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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5년만에 미국에서 학사, 석사, 박사 학위 취득!~
하와이에서 교육사업을 시작하다!~
이승만의 하버드 앨범.
"이 자료는 하버드 대학을 다니실 때입니다.
기억에 남는 중요한 자료들을 사진과 더불어 보관하기 위해서 샀던 앨범으로
여러 가지 자료가 들어 있습니다."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미국 생활을 시작한 이승만은
조지 워싱턴 대학과 하버드 대학, 프린스턴 대학에서 공부하며
당대 최고 엘리트로 성장해 나갔다.
"학사, 석사, 박사 학위 세 가지를 합쳐 다 5년 내에 받았습니다.
동양 사람 중에 5년 동안에 학사, 석사, 박사를 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고
미국 역사에도 미국 사람 중에도 제가 알고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 유영익 석좌교수
천재적 능력을 가진 미국 박사.
하지만 이승만의 명성은 이 뿐만이 아니었다.
이승만의 앨범속에 오래도록 간직되어 있는 테오도어 루스벨트(1901~1909).
이승만은 1905년 루스벨트를 공식 면담함으로써
정치 지도자로서 한인 사회 화제의 중심에 서게 된다.
미국독립기념관(Indepenence Hall).
미국 독립 운동의 중심인 필라텔피아는 이승만과 특별한 인연이 있는 곳이다.
1919년 국내에서 일어난 3.1운동의 열기는 미국에까지 번져
4월 14일 제 1차 한인 자유 대회가 필라텔피아에서 이뤄졌다.
미국과 국제 사회를 향해 조선의 독립운동을 외친 이 대회에서
이승만은 조선이 독립하면
기독교 국가 건설과 미국식 민주제를 실시하겠다고 주장했다.
미국 각지에서 모여든 유학생과 한인 대표 등
150여 명이 참가한 이 대회는 2박 3일간 계속되었다.
그리고 미국 최초의 의회(Continental Congress Hall)가 열렸던 으로 발길을 돌린다.
미국 민주주의가 시작된 역사적 현장을 방문한 것이다.
그런데 이날 이승만은 조지 워싱턴이 앉았던 의자에 앉는다.
독립 이후 어떤 국가를 건설할 것인가 논의하던 끝에 그가 주목한 것은 대통령의 의자였다.
이승만이 필라델피아 한인 대회 끝에,
미국 의회에서 조지 워싱턴 의자에 앉았던 것은 어떤 의미일까?
미국 한인 사회에 촉망받는 독립운동가.
하지만 이승만의 꿈은 여기에 머무르지 않았던 것 같다.
이날 보여준 이승만의 모습속에는
조지 워싱턴처럼 새 나라의 대통령이 되겠다는 원대한 포부가 담겨 있었다.
하와이.
30대에 미국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정치인이 된 이승만이
영구 귀국하기까지 주된 활동무대가 되었던 곳은 하와이다.
프린스턴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이승만은
30여 년을 이곳 하와이에서 산다.
당시 가장 많은 한인들이 모여 살았던 하와이는
이승만에 대한 여러 가지 기억들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다.
이승만이 살았던 집 근처 이승만이 심었던 '이승만 소나무'는
100년도 안 된 사이에 열대 야자수를 제치고 큰 키를 자랑하며 하늘 향해 길게 뻗고 있다.
1920년대 이승만이 살았다고 하는 집은
그동안 주인이 몇 차례 바뀌어 지금은 미국인이 살고 있다.
당대 최고 엘리트였던 이승만의 계획. 이승만의 목표는 무엇이었을까?
<이승만의 한인 중앙학원>
이승만은 가장 먼저 교육사업을 시작한다.
한인 이민자들의 자녀들을 모아 학교를 세우고,
한글과 우리 역사를 가르쳤다.
그는 수많은 제자를 양성한 교장선생님이었다.
"'숙희야', 제 이름이 숙희인데, 그렇게 저를 부르시며 '흰머리 좀 뽑아라'라고 하셨어요.
