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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1. 묵상글 ( 성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주교 학자 기념일. - 지옥에 가지 맙시다!.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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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1. 성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주교 학자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지옥에 가지 맙시다!
오늘 하늘나라에 관한 마지막 비유는 마지막 비유답게 중대한 비유입니다.
우리 교회가 주장하는 상선벌악(償善罰惡)에 관한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선한 일을 한 사람은 상 받고 악한 일을 한 사람은 벌 받는다는 내용의.
그런데 이것은 지옥의 실재 문제와도 관련이 있고,
사랑이신 하느님이 인간을 영원히 벌하시는가의 문제와도 관련이 있지요.
이것은 제가 미국에 있을 때 뜨거운 논쟁 주제이기도 했지요.
당시 성공회 신부가 ‘지옥은 없다.’라고 주장하며
그 근거가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저의 주장은 역시 충실한 가톨릭 사제답게 ‘지옥은 있다.’입니다.
그렇다고 그 지옥은 ‘불붙는 지옥’과 같은 그런 지옥이 아닙니다.
천국이 하느님과 영원히 함께하는 것이라면
지옥은 정반대로 하느님과의 영원한 단절이지요.
그런데 이 영원한 단절이 하느님의 벌 때문인가?
오늘 복음은 하느님께서 마지막 날 천사들을 시켜 악인들 가운데서
악인을 가려내어 불구덩이에 던질 것이라고 하고 있지요.
그러나 저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굳이 지옥이라는 곳을 만들어 놓고
저승사자를 보내 악인을 지옥에 처넣지 않으실 겁니다.
인간이 천당 가고 지옥 가는 것은 하느님의 선택이 아닙니다.
천당과 지옥은 인간의 선택입니다.
인간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시는 것이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자유로 하느님께 다가갈 수도 있고,
같은 자유로 하느님과 멀어질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인간이 사랑으로 선택할 수도 있고,
하느님의 사랑을 인간이 교만으로 무시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사랑을 영원히 거부하는 인간이 있다면
그런 존재가 악령들이고 더러운 영들일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 예레미야서와 연결해 보겠습니다.
오늘 예레미야서는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를 옹기장이와 옹기들로 비유합니다.
“이스라엘 집안아, 옹기장이 손에 있는 진흙처럼 너희도 내 손에 있다.”
그런데 옹기장이는 옹기그릇에 흠집이 생기면 버려버립니다.
“옹기장이는 옹기그릇을 만드는데 옹기그릇에 흠집이 생기면
자기 눈에 드는 다른 그릇이 나올 때까지 계속해서 그 일을 되풀이하였다.”
옹기장이 하느님은 옹기인 우리를 흠 없게 만드십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에서 하느님은 창조하신 모든 것을 보시고 좋다고 하셨지요.
그런데 흠 없게 만든 옹기에 흠집이 생기는데
그 흠집은 어떻게 생긴 것입니까?
하느님이 흠집을 내신 겁니까?
아닙니다. 자해(自害)입니다.
하느님이 원치 않으시는 짓을 자기에게 한 것입니다.
나를 사랑으로 만드신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고,
하느님이 사랑으로 만든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그렇게 자신을 자해하며 하느님 사랑을 영원히 거부하면
그것이 지옥이 아니고 무엇이며,
스스로 영원한 벌을 내리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느님은 우리를 지옥에 보내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지옥에 가는 것입니다.
스스로 지옥에 가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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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1. 성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주교 학자 기념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1979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셀던 글래쇼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 물리학자들이 하는 연구의 상당수는 사실 필요가 없지요. 지금까지 이루어진 놀라운 발견 중 대부분이 우리 삶에 아무런 직접적인 영향도 미치지 않을 거예요. 매일 세계를 조금 더 이해해 간다는 기쁨을 제외하면 말이죠.”
결국 물리학자들의 연구는 세계를 조금 더 이해한다는 것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기쁨이라고 말합니다. 이 글을 읽으며 신학생 때의 혼란스러웠던 기억이 생각났습니다. 철학, 신학을 배우며 이것이 과연 이 세상에 어떤 필요가 있느냐는 의문이었습니다. 단지 말장난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도 싶었습니다. 하지만 쓸모없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을 조금 더 이해하는 기쁨이 이 안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를 이해되지 않는다고 또 잘 모르겠다며 공부하기를 소홀히 했던 저의 게으름을 늦게나마 반성하게 됩니다.
신자들도 하느님을 잘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노력이 하느님을 조금씩 알게 됩니다. 이렇게 알게 되면서 우리 역시 선한 모습으로 악인과 구별되게 됩니다. 또 그 안에서 하느님을 이해해 간다는 기쁨도 얻게 됩니다. 알려고 하는 아무런 노력도 없이 쓸데없는 노력이라고 평가절하해서는 안 됩니다. 이럴수록 하느님을 더 모르게 되면서, 동시에 하느님으로부터 더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 종말에 대한 말씀을 하십니다. 마치 그물에 걸린 온갖 종류의 고기 중에서 좋은 것만 그릇에 담고 나쁜 것은 밖으로 던져지는 것처럼, 세상 종말에도 의인들은 받아들여지고 악한 자들은 불구덩이에 던져 버려질 것이라고 하십니다. 따라서 그때 가서 울며 이를 갈면서 후회할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의인의 길에 들어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하느님을 알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고 또 그 소리도 들리지 않는 하느님을 알려고 한다는 것을 어리석게 여기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것을 맘껏 누리면 그만이라고도 생각합니다. 나만 잘되면 그만이고, 남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고 말하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길이 결국 악인의 길이 되고, 심판 때에 큰 후회를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이제 우리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이는 하느님을 알기 위해, 특히 그분께서 말씀하셨고 강조하셨던 사랑의 길을 걷기 위한 것입니다. 분명히 하느님을 알게 되면서 그분을 조금씩 이해하게 되고 그 안에서 기쁨을 얻게 됩니다. 지금 하느님 나라를 체험하는 방법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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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인생의 의미는 서로의 가치를 높여주는 관계를 형성하는 법을 배우는 데 있다(테리 이글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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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1. 성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주교 학자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우리는 <마태오복음> 13장에 나오는 ‘하늘나라에 대한 비유’에서, 마지막 일곱 번째인 “그물의 비유”를 들었습니다. 이 비유는 지금까지의 하늘나라에 대한 비유들에 대한 결론에 해당한다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날에 있을 “심판”을 강조하시면서, 하늘나라의 비유를 마무리 지으십니다.
