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의자왕 삼천궁녀?
승자의 기록은 누명과 오욕으로 이어지고!...
신라 5만 대군을 맞아 처절하게 싸운
백제 계백장군과 5천 결사대의 투혼.
황산벌 전투.
그것은 기우러져 가는 백제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로부터 기나긴 누명과 오욕은 시작됐다.
660년 7월 18일.
웅진성의 달빛 아래선 거대한 음모가 진행되었다.
1,300여 년의 세월,
묻혀졌던 진실이 드러났다.
그것은 철저하게 가려진 백제 멸망과
의자왕 항복에 관한 충격적인 역사보고서였다.
"저는 지금 <삼국사기> '의자왕편'을 보고 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의자왕 하면
향음, 삼천궁녀, 망국지환 같은
치욕적인 수식어를 달고 다니는 왕이었습니다.
헌데 이러한 '의자왕이 재위 기간 내내 대내외적으로 의욕적인 정복활동을 펼쳤다'는 것이 의외군요.
나당연합군에게 항복하면서 허망하게 백제의 멸망을 보고말았던 이 의자왕이
활발할 정복전쟁을 펼이고 강력한 왕권강화를 시도했다?
사실 좀 연결이 되지않는 부분입니다.
얼마전 백제 멸망을 담은 새로운 유물이 발견되었습니다.
지금부터 저와 함께 의자왕의 최후를 담은 충격적인 역사를 추적해보겠습니다."
2. '대당좌위위대장군 예식진', 그는 누구인가?
중국 낙양.
황하의 물줄기가 중국 고대 문명을 이루었던 곳이다.
고대 문명의 중심지였던 낙양에서는
수천 년 동안 잠들어 있던 유물이 발굴돼 세상을 놀라게 한다.
뜻밖의 유물이 발견되어 고대사 연구에 활력을 불어넣기도 한다.
얼마전 이곳에서 백제와 관련된 유물 한 점이 발견됐다.
왜 백제 유물이 낙양에 등장했을까?
제작진은 이 유물의 행방을 수소문해봤다.
"백제국 유물에 대해서 들어보신 적 있나요?"
"그건 탁본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에게 물어보세요."
"백제국 유물 들어본 적 있으세요?"
"들어본 적 없어요."
"당대의 묘지명이 나왔다는 것도 못 들었어요?"
"당대 묘지명은 아주 많아요."
"이건 언제 꺼예요?"
"청나라 시대요."
"그럼 백제국 비에 대해 들어보신 적 있으세요?"
"없습니다. 신경을 안 써서... 아마 아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이곳에는 도굴성 유물들도 있기 때문에
출처나 행방에 대해 솔직한 답변을 하지 않았다.
며칠 동안 수소문을 하던 우리는
그 비를 한 중국학자가 사진으로 찍어갔다는 정보를 들었다.
제작진은 일단 그 교수를 만나 유물의 행방을 확인해보기로 했다.
그는 오랫동안 낙양에서 고대문물연구가로 활동하고 있는 조오쩐화 교수였다.
중국 고대 금석문을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있는 역사학자다.
조오쩐화 교수는 유물의 탁본을 사진으로 갖고 있었다.
사진은 두 장으로 된 묘지명이었다.
묘지명은 망자의 무덤에 넣는 금석문이다.
무덤의 주인공은
'대당좌위위대장군 예식진' 묘지명으로
정 3품의 고위직을 지낸 사람이었다.
"좌위위는
우위위와 더불어 전부 당 왕조의 16위 중 하나입니다.
이 16위는 조정의 금위군입니다.
전문적으로 황제와 조정 그리고 수도의 안전을 도모하는 부대의 수장입니다.
황제가 신뢰하고 의지했던 사람입니다."
-조오쩐화 교수(고고문물연구가)
그런데 묘지명에
'백제웅천인(百濟熊川人)'이란 단어가 눈에 띄었다.
백제 웅천,
즉 웅진, 충남 공주 출신이었다.
어떻게 백제인이 당나라에서 고위직을 지냈을까?
유물은 진품이다.