그런데 그분은 자리에 앉거나 할 때면 늘 손끝을 호호 부는 습관이 있었어요.
항상 그렇게 손가락을 불었죠. 왜 그렇게 손을 호호 부는지 궁금하더라구요."
- 메리 홍(100세)
"학교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는데요.
갑자기 이승만 박사가 몸을 떨기 시작했어요.
이상하게 손을 떨면서 손가락을 호호 불었어요.
나중에 어머니한테 설명을 들었는데
그분이 감옥에 있을 때 고문을 심하게 받아서 생겨난 행동이란 걸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우리는 '와 그는 진정한 영웅이구나'라고 생각하고 그를 다르게 봤죠."
- 베티 김(80세)
하와이 이민자들에게 이승만은 신비로운 존재였다.
근대화를 위해 고문을 받고 사형선고까지 받았다는
그는 존경과 선망의 대상이었다.
4. 하와이 한인사회와 이승만에 관한 불편한 진실!
- "이승만은 분열과 대립의 중심에 있었다!"
그런데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은 이승만에 대해 전해줄 이야기가 있다며 나선 이가 있다.
하와이 이민 2세인 로베르타 장이다.
<로베르타 장의 촬영 테잎>
그녀의 집에는 수백 개에 달하는 테잎들이 있다.
15년간 100여 명이 넘는 한인들이 이승만에 대해 증언한 자료들.
현재 증언자들의 대부분이 이미 사망한 상태,
그들은 자신들이 직접 만나고 경험한 이승만을 이야기했다.
"모두 70세 이상 된 분들만 인터뷰 했습니다.
1993년부터 인터뷰를 시작했는데
그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었고 싫어하는 사람도 있죠.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에 대해 기억합니다."
- 로베르트 장.
이승만을 직접 보고 겪었던 하와이 이민 1세대의 증언.
테잎속에는 충격적인 내용이 담겨져 있었다.
"내가 이승만을 어떻게 아냐고?
그때 내가 어려서 잘은 모르지만....
(그런데 이승만이 당신 아버지를 죽이려 했다는 걸 어떻게 아시죠?)
왜냐면 누군가가 곡괭이를 들고 와서 뒤에서 찍었거든.
그래서 병원에 실려 갔지.
다음날 우리 오빠가 꽃을 팔기 위해서 준비 중이었는데
이번에는 누군가가 뒤에서 다른 무기를 가져와서 공격을 했지.
그래서 두 번이나 병원에 입원 했었어...
(그게 이승만이 한 거라고 생각하세요?)
그의 조직원들이 한 짓이지."
- 미니 유(1905년 출생, 2006년 사망)
"이승만 박사가 나에게 자신의 사제가 되라고 권하면서
맹목적으로 따르라고 말씀하셨어.
그래서 이렇게 대답했지
"선생님 제가 어디든지 따르겠습니다. 하지만 맹목적으로 따를 순 없습니다.""
- 찰스 정(1909년 출생, 1997년 사망)
이민 초기 하와이에서 벌어진 크고 작은 사건들 속에 이승만이 있었다.
수십 년이 지났는데도 이민자들은 그때 있었던 작은 일들까지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내 기억으로는 이승만 박사의 집이 참 아름다웠어.
그 집 마당에서 많이 뛰어놀았지.
나를 부르면서 "백순아, 백순아 이리와 나하고 놀자" 하셨지."
- 아인스공 배(1919년 출생, 1998년 사망)
그리고 이들에게 이승만은 하와이 분열과 대립의 상징이었다.
"이승만이 당시 교회를 분열시켜 놓았지.
'이승만의 교회' 아니면 '감리교회'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어."
- 헤이즐 정 (1911 출생, 2004 사망)
"한국 사람들 간의 적개심이 강렬해졌지.
자세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승만과 <국민회>가 갈라서게 된 거지."
- 유원식(1907 출생, 1998 사망)
로베르타 장이 모은 기록은
초기 하와이 이민자들이 겪은 상처의 이야기다.
