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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원문보기 글쓴이: † 다미아노^)^
8월 20일 성 베르나르도 아빠스 학자 기념일 아침기도
8월 21일 연중 제21주일 제1저녁기도
8월 21일 연중 제21주일 제1저녁기도 후 끝기도
성 베르나르도 아빠스 학자 기념
1090년 프랑스의 디종 근처에서 태어났다. 경건한 교육을 받아 1111년 시토 수도회에 입회했고 조금 후 클레르보 수도원의 아빠스로 선출되었다. 생활과 모범으로써 수도자들을 덕행으로 훌륭히 이끌었다. 교회에 발생하고 있던 분열을 막으려고 유럽 각지에 여행하면서 평화의 일치를 되찾고자 노력했다. 신학과 영성 생활을 다루는 여러 저서들을 남겼다. 1153년 세상을 떠났다.
나는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고, 사랑하기 위해서 사랑합니다
사랑은 그 자체로 만족을 줍니다. 사랑은 다른 것 때문이 아닌 그 자체로 마음에 드는 것입니다. 사랑은 그 자체로 공로도 되고 상급도 됩니다. 사랑은 그 자체 말고는 다른 이유나 열매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사랑의 열매는 사랑하는 것 - 바로 그것입니다. 나는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고 사랑하기 위해서 사랑합니다. 사랑은 보배로운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참된 사랑이라면 자신의 시초로 되돌아가고 자신의 기원으로 돌아서며 자신의 원천으로 되흘러가야 합니다. 거기에서 항상 자신의 물줄기를 받아야 합니다.
[역사속의 그리스도인] 55. 신학·철학자편 (2) 성 베르나르도
(그림설명) 신학자 베르나르도는 시토회 출신으로 16~19세기 영성주의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림은 리발타가 그린 「예수 그리스도의 품에 안긴 베르나르도」.
“수세, 혈세 화세로 대체 가능”
『하느님은 사랑이다. 하느님은 인간을 사랑으로 창조하였으며 구원된 자로서 창조하였다. 그 사랑의 최상의 증거는 말씀의 강생이며 구원이다.
그 사랑의 또 다른 증거는 성모의 출현이다. 성모는 또한 구원의 위대한 계획안에서 하느님의 어머니이다』(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
시토수도회 출신으로 에크하르트(Eckehart), 단테, 프랑크푸르트 학파, 루터,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오라토리오회 등 16~19세기 영성주의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던 신학자 베르나르도(1090~1153)는 전형적인 「수도자적 신학」의 사상을 드러낸 인물로 꼽힌다.
그의 신학의 특징은 새로운 유형의 사유를 도출해낸다기 보다 풍부한 내적 경험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는 기본적으로 성서를 참고 자료로 삼았으며 그 다음은 교부들의 수도자 생활 규칙에 관한 저서들 특히 「베네딕도 규칙서」같은 것을 참고했고 「전례」도 참조했다.
특히 구원 사업안에서 마리아가 보였던 역할에 대해 깊이 있는 신학적 견해를 드러내 보였던 베르나르도는 또 「세례론」 등을 통해 성사 신학에 대한 입장을 언급하면서 『수세(水洗)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아니며 혈세(血洗)나 화세(火洗)로 대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 『세례 받지 못한 유아들은 그들 부모의 신앙 덕분으로 의화(義化)될 수 있다』고 밝혔다.
학자들은 그의 수도 신비적인 사상과 관련 『베르나르도의 신학은 하느님께로의 인격적인 상승 체험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고 설명하고 『그의 교의적인 가르침과 수도적인 가르침은 분리될 수가 없다』고 밝히고 있다.
수도생활에 미친 영향도 매우 크다. 그는 수도자들에게 관상 기도에 전념하도록 고무시켰으며 또 한편 시토회를 개혁과 확장의 대중 운동으로 발전시키면서 초기 시토회의 개념을 정착시켰다.
어머니 사후 시토회 입회
부르고뉴 귀족 가문 출신으로 프랑스 피종 근처의 퐁텐 성에서 태어난 베르나르도는 샤티용의 생 보를 학교에서 중세 시기 삼학(三學)으로 불리는 문법 논리학 수사학을 포함한 교육을 받으며 매력적이고 재치 있으며 학식과 웅변력을 갖춘 젊은이로 성장했다.
그러나 1107년 어머니가 사망하자 그의 말처럼 「완전한 회심을 향한 먼 길」을 향해 걷기 시작했고 1112년 30여명의 동료들과 함께 시토회에 입회했다.
당시 가장 엄격했던 시토회 규율에 따라 신학적 영성적 교육을 받았으며 1115년에는 대수도원장의 지시에 따라 부르고뉴와 상파뉴 경계에 있는 클레르보라는 계곡지역에 수도원을 세우기도 했다.
1115년 샬롱 쉬르 마른의 주교이자 학자인 샹포의 기욤으로부터 사제품을 받은 베르나르도는 수도원 근처에서 은둔 생활을 하며 극도의 절제된 생활로 공동체를 엄격하게 이끌어 나갔다. 그의 상당수 초기 저술 활동은 이시기에 이뤄졌다.
1125년 자립 체계를 갖춘 클레르보 수도원 원장이 되면서 베르나르도는 프랑스와 다른 나라에도 클레르보 수도원을 설립했는데 애정적이고 사람의 마음을 끄는 그의 성격은 명성을 불러 일으켰고 수도원을 빠르게 확장시켰다.
한편 그는 온유한 성품과 반대로 성직자들의 사치 방종이나 유다인들에 대한 박해 등을 얘기할 때는 대단히 단호한 입장을 보였다.
클레르보 수도원장이 된 후 1130~ 1145년 정도까지 베르나르도는 그의 생애에서 가장 원숙하고 활동적인 시기를 보냈으며 당시 그리스도교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해냈다.
그의 제자였던 에우제니오 3세가 교황으로 선출된 후 베르나르도는 제2차 십자군 전쟁의 당위성을 설명하기 위한 순회 설교를 요청받고 십자군의 순수한 의미를 심어주는 설교를 펼쳤고 알비파(Albigenses)에 대항하는 설교를 하기도 했다.
후대 서양 신비학의 기초
사상과 영성 면에서 교회 생활에 가장 깊은 영향을 주었던 성인들 중 한명으로 꼽히는 성 베르나르도는 당시 출현한 초기 스콜라 학파의 변증법적인 방법에 맞서 성서와 교부들의 영향을 받아 살아간 수도자였고 직관적이고 카리스마적인 모습으로, 그리고 금욕적이고 전례적인 전통과 강하게 연결된 인물로 평가된다.
생 모르(Saint Mour) 학파의 대표적 전기 작가 마비용(J.Mabillon)은 베르나르도에 대해 『마지막 교부이지만 첫째 교부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는 입장을 보인바 있다.
