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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Lets go Libera 원문보기 글쓴이: 광복이
국가 이권을 외세에 넘긴 까닭은?
이완용을 비롯한 정동파 인사들은 미국 체류 당시 목격했던 서구 문물을 우리 사회에 도입하기 위해 철도와 전차시설, 전신 전화사업, 광산 등을 서구 열강과 공동으로 개발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당시 조선의 경제사정이 극도로 어려웠으니 어느 누가 선뜻 투자를 하려고 나섰겠는가. 외자유치에 대한 이완용의 노력에 대해 독립신문(1897년 11월 11일)은 다음과 같이 평했다.
미국인 모스( James Morse)가 금광개발권을 받았던평안북도 ‘운산광산’
미국인 모스(James Morse)가 획득한 것은 최초의 철도부설권(경인선) 만이 아니었다. 1896년 모스는 평안북도 운산군 북진읍에 있는 우리나라 최대의 금광인 ‘운산광산’ 개발권도 따내었다. 모스는 동양합동광업회사를 조직하고 황실에 자본주 100에 대한 25주를 주고 일시금 25만원을 헌납하였고, 또한 매년 2만 5천원을 헌상하였다. 1910년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로 주권을 상실하자 일본의 광업에 대한 일원화 정책에 따라 다른 외국인 운영의 광산과 함께 운산광산도 1939년 일본인이 경영하게 되었다. (모스가 고종으로부터 경인선 철도부설권을 획득한 것은 1896년 3월 29일 이다.)
이 과정에서 금욕(金慾)이 강했던 이완용은 알렌을 통해 상당액의 소개비를 챙겨 재산증식에 이용했다고 한다. 외세에 대한 이권 할양과 개인적인 축재(蓄財)는 이완용의 매국적 성격을 부각시키는 소재로 자주 거론된다.
그러나 국가 이권의 양도는 이완용 단독의 결정이 아니라 미국과 러시아에 기대를 걸었던 국가 지도부의 희망이 담겨 있었다. 또한 인프라 시설의 미비와 미개척 시장에 대한 투자 안전성 미비로 투자를 망설이던 외국 자본 유치를 위해 어쩔 수 없었던 시대적 상황도 감안해야 할 것이다. 이완용이 경인철도 부설권을 미국인 모오스에게 양여했을 때 독립신문은 다음과 같은 논설을 게재했다.
<외국 자본가들이 여러 이유로 조선에 자본 투자를 꺼리는 악조건 속에서 기업심이 왕성하고 정열적이며 관대한 마음을 지닌 미국인에게 철도 이권을 양여하는 것이 최선의 정책이었다. 철도가 다 완성되면 조선의 농업 상업 공업들이 온통 변혁하여 나라가 부강하게 될 뿐 아니라 개화의 실상을 보지 못한 국민들에게 개화 학문이 어떠한 것인 줄을 깨닫게 해주는 큰 학교 역할을 담당하게 될 것이다.>(독립신문 1896년 7월 2일, 12월 29일)
경인선을 개통하고 첫 운행을 할 차량에 일장기가 덮혀있다. 철도 부설권을 딴 미국인 모스(James Morse)가 권리를 일본에 넘겨 주었기 때문이다.