하와이 이민자들은
이승만과 함께 시작된 이 상처를 한동안 간직하고 있었다.
"(기록을 통하여) 어떤 결론을 얻게 되었나요?"
"인터뷰와 관련 조사를 하면서
하와이 한인 사회가 이승만으로 하여
얼마나 나쁜 영향을 받게 되었는지 알게 되셨죠.
그래서 그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이 있어요.
100명 이상 인터뷰를 하였는데
과반수 이상의 사람들은
이승만이 한인 사회에 위험한 인물이었다는 걸 기억했죠.
다들 돌아가셨지만
그분들은 제가 이일을 하는 걸 매우 기뻐했어요."
- 로베르타 장(75세)
뜻밖에 놀라운 이야기들이었다.
이 테잎들에 의하면
과거 한인 사회가 두 파로 갈라져서
극도로 대립했고 테러까지 벌어졌는데
그 중심에 이승만이 있었다고 증언하는 것이다.
이건 어떻게 된 상황일까?
그때 한인 사회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메리홍 할머니는 하와이 이민 1세대 중 몇 안 되는 생존자의 한 분이시다.
"한국 나이 100살이요.
명동 교회 땅에서 태어났어요.
그런데 세 살에 부모님하고 하와이 건너왔어요."
메리 홍 할머니가 하와이에 건너간 것은 1912년.
일제 점령을 견딜 수 없었던 부친의 선택이었다.
5. 이승만과 박용만!~
- 외교. 교육론 : 무장투쟁론의 갈등!~
하와이 이민이 시작된 것은 1902년.
102명이 최초의 하와이 이민선 '캘릭호'에 오르면서
3년동안 7,200여 명에 달했다.
이들은 대부분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당 35센트 노동자로 일했다.
그러나 하와이 이민자들은 주권을 잃은 조국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았다.
1907년 <국민회>를 결성해 열성적으로 독립운동에 나섰다.
"당시 한인 이주 노동자들은 한 달에 35달러씩 벌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 중 상당 액수를 한국의 독립을 위해 기부했던 거죠.
그렇게 <국민회>가 만들어진거죠.
가입비 10달러, 매년 회비 10달러 등 항상 많은 돈을 기부했어요."
- 안필영(도산 안창호 아들)
하와이 <대한인국민회> 경리장부.
하와이 이민자들은 국민회에 세금처럼 의무금을 납부했다.
<국민회>는 당시 최대 인력과 자금력을 가진 조직이었다.
1913년 그 하와이에 독립운동에 큰 뜻을 품은 두 남자가 들어온다.
이승만과 박용만이었다.
두 사람은 한성감옥 시절 옥중 동지로 만나 호형호제하던 관계였다.
박용만(朴容萬, 1881년 ~ 1928년)은 미국에 들어와
헤이스팅스 대학을 졸업하고 한인 군사조직을 만들었던 독립운동가였다.
박용만은
이곳 하와이에서
1914년 <대조선국민군단(大朝鮮國民軍團)>을 조직한다.
구한말 군인과 하와이 노동자가 주축이 된 <국민군단>은
낮에는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며 밤이면 군사훈련을 받았다.
<국민국단> 호놀룰루 시가행진.
기념일에는 시가행진으로 미국인들에게 그 위용을 자랑하기도 했다.
하와이 오아후 가할루지방.
"바로 여깁니다" - 최영호 교수(하와이대학 역사학과)
<국민군단>이 만든 병사 학교가 있던 곳이다.
<국민회>의 지원을 받으며
이들은 일제와 싸워 이길 수 있는 군사력을 길러내는데 온 힘을 쏟고 있었다.
그러나 이승만과 박용만, 그 절친한 관계는 오래가지 못하였다.
이승만이 박용만의 <국민군단>에 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프린스턴 대학 박사 출신 이승만은
그들의 무장투쟁노선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당시 이승만은 교육을 통한 인재 양성에 주력하고 있었다.