“하늘나라는 바다에 그물을 쳐서
온갖 것을 끌어올리는 것에 비길 수 있다.”(마태 13,47)
사실, 그물 속에는 “온갖 것”이 한데 섞여 있습니다. 마치 밀밭에는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듯이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물이 가득 차면, 어부들이 그물을 해변에 끌어올려
좋은 것은 추려 그릇에 담고 나쁜 것은 내 버린다.”(마태 13,48)
“세상의 끝날”이 오면, 하느님의 천사들이 밀밭에서 가라지를 따로 뽑아 묶어서 불에 태워버리고 밀은 하느님의 곳간에 거두어들이듯이, 하느님의 사명을 받은 어부들이 바다에서 그물을 끌어 올려 쓸모없는 나쁜 고기를 추려내어 해변에 죽게 내버리고, 좋은 고기는 “하늘나라”라는 그릇에 담는다는 말씀입니다.
결국, 이 “그물의 비유”는 의인과 악인의 종국적인 결말이 준엄함을 말해줍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바다에 생명의 물을 부으시어 우리를 살게 하시고, 그 물속에서 생명을 모아들이십니다. 곧 우리를 살리려고 당신 생명의 그물에 몰아넣으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이미 ‘당신의 그물’ 속에 들게 하셨습니다. 이 ‘그물’은 욥을 찾아와 충고했던 친구(빌닷)의 말을 떠올려줍니다.
모르겠는가? 나를 이렇게 억누르는 이가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나를 덮어씌운 것이 그분의 그물이라는 것을!”(욥 19,6)
시편 작가도 이렇게 노래합니다.
“실족하여 죽을세라 염려하여 주시며 우리의 목숨을 되살려 주셨다.
~우리를 그물에 몰아 넣으셨으며 짐을 등에 지우셨다.”(시 66,10-11)
이처럼, ‘그분의 그물에 든 물고기’인 우리는 동시에, 하느님께서 “바다에 처져 있는 그물”, 곧 ‘이 세상에 쳐놓은 그물’이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이 세상의 바다에 처져서 온갖 것을 끌어올리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의 비유 일곱 가지를 마치신 다음, 제자들에게 그 사명을 상기시켜주십니다.
“너희는 이것들을 다 깨달았느냐? 하늘나라의 교육을 받은 율법 학자는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마태 13,51-52)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늘나라의 교육을 받은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그러니, “하늘나라”의 의미를 깨닫고, 또한 가르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먼저’ 우리의 곳간에 ‘하늘나라의 복음’이 채워져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하늘나라는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다.”(마태 13,47)
주님!
하늘나라의 그물에 저를 몰아넣으소서.
당신 말씀의 그물로 덮어씌워 당신 뜻 안에 가두소서.
세상의 바다에 저를 던지시어, 당신의 그물이 되게 하소서.
온갖 고기를 모아들일 뿐, 제 입맛에 맞게 고르지 않게 하소서.
제가 그물일 뿐, 주인이 아니듯 고기의 주인도 아님을 잊지 않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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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1. 성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주교 학자 기념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확실히 알아야 힘이 된다
미움이 가득한 사람에게는 상대방에게서 꼬투리 잡을 허물만이 보이지만 사랑이 가득한 사람에게는 선한 것이 보이게 마련입니다. 사물이 구부러져 있으면 그 그림자도 구부러지게 마련이듯이 마음이 비딱하면 나오는 것도 비딱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밖으로 드러나는 것을 통하여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굽은 마음을 바르게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놀라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마태13,54)하고 말하였습니다. 지혜의 출처를 묻는 질문이었습니다. 지혜는 사람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오는 겁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지혜는 너무나 풍요롭고 깊어서 사람으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로마11,3).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 그 신비한 비밀을 믿는 이들에게 드러내셨습니다(1코린1,24.2,7).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나시어 하느님의 은총을 받으며 날로 지혜가 성장하였으며 당신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습니다(루카2,40.콜로2,3). 그리고 “지혜의 시작은 주님을 경외함이며 거룩한 분을 아는 것이 곧 예지”(잠언9,10).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하느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 나아간다는 말은 하느님의 말씀을 잘 알아듣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혜의 근원은 하느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지혜는 인생의 종합적인 사리 판단력입니다.
선한 것과 악한 것, 바른 것과 그른 것, 먼저 해야 할 일과 나중에 해야 할 일을 아는 것, 어떤 상황 안에서 그때그때 무슨 말과 행동을 할지를 종합적으로 판단하는 능력입니다.