미국인 모스가 1896년 3월 29일 한국정부로부터 경인철도 부설권을 따내자 한발 늦은 일본이 모스의 경인선 부설권을 빼앗기 위해 1897년 5월 ‘경인철도인수조합’을 결성하고 경인지역에 사는 일본인 거류민들을 동원해 경인선 철도부지를 전부 산 후 터무니없는 비싼 값으로 모스에게 되파는 등의 방해공작을 펼쳤다. 자금 압박과 일본의 방해공작에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된 모스는 1899년 1월에 계약금 5만 달러를 포함해 총 180만원을 받고 경인철도를 완전히 인수조합에 넘겨주었다. 이로써 경인선 부설권은 일본 수중으로 넘어갔으며 모스는 맨주먹으로 거금을 벌게 되었다. 경인철도인수조합은 미완공인 경인철도를 인수해 9월 13일 제물포(인천) ~ 노량진간 공사를 완공하고 1899년 9월 18일부터 임시 영업을 시작했다. 1899년 제물포와 노량진 구간을 임시 운행한 경인선은 처음에는 객차 6량으로 오전 오후 각각 1회씩 왕복했다. 객차 중 1량은 황실전용으로 왕족이나 대신들이 타고 다녔다. 이어 1900년 6월 말 한강철교의 준공과 더불어 이해 11월 남대문까지 개통되어 우리나라에 교통혁명을 일으키는 철도시대를 열었다. 경인철도 기공식을 가진 후 2년 6개월이 지나 처음으로 개화의 상징인 기관차가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달리기 시작했던 날, 독립신문은 다음과 같이 경인선의 개통을 알렸다. “화륜거 구르는 소리가 우레와 같아 천지가 진동하고…, 수레 속에 앉아 영창으로 내다보니 산천초목이 모두 활동하여, 닿는 것 같고 나는 새도 미처 따르지 못하더라"
친미, 친러에서 친일로 돌아선 이완용
러시아 세력이 한반도에 미치던 그 시절, 러시아는 한반도보다 만주에 더 큰 관심을 보였고 조선문제로 일본과의 직접적인 마찰을 피하는 소극책을 추진했다. 따라서 춘생문 사건, 아관파천 당시에도 미국과 보조를 취하면서 미국을 지원하는 방식으로 한반도 문제에 어정쩡하게 개입하고 있었다.
고종 34년(1897) 2월 20일 경운궁으로 환궁한 고종이의정부 대신들과 기념촬영을 했다.
이완용은 러시아가 요구한 함경도 영흥·길주·삼수·단천의 금광 및 석탄채굴권을 거부했으며, 러시아 군사교관 초빙 문제가 제기됐을 때 “무관(武官)을 러시아로부터 빌리는 일은 조선의 흥망이 달려 있는 문제다. 나의 생사는 논할 가치가 없지만 조선은 한번 죽으면 다시 소생할 수 없다. 내 몸이 죽어서 이 일을 방지할 수 있다면 지금 사후의 영광 그 어떤 것이 이에 미치겠는가”(‘일관일기’ 1897년 5월 25일) 하면서 강력하게 반대했다.
고종황제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왕족의 성씨인 이(李)씨에서 비롯한 ‘오얏꽃 문양’을 국가의 상징으로 사용했다. 이 문양은 황실 예복뿐만 아니라 황실에서 사용하는 모든 물품에 장식되었다.
일본의 고문정치 개시되다
일본은 1904년 2월 인천에서 러시아 군함을 선제 공격함으로써 러일전쟁이 발발했다. 일본은 2월 23일 고종을 협박하여 한일의정서를 체결, 전쟁에 필요한 모든 편의를 제공받는 단서를 마련했다. 이날 체결된 의정서 내용 중 중요한 부분은 제4∼5조다.
<제4조: 제3국의 침해나 혹은 내란으로 대한제국 황실의 안녕과 영토의 보전에 위험이 있을 경우 대일본제국 정부는 속히 정황에 따라 필요한 조치를 취해야 하며, 대한제국 정부는 대일본제국 정부의 행동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충분한 편의를 보장할 것이다. 대일본정부는 앞 항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군략상 필요한 지점을 정황에 따라 차지 이용할 수 있다.
러일전쟁 발발 직후 서울시가를 행진하는 일본군대.
제5조: 대한제국 정부와 대일본제국 정부는 서로 승인을 거치지 않고 뒷날 본 협정 취지에 어긋나는 협약을 제3국과 맺을 수 없다.>
러일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한국에 온 외국언론 특파원들이 고종황제를 알현하고있다. 영국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 1904. 8.27일자에 실린 삽화.
러일 전쟁 취재를 위해 한국에 온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그리고 이탈리아 특파원들이 고종을 알현하는 모습이다. 단상 왼쪽이 고종이고 오른쪽은 황태자, 단 아래서 특파원을 대표하여 영국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의 빌리어스 기자가 명함을 건네주고 있다. 명함을 받는 군복 입은 사람은 시종 무관장인 듯하다.
권중현: “요양과 봉천 사이의 양국 병력은 서로 비슷합니다.” 느닷없이 친일파로 변신한 이완용 1905년 5월 27일 일본은 동해 해전에서 발틱 함대를 격파하고 함대사령관 로제스트윈스키 제독을 포로로 잡는 대승을 거두었다. 그 여세를 몰아 9월 5일 포츠머스 강화조약을 체결했다. 바로 이 무렵 러시아의 압력에 의해 퇴임하여 8년여 은둔생활을 하던 이완용이 1905년(고종 42·광무 9) 9월 학부대신으로 다시 등장한다.