그의 계획은 미국인이 인정하는 지식인, 교양인을 길러내는 것이었다.
하와이대학 신문자료실에 당시 이승만에 대해 알려주는 기사가 남아있다.
1915년 6월 17일자 호놀룰루 스타블레틴 신문에 기고한 이승만의 글
"나는 어떤 반일적 내용도 가르치지 않는다.
다만 보편적인 인류애를 강조할 뿐이다.
이 지역 일본인 신문들은 내가 반일 감정을 일으킨다는 오해를 하지 말길 바란다."
"박용만과 이승만은 개인적인 야망에서도 충돌이 있기도 했지만
내가 보기에 두 사람 사이 가장 큰 문제는
어떻게 하면 독립을 쟁취하겠는가 하는 방법의 차이,
두 사람이 대표하는 노선이 다른 것입니다."
- 최영호 교수(하와이대 역사학과)
결국 이승만은 하와이 이민 사회를 장악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국민회 회장 선출과 자금 사용 출처에 문제를 제기했고,
이 과정에서 국민회측과 다툼과 논란이 불거졌다.
심지어 테러까지 자행될 정도로 사태는 심각했다.
'하와이 한인들 간에 싸움이 확산되다.'
'한인들이 재판중인 회장을 쫓아내다.'
'법정에 선 한인들, 살해 위협을 당하다.'
'법원까지 간 한인 폭동 사태'
"우리 아버진 박용만 지지자였어.
그런데 이승만 지지자들에게 몰리고 있었지.
그리고 서로 감정이 격해지면서 위험한 상황이 됐고
우리 가족은 다른 섬으로 도망가야만 했지."
- 유원식(1907 출생, 1998 사망)
"아주 끔찍한, 끔찍한 싸움이 있었지.
내가 기억하기로는 이승만 박사가 우리 집에 찾아왔었어
그리고 우리 아버지를 설득하면서 조직의 대표 자리와 통제권을 넘기라고 했지.
당시 국민회가 안정적인 자금을 가지고 있었거든.
그리고 결국 국민회 대표 자리를 둘러싸고 아주 큰 싸움이 벌어졌지.
이승만의 지지자들이 몰려 왔고 총격까지 발생했어."
- 에드워드 김(1914 출생, 1999 사망)
이 모든 분란은 이승만이 하와이 국민회를 장악하면서 일단락되었다.
이로써 모든 인력과 자금이 이승만에게 집중되었다.
하와이 이민들이 내는 <대한인국민회> 의무금 증서.
이승만의 싸인이 선명하다.
그가 자금을 관리하는 총책임자가 된 것이다.
1918년 한인사회에 충격을 주는 재판이 열린다.
<국민군단>의 박용만이 하와이 법정에 서게 된 것이다.
그는 하와이에 정박중인 일본군함 '출운호'를 폭파하려 한다는 혐의를 받고 있었다.
이 사건으로 독립운동을 위해 군사훈련을 받던 <국민군단>은 결국 해체되었고
박용만은 하와이를 떠났다.
그런데 이 사건이 일어난 직후 1918년 6월 27일자 <신한민보>는
이 사건의 배후 인물로 이승만을 지목했다.
이승만이 박용만의 '출운호' 폭파 계획을 비판하며 증인으로 나섰다는 것이다.
"이승만 박사는 항상 분열의 원인이었죠.
그 당시 한인들은 정말 서로 적이었어요. 첫 세대는 말이죠."
- 메리 홍(100세)
"나의 부모님은 항상 이승만 박사를 집으로 초대하곤 했지.
그는 항상 한국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염려하고 있었지.
우리는 이승만 박사를 존경하고 따르게 됐지."
- 클레런스 최(1917 출생~)
6. '미국'을 통한 독립의 꿈 - 이승만의 외교 활동
1924년.
이승만은 그의 지지자들을 모아 <국민회>와는
또 다른 <동지회>라는 단체를 결성했다.
<동지회>는 지금도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명맥을 유지하며
이승만을 최고의 정치가, 영웅으로 생각하고 있다.
