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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하느님을 마음을 잡읍시다. 그분을 감동시킵시다!
제 어린 시절 집집마다 가축을 키워 내다팔기도 하고 잡아먹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그때 경험많은 어르신들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닭을 잡을 때는 날개를 잡으면 끝이다. 토끼를 잡을 때는 귀를 잡으면 꼼짝 못한다. 고양이는 목덜미를 잡으면 쉽다.”
그 대목에서 스스로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러면 개는? 같이 사는 개들에게 실험을 해봤습니다. 꼬리를 꽉 잡았더니 엄청 으르렁댔습니다. 개는 잡지 말고 그냥 쓰다듬어주는 게 좋겠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은 어디를 잡아야 할까요? 손목을? 머리를? 요즘 시대가 바뀌어서 그 어떤 부위든 신체 접촉을 아예 안 하는 게 좋습니다. 다만 사람은 마음을 잡아야 합니다. 감동을 줘서 마음을 사로잡으면 다 잡는 것입니다.
그 어떤 교육적 노력도 먹히지 않던 한 아이가 있었습니다. 백방으로 노력해도 그 어떤 작은 변화의 기미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희미하게나마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는데...
그 순간은 아이의 마음을 움직인 순간, 즉 감동을 통해 마음을 사로잡은 때였습니다. 때로 마음이란 것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놀랄 때가 많습니다. 마음이 담길때와 마음이 전혀 없을때와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드리는 봉헌과 사랑, 기도에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마음과 정성, 진정성이 당긴 기도는 하느님께서 크게 기뻐하실 것입니다. 이런 배경을 바탕으로 오늘 복음 안의 예수님 말씀을 묵상하니 더 은혜롭습니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르 12,30)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어떠한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음이나 정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고, 그저 형식적, 습관적으로 그분을 사랑하는 것은 아닌지요?
어떻게 하면 우리의 신앙생활이, 우리의 기도 생활이 하느님을 감동시키고, 하느님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겠는지, 고민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신앙에 무관심한 자와 미지근한 자 중 누가 더 나쁠까?>
복음: 루카 11,14-23
오늘 복음에서 군중 가운데 몇 사람은 예수님께서 하신 기적을 보고는 “저자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라고 말하고, 또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그분께 요구하기도”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마치 마귀를 쫓아내는 일이 힘센 자와 강도가 싸우는 것과 같은 일이라고 하시며,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버리는 자다.”라고 결론을 내리십니다.
만약 전쟁에서 상급자가 하는 일에 자꾸 불만을 품거나 상급자를 인정하지 않는듯한 태도를 보이면 어떻게 될까요? 이는 마치 ‘탈영’을 하는 일과 같습니다. 자기 목숨을 살리고자 탈영하면 어떤 면에서 크게 피해를 주는 것처럼 생각되지 않을 수 있으나, 실제로는 군의 사기를 떨어뜨려 전쟁에서 패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게 합니다.
영화 ‘반지의 제왕’에서 골룸이 이와 같은 역할을 담당합니다. 골룸은 프로도와 샘의 길 안내자로 등장하면서 그들의 믿음을 얻기 위해 간절하게 말합니다. “골룸이 착한 주인님을 잘 모시겠어요. 골룸이 길을 잘 알고 있어요.”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는 항상 다른 생각이 있었습니다. 골룸은 프로도와 샘을 속이기 위해 친절한 모습과 간교한 모습을 반복하며 내부에서 그들을 분열시키고 약화했습니다. 그는 샘을 끊임없이 의심하게 했고, 프로도의 마음을 혼란에 빠뜨려 결국 프로도는 샘마저도 의심하게 됩니다. 결국 프로도는 신뢰했던 친구 샘에게 “돌아가 버려! 네 도움은 이제 필요 없어!”라고 말하며 분노를 표출합니다.