러일전쟁 중 일본 해군의 공격을 받고 침몰하는 러시아 발트함대(왼쪽)와 일본군의 포로가 된 러시아 함대사령관 로제스트윈스키 제독(오른쪽).
철저한 배일(排日) 친미주의자였던 이완용이 어떤 과정을 거쳐 친일파의 거두로 탈바꿈했는지 그 이유를 명쾌하게 밝혀주는 자료나 연구성과는 아직 없다. 근대사 연구가들은 이완용이 천성적으로 권력과 돈에 민감한 성격에서 그 이유를 찾는다. 국제정세의 흐름과 권력의 향배에 누구보다 민감했던 이완용에게 뜻하지 않은 은퇴생활 8년여의 공백기는 좌절과 울분의 참담한 세월이었을 것이다.
이완용은 학부대신으로 다시 각료생활을 시작한 지 3개월 만인 1905년 11월 17일, ‘을사보호조약’으로 알려진 제2차 한일협약을 체결, 외교권을 일본에 넘기는 데 앞장섬으로써 친일 매국의 길을 걷게 된다.
을사조약 체결을 주도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왼쪽)와당시 한반도 주둔 일본군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대장.
그는 을사보호조약 체결의 공로로 외무대신 서리로, 같은 해 12월 8일에는 의정부 의정대신 임시 서리로 승진을 거듭했다. 1905년 12월 14일 이완용은 각국에 주재하고 있는 대한제국 외교관의 소환을 건의했다.
1905 년, 일본에게 한반도 지배권을 부여한 ‘포츠머스 강화회의’– 을사보호조약과 한일합병으로 이어져 -
포츠머스 조약은 1905년 9월 5일 러일전쟁을 끝내기 위해 미국 뉴햄프셔 주에 있는 군항도시 포츠머스에서 러·일 간에 맺은 강화조약이다. 러일전쟁은 1904년 2월 만주와 한국에 대한 배타적 지배권을 둘러싸고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일어난 제국주의 전쟁이었는데, 1905년 1월 뤼순항[旅順港]이 일본군에 의해 함락되었다. 그러자 열강들의 조정·강화 문제가 제기됨에 따라, 결국 미국의 대통령 루스벨트의 중재로 미국 뉴햄프셔 주의 군항도시 포츠머스에서 8월부터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강화회의가 열렸다. 강화회담은 일본측이 제시한 12개 조항을 토대로 진행되어, 9월 5일 전권외상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郞]와 러시아의 재무장관 비테와의 사이에 전문 15조, 추가조약 2개조의 강화조약이 조인되었다. 주요내용을 보면 ① 한국에 대한 일본의 지도·보호·감리권의 승인, ② 뤼순·다롄[大連]의 조차권 승인, 창춘[長春] 이남의 철도부설권 할양, ③ 배상금을 청구하지 않는 조건으로 북위 50˚ 이남의 남사할린 섬 할양, ④ 동해, 오호츠크 해, 베링 해의 러시아령 연안의 어업권을 일본에 양도한다는 것 등이다. 이 조약으로 미국·영국뿐만 아니라 패전국 러시아도 일본의 한국 지배를 승인함으로써 일제의 한국 지배가 국제적으로 확인되었으며, 이후 한국은 일제 식민지의 길로 들어섰다.
미국 포츠머스에서 열린 강화회담에 참석한 러시아 전권대표 비테 전 재무대신과 일본 전권대표 고무라 외무대신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앞에서 인사를 나누고 있다.
일본은 포츠머스 회담 직후인 1905년 11월 9일 일본특명전권대사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파견하여 하야시공사와 주한일본군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를 앞세우고 ‘보호조약’를 강행하려 하였다. 외교권 박탈을 내용으로 하는 신협약안(新協約案)은 이토와 하야시를 거쳐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에게로 전달되었다. 이토 히로부미와 하세가와 요시미치는 고종이 신협약 안에 동의하지 않자 11월 16일 정동(貞洞)의 손탁호텔에서 참정대신 한규설(韓圭卨) 이하 8대신을 위협하여 협약안의 가결을 강요하였다. 이어서 그들의 강요 아래 5시간이나 계속된 17일의 어전회의(御前會議)에서도 결론이 내려지지 않자 이토와 하야시는 일본 헌병 수십 명의 옹위 아래 회의장에 들어가 대신 각각에게 가부의 결정을 강요하였다. 1905년 11월 17일, 강압적으로 작성된 을사보호조약으로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 시대를 만나게 됐다.