지혜는 인생의 올바른 방향감각입니다. 한 번뿐인 나의 인생 여정이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인생의 목적지인 하느님의 나라에 안전하게 도착할 수 있도록 그 방향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지혜는 균형감각, 조화 감각입니다. 균형과 조화가 깨지면 불행해집니다.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면 불행합니다. 하느님과 세상,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의 조화,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이뤄야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하느님말씀 안에서 균형과 조화의 올바르고 절대적인 가르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오늘의 세상은 지식의 소유자 보다는, 지혜로운 사람을 필요로 합니다. 지혜로운 삶 안에서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의 동네 사람들은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하면서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소위 가문도 별로이고 배움도 많지 않은, 엘리트도 아닌 사람이 어떻게 저런 가르침을? 잘난 척 하지마라! 하고 생각한 것입니다.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그들의 선입견이 예수님의 진면목을 볼 수 없게 만들었고 결국은 믿음이 없는 그들에게 기적을 일으킬 수도 없었습니다.
자기 정보가 다 인양, 그리고 확정적인 것으로 여기는 섣부른 앎이 병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차라리 모르는 게 약입니다. 사실 별것 아닌 것 같아도 부정적인 생각과 판단을 바꾸면 변화가 옵니다. 문제만 바라보고 부정적인 생각에 골몰하면 모두가 피곤하지만 그 생각을 바꾸면 자신도 바뀌고 세상도 바뀝니다. 내면을 모른 채 외면만을 보고 판단하고 평가하는 어리석음을 거두어 주시길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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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1. 성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주교 학자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낯선 모임에 가면 사람들이 서로 교환하는 것이 있습니다. ‘명함’입니다. 명함에는 이름, 직장, 메일, 전화번호가 있습니다. 저는 이름을 소개할 때 주로 세례명인 ‘가브리엘’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가브리엘은 성모님께 예수님의 잉태를 알려준 천사입니다. 저는 가브리엘 천사처럼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사제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쉽게 저를 기억합니다. 오늘 하루 여러분의 이름과 세례명을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내 이름과 세례명의 뜻과 의미를 떠올리고, 그 의미에 맞게 살 수 있도록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성당에도 이름이 있습니다. 대부분은 지역의 이름을 따라서 성당 이름을 정합니다. 제가 있는 성당의 이름은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입니다. 댈러스는 지역 명칭이고, 성 김대건 안드레아는 주보성인의 이름입니다. 미주 지역의 성당은 대부분 한국의 성인을 주보성인으로 공경하고 있습니다.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간직하려는 마음이 있기에 그런 것 같습니다.
개신교회는 이름을 정하는 방식이 가톨릭과는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 개척교회의 목사님과 공동체가 교회의 이름을 정하는데 지역의 명칭이나 주보성인으로 정하지 않습니다. 성인이라는 교리가 없고, 가톨릭처럼 속지주의 원칙을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이름을 보면 ‘반석교회, 빛과 소금 교회, 광명교회, 온 누리 교회, 사랑의 교회, 방주교회’와 같이 성경에서 교회의 이름을 찾습니다. 한 목사님이 공동체와 함께 교회의 이름을 정했는데 ‘주님의 교회’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야 너는 반석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나의 교회를 세우겠다.” 목사님은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서 교회의 이름을 주님의 교회라고 하였습니다. 교회의 주인은 목사님도 아니고, 교회의 주인은 장로님도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교회의 주인은 바로 주님이기에 ‘주님의 교회’라고 정했다고 합니다. 목사님은 그 원칙에 따라서 10년만 목회하고 떠났습니다. 장로들도 임기를 정하고 모두 그만두었다고 합니다. 그런 교회와 목회자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교회는 공동체를 이루는 신자들이기에 큰돈을 들여서 교회를 세우지 않았다고 합니다. 고등학교에 큰 강당을 지어주고, 그 강당의 일부를 교회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하라고 하셨고, 같은 마음과 정성으로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서 교회 재정의 50%는 교회를 위해서 사용하고, 50%는 이웃을 위해서 사용했다고 합니다. 헌금 봉투에 이름도 적지 않았고, 주보에 헌금 낸 교우의 이름도 적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모두 알고 계시니 이름을 굳이 적을 필요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했어도 교우들은 기쁘게 헌금했다고 합니다. 1년 예산을 정하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상황에 따라서 지출했다고 합니다. 다만 모든 지출의 원장을 공개했다고 합니다. 하느님 보시기에 합당한 지출이라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고 합니다. 예산을 정하면 그 예산에 부족한 금액을 확보하기 위해서 헌금 설교를 해야 하는데, 예산을 정하지 않으니 그럴 필요가 없었다고 합니다. 모든 걸 하느님의 뜻에 따라 하니, 35년이 지났어도 공동체는 사랑과 기쁨이 넘쳐났다고 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우리는 ‘옹기장이와 진흙’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옹기장이는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입니다. 진흙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 만물과 사람입니다. 세상 만물은 옹기장이이신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자연스럽게 흘러가는데 오직 사람만이 하느님의 뜻을 거슬러서 진흙인 자신의 위치를 망각한다고 합니다. 예전에 읽었던 글이 생각납니다. 주님!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실행할 수 있도록 용기를 주시고, 할 수 없는 것은 포기할 수 있는 겸손함을 주십시오. 더불어 제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식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내가 이 옹기장이처럼 너희에게 할 수 없을 것 같으냐? 이스라엘 집안아, 옹기장이 손에 있는 진흙처럼 너희도 내 손에 있다. 인간은 너희를 구원하지 못한다. 숨 한 번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고, 그날로 모든 계획도 사라져 버린다. 행복하여라, 야곱의 하느님을 구원자로 모시고, 주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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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1. 성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주교 학자 기념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제가 가지고 있는 어린 시절 기억 중 이런 기억이 있습니다.