"전 세계에서 다시 볼 수 없는 정치가며 외교가며 교육가며 또 종교가예요.
이박사의 생애를 잘 보면 과연 이런 사람이 다시 전 세계에서,
특히 한국 사회에서 다시 나올까 난 의심스러워요.
왜냐면 그런 분을 찾을 수가 없으니까"
- 김창왕 (동지회 회원)
"그는 한국 역사상 최고의 정치가입니다.
이승만 박사가 아니었다면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없을 것입니다.
이승만 박사는 성경책 속의 예수님과 같습니다.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의해 십자가에 박히셨습니다."
-고영희(동지회 회원)
하와이 한인 사회를 장악한 이승만은 그의 뜻을 펼치기 시작한다.
1919년에는 워싱턴 <구미위원부>를 조직하며
각종 국제회의에 참석해 한국의 상황을 알려나갔다.
"내가 보기에는 이승만 박사는 사람들 사교와 외교를 정말 잘한 것 같아요.
어디 가나 주요 요직에 있는 인물들을 골라내 가지고
그 사람들과 접촉해서 그 사람들과 친교를 가져요.
그리고 그 사람들을 조직하는 거예요.
미국 내에서 이승만을 방해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지만
지지하는 사람들을 보면 아주 숭배할 정도였어요."
- 최영호 교수
1919년 9월 1일 발행. 대한민국 공채표.
이승만은 1919년 대한민국 공채를 발행하기도 했다.
독립 이후에 상환한다는 공채,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일이었다.
1944. 7 미국 체신부 발행 태극우표.
또한 이승만의 노력으로
미국 체신국에서 태극마크가 들어가 있는 우표를 공식 발행하기도 했다.
외교활동가 이승만.
그의 화려한 이력은 이렇게 만들어져 갔다.
하와이 한인사회에 분열과 대립이라는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이승만은 독립운동의 조직과 자금을 자신에게 집중시키며 권력을 장악해갔다.
'독립'은 외교와 교육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 그의 확신이었다.
한동안 하와이에 남아있던 상처는 이러한 이승만의 신념의 결과였다.
7. 워싱턴에서 전하는 이승만의 음성,
식민지 조선의 신화가 되다!
그런데 1940년대에 접어들면서
은밀하고도 빠르게 이승만의 이름이 퍼져 나갔다.
태평양 너머 미국땅의 독립운동가 이승만.
전설처럼 들려오는 그의 소식에 민중들은 설레이기 시작했다.
천안 <독립기념관>에는
1942년에 있었던 이승만의 연설이 육성 원본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나는 이승만입니다.
미국 워싱턴에서 해내(海內), 해외(海外) 우리 2,300만 동포에게 말합니다."
1941 미일전쟁 발발 상황을 알려주는 라디오 방송에서
뜻밖에도 이승만의 목소리가 흘려나온 것이다.
멀리 미국에서 전해져오는 이승만의 연설은
전설처럼 한반도 민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내가 미국 워싱턴에서
몇몇 동포와 미국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미국 정부와 교섭하는 중이며,
우리 임시정부의 승인을 얻을 날이 가까워 옵니다
승인을 얻는대로 군비를...."
"지금 말하는 것은 우리 2,300만의 생명의 소식이요 자유의 소식입니다...."
당시 이 라디오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소수였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과정에서 내용이 부풀려지고 첨가되기도 했다.
"힘은 많지 않지만 그러니까 아주 막연하게 저 하늘에 있는 구름 같이 먼데,
아주 알 수 없는 곳인데, 우리하고 아주 먼데서,
우리나라를 다시 만들려고 하고, 우리를 지키려는 누군가가 있다,
그런 걸 아주 가날픈 희망이지만 그런 게 있다..."
- 문제안(前 서울 중앙 방송국 기자)
이때 워싱턴에 머물던 이승만의 공식 직함은
중경 임시정부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1941~1945).