취재 도중 조오쩐화 교수는 어딘가에 전화를 해보더니
유물 소장 기관이 방송에 나오기를 꺼린다고
좀더 알아보고 나서 다시 연락하겠다고 했다.
왜 백제 웅진 사람이 이곳에 묻힐 것일까?
기대와 불안이 교차했다.
몇일후 다행히도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그러나 유물을 취재진에게 보여줄 수는 있지만
방송 촬영은 안 된다고 했다.
현장에서 설득하기로 하고
급히 유물이 있는 <낙양2이공대학>으로 갔다.
우린 조심스럽게 묘비명을 촬영하게 해줄 것을 부탁했다.
"왜냐하면 지금 아직까지 연구 단계에 있습니다.
아직 공개를 하지 않아서 제 생각에는 찍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 시린후이(낙양 2이공대학 문물연구원)
그러나 뭔가 다른 문제가 있는 것 같았다.
묘지명이 창고에 정리되지 않은 상태로 있어서 촬영이 부담스럽다는 것이었다.
"한국에서 손님이 몇 분 오셨는데
우리 진열실을 보고 싶어 하세요."
- 시린후이(낙양 2이공대학 문물연구원)
간신히 촬영 허락을 받았다.
우리를 안내한 곳은 이 학교의 탁본전시실이었다.
창고에서 꺼내온 문제의 묘지석이 탁자에 올려지는 중이었다.
사진속의 묘지명이었다.
아직 중국에서도 실물이 공개된 적이 없다.
지석과 덮개인 개석으로 된 묘지명은
글자 한 자 파손된 게 없었다.
측면엔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개석을 화려하게 장식한 것은 당나라의 대표적인 길상문인 당초문.
지석의 사면엔 십이지신이
마치 종이에 그린 듯 생생하게 새겨져 있었다.
선명하게 새겨진 '백제웅천인'.
백제, 마치 고대 백제인을 보는 느낌이었다.
묘지명은
중국에선 수나라와 당나라 시대에 가장 유행했고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에 대거 매장되었다.
묘지명의 글자를 정확히 알기 위해 탁본을 떠보았다.
묘지명은
망자와 함께 바로 묻히기 때문에
당대의 기록들이 왜곡되지 않고 기록되어 있어
어떤 기록물보다 역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다.
지석에는 빼어난 글씨의 문자들이 가득 새겨져 있었다.
문장의 내용은 묘지명 특유의 은유적인 표현으로 되어있어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예식진(禮寔進),
할아버지 예다와 아버지 사선,
모두 백제 최고 직위인 좌평을 지닌 유력 가문 출신이었다.
'祖左平譽多' (조좌평예다)
'父左平思善' (부좌평사선)
614년에 태어나서 672년,
58세의 나이로 사망한 것은 한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이 묘지명은 백제 출신 한 장군의 죽음을 너머
백제사에 엄청난 비밀을 담고 있었다.
'대당 좌위위 대장군 예식진 묘비명'
'백제 웅천인'
좌평 집안.
예식진은 누구인가?
3. 백제 신흥 세력 예씨 집안!
"이것은 저희가 어렵게 입수한 '예식진 묘지명'의 탁본 되겠습니다.
상당히 정밀하게 만들어졌죠.
원래는 죽은 사람 묘지에 묻혀 있었겠지요.
1,300년만에 드러난 예식진 묘지명.
이 사람은 원래 백제 사람인데
당나라에 의해서 중용이 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어떻게 당나라의 높은관직에 오를 수 있었던 걸까요?
그리고 당나라에 왜 갔을까요?
예식진의 생몰 연대를 보면
614에 태어나 672년에 사망했다고 합니다.
생존 시기가 백제 멸망과 겹쳐집니다.
그렇다면 백제가 멸망하던 시기를 찾아보면
예식진의 흔적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660년 11월 1일.
당나라 수도 낙양에선 특별한 행사가 이루어진다.
당 고종은
이곳에서 소정방이 백제에서 잡아온 포로들을 접수했다.
포로들은
의자왕과 왕자 융과,
88명의 백제 고위 관리들,
그리고 1만 2천여 명의 백제 백성들이었다.