어느 날 할머니께서 큰 양동이를 가져오셨습니다. 그리 높지 않지만, 사람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넓은 양동이였습니다. 그 양동이 근처에는 콩이 든 자루들이 몇 개 있었습니다.
할머니께서는 콩이 든 자루의 입구를 푸시며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콩을 저기 양동이에 부어주렴.
콩 몇 포대를 부었더니 양동이의 반이 찼습니다. 할머니는 이내 그 양동이에 호스 입구를 대시며 물을 트셨습니다. 물은 금방 콩 위로 차올랐습니다. 그때 콩 위로 다른 콩과 그 껍데기가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할머니는 물을 부어 쓸모없는 콩과 껍데기를 걸러 내셨습니다. 그렇게 휘적휘적 이며 거르고 또 거르셨습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갑자기 할머니께서 휘적이던 커다랗고 콩과 물이 가득 들어있는 양동이가 떠올랐습니다. 포대에 담겨있을 때는 몰랐던 것들을 물로 띄워 걸러냈던 것입니다.
우리도 이런 일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전 우리도 하느님의 맑은 물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때 그중 하늘나라에 쓸모없는 것들은 우리 안에서 떠오를 것입니다. 섞은 것도 떠오를 것이고 말라버린 껍데기도 떠오를 것입니다. 천사들은 그 모든 것들을 모아 불타는 구덩이 속에 던질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쓸모없는 것을 버린 채 새로운 옷을 입고 하늘나라에 입성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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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국수
더운 여름입니다.
더워서 그런지 몰라도 시원한 것만 찾게 됩니다.
시원한 것을 찾을 때마다 귓가에 이런 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이노마~ 배탈 난다. 조금만 먹어라.^^
가끔 이런 더운 여름이 오면 냉국수를 해 먹습니다.
우선 시원한 김치와 김칫국물이 필요합니다. 특히 김칫국물이 중요합니다.
탁한 김칫국물을 체에 걸러줍니다. 면포에 걸러주면 더 좋습니다. 걸러진 김칫국물에 적당량의 물과 얼음을 넣습니다. 물 대신 채수를 사용하셔도 좋습니다. 설탕도 조금 넣어주시고 식초도 살짝 넣어주세요. 이제 국수 국물은 완성되었습니다.
김치도 물에 살짝 씻어 채 썰어 고명으로 준비해 주세요.
이제 국수를 삶으세요. 소면이든 중면이든 상관없습니다. 알맞게 삶아졌을 때 꺼내어 찬물에 씻어주세요.
씻은 국수는 그동안 키워온 팔의 근육을 총동원해 꾹꾹 짜주세요.
그릇에 국수를 담고 준비한 김치 육수를 부어주세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위에 챔기름~을 살짝 얹어주세요.
더운 여름입니다. 무조건 시원하게, 몸도 마음도 시원하게 지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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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1. 성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주교 학자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아름다운 삶, 아름다운 죽음
“어떻게 죽을 것인가?”
“내 영혼아, 주님을 찬양하여라.
내 한평생, 나는 주님을 찬양하리라.”(시편146,1ㄴ-2ㄱ)
7.21일 사후, 이렇게 크고 깊고 길게 울림을 준, 향기로 남아 있는 분은 처음일 것입니다. 향년(享年) 73세로 사망했다는 향년이란 말마디도 새롭게 와닿았습니다. 살아서 누린 나이 답게 그렇게 아름다운 삶을 누렸고 겪어낸 분입니다. 신자아닌 경우 유가족이 청하지 않았는데 가톨릭교회 주교가 이렇게 각별히 장례미사에 추모강론을 한 경우도 사상 초유의 사건일 것입니다. 그 까닭은 믿는 누구보다 내용적으로 충실히 주님을 따랐다는 것입니다. 말그대로 참 아름다운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입니다.
사후 10일이 지났는데도 신문에서는 릴레이 식으로 계속 이어지는 미담성 기사입니다. 축생(畜生;사람답지 못한 짓을 하는 사람의 비유)의 시대, 비로소 인생이, 사람 얼굴을 한 아름다운 사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흡사 불교의 윤회설을 생각할 정도로 명칭만 사람이지 구분이 안될 정도로 짐승같은 모습들도 얼마나 많은 세상인지요. 사람 얼굴로 살기가 쉽지 않은 세상입니다. 길다 싶지만 어제 기사도 소개합니다.
“작가 서해성은 그의 넋이 너무 아름다워서 영전에 꽃을 올리수가 없었다고 했다. 그는 하늘에서만 빛나지 않을 것이다. 가난한 마을에 불이켜지면 별들의 노랫소리를 담아 내려올 것이다. 모든 잘난 것들이 사라진 마을에는 또 다른 김민기가 살고 있을 것이다. 주막을 발견하면 어떤 속기(俗氣)도 묻어있지 않은 미소를 지을 것이다. 우리 삶도 떠내려 가고 있다. 노을 뒤편의 어둠이 보인다. 무엇을 받들고 무엇을 버려야 김민기 마을에 들 수 있을까.”(김택근)
오늘은 8월 첫날이자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창립자인 참 아름다운 사람, 성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주교 학자 기념일입니다. 그와 수도회의 모토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서 기쁜 소식을 전하라.”(루카4,18) 였습니다. 그는 18세기 한생을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살았던 이탈리아 나폴리 출신의 착한목자 주교학자였습니다. 그는 엄한 윤리를 강조한 얀세니즘의 흐름 안에서도 고해소에서는 자비와 부드러움으로 사람들의 양심을 매우 편안하게 해줘야 한다며 다음처럼 말씀하셨습니다.
