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길
남해안을 따라 가 보겠다는 목적으로 부산, 창원, 고성, 통영, 거제를 거쳐 가는 중이었다. 남해안 전구간의 거리는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르지만 내 구상으로는 1,800km 이상 될것 같다. 내 구상은 첫째 가능하면 바닷가로 가고, 둘째 섬이라도 걸어서 건널수 있는 다리가 있으면 가고, 셋째 길이 있으면 건너 뛰지 않는다는 것이다.
남해안길(일명 남파랑길)은 하루 20~30km를 걷는다 해도 70~80일 소요되어 한달에 5~6일 걷는다 해도 1년 이상 걸리겠다. 날씨가 덥고 춥고를 가릴 처지가 아니라서 8월중에 무더위를 무릅쓰고 출정했다. 주변 친구들의 걱정이 대단하다. 하루 20~30km 걷는 것은 내 나이에 무리다. 더운 혹서기에 걷는 것은 건강을 해친다. 우정어린 고언을 뒤로 하고 '이 걷기'를 강행했다.
북 통영과 서 고성을 연결하는 40~50km 정도의 구간이다. 전반적으로 조용한 어촌들이 연결되어 걷기로는 쾌적한 곳이다. ㅁㅁ 일주로라는 이름이 붙은 국도로 따라가는데 교통량도 한적한 편이다. 보통 2~3km 멀어도 5~6km 지나면 마을이 있고, 마을마다 쉼터가 마련되어 있어 도보 여행자에게 큰 도움이 된다. 애로가 있다면 먹고 잠잘 곳이 마땅찮다는 것이다. 100가구도 안되는 마을에 식당이 없고 숙박시설도 없다. 가끔 전망이 좋은 곳에 팬션이 있기는 한다. 숙박비는 가족단위 비용이라 단독 여행자에게는 감당하기 어렵고, 커피같은 음료수를 파는 곳은 있지만 식사를 제공하는 곳은 드물다. 여행자 입장에는 불만이지만 사업자 입장으로는 인건비가 비싸고 수요가 적어 수익성이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상황인 것 같다. 도로도 조용한 국도만 있는 것이아니라 가끔 고속화 국도를 통과해야 할 때도 있다.
내 스스로 정한 목표를 이룰려고 가까운 친구들의 걱정과 여행 중의 먹고 자는 환경을 무시한 채 한여름에 출정을 단행했다. 새벽 6시에 집을 나서서 노포터미널로 가는 발걸음은 기대감으로 경쾌했다. 시외버스를 내려 통영시내버스도 잘 연결되어 지난번에 마쳤던 출발점에 섰다. 계획대로 잘 된 셈이다.
11시부터 호젓한 국도를 따라 걷는다. 햇볕도 구름에 가리어 걷기가 좋다. 13시경 구름이 걷쳐 따가운 햇살을 피해 쉬는 이번 쉼터는 정결하다. 동네주민들이 잘 관리하나 보다. 1시간 여 쉬다가 출발한다. 옥에 티라 할까, 식당이 보이지 않는다. 준비한 간식으로 적당히 때우고 간다. 오후 4시경 식당이 있어 늦은 점심을 먹는다. 식당주인이 묻는다. 어디 가느냐? 혼자 심심할텐데 일행이 없느냐? 어디서 왔느냐? 묻는 말에 대답하고 이동네에 민박이나 잠잘 곳을 물어 봤다. 오다가 본 팬션을 말한다. 숙박비가 단독여행자에는 비싸서 못간다 했더니, 이 동네의 마을회관에서 잘수 있으면 좋은데 금년에 새로 완공하여 외부 손님에게 아직 개방되지 않았단다. 이 마을을 지나 다음 마을에 와 경운기를 운전하는 촌로에게 민박을 물어보니 이 마을에 민박이 없고 주변마을에도 없을 거란다. 이장 댁이 저 교회 뒷집이니 이장한테 마을회관에서 잘수 있는지 물어 보란다. 마을 이장을 찾아 부탁하니 기꺼히 승락해 준다. 숙박비를 물어보니 그냥 자라고 하며 화장실에서 샤워할수 있고 에어콘 사용법도 일러준다. 이장을 소개해준 촌로를 보더니 소개해 주면서 이 마을의 노인회장으로 전에 마을이장을 지낸 선배님이라며 형님이 열어주면 되는데 그랬단다. 노인회장은 마을회관 사용은 이장 소관이니 이장에게 이야기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단다. 마을 어른들이 서로의 역할을 존중하며 마음을 모으는 마을의 분위기와 인심이 너무 보기 좋다. 식당이 없어 저녁은 간식으로 때웠지만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새벽 6시경에 출발한다. 감사인사를 직접 하지 못해 새벽에 나온 아주머니께 사유를 설명하고 고맙다는 인사를 전해 달라고 부탁하고 떠난다. 이른 아침이라 덥지 않아 걷기가 좋았는데 10시경이 되니 더위를 느낀다. 마침 삼거리에 식당이 있어 아점으로 식사한다. 식당주인을 은행원 출신으로 통영지점에 발령받아 근무하다가 정이 들어 조기퇴직하고 여기에 산단다. 부산출신인데 이젠 부산에 가면 번거럽고 여기가 좋단다. 식당도 돈벌이가 목적이라기 보다 집사람이 요리를 즐기고 하고 싶다고 해서 소일거리 겸으로 열었단다.