무엇보다 그의 논문에 나타난 신심과 신비학은 후대 서양 신비학의 기초가 되었다. 프란치스코 학파에서는 성 베르나르도의 그리스도 중심적인 노선을 수용하였고 17세기 프랑스 학파는 베르나르도 신학의 기초적 노선과 깊은 연관을 드러내기도 했다. 또한 신학자들과 설교가들 그리고 금욕자들에게 미친 영향은 매우 대단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엄격한 고행과 지병으로 체력 소모가 컸던 베르나르도는 1153년 8월 20일 클레르보에서 사망했으며 1174년 교황 알렉산델 3세에 의해 시성됐다. 그리고 1830년 교황 비오 8세에 의해 교회 학자로 선언됐고, 교황 비오 12세는 성인의 서거 800주년을 기념해 1953년 5월 24일 「꿀처럼 단 박사」라는 뜻의 「독토르 멜리풀루우스」(Doc tor Mellifluus)를 발표한바 있다.
[가톨릭신문, 2005년 6월 12일, 이주연 기자]
양봉업자의 수호성인 성 베르나르도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도(Bernardus)는 1090년 프랑스의 부르군디에서 태어났다. 영주의 딸인 어머니에게 신앙교육을 받고 자란 그는 어머니의 죽음에 충격을 받고 수도생활을 선택하였다.
1111년 시토회에 입회하여 클레르보(명랑한 골짜기) 수도원의 아빠스가 된 그는 덕행으로 수도자들을 이끌었으며, 이 수도회의 개혁과 제2의 창설에 지대한 공로를 세웠다. 그는 수도자들에게 명상생활을 하도록 권고하며 밤에도 기도했다. 동료 수사들 역시 깨어 함께 기도했다. 그는 수도원을 지혜롭게 이끌었으며, 특히 수도원 규칙을 엄중히 보전해 나가려고 애를 썼다.
학덕과 성덕이 뛰어난 그는 왕들과 교황의 자문을 담당하여 많은 공로를 세웠으며, 알비파 이단을 척결하는 설교자로, 제2차 십자군 원정을 독려하는 특사로 활동하면서 교회의 분열을 막고 일치를 되찾고자 노력하였다. 신학과 영성생활에 대한 여러 저서를 남겼는데, 성모님에 대한 설교와 저서들은 지금도 마리아 신학의 기초가 되고 있다. 그의 탁월한 설교는 성무일도에 많이 채택되었으며 ‘성모 찬송가’는 널리 알려졌다.
1152년 병상에서도 그는 쇠약한 몸을 이끌고 메츠 시의 귀족과 시민을 화해시키려 노력했다. 성인 천국으로 떠난 것은 1153년 8월 20일, 그의 나이 63세 때였다. 1174년 교황 알렉산데르 3세가 그를 시성하였고, 교황 비오 8세는 1830년에 그를 교회학자로 선언하였다. ‘꿀처럼 단 박사’란 칭호처럼 그의 문장은 꿀벌통이고, 양봉업자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고 있따. 스콜라 학파 이전의 신학자인 그를 ‘마지막 교부’라고도 한다.
[경향잡지, 2006년 8월호]
[새로 보는 교회사 17] 시토 수도원
구본식
그레고리오 개혁과 아울러 유럽의 팽창은 수도생활에 놀랄 만한 확장을 가져왔다. 클뤼니 수도원도 대 우고 원장(1049-1109년)의 지도로 그 정점에 이르렀을 뿐 아니라, 몬테카시노 등의 옛 수도원들도 대단한 발전을 이룩했다. 이미 존재하고 있는 수도원이 발전하는 것은 물론, 이 무렵에는 새로운 수도원들도 엄청나게 많이 창설되어 발전해 나갔다. 이때 새로 생긴 수도원은 대부분 교회사에 작은 흔적을 남겼으나, 체르토시니(Certosini), 시토(Citeaux) 등 몇몇 수도원은 역사 속에 뚜렷하게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교회개혁과 수도생활의 이상을 세우고 제2차 십자군 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베르나르도 성인의 치스테르첸시 수도원 또 오늘의 이 수도원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시토 수도원 창설
시토는 보르고뉴 지방의 랑그르에서 사롱 지방에 이르는 옛 로마로 이르는 길 중간에 자리하고 있다. 새로운 시토 수도원의 창설도 수월하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그 기원은 1075년경 로베르토 성인한테서 출발한다. 성인은 1075년에 일단의 은수자들과 함께 랑그르 교구의 몰레슴(Molesme)에 도착하여 공동생활을 시작한다. 그러나 수도생활의 형태에 대해 논란이 일자 로베르토는 스테파노 하딩 등 스무 명 남짓한 수사들과 함께 몰레슴을 떠나도 좋다는 허락을 얻어 다른 곳으로 옮겨가 시토에 새로운 수도원을 세우게 된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열망하던 완전한 수도 분위기를 찾지 못해 애태우던 로베르토는 마침 몰레슴 사람들의 요청이 있자 다시 돌아가게 된다. 이로 인해 시토회 첫 원장들 명단에서 로베르토는 빠져있다.
로베르토가 돌아가고 난 뒤 알베리코가 원장이 되면서 영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정착을 한다. 이렇게 정착하는 데는 클뤼니의 우고 원장의 도움이 컸다. 창설일은 1098년 3월 21일로 베네딕토 성인의 축일과 성지주일이 겹치는 날짜였다고 하는데, 1100년 10월 19일에 파스칼 2세 교황으로부터 법적 인정을 받았다.
이 수도회 수사들은 흰 옷을 입기 때문에 ‘하얀 수도자’란 별명으로 불렸다. 알베리코 이후 앵글로 색슨족의 귀족 출신인 스테파노 하딩이 원장이 되면서 더욱 큰 발전을 이루는데, 1113년 라페르테에, 1113년 폰티니에, 1119년 폰테나 등에 예하 수도원을 세웠다. 그러나 시토회가 진정한 명성을 이루고 교회에 영향을 끼치게 된 것은 성 베르나르도가 입회하고서부터이다.
성 베르나르도
보르고뉴 지방의 오랜 귀족가문 출신인 베르나르도 성인은, 세상의 쾌락에 대한 혐오 때문에 수도자의 길에 들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미 대수도원이 되어있고 또 규칙이 어느 정도 느슨해진 클뤼니보다, 규칙을 문자 그대로 지키기 위해 고행생활을 하는 시토회를 택했다. 수도원에서 그는 다른 수도자들과 똑같이 행동하고 생각하고 고행을 했다. 그는 자신의 노력으로 하느님께 이르게 된다고 생각하지 않고, 규칙에 충실함으로써 그 규칙이 자신을 어떤 경지에 이르게 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고행은 하느님 사랑에서 비롯한다. 하느님의 사랑에 도달하기 위해서 자신만을 생각하게 하는 인간적인 사랑을 멀리해야 하고, 인간적인 사랑을 멀리하기 위해서는 고행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배부르게 먹는 것은 목구멍의 죄에 해당되었고, 잠자는 것도 시간낭비로 여겼다. 15년 동안 고행과 묵상생활을 한 뒤에 25년 동안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영국 등 두루 세상을 돌아다니면서 이단과 싸우고, 주교와 영주, 왕들을 훈계하였으며, 교황들한테 조언을 하면서 제2차 십자군 운동을 독려하였다.