을사조약 당일 (11월 17일) 대관정을 나서 마차에 오른일본군 사령관 하세가와 대장과 일본에서 급파된 이토 히로부미 특사.
그러나 대한제국 황실이 조인도 하지 않았고 비준되지도 않은 이 협약이 국제사회에 조약으로 공포되고 실질적인 효력을 발생시키는 오류를 바로잡고자 국제사회에 호소할 기회조차 대한제국은 박탈당했다. 1907년 6월, 7월에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제 2회 만국평화회의가 열린다는 소식을 들은 고종은 전의정부 참찬(參贊) 이상설을 정사(正使), 전 평리원 검사 이준, 전 러시아공사관 참서관 이위종을 부사(副使)로 임명하여 보호조약은 황제가 승인한 바가 아니라는 내용의 밀지를 주어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게 했다.
헤이그 특사, 왼쪽부터 이준, 이상설, 이위종.
이상설, 이준, 이위종은 헤이그에서 각국의 외교관들에게 1905년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사건인 을사늑약의 불법성을 호소하고 회의에 참석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그들은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루즈벨트 대통령이 이끄는 “평화회의”에 합법적으로 참석할 수 없었다. 일본은 헤이그 밀사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퇴위시키고 태자로 하여금 대리로 섭정하게 한 후 양위시켰고,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을 맺고 기존의 통감정치에서 각 부의 모든 차관을 일본인으로 대체하는 차관정치를 시작했다. 그리고 곧 이어 군대해산령을 내렸다.
1907 년 8월 초, 조선군대 해산에 항거하다 숨진 조선군의 시신들.1907년 8월 1일 조선군대가 해산되자 이에 항거하던 조선군을 일본군들이 학살했다. 서울 광희문(光熙門) 옆에는 버려진 조선 병사들의 시신들로 가득했다. 이 영웅들의 주검 앞에서 조선인 가족들은 물론 일본인들마저 경의를 표했다고 1907년 9월 7일자 프랑스 일뤼스트라시옹지는 기록하고 있다.
한국군대를 강제로 해산한 일제는 항일운동을 적극적으로 ‘남한대토벌작전’을 통해 강력하게 진압하였다. 일제는 1910년 5월 육군대신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를 3대 통감으로 임명, 한국식민지화를 단행하도록 하였다. 그는 헌병경찰제를 강화하고 일반경찰제를 정비하였다. 경찰제의 정비로 한국경찰은 1907년 10월 일제 경찰에 통합되었다. 일제는 1910년 6월 각서를 교환, 종래의 사법·경찰권 이외에 일반경찰권까지 탈취하였고, 1910년 8월 16일 비밀리에 총리대신 이완용에게 합병조약안을 제시했다. 같은 달 22일 이완용과 데라우치 마사타케 사이에 한일합병조약이 조인되었다. (1910년 8월 22일에 조인된 합병조약의 공식 발표일은 1910년 8월 28일 이다.)
과연 이완용만 죄인인가?
같은 해 7월 6일에는 나인영, 오기호를 비롯한 애국지사들이 이완용을 비롯한 을사 5적을 살해하려다 불발에 그친 사건이 발생했다.
1907 년 7월 20일. 고종을 강제퇴위 시키고궁에서 물러나오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907년 8월 26일에는 이완용이 의병 토벌을 위한 선유사 파견을 건의했다.
