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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馬山)에서 거제도(巨濟島)를 향하여 14번 국도를 타고 약 20여Km 가다보면 고성(固城)과 진주(晋州)로 갈라지는 삼거리 교차로(交叉路)가 나온다. 교차로에서 오른쪽 진주를 향하여 2km 쯤 가다보면 오른편 마을 옆에 느티나무 숲이 있고 그 중앙에 지은지 얼마안되는 누각(樓閣)이 세워져 있는 조그만 공원(公園)처럼 조성된 휴식처를 볼 수 있다. 이 휴식처 서쪽에는 북쪽 인성산(仁星山, 648m)에서 내려 뻗은 산줄기가 마을을 휘감으면서 국도변을 옆에 두고 층층 절벽을 형성하여 산세(山勢)를 마감하며 마을 동남쪽 근거리에서는 진해만(鎭海灣)의 창창한 바다가 펼쳐지고 있다. 마을 앞으로는 여항산(艅航山, 744m)에서 발원한 진전천(鎭田川)이 진해만으로 흘러가며 여기의 행정지명은 경남 마산시(馬山) 진전면(鎭田面) 곡안리(谷安里) 이다. 휴식처 한켠 산모퉁이에는 비석(碑石)들이 세워져 있고 그 앞에는 윗사진에서 볼 수 있는 넓적한 바위가 시멘트 콘크리트에 둘러싸인 채로 다소곳이 자리잡고 있다.
이 바위를 위에서 보면 칼로 자른듯이 반듯한 모서리의 오각형이며, 크기는 동서의 길이가 4m, 남북의 길이가 3.1m이며, 높이는 1.45m이다. 암질(岩質)은 주변 절벽의 암반(岩盤)과 종류가 같은 점판암(粘板岩)이며, 암반이 네모난 판석(板石)으로 잘라지는 것으로서 주변에서 쉽사리 이같은 모양의 돌덩이를 확인할 수 있다. 휴식처 내에는 주민들이 편의시설로 설치한 바둑판식 소형 고인돌과 같은 모양의 긴의자를 상당수 볼 수 있는데, 대부분 직사각형이거나 기울어진 사각형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의 거석(巨石)도 기울어진 오각형이어서 실상 기울어진 사각형의 한쪽 귀퉁이를 의도적으로 잘라 될 수 있는 한 직사각형에 가까운 모양으로 만든 것이라 추정된다. 바위의 북쪽이 시멘트로 메꾸어진 상황이어서 굄돌의 상황을 정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마을 주민의 증언과 함께 그 남쪽 밑에 여러 개의 돌조각들이 괴어져 있어 이 반반한 거석이 고인돌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바위의 위치와 구조는 김해 구지봉과 경주 상신리에서 볼 수 있는 바둑판식 고인돌과 매우 흡사하게 고인돌 뒷쪽에 둔덕이 있어 고인돌의 앞뒤를 확실하게 구분하였다. 그러나 김해 구지봉의 것은 언덕 꼭대기의 가파른 경사면에 위치하는데 반하여 경주 상신리의 경우는 여기와 같이 산자락 끝에서 약간 떨어져서 들판을 앞에 두고있는 점에서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 고인돌은 아직 발굴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바위 상부 북동쪽에는 가장자리에서 약 70Cm 들어가 있는 부분에 조그만 바위구멍(性穴)이 하나 파여져 있다. 1966년 11월에 국립박물관에서 부근에 산재한 고인돌 가운데 단 1기만 발굴하여 그 지하구조가 알려지게 되었다. 그 당시 조사로는 이 근처에서 10여기가 발견되었는데, 필자가 현지에서 알아본 바는 현재 2기만 남아있고, 나머지는 약 3~4년전에 모두 파괴하여 땅 속에 묻어버리거나 덮개돌만 들어내서 여기의 휴식처로 이동시켰다고 한다. 즉 발굴하였던 고인돌조차 조각을 내서 버렸다고 하는데, 그 당시 주민들이 거세게 반대하였는데도 불구하고 땅주인이 임의로 파괴하였다고 한다.
