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에 살기 시작했다. 서울이나 대구 등 대도시에 비해 안동에 사니 편안하다. 안동은 좋다. 날마다 안동을 걷고 안동음식을 먹는다.
익숙한 그것들이 어느 날 하나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안동의 주름살이 보이기 시작했고 안동이 속살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안동국시와 안동찜닭, 안동간고등어 혹은 헛제사밥의 심심한 내력도 내 귀에 속삭거리기 시작했다.
무심했던 안동에 대한 내 시선이 한결 부드러워졌고 투박한 내 입맛도 호사스럽게 안동을 먹게 됐다.안동에 대한 거창한 담론이 아니라 그냥 안동이야기다.
퇴계의 향기 도산서원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고 했다. '여우가 죽을 때 구릉(丘陵)을 향(向)해 머리를 두고 초심으로 돌아간다.'는 뜻으로 죽어서라도 고향에 묻히고 싶어 한다는 의미로 많이 쓴다. 필자도 오랫동안 서울에서 살다가 안동에 내려온 지 어느 새 5년이 지났다.
퇴계 이황 선생은 끊임없이 조정에 불려나가 진퇴를 거듭한 끝에 마침내 69세가 되던 1569년 고향에 돌아와서 도산서당에 머물면서 후학을 양성하면서 마지막 여생을 보냈다.
'퇴계(退溪)'라는 호가 '나의 고향 시냇가로 물러나겠다.'는 의미라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 후 퇴계 선생이 더 존경스러워졌다. 퇴계 선생이 안동에서 기거하던 곳이 바로 계상서당(溪上書堂)이었으니 '물러나 계상서당으로 돌아간다.'는 퇴계라는 호의 의미가 딱 들어맞았다.
퇴계는 낙향을 만류하던 선조 임금의 허락을 받아 마지막 벼슬을 물리치고 한양(漢陽)을 떠나 14일 만에 고향 도산으로 내려왔다. 그로부터 451년이 흘렀다.
혼탁한 세상이다. 서푼짜리 미관말직 벼슬이라도 얻으려고 너나할 것 없이 서울로 몰려가서 정치권 주변에서 유력정치인의 잡심부름을 마다하지 않고 뒤치다꺼리를 도맡아 하다가 감옥에 가기도 하고 혹은 권력의 부스러기라도 얻기 위해 '감사합니다.'하며 고개를 수그리는 세태다. 서울 여의도 정치권 주변의 그런 세태를 보면 퇴계가 얼마나 위대한 우리의 스승이었는지를 새삼 깨닫는다.
스스로 진퇴를 분명히 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른다. 퇴계의 삶은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이 다르지 않는 실천하는 삶이었다. 학문과 삶이 같았다. 그런 퇴계의 삶의 자취와 가르침의 향기가 여전히 짙게 남아있고 살아있는 곳이 안동이다. 그래서 안동은 여전히 사람이 살만한 곳이다.
다시 안동을 걷는다. 퇴계의 가르침은 안동의 정신이다. 안동의 정신은 곧 퇴계의 가르침이고 그것은 안동을 우리 독립운동의 본산으로 만든 바탕이기도 하다.
안동 시내에서 퇴계의 삶의 자취를 찾아나서는 길은 꽤나 먼 편이다. 봉화로 가는 도로를 따라 안동호를 끼고 30여분을 달려야 도착한다. 도산서원은 인근의 병산서원과 영주 소수서원, 경주 옥산서원, 달성 도동서원 등과 함께 2019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고 해서 도산서원의 위상이 달라진 것은 없다. 꼬불꼬불 호수가 보일락말락하는 호숫길을 지나면 도산서원 입구 주차장에 도착한다.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끊어서 도산서원까지는 오분 여 남짓 걸으면 오른쪽에 시원한 안동댐이 만든 안동호를 만나게 된다. 도산서원은 안동호를 바라보는 풍광좋은 도산자락에 자리 잡고 있다. 서원 앞 넓직한 마당에는 수백 년 묵은 고목들이 도산서원을 찾아 온 관광객과 배향객을 반갑게 맞이한다.