백제 최고 관직인 좌평직 예식진도 이들 중 한 명이었을까?
그 가능성을 왜의 사신 이키도구라치의 증언에서 찾을 수 있다.
당시 그는 당나라에 머물다가 이날 행사에 참석했다.
<일본서기>에 기록된 그의 목격담을 보자.
"...백제왕 이하 태자 융 등 왕자 13인,
대좌평 사택천복, 국변성 이하 37인, 모두 50여 인이 조당에 나가..."
- <일본서기>, 제명천황 편
왕족 및 귀족 포로들은 백제 최고위직이었다.
그렇다면 최고위직 좌평 예식진도
이때 전쟁 포로로 당나라에 끌려왔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백제 최고 고위층 집안인 예씨가
백제 멸망할 때까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국립부여박물관. 사택지적비.
이 비는 의자왕 때 좌평을 지낸 사택지적이 인생무상을 한탄하며 세운 비다.
백제는 부여(扶餘), 사(沙), 진(眞), 목(木), 해(解), 국(國), 협(協), 등이
지배층의 성씨들로 당연히 백제 금석문에 그들의 성이 등장한다.
"종전에는 확인되지 않았던 가문의 존재가
이 묘지명을 통해서 처음으로 드러났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좌평을 대대로 역임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씨 집안은 문헌에서 확인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굉장히 의아하고 이상하다는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 이도학 교수(전통문화학교 문화유적학과)
최고 가문이면서 비문에 전혀 등장하지 않는 예씨 가문의 비밀.
이것은 뭘 의미하는 것일까?
이것은 흑치상지(黑齒常之, 630?~689, 부여씨->흑치)의 묘지석에서 찾을 수 있었다.
흑치상지의 묘지석은
1920년대 낙양에서 발견되어
현재 남경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흑치상지는
예식진과 같은 시대의 장군으로
좌평 다음 직급인 달솔을 지냈다.
백제 멸망후 당에서
예식진과 비슷한 우무위위대장군(右武威衛大將軍)을 지냈다.
그런데 흑치상지 비문에는
증조부 때부터 집안 내력이 적혀 있다.
曾祖 文大 (증조 문대)
祖 德顯 (조 덕현)
考 沙次 (고 사차)
"중국에서 발견된 당 시대의 묘지명은 선조를 설명할 때
보통 그의 증조부부터 시작합니다.
예를 들어 흑치상지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예식진의 묘지명은 그의 조부부터 시작했습니다."
- 조우쩐화 고고문물연구가
예식진의 묘지명에 왜 증조는 기록되지 않았을까?
예식진은 웅천,
지금의 공주에서 614년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대략 590년생,
할아버지는 대략 570년생이 될 것이다.
조부와 아버지는
무왕 때에 좌평이 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예식진의 묘지명을 보면
증조부는 기재되어 있지 않고
할아버지대부터 좌평에 오른 것으로 기록이 보여지고 있습니다.
그런 점으로 비쳐볼 때에
예식진 가문은 할아버지대에 와서 중앙 정계에 진출하지 않았겠는가
이렇게 판단이 됩니다."
- 이도학 교수
예씨 가문은
600년대 백제 신흥 정치 세력인 셈이다.
가문의 역사가 짧더라도 어딘가 예씨 가문의 흔적이 있지 않을까?
의문의 장군 예식진,
그의 족적을 찾아 예식진 생존 시기 한중일 기록을 샅샅히 찾아보았다.
어디에도 예식진은 찾을 수 없었다.
4. '웅진 사람 예식진(예寔進)'?
'그 장군 예식(예植)'?
중국 정주, 하남성도서관
그런데 <신당서> '소정방전'에서 또 다른 예식진을 찾을 수 있었다.
소정방은 660년에 나당연합군의 총사령관이었다.
'소정방전'의 내용 중,
의자왕이 항복을 한 대목에,
웅진성의 장군 예식이 의자왕과 함께 항복했다는 내용이 있었다.
"그 장군 예식이 의자왕과 함께 항복하였다."
- <신당서> '소정방 열전'
의자왕은 660년 7월 18일,
사비가 아닌 웅진성에서 항복한다.