골룸의 최악의 배신은 프로도와 샘을 거대한 거미 괴물 ‘쉴롭’의 소굴로 유인한 사건입니다. 그는 프로도를 죽게 하고 자신이 반지를 차지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결국 프로도가 거미에게 마비되고 위험에 처하게 만듭니다. 샘이 프로도를 구해냈지만, 내부에서 일어난 이 배신 때문에 프로도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큰 상처를 입게 됩니다.
예수님도 가리옷 유다에 의해 배신당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그가 아니어도 십자가의 길로 가시기로 결심하셨기 때문에 이것은 실패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분께 냉랭한 사람보다 사랑하는 척하며 그분 곁에서 열성적이지 못할 때 가장 큰 피해를 준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장군 중 하나로 꼽히는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은 기원전 218년부터 제2차 포에니 전쟁을 이끌며 로마를 상대로 수많은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특히 기원전 216년의 칸나이 전투에서는 로마군을 거의 전멸시키는 대승리를 거두며 로마를 공포에 떨게 했습니다. 로마의 역사가 리비우스는 “한니발 앞에서 로마는 마치 늑대 앞의 양 떼와 같았다.”라고 기록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로마를 무너뜨리기 위한 한니발의 모든 계획은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서 무너졌습니다. 카르타고의 정치인들과 귀족들은 한니발의 성공을 질투하고 견제하며, 필요한 지원과 병력을 제공하지 않았습니다. 한니발은 계속해서 본국에 편지를 보내 지원을 요청했지만, 정치적 이해관계에 얽힌 지도자들은 이 요청을 무시하거나 지연시켰습니다.
결정적으로, 내부의 배신은 기원전 202년 자마 전투 직전에 절정을 이룹니다. 카르타고의 정치 지도자들은 내부에서 협력하여 한니발의 권력을 약화시키고, 심지어 로마와 비밀리에 협상을 시도하기까지 했습니다. 결국 한니발은 자마 전투에서 로마의 스키피오 장군에게 결정적으로 패배했고, 전쟁은 로마의 승리로 끝납니다. 전투 후, 절망한 한니발은 “내 진정한 적은 로마가 아니라 카르타고의 정치가들이었다.”라고 말했습니다. 로마는 법치주의 국가였기에 결단력이 빨랐으나, 카르타고는 결정을 지연하고 일치하지 않으며 패배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순신 장군은 영화 ‘명량’에서 이순신 장군은 마치 아버지처럼 자상하다가도 탈영한 자에 대해서는 매우 무서운 모습을 보입니다. 자기 자신이 탈영한 자의 목을 사정없이 치는 것입니다. 그들이 가족이 있고 나이 든 부모가 있다고 해도 주저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전쟁에서 지면 그보다 더 큰 비극이 온 국민에게 닥쳐오기 때문입니다.
죄를 짓는 사람은 그냥 죄를 지어 자기만 지옥에 가면 됩니다. 그러나 교회 내에서 영혼 구원을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자리에 있으면서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은 더욱 큰 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다시는 대통령 부부가 아무리 미워도 비행기 사고로 떨어져 죽으라고 하는 사제는 나와서는 안 됩니다. 그것 때문에 얼마나 많은 영혼이 교회에서 떨어져 나갔는지 모릅니다.