오른쪽 끝의 흑백 사진은 발굴 당시에 촬영한 것으로 현재 남아있는 거석 고인돌 앞쪽(남쪽)에 있었던 것이다. 국도 앞에 나란히 놓여있는 2기의 고인돌과 함께 그 중앙 소로(小路)에도 조그만 고인돌이 있어 진전천(鎭田川)의 강줄기와 엇비슷하게 3기가 나란하게 놓여 있었다고 한다.
(1) 발굴된 것은 사진에서 보이는 왼쪽 고인돌로 현재는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오른쪽의 것은 3~4년전 파괴한 후 덮개돌만 앞에서 말한 고인돌 뒤로 이동시켜 돌의자로서활용하고 있다.(오른쪽 왼편 사진) 이 덮개돌은 사각형의 점판암으로 크기가 2.3m x 1.1m x 55Cm 이며, 동쪽 상부에 '윤병찬'이라는 이름이 한글로 새겨져 있다.
발굴된 고인돌은 거의 정방형(正方形)에 가까운 돌로서 동서의 길이가 1.45~1.55m, 남북의 길이가 1.15~1.35m이며, 두께 30Cm 정도 미만의 소규모 덮개돌이다. 산재한 고인돌 중 그 크기가 가장 작은 것이며 또한 굄돌이 전혀 없는 것인데, 발굴자는 경작시 토사의 유입으로 인하여 덮개돌 아래의 공간이 메꾸어지면서 굄돌이 파괴된 것으로 보고 있다. 나머지 대부분도 굄돌이 보인다 하더라도 매우 빈약(貧弱)하였으며, 발굴 결과 무덤방 위에 곧 굄돌이나 덮개돌을 올린 것이 아니라 약 20Cm 정도의 부식토(腐植土)를 덮고 그 위 지표면에 덮개돌을 놓은 것을 알게 되었다. 부식토(腐植土) 아래에는 붉은 색이 감도는 토층(土層)이 있었고 그 아래에 덮개돌의 규모보다 큰 무덤방이 있었으며, 그 안바닥에서 높이 10.5Cm, 지름 14.3Cm의 붉은 색의 단도마연토기 (丹塗磨硏土器)만 발견되었다. 무덤방은 남북 길이 2.1m, 너비 40Cm, 높이 50Cm로서, 바닥에는 돌을 깔지 않고 돌덩이로 네벽을 쌓고, 그 위에 길쭉한 판석들을 옆으로 건너서 나란히 배열하였으며, 그 틈을 진흙으로 메꾸었다.
(2) 곡안리 마을 동쪽 뒷편에는 완만하고 넓다란 경사면이 펼쳐져 논으로 경작(耕作)하고 있는데, 마을 끝 대나무숲 바로 뒤에는 논 한쪽에 길죽한 배모양이 역력한 타원형의 덮개돌을 볼 수 있다. 돌 아래에 굄돌은 전혀 보이지 않으나 그 위치와 주변 상황으로 보아 고인돌의 덮개돌이라고 추정된다. 현재 장축(長軸)의 방향이 동남 150도이며, 길이 3m, 너비 2m이며, 두께 약 30Cm로서 암석의 종류는 이 지역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점판암이다. 그리고 이 고인돌에서 약 100여m 떨어진 거리에서 돌무지 2기를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돌무더기 또는 돌무지는 논밭 등 경작지(耕作地)에서 경작하다 나오는 잔돌을 둔덕에 모아놓거나 이미 쌓여진 돌무지에 대충 얹어놓은 것으로 우리의농촌에서는 쉽사리 볼 수 있는 광경이다. 여기에도 마찬가지의 돌무지 2기가 눈에 띄는데, 단지 다르다고 한다면 돌무지 2기 중 앞쪽 돌무지의 축석(築石) 상태가 유난하게 정연(精姸)하다는 점이다. 