서원의 규모는 생각보다 크지 않고 아담하다. 퇴계가 제자들을 가르치며 기거하던 '도산서당'은 그저 작은 세 칸 반짜리 집으로 마루까지 갖추고 있지만 소박했다.
유교의 본산이라고 할 수 있는 공자의 고향, 중국 곡부(曲阜)에서 만난 공자의 유적들이 '대륙스케일'을 그대로 재현하듯이 웅장한 규모라는 것과 비교해본다면, 공자의 후손도 '추로지향'(鄒魯之鄕공자(孔子)와 맹자(孟子)의 고향)으로 추존된 안동의 도산서원을 보고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조선에서 최초로 주자학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새롭게 정리한 퇴계 이황선생을 기리는 도산서원은 옛 모습 그대로다. 더하고 덜하고 할 것도 없이, 퇴계가 기거하고 후학들을 가르치던 도산서당을 중심으로 농운정사와 광명실, 역락서재, 하고직사 등의 여러 건물들이 있지만 모두 간결하고 소박하고 검소했다. 퇴계의 생활 자체가 자연과 벗하면서 살아가는 소박하고 검소한 삶이었기에 가능했다.
서원에 들어서 가장 먼저 도산서당으로 향했다. 문패처럼 붙어있는 '도산서당'(陶山書堂)이라는 작은 현판글씨가 이채로웠다. 이 도산서당이라는 현판 글씨는 퇴계가 직접 쓴 친필이라고 한다. 천하에 명성이 자자한 퇴계를 찾아오는 후학들이 줄을 이을 정도로 북적이던 서당의 현판이 자그마한 나뭇조각에 작고 아담하고 글씨체로 쓰여있는 것이 여간 의아스럽지 않았다.
김병일 도산서원 원장은 "배우러 찾아오는 제자들이나 질문하기 위해 방문하는 후학들이 마음 편하게 다가오도록 배려한 결과"라고 말했다. 당시 퇴계 같은 대학자를 찾아뵙는다는 것은 방문자 입장에서도 쉽지도 않았고 무척이나 긴장된 일이었을 것이다. 퇴계는 자신을 찾아오는 이들의 그런 불편한 처지를 배려하고 헤아려 문패부터 턱을 낮춘 것이리라.
이 도산서당은 퇴계가 스스로 공부하고 후학들을 위한 공간이 필요해서 직접 마련한 곳이다. 제자들이 먼저 도산서당 터를 찾아서 이곳에 짓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건의하자 퇴계가 직접 와서 보고 터를 확정했다. 지금은 1976년 안동댐이 들어서면서 풍광이 많이 달라졌지만 뒤로는 도산(陶山)자락인데다 앞으로는 낙동강(지금은 안동호)이 흐르는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길지였다. 후일 조선시대 진경산수화의 대가인 겸재 정선이 이곳까지 찾아 와서 <계상정거도>를 그릴 정도였다. 이 그림은 퇴계 유물을 전시하고 있는 '옥진각'에서 볼 수 있다.
도산서당의 맨 왼쪽 한 칸은 골방이 딸린 부엌이고 중간의 아늑해 보이는 1칸짜리 방이 퇴계가 기거하던 완락재(玩樂齋)다. 열린 문 사이로 한참을 방안을 들여다보면서 퇴계의 향기를 맡으려 애썼다. 우리에게는 아주 좁은 공간으로 느껴졌다. 그러나 당시 퇴계 선생에게는 공부하고 후학들을 가르치면서 거처로 삼기에 충분한 공간이었다. 소박하고 검소한 삶을 살아온 퇴계 선생은 서당 바로 마당에 작은 연못을 파고 거기에 연을 심어 '정우당'(깨끗한 벗이 있는 우물)이라는 이름을 지었다. 서당 옆 산자락에는 샘을 파고 그 옆에 소나무와 대나무 국화, 매화를 심어 '절우사'라고 불렀다. '절개와 의리가 있는 벗'이란 뜻이다. 자연 속에 살면서 늘 자연을 가까이 한, 퇴계의 하루하루가 선연하게 그려졌다.