선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선교를 자신이 빠져도 되는 무엇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큰 노력을 하지 않고 주일미사에만 열심히 나옵니다. 그러나 선교도 전쟁입니다. 싸워서 쟁취하지 않으면 빼앗깁니다. 한 영혼을 빼앗기는 것은 전쟁에서 한 민간인이 죽는 것보다 무서운 일입니다. 하느님은 모든 신앙인이 선교에 열정을 쏟기를 바라십니다. 그런데도 노력하지 않고 나만 혼자 신앙생활 하려고 한다면 역시 전체적인 사기를 떨어뜨리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차갑거나 뜨거운 것은 삼키시지만, 미지근한 것은 참아내지 못하십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루카 11,14-23: 나는 하느님의 능력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있다
“저자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구들을 쫓아낸다.”(15절)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주님께서 하신 일에서 하느님의 능력을 벗겨내고, 그리스도의 힘의 원천이 베엘제불이라고 한다. 나라가 서로 갈라지면 어떻게 설 수 있겠는가? 사탄이 저 자신과 싸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자기 시종들을 해치지 않는다. 그들은 주님께서 하느님의 능력으로 사탄을 짓부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20절). 아들과 성령은 아버지의 두 손이라고 하였다. 하느님의 손가락은 바로 아들과 함께 일하시는 성령이시다. 주님께서는 인간으로서 하느님의 영 안에서 마귀를 쫓아내신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인간 본성은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도달한 것이다. 인간 본성이 더러운 영들을 꾸짖음으로써 빛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와있다는 의미이다.
“힘센 자가 완전히 무장하고 자기 저택을 지키면 그의 재산은 안전하다. 그러나 더 힘센 자가 덤벼들어 그를 이기면, 그자는 그가 의지하던 무장을 빼앗고 저희끼리 전리품을 나눈다.”(21-22절) 그분은 세상의 지배자를 이기셨다. 그를 무릎 꿇리고 그의 힘을 빼앗은 다음, 당신을 따르는 이들이 마음대로 처리하도록 내주셨다. 주님께서는 그 주인보다 더 힘센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말씀이신 분이 사람이 되시어 맞서시자, 그는 모든 것을 잃었다.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버리는 자다”(23절).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마귀의 손에서 구해 내고 그에게 속아 넘어간 이들을 그의 거짓에서 건져 내러 오셨기 때문이다. 사탄은 주님께서 구원하고 모으신 이들을 흩어버리려는 자이다. 우리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처럼 다른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며 살지 않고, 언제나 다른 사람을 축복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소화 데레사 성녀께서 쓰신 글입니다.
“나는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비록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웃으면서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항상 좋으신 하느님 앞에 행복한 모습을 드러냅니다. 좋으신 하느님의 은총을 가장 잘 얻게 해 주는 것은 다름 아닌 감사입니다. 우리가 그분께 어떤 은혜에 대해서 감사를 드리면 그분은 감동하시어 우리에게 열 배의 은혜를 주십니다. 난 그것을 경험했습니다.”
성녀의 말씀에 큰 공감을 하게 됩니다. 일어난 일에 대해 이해하지 못했던 경우가 있었습니다. 왜 이런 고통과 아픔을 주시는지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해하지 못하는 시간을 지나고 나면, 그 고통과 아픔도 은혜였음을 깨닫습니다. 지금의 나를 만들기 위한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이었던 것입니다.
고통과 아픔이라는 이해하기 힘든 일에도 감사의 기도를 바쳤을 때는 조금 더 빨리 하느님의 은혜를 발견하게 됩니다. 하지만 불평, 불만이 커지면 커질수록 하느님의 은혜를 느끼는 시간이 더 늦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감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의 은혜 속에 머물면서 하느님의 일을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감사할 수 있는 순간에서도 불평불만의 삶을 찾으려는 것 같습니다. 더 많은 것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으며, 내가 인정받고 더 사랑받아야 한다면서 자기 욕심과 이기심을 버리지 못하면서 사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당연히 하느님이 자기 안에 없으니, 하느님의 은혜도 깨닫지 못하고 감사하지도 못합니다. 행복한 삶일 수가 없습니다.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셨습니다. 그러자 말을 못하는 이가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떻습니까? 감사할 수 있는 순간일까요? 아니면 원망의 순간인가요? 당연히 감사해야 하는 순간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저자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 말합니다. 감사하지 못하고, 더 큰 마귀가 우리 곁에 왔다면서 원망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자기를 구원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자기에게서 멀리 쫓아내고 맙니다.
