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의 이중성과 느후스단
흔히 형언하기 어려운 고통과 고난을 겪는이들을 위로하면서 세월이 약이라 말합니다. 그런데 인생을 살아보면 이 말이 빈 말 만은 아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넘지 못할 산처럼 여겨졌던 일들도 세월 앞에는 희석되어지고 아련하게 마련입니다.
세월의 무게를 실감나게 하는 것 중 하나는 처마끝에 떨어지는 물방울이 바닥에 있는 돌을 뚫은 것을 볼 때입니다.
흐르는 세월이 자연이나 사물도 변화시키지만 사람의 인격이나 성품도 바뀌게 합니다.
무엇보다 신앙에 있어서도 세월의 무게는 엄청난 영향을 끼치는 것을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세월의 흐름이 순 기능을 하게 되면 신앙의 성장과 성숙이 이루어지지만, 역 기능을 한다면 변질과 신앙의 타락이 동반됨을 교회사를 통하여 배우게 됩니다.
신앙적 순 기능으로서의 세월의 흐름은 “세월 지나갈수록 의지할 것 뿐일세”라 찬송하듯이, 연약한 인간이 창조주이신 하나님만을 의뢰하고 의지하는 것은 지당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세월의 역기능적 신앙 모습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가 유다왕 히스기야 시대의 신앙 개혁운동입니다.
이십오세의 나이로 남 왕국 유다의 13대왕으로 등극했던 히스기야는 여느 유다왕들과는 다른 행보를 보이게 됩니다. 단적인 모습을 열왕기하서는 증언하고 있습니다.
왕위에 오른 히스기야는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며 구체적인 개혁 행보에 나서게 됩니다.
그 첫 번째 작업이 산당과 이방신인 목상과 주상들을 제거하는 일들이었습니다.
나아가 히스기야왕의 개혁 운동이 향하는 방향에서 흐르는 세월의 이중성을 잘 알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구리뱀을 산산조각 내버리게 됩니다.
흥미로운 점은 히스기야왕이 깨뜨린 구리뱀은, 출애굽 시대에 광야에서 원망과 불평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진노하신 하나님께서 불뱀을 백성들에게 보내십니다.
보내진 불뱀들에게 물린 백성들 중에는 죽은자들이 많이 발생하게 됩니다.
그러자 살길을 찾으려는 백성들이 모세에게 하나님께 기도하여 치료 방안을 요구하게 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대안을 제시하는 장면을 성경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8.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9.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민수기 21:8-9)
이렇듯 불뱀에 물린 백성들을 살리기 위한 방안으로 만들었던 놋뱀이었는데, 흐르는 세월 동안 놋뱀을 만들도록 지시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망각속에 사라졌고 쳐다보면 살았던 놋뱀만 전승되어 우상시 되어왔음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마치 어느 설교자가 달을 가르키며 저 달을 만드신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했더니, 시간이 지나자 달은 간곳 없고 달을 가르키는 손가락의 그림이 경배 대상이 되었다는 이야기와 같은 맥락입니다.
“느후스단은 놋쇠조각”이라는 말이며 곧 놋뱀을 형상화 한 우상입니다.
본래적 놋뱀은 불뱀에 물린 백성들이 쳐다보면 살도록 하나님께서는 생명도구로 만들었음에도, 미련한 백성들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여 놋쇠 조각인 느후스단만 숭배하는 어리석음의 역사가 느후스단 분향 사건입니다.(열왕기하 18:4)
이러한 성경 역사를 보면서 현대의 그리스도인은 삶의 자리에서 끊임없이 물어야 하는 두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하나는 존재론적인 물음으로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이고, 다른 하나는 본질과 비본질의 물음입니다.
이러한 두 가지 물음에 대한 성경의 대답은 분명합니다. 바로 로마서 14:8절입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그렇습니다. 피조물인 인간은 존재론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어야 합니다.
흐르는 세월속에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라는 고백이 입술을 넘어 삶의 고백으로 연결되는 이들이 늘어나길 기도하는 마음입니다.
여러분 한명 한명을 주님의 이름으로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