1907 년 6월 내각 총리대신이 된 이완용(가운데 줄 왼쪽에서 두 번째)이대신들을 이끌고 황태자로 책봉된 영친왕(중앙)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오른쪽 빨간 반원 안에 순종에게 왕위를 내준 평상복 차림의 고종황제가 보인다. (사진 / ⓒ 서원대교육박물관)
구한말 허물어지는 대한제국의 위상을 보여주는 이 한 장의 사진. 합방을 3년 앞둔 1907년 7월 고종황제는 제위를 순종에게 물려주고 태황제로 덕수궁에 거주하게 된다. 이 무렵 매국노 송병준을 비롯한 대한제국 대신들의 기념사진 오른쪽 끝에 반쯤 잘려나간 평상복 차림의 고종황제가 등장한다. 이는 곧 기울어가는 대한제국의 운명을 암시하고 있는 한 장의 사진이다. 이후 일제의 동양문화협회라는 단체는 1933년 이런 사진을 활용하여 일본국민의 필독서로 유명한 '개국문화80년사'를 편찬하게 된다. 일본 천황의 경우 사진의 직접촬영조차도 금지하던 당시로서는 조선 황제에 대한 모독 행위였다.
이완용은 11월 22일에는 황태자 영친왕의 스승 격인 소사(小師)로 임명됐다. 이완용은 12월 29일 영친왕을 일본 유학 명목으로 일본에 인질로 보냈으며, 일본 왕족 방자(方子) 여사와 정략결혼을 시켰다. 1909년(순종 2·융희 3) 5월 24일, 이완용은 폭도(일본에 대항하여 궐기한 의병을 가리킴) 진압비를 예비비에서 지출하자는 모습이 발견됐다.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이 폭도 소탕 진압비용 3만2573원, 비적(匪賊)들에게 피해를 입은 집 가족들에게 주는 돈 188원, 항문도(巷門島)의 등대가 폭도들에게 피해를 입은 것과 관련한 비용 1074원 등을 예비금 가운데서 지출할 것을 제의했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와 황태자 이은(李垠, 영친왕).
일제에 의해 고종은 강제 퇴위 당하고 1907년 8월 27일 즉위식을 마친 순종은 황태자 이은(李垠, 영친왕)의 스승으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선정하고 이완용에게 보좌역을 맡겼다. 이후 황태자 이은(李垠, 영친왕)은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야 했으며 황실의 다른 자제들도 모두 일본으로 가서 일본식 교육을 받아야 했다.
같은 해 7월 12일 이완용은 일본 통감 소네 아라스케(曾尼荒助)와 ‘사법과 감옥에 관한 사무를 일본 정부에 위탁하는 약정서’를 체결했다. 조약 체결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이처럼 매국적인 행위를 일삼는 이완용을 우국지사들이 그냥 놔두지 않았다. 1909년 12월 22일 이완용은 이재명 의사의 칼에 맞아 부상을 당하는 모습이 발견됐다.
이완용을 칼로 찌른 이재명(李在明 1890-1910).
이재명(李在明) 의사는 1909년 매국노 이완용의 복부를 칼로 찔러 중태에 빠뜨렸으나 체포되어 이듬해 사형당한 순국의사다. 이 사진은 이재명의사가 하와이에서 체류 중일 때 찍은 사진이며 미국에서 엽서로 제작되었다.
이재명은 1909년 12월 22일 서울 종현성당(현 명동)에서 벨기에 황제 리오올드 2세 추도식이 있으며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이 참석한다는 정보를 얻었다. 거사 전날 그는 당시 영심여학교 학생이던 아내 오인성을 숙소로 불러 마지막 작별의 밤을 보냈다. 그녀는 울지 않았고 거사를 말리지도 않았다. 날이 새자 이재명은 이동수, 김병록과 같이 성당으로 향했다. 군밤장수를 가장했다는 자료도 있고 학생복을 입었다는 자료도 있다. 전신주 뒤에 몸을 감추고 기다리니 오전 11시 30분에 이완용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재빨리 인력거에 올라타자 이재명이 달려가 인력거 뒤로 올라타면서 칼로 왼쪽 어깨를 힘차게 찔렀다. 이완용은 실신하면서 인력거 밑으로 나둥그러졌다. 인력거 차부인 박원문이 덤벼들다가 칼에 맞고 주인 옆에 쓰러지면서 그는 숨을 거두었다. 이완용을 올라타고 여러 번 찔렀다. 자신의 두루마기에 가려져 이완용을 거꾸로 올라탄 사실을 모르고 가슴인줄 알고 엉덩이를 계속 찌른 것이었다. 달려온 경관들에 의해 체포되면서도 자신의 거사가 성공한 줄 알고 ‘대한 만세’를 연창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이동수와 김병록도 이완용이 죽은 것으로 속단하고 현장에서 떠났다. 안중근 의사에 비해 나이가 어린 이재명은 중요한 순간 침착하지 못했던 것 같다. 이완용은 어깨, 허리, 복부 등 세 곳을 찔렸으나 약 2개월 동안 치료받고 회복되었다. 1910년 4월 13일부터 서울지방 법원에서의 재판이 시작되어 ‘고의로 사람을 죽이려고 한’ 법조문을 적용하여 교수형에 처하고 9월 13일 집행했다.
