리도 ‘마고르 미싸빕’이 되어야 함을 묵상하고 나누려고 합니다.
사실 원하지도 않는 외톨이, 왕따가 있고, 우리가 이런 사람은 되지 말아야겠지요.
그런데 오늘 복음의 예수님을 상징하는 ‘마고르 미싸빕’은 의로운 외톨이요 더 나아가 거룩한 왕따이기에 본받아야 하는 것이지요.
인간의 가장 큰 두려움과 불안은 혼자 되는 것입니다. 죽음이 가장 큰 두려움과 불안일 수도 있지만 너무 큰 고통 앞에서 죽음을 선택하는 사람이 있는 것을 보면
고통 그 자체가 가장 큰 두려움과 불안은 아닌 것 같습니다.
사실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도 죽고 나면 모두와 헤어지고 자기만 영원히 혼자 되는 걸까 봐 그런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혼자 되는 것이 두렵고 불안하지만 그것도 버림받아 혼자 될 때 더 두렵고 불안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랑하는 사람이 병이나 사고로 죽어 혼자 되는 것도 두렵지만 사랑하는 이가 나를 버려버려서 혼자 되는 것이 훨씬 더 두려운 법이지요.
그러니 이 두려움보다 더 큰 이유가 없으면 혼자 되려는 사람이 없고, 또 혼자 되는 것을 자초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두려운 외톨이를 왜 되려 할까요? 사랑 아닌 다른 이유가 무엇 있겠습니까?
옳은 소리를 하면 외톨이 될 줄 뻔히 알면서도 그것을 무릅쓰고 얘기하는 것인데 공동체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면 왜 하겠습니까? 자기만 살려고 하는 사람은 결코 이런 소리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레미야의 경우 하느님 사랑 때문이 아니라면 왜 하겠습니까? 하느님께서 공동체를 사랑하시고 공동체에 당신 말씀을 전하라고 하셨기에 싫고 두렵지만 그 말씀 전하는 것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그런데 사랑이 목적이라면 믿음은 바탕입니다. 하느님과 공동체에 대한 사랑 까닭에 옳은 소리를 하는 것이라면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바탕에 있기에 옳은 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힘센 용사처럼 옆에 계실 거라는 믿음,
복수가 필요하다면 그 복수를 하느님 친히 해주실 거라는 믿음, 이 믿음이 중심추처럼 밑에 묵직이 있기에 옳은 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나에게 이런 사랑이 있는지,
나에게 이런 믿음이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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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손을 벗어나셨다."(요한10,39)
<약한 믿음!>
오늘 복음(요한 10,31-42)은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배척하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파스카(부활) 축제가 가까이 다가오니, 예수님과 유다인들과의 갈등이 점점 더 고조되고 있습니다.
예수님 공생활 전반부의 갈등은 율법에 관한 갈등이었다면, 후반부의 갈등은 예수님의 신성(하느님)에 관한 갈등입니다.
"좋은 일을 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을 모독하였기 때문에 당신에게 돌을 던지려는 것이오. 당신은 사람이면서 하느님으로 자처하고 있소."(요한 10,33)
예수님은 '하느님'이십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곤경 중에 나를 구해 주시는 '구세주'이십니다.
나는 지금 여기에서 예수님을 이런 분으로 믿어 고백하고 있는가? 나는 지금 여기에서 이런 예수님 안에서 부활하고 있는가?
어제 공소 선교사님으로부터, "냉담한 지 50년 된 어느 자매님께서 고해성사 보는 것을 너무 두려워하고 있는데, 어떻게 도와주면 좋겠냐?"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저는 자비로우신 하느님, 곤경 중에 부르짖으면 그 소리를 들어주시는 하느님, 돌아가기만 하면 이유를 묻지 않으시며 용서해 주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비유인 탕자의 비유(루카 15,11-36)를 들려주었으면 좋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독서(예레 20,10-13)는 '공경 속에서 부르짖는 예레미야 예언자의 탄원기도'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자신의 탄원기도를 들어주셨다고 고백합니다.
"주님께 노래 불러라! 주님을 찬양하여라! 그분께서 가난한 이들의 목숨을, 악인들의 손에서 건지셨다."(예레 20,13)
믿는 이들이 점점 더 곤경 속에 빠져들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세상 유혹에 자주 빠져들고 있기 때문이고, 자비로우신 하느님, 구세주이신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약한 때문이 아닐까요?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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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dbdx8eKLPl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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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어떤 일로 나에게 돌을 던지려고 하느냐?" (요한 10, 32)
판단의 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삶이
하느님과 함께
사는 삶이 아니라
판단과 함께 사는
삶이 되어버렸습니다.
늘 부정적 판단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들 삶입니다.
판단의 깊이만큼
돌을 던지게
되어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이와같습니다.
판단은 끝내
하느님을 향하게
되어있습니다.
하느님을 죽이고도
우리의 판단은 끝나지
않습니다.
판단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됩니다.
믿음과 판단은
함께 갈 수 없습니다.
우리의 이중성을
아프게 반성하게됩니다.
판단의 돌을
퍼붓는 사이
누군가가 죽어갑니다.
하느님의 일은
판단이 아니라
섬김이기 때문입니다.
판단에서 섬김으로
나가는 은혜로운
사순시기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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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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