그가 이러한 여행을 한 이유는 이웃 사랑 때문이었다. 이웃 사랑은 하느님의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다. 그가 하느님의 사랑을 구하고 또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사랑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하느님의 사랑을 자신 안에 가두어 널리 전하지 않으면 그것은 이기적인 것이다. 자신이 먼저 하느님의 사랑을 입고 그것을 또한 널리 분산시켜야 했던 것이다.
클레르보 수도원 창설
베르나르도 성인이 시토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하딩 원장은 그에게 새로운 자(子) 수도원 창설의 임무를 맡겼다. 그는 열두 명의 수도자들과 같이 클레르보에 있는 ‘고뇌의 원인인 계곡’이라는 곳에 수도원을 세우기로 하였다. 그는 규칙에 따라 전례에 필요한 몇 가지 소지품만 가져왔을 뿐 다른 필요한 것은 모두 현지에서 찾아 충당해야만 했다. 초막을 지어 수도원으로 삼았다. 이 출발은 앞으로 시토회 생활양식에 아주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수도자들의 완전한 관상생활을 위하여 많은 고행을 하였는데 수도자들이 너무 힘들다고 호소하자, 어려운 고행은 자신한테만 적용하고 다른 수도자들한테는 할 수 있는 만큼의 고행만 요구하였다.
베르나르도 성인은 베네딕토 성인의 규칙을 글자 그대로 살려고 노력하였다. 또한 수도자의 적이라고 간주된 두 가지 위험을 피하는 데 아주 엄격하였으니, 이는 바로 여자와 속세의 학문이었다. 성인은 여자를 멸시해서 그런 것은 아니나 여자를 마귀의 화신으로 여겼다. 그것은 그가 여자 수도원을 세우는 것으로 드러난다. 오로지 수도자들을 걱정해서 나온 생각이었다. 필요한 물건을 가져다주는 부인들을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묻는 은둔자한테, 여자와는 이야기를 나누어서도 안되고 방문을 허용해서도 안된다는 내용의 답장을 보냈다. 이것은 여자는 수도원의 어떤 곳 즉 작업장이나 수도원 경내에 발도 들여놓아서는 안된다는 시토회 규칙을 지키기 위함이라 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정절을 지키는 데 범죄의 기회조차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베르나르도 성인은 또한 속세의 학문을 수도자의 다른 적으로 여겼다. 학문은 위험한 영광이며 수도자들한테 자만심과 이기심을 일으키고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학문은 정신적인 유혹을, 여자는 육체적 유혹을 느끼게 하여 두 가지 다 수도자의 기본적인 덕행인 정절과 겸손을 방해하는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수도자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으로 바쳐야 하고 자신의 가족과도 이별해야 했다. “누구든지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면 나에게는 합당하지 않은 사람이다.”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수도자의 생활은 포기의 연속이었다. 이를 위해서 성인은 규칙을 철저히 지켰으며, 두 마디 말에 이 모든 것을 집약하였으니 바로 회개와 순명이었다. 또한 모범으로 가르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수도자들이 철저하게 규칙을 지키도록 엄격하게 감시하였다. 단적으로 클레르보의 식사는 너무 형편이 없어 우유로 만든 것이라든지 물고기나 달걀 같은 것은 절대로 수도원에 들여오지 못했다.
성인은 또한 정신의 고행을 수행했다. 수도자들한테 각자 ‘자기의 뜻’을 버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순전히 우리들의 뜻이라는 것은 하느님의 뜻과 일치되지도 않고 사람들의 뜻과도 일치되지 않는 것이다.” 이 목적에 이르기 위해서 전적인 순명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그렇게 철저한 고행을 요구했지만 필요에 따라서는 융통성을 보였다. 잘못을 뉘우친 이는 위로하고, 약한 사람을 이해하고, 고행을 스스로 받아들이도록 하였다. 따라서 그는 엄격함과 부드러움을 지닌 아버지와 같았다.
클레르보 수도원의 성공
클레르보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귀족과 학자 성직자 할 것 없이 하느님의 사랑에 목말라하는 사람들이 몰려와 시토회의 생활을 받아들이고 성인의 지도를 받고 싶어 했다. 그가 강론을 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이삼십 명 되는 사람들이 그를 따르려고 몰려왔다. 1116년에는 한 학교의 선생과 학생 전체가 수도원에 입회한 일도 있다. 따라서 이제 시토회의 예하 수도원으로 출발한 클레르보는 자신의 예하 수도원을 창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성인의 외적 활동이 커져가고, 그에 따라 수도자들이 계속 불어나 이탈리아나 독일에서도 몰려왔다. 그 때문에 유럽 전역으로 시토회의 예하 수도원이 퍼져나가게 되었다. 성인이 죽은 1153년쯤에는 삼백오십 개의 시토회 수도원 가운데 백육십 개 이상이 클레르보의 예하 수도원이었다. 이런 현상은 성인의 영향도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당시의 종교적인 열망을 드러내고 있는 현상이라 하겠다.
시토회의 생활
시토회가 사는 형태를 보는 것은, 당시 다른 수도원들의 삶을 간접으로 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 그들의 규정에 따른 생활을 알아보고자 한다. 시토회는 베네딕토 성인의 규칙을 글자 그대로 지키려는 이상으로 출발하였다. 그러나 그 적용에는 1119년에 만든 ‘사랑의 헌장(carta caritatis)’과 그 뒤 1134년에 만든 규정대로 수도자들의 생활을 정하고 있다. 음식에 관해서는 기름을 묻힌 채소를 금한다는 내용까지 규정하고 있고, 수도자들의 의복은 처음엔 추위를 전연 막을 수 없었고, 잘 때에는 옷을 입고 신발을 신은 채 짚이불에서 자야 했으며, 환자도 요를 쓸 수 없었다. 정신적인 회개는 육체적인 회개가 따라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수도원장의 뜻에 완전히 따르는 순명이 절대라 여겨 불복종에는 매로써 벌을 내렸다. 시토회는 주변의 클뤼니 수도원이 적용하고 있는 완화된 베네딕토 성인의 규칙을 거부하고, 고행생활 그 자체로만 일관했다. 그것이 잘 나타나는 것이 바로 가난과 노동이었다.