그런데 왜 굳이 '그 장군 예식과 함께 항복했다'고 기록했을까?
의자왕과 함께 항복한 그 장군 예식은 누굴까?
'그 장군 예식(예植)'?
'웅진 사람 예식진(예寔進)'?
대대로 좌평을 지닌 웅진 사람 예식진(예寔進)과,
의자왕과 함께 항복한 그 장군 예식(예植)의 관계는?
예식진 묘지명을 통해
'예식'은 같은 웅진성의 예씨 집안 사람임을 알 수 있다.
'예식(예植)'
그런데 예식은 의자왕과 같이 항복할 때 이외에 전혀 보이지 않는다.
1,300년전에 홀연히 사라진 예식과
1,300년만에 홀연히 나타난 예식진.
가문, 직위, 활동 시기, 너무나 일치한다.
중국 섬서성, 섬서사범대학.
경북대학에서 당과 한반도 관계로 박사 학위를 받은 배근흥 교수는
예식 장군을 독특하게 해석했다.
예식과 예식진은 같은 집안 이상의 사람이라는 것이다.
"추정컨대 예식은
당나라에 도착한 뒤에 자기 이름을 쓸때,
중간에 변화가 생겨 예식을 한자 예식진으로 바꾼 겁니다.
지금 현재까지 파악한 바로는 이 두 사람은 동일인입니다."
- 배근홍 교수(섬서사범대)
<삼국사기>에도
동일인의 이름을 다르게 표기하는 방법은 흔히 있다.
'龍樹 一云 龍春' (용수 또는 용춘 )
'陳純 一云 陳春' (진순 또는 진춘)
'欽春 一云 欽純' (흠춘 또는 흠순)
"그 당시에 한자에 어떤 글자를 쓰느냐는
가차(한자음만 빌려씀) 문제가 있기 때문에
음만 같으면 거의 같은 글자를 쓴다고 보고,
한 자를 더 쓰느냐 덜 쓰느냐는 표기상의 문제였던 것 같습니다.
두 사람은 동일인물로 보는 게 합당하다고 봅니다."
- 김영관(청계천문화관 관장, 백제사 연구)
당의 정 3품 예식진은
패전국 백제의 예식장군이었다.
당의 대장군 예식진 = 백제웅진장군 예식
그러나 예식진의 묘지명은
예식진과 예식이 동인물이라는 차원을 넘는
백제 마지막날의 충격보고서였다.
백제 예식장군은 전쟁포로에서 어떻게 당나라 대장군이 되었을까?
5. 18만 나당연합군의 총공격,
의자왕, 사비성에서 웅진성으로 후퇴!~
"그렇다면 예식진은 의자왕의 최측근이었던 셈입니다.
헌데 왜 의자왕은 백제의 마지막 수도인 사비성, 즉 부여가 아닌,
웅진, 즉 공주에서 항복을 했던 걸까요?"
의자왕은
660년 7월 14일 웅진성에서 예식장군과 함께
방어선을 구축하고 나당연합군에 대비하고 있었다.
의자왕의 친고구려 반당 노선은
당나라와의 마찰을 빚고,
20년에 걸친 신라의 친당 외교에 맞물러
당나라의 침공을 초래한다.
660년 6월 18일 당군 13만 명 백제 침공
당군은 660년 6월 21일,
서해를 가로질러 인천 앞바다 덕물도에 도착했다.
예상치못한 나당연합군의 전격적인 양동작전은
백제 방어대책에 큰 어려움을 줬다.
70평생을 신라와의 전투로 단련된 백전노장 의자왕도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시간이 문제였다.
나당연합군은 엄청난 속도로 진격하고 있었다.
신라는 이미 백제의 요충지 탄현(논산)을 넘어섰다.
삼국시대의 보편적인 전쟁은
거점성을 점령한 후
주변을 평정하며 차근차근 진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연합군은 전투의 기본틀을 깨어버렸다.
목표는 영토가 아니라 백제 멸망!
중간 방어성들을 무시하고
곧바로 사비성으로 돌진하고 있었다.
전황은 긴박했다.