너비 약 5~6m 정도이며, 높이 약 1.8m이며 전체적으로 봉토분처럼 보이는 이 돌무지는 한편이 무너져 내리고 뒷편이 엉성하게 덧쌓은 돌로 어지럽게 보이지만 앞쪽의 아래부분은 주먹만한 크기의 막돌을 꼼꼼하고 차분하게 쌓아서 그 정성이 돋보일 정도이다. 또한 논둑에 쌓아놓은 돌들과도 크기와 정성도에서 차이가 있으며, 일반적인 서낭당(城隍堂)(3) 돌무지와도 상당히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곳에서 북동쪽으로 약 10Km 떨어진 함안(咸安)으로 향하는 도로변(鎭北面 중촌마을 입구)에는 서낭당 돌무지 1기를 볼 수 있다. 도로를 개설하면서 한쪽을 깍아 내린 탓으로 가파른 언덕 위에 세워진 것처럼 보이는 이 반구형(半球形) 돌무지는 바로 앞에 제단(祭壇)이 있으며 꼭대기에는 똑바로 세워졌으리라 생각되는 길죽한 돌이 기울어져 있다. 이러한 모습의 돌무지는 전국 곳곳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으로서 보통 서낭당(城隍堂), 누적단(累積檀) 등으로 부르고 있다. 마을 어귀나 산 모퉁이에 고목(古木)과 함께 자리잡고 있으며, 돌무지에 '금줄'이라하여 짚으로 역은 새끼줄에 빨간 고추와 숯, 흰 종이조각을 끼워서 두르거나, 그냥 새끼줄을 두세번 두른 경우도 볼 수 있다. 돌무지 앞에서는 매년 정해진 일시에 마을의 수호와 안녕을 기원(祈願)하는 동제(洞祭)를 지내며 또한 주민이 개별적으로 치성(致誠)을 드리는 기도처(祈禱處)로서의 역활도 하고있다. 이러한 서낭당은 역사시대 이전부터 전해져 오는 민간(民間) 풍습(風習)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 기원(起源)에 대하여는 여러가지 설(說)이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비보풍수적(裨補風水的)인 의미에서 선돌(立石)과 조산(造山)이 세워졌는데, 지기(地氣)가 센 곳의 기운(氣運)을 누르거나 반대로 지기(地氣)가 약한 곳의 기운을 돋우기 위하여 만든 돌무지를 경상도 지역에서는 조산이라고 한다. 이런 조산이나 서낭당 돌무지 모두 같은 모양이자 같은 구조로 되어있으나 예외적으로 네모진 방형단(方形壇)으로 쌓은 경우도 가끔 볼 수 있다. 대부분의 반구형의 돌무지는 여성의 유방(乳房)과 비슷한 모양으로, 대부분 지름 20~30Cm 정도의 거치른 막돌이나 산돌을 약 1m~3m 정도 높이로 쌓아놓고, 중앙에는 항상 1~2m 정도의 장대석(長臺石)을 세우거나 길죽한 돌을 세워서 꽂아놓는데, 선돌을 세우고 그 주변에 둥그렇게 돌을 쌓은 경우도 있다. 돌무지 중앙의 꼭지는 천계(天界)와의 교감(交感)을 위한 안테나(antenna)이자 중계자(中繼者)로서의 역할을 의미한다고 하며,(4) 항시 돌무지 옆에 자리잡고 있는 수령(樹齡)이 오래된 박달나무나 느티나무도 같은 의미로 해석된다.