가난은 수도자들한테 절대적인 요구사항이었다. 수도자가 개인물건을 가지고 있을 경우에는 일년 동안 모든 금요일에 빵과 물만으로 금식할 것이며 사십일 동안 속죄기간을 가져야 하는 벌을 내렸고, 작은 도적질이라도 있으면 공동체에서 추방하는 벌을 내렸다. 공동체의 가난에 대해서도 규정을 해놓았는데, 성당이나 마을, 하인과 방앗간 같은 것을 소유하는 것을 금했다. 다만 경작할 땅이나 포도원, 목초지, 숲이나 낚시를 할 수 있는 시냇물 등은 소유할 수 있도록 허용하였다. 그러나 그것도 자신들이 경작하거나 쓰기 위해서일 뿐이고, 남에게 빌려주어 소작료를 받기 위해서는 소유할 수 없다고 규정하였다. 물론 이와 같은 재산소유도 매매 등의 방법은 엄격하게 금했고 희사를 통해서만 가능했다.
따라서 돈을 소유한다는 것은 절대로 허용되지 않았다. 구걸이나 모금은 성당 짓는 일을 위해서조차 금하였다. 다만 스스로 희사하는 것은 허락되었다. 이때 지은 성당도 아무런 장식이 없고 성물도 화려한 것을 피하는 등 가난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세월이 차츰 흐르면서 이 공동체의 가난한 모습도 서서히 변질되기 시작한다. 이렇듯 엄격한 가난과 동시에 수도자들은 노동을 하였다. 공부는 성서와 교부들의 저서로 국한되었으며, 손으로 하는 노동을 강조하였다. 보조수사는 특별한 공작이나 농사의 조언자였고 수도자들이 직접 땅을 경작하고 베고 그리고 도랑을 파는 일 등 끝까지 모든 일을 다했다. 이런 사실은 보조수사의 역할이 많은 클뤼니 수도원과는 좀 달랐다.
그들은 자기네가 경작한 것만으로 살았다. 그러나 시간이 점차 흐르면서 경제적인 어려움이 뒤따르고 그들이 경작한 땅이 너무 척박하여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을 때, 영국이나 독일 등에 농사지을 땅을 얻어 예하 수도원을 지었으며, 당시 행하던 가축사육이나 모직공업에도 참여하게 되었다.
수도생활이 확장되고 새로운 수도원 공동체가 많이 생겨나던 시대에 베르나르도 성인을 중심으로 시토회의 상황을 살펴보았다. 이것으로 당대 수도자들의 삶을 얼마간 엿볼 수 있지 않았는가 싶다.
구본식/ 대구 관덕정순교기념관 관장 ‧ 신부
[경향잡지, 1995년 5월호]
씨토회와 성 베르나르도
허 로무알도 신부
1. 카르투시오회는 11세기 은수생활 부흥의 정점을 대표하였다. 이는 베네딕도회 수도승 생활 밖에서 실현되었지만 베네딕도회 수도승 생활 안에서 역시 늘 당시의 공통된 이상에 대한 갈망이 있었다. 그리고 12세기 초반, 엄격한 의미로 서방 그리스도교에서 가장 최초의 수도회 (Ordine)를 이룬 내부의 쇄신, 즉 씨토의 베네딕도회적 개혁이라는 하나의 기치가 기적적으로 확산되었다. 씨토회는 그 시대의 이상들과 갈망들을 보다 완전한 방법으로 구현하고자 노력하였다.
씨토회의 기원에 관해 우리는 주로 에서 그 정보들을 얻는데, 이 작품은 이 보다 더 방대하고 후기에 쓰여진 과 구분하기 위하여 흔히 이라고 일컬어 진다. 씨토회의 기원에 관한 이 주된 원전은 서언과 18개의 장들로 이루어지는데 여기서, 승인된 문서들을 인용, 그 정신을 전달하면서 새 단체의 기원이 언급되고 있다. 제 1장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 1098년 주님의 강생의 해에 리용 교구 안에 설립된 몰렘 (Molesme)의 초대 아빠스 로베르또와 수도원의 몇몇 형제들은 당시 교황의 특사이자 리용의 대주교 가경자 후고 (Ugo)에게로 가서 그들이 사부 성 베네딕도 규칙서의 가르침 하에 자신들의 삶을 규정할 것을 약속하면서 이 목표를 위해 그와 사도좌의 도움을 요청하였다.
샹빠느 (Champagne) 출신의 이 아빠스 로베르또는 한 무리의 동료들과 함께 세상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가난과 육체노동 그리고 엄격한 금욕생활로 은수생활을 하기 시작하였다. 하나의 개혁된 수도승 공동체를 조직하기 위한 여러 번의 시도들이 실패로 끝난 후, 1075년에 그는 몰램 수도원을 설립하였다. 이 수도원은 20년 간의 지속적인 번성 후, 내부의 반대들로 인해 어려움을 겪게 되는데, 이 반대들은 로베르또와 그의 추종자들이 완전한 고독을 보장하는 새로운 장소 물색을 위해 몰램을 포기하게끔 한다. 그러한 새로운 과업과 목표를 위해 그들은 교황사절인 대주교 후고에게로 간다. 그는 그들의 갈망에 기꺼이 부응하여 그들에게 하나의 편지를 쓰는데, 이 서신과 더불어 대주교는 씨토 시발의 토대를 부여하였다. 이 편지에서 그는 다른 장소로 옮기는 것을 허락하였고, 최대의 이점과 고요로 하느님을 섬기도록 당부하였다. 왜냐하면 몰램에서 성 베네딕도의 규칙서가 느슨하고 소홀히 준수되었다고 여겨졌을 뿐더러, 또한 그들이 보다 철저하고 완전하게 규칙을 준수하기를 원한다고 천명했기 때문이다.
이 서신에 의해 용기를 얻은 로베르또와 그 동료들 (알베리꼬, 오도, 요한, 스테파노, 레딸도 그리고 베드로)은 대주교에 의해 그들에게 부여된 권한에 따라 또 다른 14명의 동료들을 선발하여 몰램을 포기하고 ‘치스테르치움’ (Cistercium)이라고 불린 사막에로 나아갔다. 이 이전은 아마도 1098년 3월 21일 성 베네딕도 축일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씨토의 라틴어 표기인 ‘치스테르치움’은 본 (Beaune)의 백작 비노 (Binaud)가 그들에게 양도한 광활한 숲들 중 하나인 보르고냐 (Borgogna)의 중심에 위치해 있었고, 당시 샬롱 쉬르 사온(Chalon-sur-Saone) 교구였던 디종(Digione) 남부에서 24킬로 떨어져 있었다. 기원 (Esordio)에 따르면 숲과 가시들로 밀집되어 있어 사람들이 접근할 수 없는 그 장소는 오로지 꽃들만이 살고 있었다. 샬롱 주교의 허락으로 밀집된 숲과 가시들이 반 정도 잘려지고 제거된 거기에 그들은 수도원을 세우기 시작한다. 그들은 오로지 몰렘에서 완전히 소홀히 되었던 거룩한 베네딕도 규칙서의 준수로써 그들의 서원을 채운다는 유일한 동기에 의해서 그것을 하도록 자극을 받았다. 또한 거기에서 그들은 장엄 서원을 통해 이 규칙서를 준수할 것을 약속했지만 어떤 형태로든 그것을 준수하지 않았던 다른 수도승들을 보며 안타까워하고 슬퍼하면서 그들에 대해 이야기 하였다.