의자왕은 신라군이 없이는 당군이 섣불리 싸우지 않음을 간파하고
결사적으로 돌진해오는 신라군 저지를 위해
계백의 5천결사대를 급파했다.
계백의 5천 결사대는
직진해오는 신라군을 저지하기 위해서
사비로 가는 길목 황산벌(논산)에서 사생결단의 전면전을 벌여야 했다.
"소수의 정예부대를 지닌 계백이 취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전술은
아마도 성에 들어가 수성전, 장기전을 하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 신라가 취한 전법이
성들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수도 사비성으로 곧바로 진격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계백으로서도 신라군을 저지하기 위해
벌판에 나와 저지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판단이 됩니다."
- 나종남 교수(육사 군사사학과)
5천결사대의 중요한 임무는 시간을 버는 것이었다.
660년 7월 9일부터 7월 10일까지 황산벌에선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신라의 5만군은
백제의 5천결사대의 철벽 방어에 가로막혀
한발짝도 나아가지 못했다.
결사대의 전과는
4전 4승, 믿기지 않는 전과를 올렸다.
계백의 5천결사대는
이틀 동안 최선을 다해 싸웠다.
그러나 숫적 열세로
우리 역사상 가장 비장한 장면을 남기고 황산벌의 전설이 되었다.
백제군은
사비 남쪽에서 18만연합군과 최후의 전면전을 벌이지만
정면전은 역부족이었다.
일말의 사상자를 내고 패배한다.
신라군과는 비교할 수 없는 나당연합군의 전투력이었다.
결국 개전 5일째인 660년 7월 13일,
의자왕은 웅진으로 지휘부를 옮긴다.
그날밤 사비도성은
더 이상 연합군의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함락된다.
전선은 웅진의 공산성,
2차방어선으로 이동한다.
대규모 나당연합군을 상대하기에 평지인 사비성보다
험준한 웅진성이 훨씬 효과적이었다.
의자왕이 2차방어선을 웅진으로 정한 것은
웅진의 유력 가문 예씨 집안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묘지명에 나오는 예식의 할아버지 예다와 아버지 사서,
그들도 의자왕의 아버지 무왕 때에 웅진성을 지키고 있었다.
무왕은 한강 유역을 되찾기 위해 627년,
군사를 일으켜 웅진성에 주둔했다.
4개월 동안 웅진성은 임시수도였다(삼국사기).
630년에도 무왕은 사비 중건을 위해
웅진성에서 7월까지 4개월간 머물렀다(삼국사기, 무왕 31년).
"예식진의 할아버지, 아버지가 좌평이었다고 한다면
그들이 좌평으로서 활동한 시기는 무왕시대로 추정을 해볼 수 있는데,
무왕시대부터 왕실과 일정한 관계를 맺고 활동을 해왔기 때문에
의자왕도 예씨 귀족에 대해 기대가 있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 이문기 교수(경북대 역사교육학과)
예씨 집안과 더불어
의자왕이 웅진성을 제 2의 방어선으로 선택한 또 다른 이유는
임존성(충남 예산)이 가까운 곳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임존성은
백제 멸망후 부흥운동세력이
나당연합군과 3년 동안 대치했던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이곳의 흑치상지 가문 또한
의자왕의 든든한 엄호세력이었다.
사비에서 4만 나당연합군이 웅진성을 공격하면
임존성의 흑치가문이 측면 지원하는 양상으로 전선이 그어진다.
의자왕이 항전을 할 의지가 있었던 것은
웅진성이나 임존성 같은 지방이 건재했기 때문이다.
당시 백제 지방군의 세력이 얼마나 강했는지 확인해주는 유물이 있다.
백제에 주둔했던 당군 사령관 유인원 기공비다.
유인원 기공비(충남 부여).
마모된 희미한 글자에서 백제 지방군의 활약상을 볼 수 있었다.
"백제부흥군이 벌떼처럼 모이고
고슴도치처럼 일어나
산과 골짜기에 가득 찼다."