이런 점에서 여기 완만한 경사면에 자리하고 있는 돌무지는 서낭당 돌무지와 외형과 위치에서 차이가 있으며, 위에 근래에 새로 쌓은 돌들이 아래 부분에 비하여 굵고 큰 돌이어서 일부러 잔돌을 골라 축조(築造)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민의 증언에 의하면 이 돌무지는 과거 논이 만들어지기 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뜻밖에도 무덤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어린애의 무덤인 '애기장'은 아니라고 한다. 워낙 논밭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모습이며 수시로 지표면에서 드러나는 자갈을 계속 얹어왔기 때문에, 경작하는 농부들에 의하여 본의아니게 이러한 돌무지 무덤을 파괴하여 왔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발해만(渤海灣)을 중심으로 하는 만주와 한반도 전역에서 볼 수 있는 크고 작은 적석총(積石塚) 가운데 소형 돌무지 무덤들은 무덤방이 석관(石棺 또는 石箱이라고도 함)이거나 아니면 여기 곡안리의 남방식 고인돌 지하구조처럼 돌을 쌓아 만든 석곽(石槨)이 대부분으로 알려져 있다. 남방식 고인돌 가운데 바둑판식이나 개석식(蓋石式) 고인돌의 지하구조도 석곽, 석관 등으로 다양하며, 탁자식 고인돌의 무덤방이 지하로 내려간 것이 개석식 고인돌이라고 생각하는 학자도 있을 만큼 지역에 따라서는 예외적인 경우도 상당수 발견되고 있다. 이런 만큼 석곽(石槨)과 석관(石棺)의 관계를 단순하게 시대적으로 구분하거나 발전의 단계로 보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석곽은 돌덩어리로 네벽을 쌓아올린 것이고, 석관은 점판암 등의 넓적한 판석으로 상자처럼 관(棺)을 만든 것을 말하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이런 것들이 같은 지역에서 혼합되어 공존하는 사례도 발견되는 것이다.
대부분의 소형 돌무지 무덤에서는 석곽 또는 석관이 있으며, 아직 논쟁의 여지가 남아있지만 돌무지에서 출토되는 유물(遺物)이 고인돌의 것과 관계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도유호는 돌무지인 석상분(石箱墳)과 고인돌의 관계에 대하여 "거석문화와 시대는 같이 하면서도 갈래가 다른 것일 가능성이 많다. "고 하였다. 그런데 돌무지 무덤에서는 특이하게도 인간의 유골이 보이지 않고 새의 뼈(봉산의 석상분)가 출토되거나 말무덤이라는 전설(춘천의 적석총)이 전해지는 경우가 있어서 선사시대의 무덤이 단지 인간 만의 것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점에서 고인돌과 같은 지역에서 발견되며 고인돌과 근거리(近距離)에 있는 곡안리의 돌무지들이 혹시 부족장과 관련이 깊은 짐승이거나 도유호가 말하였듯이 종교행사(宗敎行事)와 관련된 희생물(犧牲物)의 무덤일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5) 또 한편으로는 여기에서 가까운 창원시(昌原市) 웅천면(熊川面) 소재의 자마산(子馬山) 패총(貝塚, AD 1세기 전후에 축조된 것으로 알려짐)의 주체와 울산시(蔚山市) 웅촌면(熊村面) 은현리(銀峴里)에 소재하고 있는 대형 적석총(積石塚)의 주체(主體)와 관련있는 부족의 무덤으로서, 계급이 있는 단일 부족 사회를 형성하고 거주하면서 전통에 따라 각기 다른 모습으로 조성한 무덤이 아닐까도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필자가 답사하였던 경상도의 고인돌 소재 지역에서는 여기 곡안리의 경우처럼 고인돌과의 근거리(近距離)에서 돌무지를 볼 수 있는 경우가 서너군데는 되었으며, 완만한 경사면(傾斜面)에 자리잡은 고인돌 위치에서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면서 고인돌의 근거리에 소재(所在)하고 있었다. 그런만큼 고인돌과 함께 있는 돌무지는 고인돌의 조성시기(造成時期)를 전후하여 축조되었을 가능성이 많다고 여겨진다. 나날이 급속도로 산업화되어가는 농촌의 현실 속에서 한국인의 뿌리를 찾을 수 있는 유일한 선사시대의 유적인 고인돌과 돌무지가 이대로 방치(放置)되어서는 안되며, 더 이상의 파괴가 진행되기 전에 이에 대한 조치가 시급하다고 생각한다.
(1997년 11월 촬영, 1997년 12월 작성, 흑백사진의 판권은 국립박물관에 있습니다.)
부산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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