샬롱의 주교는 아빠스 로베르또에게 목자의 권한을 주었고, 그를 동반했던 형제들 측으로부터 이 새로운 장소에 정주 서원을 확인 한 후, 교회법적으로 새로운 수도원을 인가하였다. 그러나 그 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곧 몰램에 남아 있었던 수도승들, 즉 로베르또의 후계자 고도프레도 (Godofredo)의 휘하에 있던 수도승들이 로마에서 교황 우르바노 2세에게 로베르또를 몰렘에 돌아오게 하도록 요구하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의 요구로 지친 교황은 자신의 사절 후고에게 가능한 한 즉시 로베르또를 씨토 사막에서 몰렘 수도원으로 되돌려 보내라고 명령하였다. 성 로베르또는 <방어의 수단으로서> (pro scuto defensionis) (Esordio, 7-8장) 하나의 반박 서한으로 자신을 보호하지 않고 이에 순명하였고 몇몇 수도승들과 함께 몰램으로 돌아갔다.
씨토 수도원은 남편을 읽은 꼴이 되었고, 이에 수도승들은 알베리꼬를 아빠스로 선출하였다. 그에 대해 기원은 다음과 같이 찬양하고 있다 : 교육을 받았고, 신적인 것들을 향해 있으며, 규칙서와 형제들을 사랑하는 사람. 오랜 기간 동안 몰램과 씨토에서 원장의 직무를 수행하였고, 오래 전 몰램에서 이곳으로 이전하는데 있어 형제들을 이끌기 위해 수고했으며, 이 때문에 엄청난 불명예와 감금과 구타로 고통을 당한 사람. 미래를 위해 주의를 기울이면서 알베리꼬는 두 명의 수도승을 갓 선출된 교황 빠스칼 2세에게 보냈는데, 이는 사도적 보호의 날개 아래 고요하고 확실한 자신의 수도원이 교회의 혹은 세속의 모든 사람의 압력으로부터 항구히 자유로울 수 있게 해달라고 그에게 청하기 위해서였다 (10장). 후고 대주교와 요한과 베네딕도 추기경들, 샬롱 주교의 서한들로 무장된 그 수도승들은 Desiderium quod 이라는 교령을 통하여 그들이 요구했던 것들을 교황으로부터 얻어냈다. 이 교령은 1100년 10월 19 트로이아 (Troia)에서 교황 빠스칼 2세에 의해서 반포되었고 후에 <로마의 특권> (Privilegium Romanum)으로 불려졌다.
그 교령을 받고 알베리꼬 아빠스와 그의 수도승들은 성 베네딕도 규칙서 준수에 대한 그들의 서원을 채우기 위하여 의복과 잠과 식사에 있어 규칙에 위배되는 것과 규칙의 순수성을 거스르는 모든 것들을 제거하도록 제정한다. 이렇게 그들의 모든 생활 안에서 규칙의 청렴성을 준수하면서 규칙의 가르침에 부응하고 적합하게 된다. 이는 교회적인 규율들 안에서와 같이 다른 것들에 있어서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 적합성은 펠리컨들, 침대의 푹신한 패킹들, 다양한 형태의 세련된 식기들, 교회의 소유, 제단, 기부, 대 영주들의 무덤들, 십일조, 오븐, 제분기, 자작 농장, 봉사자들 그리고 여성들이 쉽게 수도원을 출입하는 것에 대한 거부를 내포하였다. 이런 방식으로 세속적 부들을 부숴버린 그리스도의 새로운 전사들, 가난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가난한 이들은 그들이 실행하게 될 바와 같이 있을 수 있는 손님들을 유지하고 양육하는 것을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당시 그들은 주교의 허락으로 생사를 자신들과 함께 나누게 될, 하지만 수도승들은 아닌 평신도 형제들(conversi laici)을 받아들이는 생각을 하게 된다. 왜냐하면 이들의 도움 없이는 밤과 낮으로 규칙서의 계명들을 충실히 준수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이 형제들(conversi )은 농업에 필요한 농장들을 관리하면서 농사일과 가축 사육을 도왔다. 게다가 그들은 성 베네딕도가 원했던 바와 같이 도시 혹은 마을 안이 아니라 오히려 떨어진 장소에 회수도원들을 세우기로 약속하였다. 그리고 베네딕도 자신이 각 수도원 안에 아빠스를 포함하여 12명 이상의 수도승이 살지 않기를 원했기 때문에 그들 역시 그렇게 하고자 하였다. 이 모든 계획들은 모든 장들 중 가장 긴 15장의 내용을 이루고 있다. 몰렘으로부터 온 씨토 수도승들의 회 (Instituta monachorum Cisterciensium de Molismo venientium) 라는 제목을 지니고 있는 이 장은 새로운 설립의 유일하고 주된 이유인 성 베네딕도 규칙서의 가르침들을 철저히 따르기 위해 알베리꼬와 새로운 수도승들에 의해서 편집된 헌장들을 구성하고 있다.
그러나 거의 아무도 그들의 삶의 양식으로 그들을 모방하려고 오지 않는다는 사실은 아빠스와 새로운 수도승들을 근심케 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의 보물을 발견한 사람과 같이 그 보물을 양도할 후계자들을 찾는 일에 역시 진력하였다. 거의 모두가 고립되고 이제까지 들어보지 못한 그들의 엄격한 삶을 보고 들으면서 그들에게 가까이 가려 하기보다는 오히려 몸과 마음으로 그들에게서 보다 멀어지려고 서둘렀다(16장). 이러한 상황으로 기울어지는 동안 성 알베리꼬가 사망하였다 (1109년). 역시 창설 멤버들 중 하나였던 영국 수도승 스테판 하딩이 그를 계승하였다. 그의 재임기간 동안 수도승들과 아빠스는 금으로 된 모든 전례 용품들과 또한 망또들을 포기하면서 덕들의 수호자이자 그들이 자발적으로 선택한 고독과 가난을 강화하였다.