"흑치상지나 복신이 부흥군을 모을 때 순식간에 3만 명이 되고,
또 곧 200여 성을 회복 했다는 것은,
백제 지방군들이 큰 타격을 입지 않고 여전히 전력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 노중국 교수(계명대 사학과)
개전 5일만에 사비성을 함락한 완벽한 군사작전.
그러나 나당연합군은 의자왕을 놓치는 결정적인 실수를 했다.
백제 지방 행정은
5방(五方 - 동,서,남,북,중방)으로 나누어 방어체계를 구축했다.
연합군의 사비 직공으로
지방군의 사기는 고전되었다.
의자왕의 전략은
지방군을 이용한 사비포위전이었다.
나당연합군에게 또 하나의 큰 위협은
18만 군대의 식량이었다.
격렬한 전투중에 사비 부소산성의 군량은 불타버렸다.
벼 수확은 두달을 더 기다려야 한다.
유일한 방법은 신라에서 조달하는 방법이다
이곳은 백제 진현성(흑석동 산성)이 있었던 곳이다.
신라에서 오는 보급품은
진현성을 위시하여 백제 국경의 산성들을 통과해야 한다.
그러나 도성을 목표로 신속하게 달려온 탓으로
백제 국경의 산성들이 건재했고
이들은 연합군의 통로를 봉쇄하게 되었다.
"실제로 백제가 부흥운동을 일으킬 때,
백제 군사가 이 진현성을 장악하고 있으므로,
신라에서 보급품이 조달되지 않아서
사비성에 주둔하고 있던 당나라 군사가 굶주림에 지친 적이 있습니다.
당군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
천여 명으로 웅진 도어를 개통하기 위해
대전쪽으로 출두했다가 모두 몰살되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보급품 전달에 중요한 요지가
이 진현성과 대전의 동쪽 되겠습니다."
- 서정석 교수(공주대 문화재보존학과)
6. "그 장군 예식이 의자왕과 함께 항복했다"???...
의자왕이 장기농성들을 이끌고 있을 때
46세의 예식장군은 웅진방령,
즉 웅진사령부의 실질적인 지휘관이었다.
그런데 의자왕은
항전 5일째인 660년 7월 18일,
갑자기 항복하고 만다.
연합군의 공격도 특별히 없었다.
왜 항복했을까?
"나당연합군이 웅진성을 공격한 흔적도 없다?
그런데 의자왕은 항복한다?
충분히 항전할 수 있는 상황이었고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백제군에게 유리한 상황이었는데
왜 항복을 했던 것일까요?
웅진성에서 5일 동안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예식진 묘지명 탁본에 나와 있는 내용입니다.
'占風異域 就日長安'(점풍이역 취일장안)
이 아리송한 내용이 의자왕과 예식진장군의 운명을 돌려놓습니다.
서기 660년 백제 운명의 날.
웅진성의 대반전입니다.
계룡산 자락에 아슬아슬하게 자리한 고왕암(古王庵).
백제 마지막 해에 지은 암자다.
암자뒤로는 천연 동굴이 있다.
백제 왕자 융이 피신했다고 해서 '융피굴'이라고 부른다.
왜 이곳에 백제 왕자가 숨었을까?
융피골 전설이 사실인지 알 수는 없지만 급박했던 상황의 증언이 아닐까?
"의자왕 및 태자 효가 성주들과 함께 항복했다."
-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이 태자 및 웅진방령군을 거느리고 웅진성에서 나와 항복했다."
- <삼국사기> '신라본기'
"그 장군 예식이 의자왕과 함께 항복했다."
- <신당서>
신당서보다 먼저 쓰인 구당서에는 더 구체적이다.
구당서는 삼국사기보다 200년 앞선 945년에 편찬되었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특이한 것이 있다.
신당서, 구당서 모두
백제가 항복하는데,
의자왕이 주체가 아니고
예식이 주체로 기록되어 있다.
'기대장예식 우장의자래항'
'기대장예식여의자항'
"중요한 사람,
특히 왕이면 왕을 제일 앞세우게 되어 있죠.
사건과 관계해서 세세한 내용을 씌지 못하고
아주 중요한 사실, 아웃 라인만 쓰게 되죠.