“죄를 지은 자는 사람들이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어떤 사람이 나쁜 악습에 깊이 빠져들어 있을수록 그만큼 더 부드럽고 다정스레 그에게 다가가야 한다. 고해신부는 죄가 남긴 수많은 상처들을 돌봐야 한다. 그는 풍부한 사랑을 지니고 있어야 하며 꿀처럼 부드러워야 한다.”
제가 이용하는 일력의 8월 주제어는 노자에 나오는 ‘독립불개(獨立不改;흔들리지 않은 마음은 단단한 몸가짐에서 나온다)라는 말마디로 우리 삶의 지침이 됩니다. 이어 8월1일 옛 어른의 말씀 역시 좋은 삶의 지침이 됩니다.
“생각과 행동 사이만큼 먼 것은 없다. 공부는 그 먼 간격을 좁히려는 노력이다.”<다산>
이런 공부가 평생학인의 참된 공부요, 우리의 전삶을 망라한 삶자체가 공부이겠습니다.
“군자의 학문은 귀로 들어와 마음에 붙어 행동으로 나타난다. 소인의 학문은 귀로 들어와 입으로 나온다.”<순자>
삶과 죽음은 하나입니다. 언젠가 갑작스런 선종이 아니라 ‘군자의 학문’처럼 잘 살았을 때 잘 죽은 선종의 죽음입니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의 물음은 저절로 ‘어떻게 살 것인가?’ 물음에 직결됩니다.
오늘 복음 역시 하늘 나라의 비유입니다. 오늘로써 마태복음 13장, 하늘 나라의 비유들도 끝납니다. 엊그제 복음 ‘가라지 비유의 풀이’처럼, 오늘 그물의 비유 역시 최후의 심판에 대한 비유입니다. 이런 심판을, 구체적으로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살 때 적당한 긴장에 아름다운 하늘 나라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베네딕도 성인의 ‘날마다 죽음을 눈앞에 환히 두고 살라’는 조언은 늘 들어도 반갑습니다. 해설이 없어질 정도로 단숨에 읽혀지는 오늘 복음 전문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타고난 ‘이야기꾼(storyteller)’입니다.
“하늘 나라는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다. 그물이 가득차자 사람들이 그것을 물가로 끌어 올려 놓고 앉아서,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렸다.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천사들이 나가 의인들 가운데에서 악한 자들을 가려내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회개하라 연장되는 날입니다. 회개도 때가 있습니다. 종말의 죽음에 임박해서는 너무 늦습니다. 부처님 손바닥 안에 있는 손오공처럼, 모든 시간이, 모든 삶이 하느님 수중에, 하느님 그물망에 있습니다. 그물을 들어 올리는 날이 죽음의 날입니다. 의인의 삶이었는지 혹은 악인의 삶이었는지 확연히 구분될 것입니다. 삶은 선택입니다. 이런 종말심판에 대한 믿음이 의인의 삶을 선택해 살게 합니다. 어제 지인의 언급을 잊지 못합니다.
“불공정과 불의가 만연된 위정자들 집단입니다. 부끄러움도 두려움도 없습니다. 불공정과 불의가 거짓이 일상화되어 갑니다. 국민들이 처음엔 놀라며 분개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다 그러려니 하고 마비 중독되어 가는 것이, 서서히 사회 전체가, 나라 전체가, 소리없이 썩어가는 것이, 망해가는 현실이 두렵습니다. 늑대 소년의 일화가 생각납니다. 늑대가 나타났다 거짓말에 동네 사람들이 나섰지만 거짓말에 속은 사람들은 세 번째 정말 나타났을 때는 아무리 외쳐도 거짓말인줄 알고 나타나지 않아 늑대에 먹혔다는 일화입니다. 무신불립, 한번 잃어버린 신뢰의 회복은 요원합니다.”
오늘 복음의 그물의 비유를 대할 때 마다 노자도덕경에 나오는 말마디가 생각납니다. 천망회회 소이불실(天網恢恢疎而不失), 천지 자연의 법칙은 광대하여 엉성한 듯 보이지만, 악인에게 벌을 주는 일을 빠뜨리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 누구도, 그 무엇도 하느님의 그물망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며 그물망을 들어 올릴 때가 죽음인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그물의 비유’나 제1독서 이사야서의 ‘옹기장이의 비유’가 흡사합니다. 옹기장이 하느님의 손안에 있는 옹기그릇과 같은 우리의 존재임을 깨달아 겸손히 그분 뜻에 따라 살때 아름다운 삶에 죽음일 것입니다. 성가 49장 옹기장이를 조용히 불러보시기 바랍니다.
“옹기장이 손에든 진흙과 같이
내게 있는 모든 것 주님 손에서,
님뜻 따라 나의 삶이 빚어지리니,
가르치심 마음새겨 들으렵니다.”
진흙하니 어제 읽은 감동적인 글도 생각납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창세3,19) 구절에 대한 풀이에 전적으로 공감했습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살아라, 죽어서 흙될 생각말고 살아서 너는 흙으로 살아라. 온갖 썩는 것, 더러운 것, 말없이 품열고 받아들여 오래 견디는 참사랑, 모든 것 삭이는 세월에 묻었다가 온갖 좋은 것 토해내어 마침내 열매 맺도록 다시 말없이 버텨주는 흙으로, 흙으로 살아라. 너는 흙이니 오오, 거룩한 흙으로 살아라.”(이현주)
흙의 영성으로 살라는 말씀입니다. 흙에서 나온 흙처럼 겸손한 참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흙(humus)에 어원을 둔 겸손(humilitas)이자 사람(homo)이요, 이에 가장 가까웠던 분이 예수님이자, 앞서 소개한 아름다운 사람, 김민기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중 주님은 우리 모두 하늘 나라의 제자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주님은 당대의 제자들은 물론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모두에게 당부하십니다.