2. 하느님께서 밤낮 끊임없이 침착하게 눈물과 탄식으로 당신께 자비를 청했던 그리고 거의 절망의 문턱에 까지 이르렀던 그들 위에 당신 자비를 쏟아 부으시면서 그 장소를 방문하신 것은 바로 이 시기였다. 그분은 그들에게 그 삶의 계승자들을 갖도록 허락하셨다. 사실, 하느님의 은총은 많은 성직자들, 귀족들과 교육받은 사람들 그리고 그 시대의 유능한 사람들을 그 수도원으로 이끄셨다. 그들 가운데 30명이 한번에 수련기에 들어갔다(17장). 씨토회원들에게 있어 이것은 결정적이 사건이자 동시에 수도승 생활을 위해서도 상당히 중요하였다. 사실 성 베르나르도와 그의 29명의 동료들의 씨토에 들어간 것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이 사례로 인해 자극을 받은 새로운 성소자들이 입회하기 시작하였다. 베르나르도의 입회 후 8년 이내에 씨토의 양식과 관습에 따라 12개의 회수도원들이 건설된다. 이렇게 씨토회 설립의 연대기인 은 끝난다.
따라서 새로운 정신의 확산은 1112년 부활 축일에 베르나르도와 그의 동료들의 입회와 더불어 시작되었다. 그 이듬해 씨토의 첫번째 가지인 (prima filiale) 라 페르떼 (La Ferté) 수도원이 설립된다. 1114년에는 뽕띠뉘 (Pontigny) 수도원이, 1115년에는 끌레르보 (Clairvaux)와 모리몽 (Morimond) 수도원이 설립된다. 그리고 이 네 수도원들 역시 곧 또 다른 4개의 자수도원들 (filiali)을 설립한다. 성 스페판 하딩이 이미 현존하는 9개의 대수도원들 안에서 성 베네딕도 규칙의 해석에 있어 일탈들을 방지하기 위하여 1118년에 사랑의 헌장 (Carta caritatis)이라 불리는 하나의 문서를 편집한 것은 바로 그 때였다. J.M Canivez의 말에 의하면 이 문서는 수도회들의 역사 안에 새로운 기원을 이루었으며, 노웰 (M.D Knowles)의 표현에 따르면 성 베네딕도 규칙서와 함께 수도회 회헌들의 역사 안에서 몇 안 되는 기본 문서들 중 하나로서 간주된다. 원문에서 충실히 번역된 이 문서의 본문은 갈리스도 2세의 승인 (1119년 12월 23일)과 더불어 시토회의 탄생을 언급하였고 독자는 부록에서 그것을 발견할 것이다.
이 문서에서 주의를 요하는 첫번째 사항은 그 자체의 제목 <사랑의 헌장>이다. 여기서 이미 스테판 하딩이 이 문서를 편집하면서 추구했던 의도가 표현된다. 즉 출범하는 씨토회를 형성하며 나아가는 여러 수도원들간의 결속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 이 결속은 성 베네딕도 규칙서의 엄격한 준수를 위한 보증으로서 간주되었다. 이를 위한 규정이자 끌뤼니 수도원들의 체험을 통해서 주의를 받은 그 헌장은 씨토의 모원에 대한 호의로 지상적인 재산에 대한 강제 징수를 부여하지 않으면서 시작한다. 그 염려는 모두 영적인 것이어야 했고, 다음 두 가지 점으로 요약되었다. 즉 성 베네딕도 규칙을 충실히 준수하는 것과 불목을 피하기 위하여 회의 모든 수도원들 안에서 회헌들의 동등성을 안정되게 유지하는 것이다 (1-2항). 그러므로 회의 제도들에 반대되는 모든 가능한 특권들이 무효한 것들로 천명된다 (3항). 그리고 헌장은 성 베네딕도 규칙서 안에서와 같이 전 회가 아빠스들 위에 축이 놓여진다는 그러한 사실을 제시하면서 아빠스들에게 연속적으로3개의 장을 할애한다. 그러나 베네딕도회원들과의 차이점으로서 아빠스들간의 상호관계 안에서와 마찬가지로 씨토의 아빠스와 다른 수도원들의 아빠스들 간에 보다 긴밀한 연결 고리들이 형성된다. 이것은 상호 방문, 특별히 그 회의 다른 어떠한 수도원들에 대한 씨토의 아빠스의 방문을 의미하며, 라 페르떼 (La Ferté), 뽕띠뉘 (Pontigny), 끌레르보 (Clairvaux), 그리고 모리몽 (Morimond) 수도원들의 초기 아빠스들이 씨토의 아빠스를 방문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또한 자 수도원들에 대한 모 수도원의 아빠스의 방문을 의미한다.
이 초기의 네 아빠스들은 전체 헌장 안에서 특별한 위치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비록 이들이 그러한 명칭을 취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전체 씨토회의 통치와 관련되는 문제를 위해서 씨토 아빠스의 총 평의회를 구성하러 온다. 이 통치 형태는 끌뤼니의 그것과는 달리 덜 군주적이며, 씨토에서 매년 개최되어야 하는 총회에 의해서 완화되었다. 이 총회 제도는 그 당시까지 전혀 볼 수 없었던 수도승 생활 안에 하나의 새로움이며, 스테판 하딩의 천재적인 한 면모를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종류의 기본 규정과 더불어 그 회는 급속히 확장되어 나갔다. 성 스테판 하딩이 죽을 무렵 (1143년) 전 유럽에 퍼진 수도원들의 수는 이미 75개에 달했다.
3. 유럽 수도승 생활의 전성기를 나타내는 12세기는 씨토회의 한 위대한 인물, 프랑스 끌레르보의 아빠스 성 베르나르도에 의해 지배되었다. 그의 삶과 가르침들은 그 시대의 수도승적 이상을 종합하였다. 노웰 (M.D. Knowles)은 그에 관해 고무된 한 페이지를 다음과 같이 종합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씨토의 수도승이자 끌레르보의 아빠스 베르나르도는 거의 30년 동안 서방 교회 안에서 교황의 명칭을 지니지 않은 그 어떤 사람보다도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오히려 그의 영향력은 가장 위대한 교황들 가운데 여러 사람들이 끼친 그것보다도 더 컸다. 그의 인격은 참으로 그 시대의 정상에 있었다. 그는 탁월한 기질로 그로 하여금 지도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게 하였던 자질들을 소유하고 있었다. 예컨대 그의 귀족적인 기원에서 나오는 사람들에게로의 접근과 환대의 능력, 윤리적이고 영성적인 위대한 가치, 상류층의 문학적이고 웅변가적인 재능, 현세적 야심과 물질적인 욕망들로부터의 자유로움, 자신에 대한 큰 신뢰심, 강철 같은 의지, 전술적 능력과 결합된 진실성, 자신의 형제들을 향한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사랑, 하지만 그가 악이라고 생각한 것을 공격할 때 이 사랑은 그로 하여금 관대함과 온건함을 드러내게 하지 않았다.