왕과 관련해서 왕보다 앞에 나온다는 것은
뭔가 그 나름대로 이유가 있는 것이고
그 이유가 뭔지를 탐색해내야 되는 것이죠."
- 노중국 교수(계명대 사학과)
의자왕의 항복 기사 바로 뒤,
태자 융의 항복 기사를 보자.
태자 융이 주체로 되어있어 어색함이 없다.
'태자융병여제서주개동송관'
예식의 이름이 앞에 씌여있는 게
사관의 실수로 볼 수 없는 증거다.
중국 역사에 김일제라는 인물이 있다.
김일제는 흉노 출신으로
한나라에 귀화하여 큰 공을 세웠다.
중국 역사에서 이민족이 공을 세우면
항상 김일제와 비교한다.
중화주의 관점에서 보면
가장 모범적인 이민족 사례가 바로 김일제다.
중국 감숙성 무위 김일제 석상.
섬서성 시안 김일제묘.
그런데 예식진의 묘지명에 보면
김일제와 비교할 수 있겠는가 하고 칭송하고 있다.
"무릇 김일제의 무리와도 업적을 논하고,
우열을 비교할 수 없으리 만큼 높다."
이민족의 모범인 김일제보다 더 극찬받는 예식진.
그의 공적은 무엇이었을까?
"백제의 유이민 중 부여융,
백제의 태자가 마지막에 정3품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흑치상지 역시 마지막에 정3품에 올랐습니다.
그들은 문헌자료와 후대에 발견된 묘지명에는
당나라에서 공이 컸다고 적혀 있습니다.
그런데 똑같은 정3품인 예식진의 묘지명에는
이런 쪽의 언급이 거의 없습니다."
- 바이근싱 교수(섬서사범대학 사학과)
개방국가였던 당나라는 이민족의 출세가 보장되어 있었다.
외국인이 입당하여 공적을 남기면 세세하게 기록하여 남긴다.
예식진과 같은 시기 당에 건너온 흑치상지는
토번족 토벌에 큰 공을 세운다.
그의 비문엔
그의 공적이 세세하게 나와 있다.
"右武威衛大將軍(우무위위대장군)
左武衛將軍(좌무위장군)
沙佯州刺史(사양주자사)
折衝都尉(절충도위)"
그러나 예식진은 공적도, 관직의 경력도 없이 좌위위대장군만 기록되어 있다.
예식진의 공적은 무엇이었을까?
7. 예식의 배신, 반역!~
의자왕을 붙잡아 당에 항복하다!!!~
민족사학자 신채호 선생은 <조선상고사>에서
의자왕의 항복 장면을 독특하게 서술했다.
"웅진의 수성 대장이
의자왕을 잡아 항복하라 하니,
왕이 동맥을 끊었으나 끊기지 않아
당의 포로가 되어 묶이어 가니..."
의자왕이 측근인 예식에게 잡혔다?
신채호 선생의 말뜻은 무엇일까?
다시 <구당서>의 기록을 보자.
의자왕 항복 기사에 뭔가 암호가 숨겨져 있다는 느낌이다.
다음 총 11자를 글자 한 자 한 자 분석해보자.
명확하게 드러나는 '기대장예식'과 '의자'를 제외하면
'又將來降(우장내항)' 네글자만 남는다.
이 중에서 모든 내용은
이 '將(장)'이라는 글자에 정확히 담겨있다.
'其大將예植 又將義慈來降(기대장예식 우장의자래항)'
'그 대장예식이 의자왕을 '장(將)'해와서 항복했다.'
'將'은 무슨 뜻일까?
"장(將)'자에는
명사로 '장수'라는 의미도 있고,
동사로는 '거느린다', '데리고 간다'의 뜻이 있습니다.
따라서 이 문장에서는 동사로 봐야 합니다.
예식이 의자왕을 데리고 가서 '항복을 했다'는 의미가 되겠습니다."
- 노중국 교수
왕을 데리고 가다?
무슨 뜻일까?
"의자왕을 감금 내지 체포를 해서 당에 항복한 것으로 보입니다."
- 이문기 교수(경북대 역사교육학과)
"의자왕을 사로잡아서
당 소정방에게 가서 항복을 한 것입니다.