어떤 책을 읽으니, 부정적인 생각 하나가 떠올려지면 긍정적인 생각 세 가지를 만들어야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다고 하더군요. 그렇습니다. 만약 주님을 의심하고, 주님의 뜻에 반대되는 생각이나 행동을 하게 될 때는 얼른 주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생각과 행동 세 가지를 찾아야 했습니다. 그래야 주님의 사랑에 감사하면서 지금을 잘 살 수 있게 됩니다. 더 나아가 주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선물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감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나를 위해서라도 말입니다.
오늘의 명언: 당신이 늘 하던 대로 살아간다면 당신은 기존에 얻었던 것만 얻을 것이다(헨리 포드).
※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출처 : 묵상글 단톡방)
조폭 영화를 보다 보면
‘얘들아, 연장 챙겨라’라는 대사를
심심찮게 듣게 됩니다.
‘기도’는 우리 손에 쥐어진 연장입니다.
‘기도’는 우리가 지닐 수 있는 최고의 무기입니다.
‘기도’ 안에서 하느님과 함께 하는 것은
우리의 믿음과 인내를
더욱 강하게 해주는 데 필수적 요소입니다.
또한 악마에 대항하여
하느님과 함께 싸울 수 있는 역량입니다.
우리는 내적이고 영적인 투쟁의 장에서
‘기도’로써 하느님과 함께 싸우는 것입니다.
우리를 갈라서게 하는 악한 영과 싸울 때
가장 필요한 연장은 ‘기도’입니다.
어떻게 연장(?)은 챙기셨나요?
지금 한판 뜨러 갈건데...
‘기도’라는 연장을 챙겨
기도 책상 앞에 앉아
몸 좀 풀 때(묵상노트를 쓸 때)
가장 행복한 우리였으면 합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 구속주회
※이병우 루카 신부님 - 마산교구 합천성당 주임신부님
복음말씀
제1독서
<이 민족은 주 그들의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은 민족이다.>
▥ 예레미야서의 말씀입니다.7,23-28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내 백성에게 23 이런 명령을 내렸다.
‘내 말을 들어라. 나는 너희 하느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길만 온전히 걸어라. 그러면 너희가 잘될 것이다.’
24 그러나 그들은 순종하지도 귀를 기울이지도 않고,
제멋대로 사악한 마음을 따라 고집스럽게 걸었다.
그들은 앞이 아니라 뒤를 향하였다.
25 너희 조상들이 이집트 땅에서 나온 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는 내 모든 종들, 곧 예언자들을 날마다 끊임없이 그들에게 보냈다.
26 그런데도 그들은 나에게 순종하거나 귀를 기울이지 않고,
오히려 목을 뻣뻣이 세우고 자기네 조상들보다 더 고약하게 굴었다.
27 네가 그들에게 이 모든 말씀을 전하더라도 그들은 네 말을 듣지 않을 것이고,
그들을 부르더라도 응답하지 않을 것이다.
28 그러므로 너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이 민족은 주 그들의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훈계를 받아들이지 않은 민족이다.
그들의 입술에서 진실이 사라지고 끊겼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1,14-23
그때에 14 예수님께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셨는데,
마귀가 나가자 말을 못하는 이가 말을 하게 되었다.
그러자 군중이 놀라워하였다.
15 그러나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은,
“저자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하고 말하였다.
16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시험하느라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그분께 요구하기도 하였다.
17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느 나라든지 서로 갈라서면 망하고 집들도 무너진다.
18 사탄도 서로 갈라서면 그의 나라가 어떻게 버티어 내겠느냐?
그런데도 너희는 내가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 말한다.
19 내가 만일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면,
너희의 아들들은 누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는 말이냐?
그러니 바로 그들이 너희의 재판관이 될 것이다.
20 그러나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
21 힘센 자가 완전히 무장하고 자기 저택을 지키면
그의 재산은 안전하다.
22 그러나 더 힘센 자가 덤벼들어 그를 이기면,
그자는 그가 의지하던 무장을 빼앗고
저희끼리 전리품을 나눈다.
23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