1115년 아직 젊을 때 끌레르보의 설립자 아빠스로 임명된 베르나르도는 여러 해의 값진 노력 끝에 그가 죽을 때 (1153년) 까지 유지한 하나의 영적 권위의 자리를 획득하였다. 거의 이 모든 기간 동안 씨토와 끌레르보의 아빠스들은 서방 그리스도교의 영적 중심지를 이룬다. 베르나르도는 개혁가, 조언가, 카리스마적 지도자, 설교가, 양심의 지도자 그리고 신학자라는 복합적인 형태를 띤 하나의 영웅이었다. 교회사 안에서 그러한 종류의 또 다른 예를 찾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는 전 유럽의 시선을 끌었던, 그리고 30년 안에 북 움브랜드 (Nord-umberland)에서 로마에 까지 70개의 자 수도원들의 모원으로 성장하였던 하나의 대공동체의 수장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계속해서 수도원 밖으로 불리워졌다. 그의 명성과 더불어 베르나르도는 교황 인노첸스 2세의 합법성을 추인하였고, 아벨라르도 (Abelardo)와 브레쉬아의 아르날도 (Arnaldo da Brescia)에 대한 단죄를 야기시켰다. 또한 라 뽀레의 질베르또 (Gilberto de la Porrée)의 복종을 얻어냈다. 그는 막강한 끌뤼니 공동체에 도전하였고, 사랑에서 분리되지 않은 열정으로 가경자 베드로를 실수에 빠뜨리게 하였고, 이단자들을 비판하였고 그의 지혜로 논쟁이 된 선거들에 관해 결정적인 평결을 제출하였다. 부당한 주교들을 퇴임 시켰고 설교와 편지들, 그리고 그의 성덕의 명성으로써 빠리의 학생들과 유명한 슈거 (Suger)와 같은 냉담자들을 회개시켰다. 그 누구의 도움도 없이 프랑스와 독일이 십자군에 가담하게 하였다. 그는 자기 수도승들이 아빠스들과 주교들, 그리고 추기경들이 된 것을 보았으며, 끝으로 교황좌에 오르게 된 그의 영적 자녀들 가운데 하나에게 조언하여 그를 다시 소생시킬 수 있었다. 그는 성 노르베르또 (Norberto)와 성 질베르또 (Gilberto)와 같이 그로부터 나와 다양한 회들에 속해 있는 다른 성인들을 이끌었다. 또한 성전 기사회 (templario)들에게 하나의 규칙서를 부여하였고, 프레몽트레회원들 (premonstratensi)의 규칙서에 영감을 불어 넣었다.
베르나르도는 하느님의 사랑과 강생, 그리고 자유의지에 관한 하나의 작품을 저술한 교회의 교부들 가운데 마지막 교부였다. 성모신심과 주의 탄생 예고와 성탄의 신비들에 대한 신심과 마찬가지로 예수의 지상 생활과 수난에 대한 그의 특별한 신심은 그로 하여금 근대 신심의 가장 탁월한 창설자들과 선구자들 중 하나가 되게 하였다. 그는 성 베네딕도 규칙서를 보다 훌륭히 가르친 스승이었고, 서유럽에서 가장 권위 있는 신비가이자 자서전 작가였다. 살리스부리의 요한 (Giovanni di Salisbury)은 베르나르도를 성 그레고리오 대종 이후 가장 유명한 설교가로서 제대로 잘 칭송하였다. 베르나르도는 성 레오 대종과 뻬뜨라르까 (Petrarca) 사이의 시대에 가장 감명적이고 존경 받은 작가로서 정의되었다. 또한 그의 시대에 많은 특징들을 지닌 서간 작가들 중 가장 유능한 작가였다. 중세의 작가들 중 거의 유일하게 오늘날에 까지 역시 현대의 독자들을 매료시키는 능력을 지녔다. 비교할 수 없는 영의 지도자 베르나르도는 비록 그가 하나의 오랜 논쟁을 후에 평화로이 또는 참으로 우정 안에서 종결짓는다 할지라도 왕성한 정력으로 한 사람을 끝까지 공격하여 그를 박해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는 참으로 설득의 기술을 최대한 활용할 줄 알았다. 그는 적절한 순간과 적합한 수단들을 선택하는데 노련한 스승이었지만 거칠고 너무 날카로운 판단들을 많이 내렸다. 하지만 그 스스로 corruscazione라고 칭했던 것에 또한 성인전 안에서 그 유사성을 발견할 수 없는 표징들과 기적들의 빛에 호소하면서 청중을 사로잡는데 성공하였다. 그는 하나의 타오르는 화염이자 하나의 기적이었으며 동시에 친절하고 정중한 태도를 지닌 사람이었다·진실로 베르나르도는 본받을 만한 인물이었다·저술가이자 실천가이며 성인인 그는 과거 유럽의 가장 탁월한 인물들 중 하나이다.
베르나르도는 1090년 디종 (Digione) 근처 퐁텐 (Fontaine)의 궁전에서 보르고냐의 고위 귀족 가문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쌍 보를 (Saint-Vorles)의 참사회원들의 학교에 위탁되었다. 우리가 이미 살펴 본 바와 같이 22살에 씨토에 들어가기로 결심하였으며 그의 형제들이 자신을 따르도록 설득하였고, 1113년에 서원하였다. 2년 후 씨토의 아빠스는 렁그르 (Langres) 교구에 위치한 끌레르보에 새수도원 설립을 위해 그를 파견하는데 거기서 그는 생애 마지막까지 아빠스 직무를 맡게 된다. 1118년에 이미 첫번재 자 수도원 트루아 퐁텐 (Trois Fontaine)을 설립한다. 그리고66개의 대수도원들이 설립되기에 이른다. 1153년 그가 죽을 당시 164개의 수도원들이 끌레르보에 종속되었다.
4. 성 베르나르도 안에서 수도승 생활의 개념은 씨토회의 한 신학을 구성한다. 그가 가르치는 수도승적 신분의 교의적 기초는 무엇보다도 포기 안에 있다. 하지만 수도승으로 하여금 수도승 생활의 포기들을 받아들이도록 도와줄 수 있는 것은 결정적으로 그에게 주님의 멍에를 감미롭게 해 줄 하느님에 대한 체험일 것이다. 이 포기의 삶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과 하느님에 대한 인식 위에 놓여진다. 이러한 이중 인식의 원리는 <다시 자신 안으로 들어감>이다. 이것은 그 출발점에서 고독과 침묵을 요구한다. 침묵은 우리 안에서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속삭임을 감지하기 위해 필요하다.
이러한 토대들 위에 놓여진 영성생활은 본질적으로 진보적이다. 앞으로 나아가지 않음은 이미 후퇴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수도승 생활은 자신의 세례 소명에 보다 충실하기를 원하는 그리스도인을 위한 정상적인 삶이다. 수도원 밖에서 사목적인 역할들을 수행하는 것은 이 삶과 양립 될 수 없다. 베르나르도는 예로니모의 옛 금언을 다시 취한다: <수도승의 직무는 가르치는데 있지 않고, 오히려 자기 자신 혹은 세상에 대해서 울며 탄식하는데 있다> (monachus non doctoris, sed plangentis officium, qui se vel mundum lugeat). 수도승 생활의 존재이유는 하느님을 섬기는 학교, 성덕의 학교를 건설하는데 있다. 초기 씨토회원들과 마찬가지로 성 베르나르도는 개혁보다도 쇄신을 위해 더욱 노력하였다. 수도승 생활에 대한 그의 개념은 고대 이집트 사막 교부들의 삶에도 돌아가는 것이다.