“너희는 이것들을 다 깨달았느냐? 하늘 나라의 제자가 된 너희들은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
지금까지 하늘 나라 비유들을 다 깨달았는지 물으시며 각오를 새로이 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지혜로운 집주인처럼 성경의 곳간에서 지혜로이 새것도 옛것도 꺼내면서 기존관념이나 편견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라는 말씀입니다.
“행복하여라, 하느님을 구원자로 모시고,
주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이!”(시편146,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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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1. 성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주교 학자 기념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날은 오리니 오늘>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마태 13,49)
그날은 오리니
오늘 맑으렵니다
그날은 오리니
오늘 밝으렵니다
그날은 오리니
오늘 깨끗하렵니다
그날은 오리니
오늘 부드러우렵니다
그날은 오리니
오늘 착하렵니다
그날은 오리니
오늘 곧으렵니다
그날은 오리니
오늘 아름다우렵니다
그날은 오리니
오늘 사랑하렵니다
그날은 오리니
오늘 살리렵니다
그날은 오리니
오늘 걸으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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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1. 성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주교 학자 기념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하늘 나라는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다.(마태 13,47)
그물
“하늘 나라는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다”는 비유는 사람들이 행동의 원칙으로 삼는 것들이 저마다 더할 수 없이 다름을 설명하는 말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이라는 표현은 다양한 형태의 덕이나 악덕에 이끌리는 성향에서 칭찬받아 마땅한 사람들과 비난받아 마땅한 사람들을 모두 가리킵니다. 하늘 나라가 갖가지 짜임새로 엮은 큰 그물에 비유되는 까닭은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에 매우 다양한 사상이 서로 얽혀있기 때문입니다.
이 그물은 바다의 파도 속으로 던져졌습니다. 파도는 세상 모든 곳에서 삶의 괴로운 일들 안에서 헤엄치는 사람들을 이리저리 뒤흔듭니다. 우리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는 이 그물이 가득 차지 않았습니다. 율법과 예언서가 기대했던 그물은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고 말씀하시는 분께서 완성하셔야 했습니다. 그물의 짜임새는 복음서와 사도틀을 통해 전해진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완성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늘 나라는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다”고 하는 것입니다. 설명을 좀 더 덧붙이자면,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이라는 표현은 모든 민족이 부름받은 사실, 곧 다른 민족의 부르심을 가리킨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리게네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9
하느님 나라가 다가온 줄을 아시오
하느님 나라가 다가온 줄을 아시오(루카 21,31),
하느님이 도와주셔서, 우리 모두 그분을 따르게 되기를. 하느님을 아는 그 경지로 우리를 데려가시기를. 아멘.
주석: 하느님 나라의 때와 곳/야곱이 꾼 꿈의 뜻/하느님 나라는 복의 나라다 - 창조계야말로 그 복이다/우리는 모두 왕이다 - 우리가 그 사실을 자각하기만 한다면 말이다.
예수의 메시지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아마도 “하느님의 통치가 시작되었다’일 것이다. 이것은 신학지들이 일반적으로 동의하는 견해다. 예수는 하느님 나라와 그것의 도래를 설교했는데, 이것이야말로 그의 메시지의 중심을 이룬다. 우리는 엑카르트의 설교 역시 그러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그의 설교들에서 살펴보고 다루었던 모든 주제. 곧 창조계의 선함, 안(ínness0의 실재성과 만유내재신론, 창조적인 말씀의 현존,모든 존재의 평등, 존재의 고귀함, 인간의 특별한 고귀함, 실현된 종말론,이 모든 것에 대한 깨달음 - 이 모든 주제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일 것이다. 엑카르트가 본 설교에서 언급하고 있는 다수의 성서 구절로 보건대, 우리는 그가 하느님 나라의 전통에 푹 잠겨 설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본 설교의 본문으로 삼은 구절은 루카 복음에 나타나는데, 거기에 언급된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에서 하느님의 백성을 상징한다.
✝️ 목요일 성모님의 날✝️
<파티마의 성모 마리아와 목동 / 세 바르따스>
제 5 장 두 천사 세상을 떠나다
항상 깨어 있으라
고통의 도가니
프란치스코는 감기에 걸렸는데 드디어 성한 기관지 폐렴이 되었다. 그는 온전히 하느님의 뜻에 맡기고 천국에 간다는 확신을 갖고 평화중에 고요히 죽음을 기다리는 듯했다. 처음 두 주간은 병상에서 전혀 일어날 수가 없었고 고열에 신음하면서도 로사리오 기도를 잊지 않고 드렸으나 완전히 쇠약해진 뒤에는 한 단의 로사리오 기도도 드릴 수가 없게 되었다.
소년은 퍽이나 한심해하며 힘없이 그 괴로움을 어머니께 호소했다. 어머니 올린삐아는 아이를 위로하고 안심시키려고 그렇게 많이 아플 때는 마음의 기도만으로도 성모님은 흐뭇해 하신다고 타일러 주었다.
소년은 어머니께 성모 마리아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로사리오의 각단마다 하도록 부탁하였다.
병세가 나아져 조금 거동하게 되었을 때에도 몸이 너무 쇠약해서 방에만 있어야 했다. 이 지방에는 겨울에도 가끔 좋은 날씨가 찾아오는데 그럴 때면 프란치스코도 힘이 좀 나서 산책하였고 그의 발은 자연스럽게 고바 다 이리아 쪽으로 향했다.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그에게 원기를 북돋우려고 병은 곧 나을 것이라고 친절히 말했다. 그러면 소년은 항상, “고마와요. 그러나 제 병은 낫지 않아요.”