도산서원을 돌아보고 밖으로 나오면 탁 트인 시야에 호수 중간에 자리 잡은 작은 섬 하나가 포착된다. 시사단(試士壇)이다. 시사단은 원래 있던 그 자리지만, 안동댐 건설로 수몰이 될 처지에 놓이게 되자 10m, 높이의 돌축대를 쌓아 높여놓았다.
퇴계 선생 사후 222년이 흐른 1792년 정조가 이곳 도산서원에서 '도산별시'라 불리는 과거시험을 치르도록 한 것을 기념해서 세운 비석이다. 정조는 당시 퇴계 선생의 기리는 의미에서 이곳에서 과거시험을 치르도록 했다. 일종의 영남선비에 대한 탕평책의 일환으로 인재등용의 특별한 기회를 부여한 것이다.
어슬렁어슬렁 퇴계의 흔적을 따라 걷기만 해도 퇴계의 향기에 흠뻑 젖었다.
'무불경'(毋不敬 모든 일을 행함에 있어 조심하고 공경하여야 한다)과 '신기독'(愼其獨 홀로있게 되면 행동이나 마음가짐이 흐트러지기 쉬우므로 늘 조심하라) 퇴계 선생의 가르침이 한 둘이 아니지만 이 두 경구를 받아들고 도산서원을 나왔다.
계상서당
도산서원에서 2km 정도를 도산뒷편으로 가면 퇴계종택에 도착한다. 이곳은 사실 도산서원의 뒷산으로, 종택 앞을 흐르는 계곡이 계상(溪上)으로 불린다. 퇴계가 도산서당을 짓기까지 10여 년 동안 기거하면서 수많은 저술들을 내고 후학들을 가르치던 곳이 바로 이 '계산서당'이다.
이곳은 퇴계의 사상이 영글어지고 완성된, 한국정신문화의 발원지이자 성지다.
당시의 계상서당은 허물어져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수년 전 옛 문헌과 기록을 참고해서 당시의 집 세 채를 복원했다. 퇴계의 공부방인 '계상서당'과 '한서암'(거처) 그리고 기숙사격인 '계재'가 그것이다.
계상서당 앞을 흐르는 시내와 징검다리. 매서운 한파가 오면서 요즘은 꽁꽁 얼었다.
퇴계종택 역시 새로 복원됐다. 종택 뒤편에는 도산서원선비수련원이 자리 잡고 있어서 매년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퇴계와 선비정신에 대해 배우고 간다.
계상서당에서는 당대 최고의 유학자인 퇴계 선생과 젊은 율곡 선생의 만남이 이뤄졌다. 1558년 약관 23세의 율곡은 58세의 퇴계를 찾아와 한껏 존경을 담은 시를 지어 바쳤고 퇴계도 화답했다. 두 사람은 사흘을 계상서당에서 함께 지냈고, 퇴계는 떠나는 율곡이 가르침을 청하자, 다음과 같은 글을 써서 줬다.
'마음가짐에 있어서는 속이지 않는 것이 귀하고, 벼슬에 나아가서는 일 만들기를 좋아함을 경계해야 한다.'(持心貴在不欺 立朝當戒喜事)
계상서당을 둘러보고 개울을 건너는데 꽁꽁 언 시냇물 아래로 졸졸 흐르던 물소리가 갑자기 내 귓가에 크게 들려왔다.
퇴계 선생이 계상서당에서 내려와 산책을 하면서 늘 듣던 그 시냇가 물소리엔 퇴계의 가르침이 스며들어있는 듯 했다.
서명수 슈퍼차이나 대표
서명수 슈퍼차이나연구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