결국 예식은
의자왕과 백제에 대해서 반역을 한 것입니다."
- 김영관(청계문화관 관장, 백제사 연구)
將.
데리고 간 것인가?
체포해 간 것인가?
취재진은 놀라운 결론에 신중해질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한문을 일상적으로 접하는 중국 역사학자의 의견을 들어보기로 했다.
"'예식이 그 왕을 데리고...'
여기서 '데리고'는
'왕을 사로잡아서 당나라에 투항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將'자가 중요한 것입니다.
전쟁에서 배신입니다."
- 바이근싱 교수
예식진.
그의 공적은 백제와 의자왕을 배신한 것이었다.
일촉즉발의 팽팽한 대치 상황.
나당연합군에 위협 당한 예식진은
영달과 파문의 갈림길에 서 있었다.
암호문 같았던 내용이 이제 뚜렷해졌다.
그 상황을 암호문처럼 적어놓은 것이다.
'占風異域 就日長安(점풍이역 취일장안)
"점풍(占風)은
바람을 점친다, 바람이 어디로 갈거냐,
백제의 거취,
당에게 항복할거냐, 저항할거냐,
점쳐봤다는 것은
자기 나름대로 여러가지로 계산을 해봤다는 거죠."
- 노중국 교수
웅진성의 깊은 곳에선 이미 새로운 힘을 따르고 있었다.
그날 웅진성의 결정권자는 예식장군이었다.
660년 7월 18일.
의자왕의 체포는 전투 중지 명령이자, 백제 700년 역사의 끝이었다.
"정말 충격적입니다.
항상 이런 위기의 순간에는 내부의 적이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역설적으로 한반도에 삼국이 대립을 하고 있었던 시기에는
당나라가 오히려 고전을 했습니다.
하지만 백제라는 한축이 무너진 후에는
668년, 신라의 지원을 받은 당나라군에 의해서
고구려도 쉽게 무너지고 맙니다.
결국 예식진의 배신은
동북아의 거대한 주춧돌 하나를 뽑아버리게 됩니다.
이후 동북아 국제질서는
중국 중심으로 고착화됩니다."
부여 고란사에는
삼천궁녀의 최후를 그린 벽화가 있다.
나당연합군에 쫓겨 낙화암에 뛰어드는 궁녀들,
그러나 삼천궁녀 이야기는 후대의 문인들이 지어낸 허구일뿐이었다.
그것은 망국의 왕이 짊어져야 할 숙명이었다.
660년 9월 3일 의자왕은 당으로 압송되었다.
그리고 660년 12월 3일.
의자왕은 당나라로 끌려와 곧 배신의 응어리를 안고
북망산(중국 낙양)의 고혼이 되었다.
중국 시안.
의자왕의 측근에서 당 황제의 충신이 되어 화려한 삶을 산 예식진.
묘지명은 그에 대한 당 황제의 믿음을 보여주고 있다.
'方承休寵(방승휴총)
恩光屢洽(은광루흡)'
"바야흐로 아름다운 총애를 입고...
천자의 은혜로운 빛이 흡족히 내려지고..."
672년.
12년의 짧은 당에서의 영화를 뒤로 하고
예식진은 58세로 사망한다.
황제는 최고의 조칙을 내려
고위관료들이 묻히는 곳에 그를 안장했다.
고엔위안(중국 시안, 당의 고위관료들이 묻히던 무덤)
8. 1,340년만에 돌아온 의자왕의 혼.
지난 2000년 충남 부여에서는
중국 북망산에서 가지고 온 흙으로,
1, 340년만에
전쟁포로였던 백제 의자왕의 고혼을 모셔와
부여 능산리에 안치했다.
의자왕과 부여융의 가묘(부여 능산리)
자신의 영달을 위해 주군을 등졌던 예식진.
그에게도 한점 회환이 남아있었을까?
대당 좌위위 대장군 예식진 묘지명.
예식진의 묘지명은 오늘 의자왕의 오욕을 벗겨주고 있다.
=============================================================================================
출처:KBS 역사추적 - 『의자왕 항복의 충격보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