하고 대답하였는데 그 말 속에는 천국에 갈 수 있다는 확신과 어딘지 모르게 천국을 동경하고 있는 듯한 불가사의한 기품이 감돌고 있어서 사람들은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어느 날 그의 대모가 성모님께 병의 완쾌를 빌기 위해 좋은 봉헌물을 바치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다.
소년은 그 말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아주머니, 그런 일은 아무 소용 없어요. 난 회복의 은혜를 받지 않을 테니까요.”
2월 말경 그는 다시 병석에 누웠다. 히야친타는 오빠 곁에 앉아셔 오랫 동안 위로도 하고 말벗이 되어 주면서 지냈다.
자주 프란치스코에게 병문안 갔던 루치아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소년은 영웅적인 용기로 고통을 견디었고 탄식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고 한다.
프란치스코는 주는 것은 무엇이고 다 잘 받아 먹었으므로 약이나 음료수 중에 어떤 것을 싫어하고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어느날 루치아가,
‘프란치스꼬, 몹시 괴롭니?" 하고 묻자,
“응, 퍽 괴로워! 그러나 난 이 모든 것을 예수님과 성모님께 대한 사랑으로 참는다"
하고 대답했다.
소년은 그때까지도 그 고행 밧줄을 매고 있었는데 어느 날 그것을 풀어 아무도 모르게 루치아에게 건네 주었다.
“우리 엄마가 보지 않게 치워 줘. 이제 난 그것을 매고 있을 수가 없어."(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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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1. 성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주교 학자 기념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하늘나라는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다.” (13,47)
베트남에서 생활할 때, 가끔 호치민에서 가까운 해변 마을 무이네로 가서 쉬었다 오기도 했습니다. 그곳에서 베트남 어부들이 어떻게 고기를 잡는지 알 수가 있었습니다. 베트남 어부들은 통버이라는 대나무로 엮어 만든 바구니 배로 가까운 연안에서 그물을 던져 물고기를 잡습니다. 그렇게 물고기를 잡은 통버이는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모래밭으로 끌어올리게 되고, 기다리고 있는 가족들이 함께 앉아 잡은 물고기들을 선별하고 분류해서 이내 팝니다. 그중 어떤 물고기들은 너무 작아서 버려지는 것도 많더군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는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다.”(13,47)라고 말씀하신 뒤, “너희는 이것들을 다 깨달았느냐?”(13, 51) 하고 물으십니다. 비유의 의미를 깨닫는 것은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야 할”(13,48) 제자들의 식별과 분류할 수 있는 능력의 중요성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늘나라의 제자는 모름지기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기” (13,52) 때문에 솔로몬처럼 “주님의 말씀을 듣는 마음과 선과 악을 지혜롭게 분별할 수 있는 마음”(1열3,9), 곧 식별력이 있어야 합니다. 진정 하늘나라의 곳간지기는 언제나 현명한 솔로몬처럼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마음, 하느님의 마음으로 사람들의 선악을 식별하고 분별할 수 있는 마음을 잃지 않도록 성령의 이끄심에 민감해야 합니다.
오늘의 비유에서 예수님은 하늘나라는 곧 교회는 가득 채워진 그물과 같다는 것입니다. 이는 이미 우리가 들어 알고 있는 밀과 가라지의 비유가 가르친 뜻과 유사함을 느끼셨을 것입니다. 바다이든 호수이든 그곳이 어디이든 그물을 던질 때, 좋은 고기든 나쁜 고기든, 큰 고기든 작은 고기든 원하는 고기만 잡을 수 없습니다. 일단은 그물을 던지고 난 뒤, 그물을 뭍에 끌어올린 다음에 자신이 원하는 고기를 선별하게 됩니다. 이는 마치 밀과 가라지가 함께 공존하듯이 그물 안에 잡힌 고기도 마찬가지로 큰 고기와 작은 고기,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가 함께 공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밀과 가라지가 반드시 다 익어야 가려내는 것처럼, 그물 역시도 여러 종류의 물고기로 가득 차야 그물을 물가로 끌어 올려놓을 때(13,48참조), 비로소 선별할 수 있습니다. 물속의 그물에서는 선별할 수가 없습니다. 그물을 뭍에 끌어올린 연후에야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릴” 것입니다. 그릇은 생명이 넘치는 상태이고 그릇 밖은 죽음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물고기에게 있어서 물은 생명이 넘치는 곳이지만 물 밖은 곧 죽음이 넘치는 곳이잖아요. 그렇게 마지막 순간에야 비로소 생명과 죽음으로, 천국과 지옥으로 가려 나뉘게 되고 “불구덩이에 떨어진 이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13, 50)라고 비유의 뜻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렇게 세상에서 일은 그 끝이 있기 마련이고 무엇이든 다 그때가 있는 법입니다. 그물을 던질 때가 있고, 그물을 끌어 올려 그것을 선별하고 구별할 때가 있습니다. 다만 우리는 이미 그물 속 곧 교회의 일원인 하늘나라의 제자가 되었으니 늘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이 되도록 늘 주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주님과 기도하는 영혼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를 깨닫고 우리에게, "우리 모두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서야 합니다. 그래서 저마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이 몸으로 한 일에 따라 갚음을 받게 됩니다.”(2코린 5,10)하고 말씀하면서 빛의 자녀답게 깨어 살도록 초대하고 촉구합니다. “주님, 저희 마음을 열어주시어 당신 아드님 말씀에 귀 기울이게 하소서”(복음환호성 후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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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1. 성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주교 학자 기념일.