11시경 이제 뱃속도 채웠으니 다소 더워도 고성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오후 5시까지만 가면 이번 걷기는 잘 마무리 되겠다. 고성을 하루 정도 더 걸으면 사천시이고 다음은 남해군으로 갈수있겠다. 8월이지만 오길 잘했다. 기대했던 대로 될것으로 생각하니 기분이 좋다.
국도를 따라 조금가니 구름이 걷히면서 아스팔트 열기가 올라오고 햇살은 바로 내려 쪼이니 몸이 괴롭다. 고성쪽으로 들어서면서 남해일주로로 가는데 점점 지쳐간다. 바닷가 쪽으로 나가는 길을 찾아 가야는데 그럴 엄두가 나지 않고 오늘 걷기를 마칠 생각만 든다. 마침 고성군청 방향 표지가 있어 이를 따라 가다가 택시로 고성터미널로 가서 부산으로 귀가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였다. 나를 생각하는 많은 친구들이 걱정해 주었다. 나도 어느 정도 고생을 각오하고 있었다. 어떤 이는 혼자 다니면 심심한데 일행을 만들어 가지 그러느냐 하고, 어떤 이는 과유불급이니 그 나이에 무리하지 말라 한다. 이런 조언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가고 있다.
덜 심심하려면 일행을 만들어 가라는데, 그렇게 하려면 몇가지를 고려해야 한다. 일행의 일정을 맞추어 조정해야 한다. 먹고 자는 일도 각자의 취향에 맞추어 조정해야 한다. 특히 위험한 도로 위를 갈 때 조심은 물론 가야 할지 말지를 의논해야 한다.
단독으로 갈 때는 자신의 속도에 맞추어 거리를 조정하여 과유불급이란 소리를 들어도 진행할수 있으나, 일행이 같이 갈 때는 일행 중 가장 약한 회원의 체력에 맞추고 합의하여 가야 한다. 나는 이렇게 해야 하는 것이 마땅찮아 자유롭게 혼자 다니는 것을 선호하는 것 같다.
문득 요즘 세태와 비슷한 점이 연상된다.
첫째 주체의 생각이 목적이나 방향이 옳다거나 추구하고 싶다는 것이다. 평화와 건강. 평화는 옳고, 걷기는 하고 싶은 것이다.
주체가 단체냐 개인이냐 는 점에서 목적설정 과정에 다소 차이가 있다. 단체지만 폐쇄된 집단이라 의견수렴 폭이 어떨지 모르지만.
둘째 많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주변에서는 알지만 주체는 인정하지 않는다. 평화와 사람중심을 위해 군방력 축소, 원전 축소, 댐 파괴, 기업정보 공개, 소득주도성장 등으로 민생에 활력을 준다는 자신감.
걷기를 위해 한 여름 더위나 체력고갈을 무시하고 나는 괞찬다는 자신감.
셋째 누가 뭐래도 계속하겠다는 점이다.
외교, 국방, 경제 어느 분야도 시종일관 계속한다. 법무부 장관 임용도 예외는 아닐 것 같다는 예감이다.
나는 남해안이 끝나고 서해안이 시작되는 지점까지 계속할 것이다. 체력이 갈 수없는 상태가 되기까지.
현 시국이나 세태를 감히 개인의 어설픈 취향에 대비할 수 있느냐는 점은 말이 안된다는 것을 알지만, 세태를 보고 개인 취향을 개선하는 계기로 삼는 것은 괜찮겠지.
첫댓글 원문 그대로 게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