그는 임정에서 외교를 담당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단파 방송을 통하여 '이승만의 신화'가 탄생되고 있었다.
"막연하게 이승만이라는 사람이 도망해서 미국에 가 있는데,
우리 임시정부에 대통령이라고 하며, 미국에서 방송을 했다더라,
그것이 일반에게 알려졌고,
그것이 아주 결정적으로 이승만 박사를 대통령으로 알리게 됐지."
- 문제안(前 서울 중앙 방송국 기자)
<경성지법검사국 형사판결원본>을 보면
이때 많은 사람들이 이 방송을 듣다가 일본에 잡혀갔는데,
이들에 따르면 임시정부가 중국이 아니라 미국에 있고
이승만이 미국에서 조선임시정부를 조직하고 대통령이 되어
독립운동을 하고 있다는 소문이 퍼져 있었다고 전한다.
1945. 8. 15. 해방.
고대하던 해방이 이루어졌고 이승만은 고국땅을 밟았다.
10월 20일. 서울군정청.
넓은 마당에서 승리에 빛나는 연합군과
때마침 30여 년만에 돌아온 이승만 박사를 환영하는 식이 성대하게 개최되었다.
수많은 인파가 몰려 이승만의 귀국을 환영했다.
미군정과 언론, 좌. 우익 단체까지 그의 귀국을 반겼다.
"한국에 있지 않아서 식민지 치하에서 친일 협력의 시비로부터 자유로웠고,
뿐만 아니라 직후에 격렬했던 좌우세력의 경쟁으로부터도 한발 물러서 있었기 때문에,
그는 당시에는 정치적 부채나 정치적 흠집이 없었습니다."
- 임종명 교수(전남대 사학과)
당시 이승만은 주로 '이박사'로 불리어졌다.
당대 최고 엘리트, '미국 박사, 이박사'
"'미국 박사'라 함은 당시 세상을 만들어 가고,
그리하여 조선에 해방을 가져다 준,
그 미국에서 박사까지 된,
그 박사가 가지고 있는 지식과 통찰력이라면,
여러 어려움에 직면했던 조선 민족에 갈길을 제시해줄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 임종명 교수(전남대 사학과)
이승만이 가는 곳마다 수많은 열렬한 지지자들이 모여들었다.
사람들은 그의 연설에 귀기울였고 그의 일거수 일투족은 뉴스거리가 되었다.
가히 '이승만 신드롬'이라 불릴 만큼 그는 인기정치인이었다.
1945년 12월.
중도파로 알려진 <선구회>가 실시한 여론조사는
당시 이승만에 대한 민중들의 평가가 어떠했는가 보여준다.
'가장 야심적인 지도자는 누구인가'라는 조사에
이승만은 1위가 아니었다.
여운형 33%, 이승만 21%, 김구 18%, 박헌영 16%
독립을 위한 '과거의 대표적 조선 혁명가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도
이승만은 1위가 아니었다.
여운형 21%, 이승만 18%, 김구 16%, 박헌영 17%
그러나 '누가 대통령으로 적합한가?'라는 질문에는
단연 이승만이 1위였다.
이승만 44%, 김구 30%, 여운형 8%
이승만의 학식과 외교 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24살에 조선의 감옥에서 근대화의 지도자로 성장하고
미국 유학시절을 거쳐 정착한 하와이에서 분열과 대립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해방을 맞이한 조선 민중들은 이승만의 학식과 외교 경험을 주목하고 높이 샀다.
최초의 미국 박사.
미국인처럼 영어를 잘 하는 사람.
뛰어난 외교활동가 이승만.
민중들에게 이승만은 특별했으며
이러한 천재적 능력과 경험에 대해서
미국은 물론 조선 민중들과 좌우익 인사들까지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 특별한 지도자였던 이승만의 해방 이후 계획은 무엇이었을까?
일찌기 대통령이라는 원대한 포부를 품고 있었던 이승만 앞에 새 역사가 다가오고 있었다...
- <한국사 전(傳)>을 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