수도승 생활과 관련된 그의 가르침은 다음 세 가지로 종합 될 수 있다: 씨토회 출현에 대한 해석, 순명과 권위의 관계, 성 베네딕도 규칙서의 적용. 일관성 있게 해석된 첫 번째 사항과 관련해서 씨토회의 설립과 확산은 시대의 표징이었다는 것이다. 성 베르나르도는 그것을 상호 연관성을 지닌 마음의 순결과 사랑, 그리고 가난으로 이루어진 삼각대 위에 수도승 생활을 쇄신하라고 의도된 하느님의 뜻으로서 해석한다. 마음의 순결은 사랑의 성장을 촉진하며, 그것들은 엄격한 가난을 통해서 지탱된다. 순명과 권위와 관련해 성 베르나르도는 아빠스가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형제들에 대해서 규정에 따라 그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규칙이 아빠스 위에 있다고 가르친다. 이것은 하나의 새로움이다. 그 주제의 내적인 성질인 순명에는 제한이 없지만 권위의 실행에는 하나의 제한이 있다. 즉 <규칙을 거슬러 혹은 규칙을 벗어나> (contra Regulam o extra Regulam) 아무것도 명령할 수 없고, 언제나 그리고 오로지 <규칙에 따라> (secundum Regulam) 행동하도록 요구된다. 그렇듯 아빠스는 무엇보다도 서원을 통해 수도승과 하느님 사이에 체결된 계약의 한 증인이다. 비록 그가 또한 그 계약의 심판관이자 보증인이라 할지라도. 성 베네딕도 규칙서와 관련해서 성 베르나르도의 작품들로부터 규칙서의 교의적 부분 (서언, 초기의 7개의 장들과 마지막 장들)과의 밀접한 유사성을 이끌어 낼 수 있다. 하지만 그 적용에 있어 규칙서는 구체적인 규율들과 관련해서는 하나의 커다란 자유를 부여하면서 중용과 분별을 요구한다. 그만큼 베르나르도는 언제나 그 본질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규칙서를 명확히 문자적으로가 아니라 오히려 그 정신 안에서 적용되는 하나의 교의적인 문서로서 간주하고 있다.
성인으로서 끌레르보의 베르나르도는 그 시대의 동력으로 떠올랐다. 하느님을 향한 사랑으로부터 그는 관상과 활동을 위한 지속적인 추진력을 얻었다. 그의 근본적인 체험은 하느님에 대한 신비적 체험이었고, 이를 위한 전제는 그리스도의 근본 자세인 겸손이었다. 말씀과의 결합을 위한 끊임없는 추구로부터 사랑을 지속적으로 성장하게 하는 싹이 나온다. 그레고리오 개혁 운동의 한 위대한 인물이면서도 그의 오로지 종교적인 충동은 그 개혁을 능가하였다. 그는 교황권에 대해 비판을 가했다. 교황의 진정한 권위는 지배와 혼동되어서는 안 되고 하나의 봉사로서, 봉사를 위한 대리로서 실행되어야 한다. 베르나르도는 비범한 인간적인 자질들과 결부된 그의 성덕의 토대 위에서 이것을 표현할 수 있었다. 로르츠 (Lortz)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베르나르도에 대해서 그 안에서 강한 의지력과 앎에 대한 욕구에 결합된 성덕과 가장 높은 형태의 천재성을 이야기 하였고, 이러한 것들은 그를 가장 위대한 영혼들, 가장 강한 성격의 소유자들 그리고 역사 안에서 가장 독창적인 재능의 소유자들의 반열에 끼게 한다.
베르나르도는 새로운 씨토회의 성장에 가장 큰 공헌을 하였다. 그의 생애 동안 씨토는 거의 그것을 능가하기 어려운 급속한 성장의 모습을 제공하였다. 수도승 생활의 관점에서, 만일 11세기가 끌뤼니의 세기였다면 12세기는 씨토의 세기였다. 둘 모두 보르고냐의 관대한 지역 안에 위치해 있었다. 끌뤼니는 2000개의 수도원들로 이루어진 방대한 그물망으로 그리스도교 위에 당당히 선 하나의 거대한 실체였다. 하지만 씨토는 이미 그 가지들이 땅을 덮은 잎이 무성한 나무였다. 이제 쇠퇴기에 있는 끌뤼니와 한창 번성기에 있는 씨토에 의해서 형성된 이 중요한 현상은 일찍이 그리스도교 안에 그 전례가 없었고 또 이후의 역사 안에서 더 이상 반복되지 않은 어떤 것이었다. 씨토의 무성한 나무는 이탈리아 (1120년)로부터 덴마아크 (1151)에 이르기까지, 연대기적으로는 독일, 영국, 오스트리아, 스위스, 벨지움, 스페인, 아일랜드, 헝가리, 포르투갈, 스웨덴, 노르웨이 그리고 폴란드를 거치면서 자신의 가지들을 뻗쳤다. 끌레르보 수도원에서는 회원들이 700명에까지 이르렀고, 그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평신도 형제들 (conversi laici)이었다. 곧 그 수도회는 추기경들 모임 (Collegio cardinalizio)에서 소개되기에 이른다. 그리고 1145년에 성 베르나르도의 제자인 씨토회 아빠스 베르나르도 빠가넬리 (Bernardo Paganelli)가 에우제니오 3세란 이름으로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1153년 8월 20일 수도승 생활과 교회 역사의 거장이었던 끌레르보의 베르나르도가 사망하였다. 그 시기에 씨토회는 전 유럽에 걸쳐 흩어진 343개의 수도원들을 지니게 되었다. 씨토회는 12세기 후반부 동안 계속해서 성장해 나갔고, 그 세기 말 무렵에 씨토회원들은 530개의 남자 수도원들과 무수히 많은 여자 수도원들로 비로소 전 서방을 정복하였다 (그 찬란한 개화는 그 다음 세기에 일어났다). 그러나 시대는 변하고 있었고, 새로운 사회 구조들과 새로운 환경, 그리고 새로운 운동들이 당시까지 서방을 지배해왔던 수도승들의 삶의 형태와는 다른 새로운 형태의 축성생활을 또한 요구하며 전개되었다. 그 새로운 형태는 탁발 수도회들의 그것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는 먼저 동시에 생겨난 두 수도회 즉 정규 참사회원들 (Canonici Regolari)의 탄생과 기사 수도회들의 비전형적인 출현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영성생활 제20호/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홈페이지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