나라가 정식으로 망한 날은 1910년(순종 3·융희 4) 8월 22일이었다. 이날 순종은 이완용에게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린다.
제 1대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왼쪽은 1910년 한일합병 당일에 촬영한 사진이다.
1910년 8월 16일. 데라우치는 이완용에게 합병 조약에 관한 각서를 내밀었다. 한국의 이익을 약속하는 일본의 방침을 들은 후, 이완용은 두 가지를 요구했다. 1. 합병 후에도 계속 한국 이라는 국호를 존속 시킬 것. 2. 한국 황제에게 왕의 칭호를 허용해 달라. 이완용은 원래 합병을 환영했다. 그가 걱정한 것은 국호와 왕이 보존되지 않으면 한국의 주체성이 사라진다는 점이었다. 이완용이 생각하는 합병이란, 오스트리아-헝가리 처럼 양국이 독립국의 형식을 유지한 채 합병하는 것을 의미했다. 최종적으로 국호는 구칭 '조선'. 황제는 '이왕 전하'가 되었다. 그러나 일본에서 '왕'이란 황족의 의미에 지나지 않았다. 일본 정부가 가장 두려워한 것은 서구 열강이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과 영국은 일본과 우호관계를 유지하려 노력했고, 일본의 세력이 한국에 뻗치는 것을 지지했다. 초대 총독이 된 데라우치는 한국의 연호 '융희'의 사용을 금하고 일본 황제의 연호 '메이지'를 따르게 했다. 조선 왕조가 500년 이상 사용한 '한성'은 '경성'으로 개명했다. 합병 초기 단계부터 이미 조선인의 국가의식을 파괴하는 작업은 시작되고 있었다.
이완용은 “일본에 홍수가 나서 수재민을 위로하러 간다”면서 일어에 능통한 조중응을 앞세워 일본 통감부를 방문, 조선의 주권을 일본에 넘겨주는 한일합병조약을 체결했다(그가 조중응을 데리고 간 이유는 일어를 거의 못했기 때문이다). 그 문안은 다음과 같다.
한일합병 후 순종황제가 국민에게 발표한 호소문. 순종 황제는 국민들에게 다음과 같이 호소했다. 문명화에 복종해서 행복을 누리라. 짐이 오늘날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은 오로지 그대들 민중을 구하고 싶은 필사적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합방조약이 체결되고 나흘 후인 1910년 8월 26일 실록에 의하면 이완용은 한일합방조약의 공로로 특별승격 및 금척대수훈장(金尺大綬勳章)을 받았다는 기록이 보인다. 민비가 일본인의 손에 살해당하고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복궁으로 환궁한 후 러시아 세력이 내정간섭을 하자 미관파천(美館播遷)을 시도했다. 1899년부터 러시아 세력이 물러가는 기미가 보이자 이완용 박정양 등 친미 개화파들을 철저히 거세하고 수구파를 등용시켜 황제권 강화에 매진했다.
1910 년 1월 15일에 촬영한 이완용 내각의 인물들.왼쪽으로부터 이완용(李完用) 총리대신, 임선준(任善準) 내무대신, 이병무(李秉武) 군부대신, 송병준(宋秉畯) 농상공부대신.
이완용은 누구보다 시류에 민감한 인물이었고, 권력욕 출세욕이 강했던 인물이다. 그의 머릿속에는 ‘외세’에 대한 진정한 각성 없이 세력균형의 큰 흐름을 망각하고 친일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근대사 연구가들은 한결같이 “이완용을 감정의 보복 차원이 아니라 역사평가의 차원으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또 이완용 개인에게만 매국의 죄를 뒤집어씌우는 것은 올바른 역사평가가 아니라면서 “외세가 판을 치게 만든 시대를 도래케 한 국가 지도부와 국민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