■ 세상 끝날 그날까지 오직 기다림으로 / 굿뉴스 게시판
박윤식 [big-llight] 240731. 21:32 ㅣNo.174658
물은 언제나 높은데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물은 어디엔가 갇혀 있지 않고 결국엔 종착지 바다로 모인다. 이렇게 물이 한없이 낮은 곳으로만 가는 모습을 보면서, 가끔은 그 어렵다는 겸손을 떠올려 본다. 바다는 세상의 모든 물이 모이는 곳이지만, 반면에 세상의 온갖 찌꺼기들이 물에 씻기어 정화되는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곳은 새로움으로 태어나 그 모든 것을 견디어 내는 힘이 생겨나 그 안에 스스로 생명력을 풍부하게 만들기도 한다.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를 바다에 던진 그물이라나. 마치 밭에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듯이, 바다 속에도 온갖 생물이 자라고 주님의 그물에는 좋고 나쁜 물고기가 함께 건져진다. 그중에서 주님께서는 좋은 것들은 담고 나쁜 것들은 던져 버리시리라. 밭에서도 바다처럼 밀과 가라지가 늘 공존한다. 이왕 세상 마지막 그날에는 필연 구분하실 건데 미리 좀 선별하시면 좋으련만, 주님께서는 마지막 선택을 할 때까지 기다리시라나. 아마도 밭에서도 저 바다처럼 생명의 정화 작용이 있어, 모두가 말씀으로 충만하게 되어 건강하게 자라나기를 바라시는 것 같다.
“또 하늘 나라는 바다에 던져 온갖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다. 그물에 고기가 가득 차자, 사람들이 그것을 끌어내 올려놓고,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렸다.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천사들이 나가서 의인들에서 악한 자들을 가려내어, 불구덩이에 던져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너희는 이것을 깨달아라.”
예수님께서는 그물 비유를 들어 하늘 나라에 대하여 가르치셨다. 모든 그리스도인과 교회의 지체가 모두 좋은 이들은 아니다. 세상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도 좋은 이, 악한 이들이 공존한다. 그러나 종말에 좋은 이들은 받아들이고 악한 이들은 가려내시는 하느님의 심판이 있을 게다. 예수님의 이 준엄한 경고를 받아들일 때 우리는 나태한 삶과 그릇된 확신에서 벗어나리라.
현세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하늘 나라도 신비일 수밖에. 그 나라는 겨자씨나 누룩처럼 우리에게 와 있지만, 큰 나무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이 세상이 천국이었으면! 여기에 악이 없고 모두가 천사 같은 이들만 있었으면!’한다면 기다려야 한다. 아직은 그 때가 아니기에. 그러나 분명 그 나라가 완성될 날이 다가오리라. 언제일지 몰라도 악이 없어지고 하늘 나라가 더 이상 신비로 감추어진 채 남아 있지 않고, 모든 이의 눈앞에 환히 드러날 그날이 올 게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건 우리가 가진 문제를 없애려하기보다는 건강한 것을 지키는 것일 게다. 사실 우리 몸에는 수많은 나쁜 바이러스들이 잠복해 있지만 단지 건강하기에 그것들이 발병을 못하는 거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수많은 결점들을 갖고 있어도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고 좋은 점을 살리면, 우리의 결점은 더 이상의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종말에는 결판된다.
그래서 종말에 대한 그 기다림은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정말 간과될 수 없는 순간이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이라고 기도하고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믿나이다.’라고 고백하는 우리는, 오랜 인내심으로 그 종말의 그때를 기다리는 신앙인임을 간절히 드러낸다. 그러니 마지막 날인 그날 그 시각, 다가올 그 종말을 정말 두려워하지는 말자. 그날은 우리가 기다리고 기다린 하늘 나라의 완성이고, 구름에 감춰진 하느님의 그 신비의 드러남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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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1. 성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주교 학자 기념일.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마태오 복음서 13장에는 하늘나라에 관한 여러 비유가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늘나라의 모습과, 마지막 날 하느님 나라의 모습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시작된 하늘나라는 씨앗이며 새싹입니다. 그 하늘나라에는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있습니다.
누룩처럼 이 세상 안에 감추어져 있는 하늘나라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때로 이 나라가 너무 미약하다고, 하늘나라가 과연 우리 가운데 와 있는지 알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답답해하기도 하지요.
그런데 하늘나라의 그 무력함은 하느님 자비의 표지이기도 합니다. 하늘나라가 완성되는 날에 가라지는 불태워지고, 나쁜 물고기는 밖으로 던져집니다.
“온갖 종류의 고기”(마태 13,47)가 모여 있는 그물은 아직 완성을 기다리고 있는 하늘나라입니다. 하느님께서 아직 기회를 주시는 때이고, 하느님께 돌아가도록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입니다. 그 시간은 우리에게 결단을 요구합니다.
예레미야서의 말씀도 같은 내용을 말합니다. 예레미야서 18장에서는 옹기장이가 그릇을 빚으면서 잘못된 그릇을 다시 고쳐 빚지만, 19장에서 이미 그릇을 구운 다음에는 잘못된 그릇을 깨뜨립니다. 구워진 그릇은 다시 고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도 18장은 아직 하느님께 돌아갈 여지가 있는 상태를 나타내고, 19장은 인간이 하느님을 거부하기로 마음을 굳힌 상태를 나타냅니다.
선과 악이 함께 있는 시간, 하늘나라가 이미 와 있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은 이 시간은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입니다.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있도록 두시는 하느님께서는 가라지를 불태우시는 하느님이시고, 온갖 고기를 모아들이시는 하느님 또한 나쁜 물고기를 버리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아직 시간이 있을 때 하느님께 돌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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