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이론이 과학자 사회에서 인정받으려면 이론을 지지하는 근거들이 부정하는 근거들을 앞서야 한다. 근거가 많고, 다양하고, 확실할수록 좋은 이론이다.
과학자들에게 이건 상식이다. 많은 과학자들이 이런 상식이 사회에도 통용되길 희망한다.
하지만 사회의 많은 현상들이 과학적으로 설명되는 것은 아니다.
과학적 태도가 사회에 적용되는 방식은 다양한 층위를 지닌다.
특히 한 국가의 존재 이유이기도 한 정책의 실천에 있어 과학적 태도의 적용은 시급하고 어려운 일이다.
정책은 국민의 세금으로 이루어지는 정부의 실천 행위다.
바로 그 행위로 국가는 존재의 이유를 찾는다.
따라서 정책의 설정, 집행, 평가에는 합리성이 담보되어야 한다.
정책의 비합리성은 비효율성으로 이어지고, 그로 인한 모든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의 몫이기 때문이다.
정책의 합리성을 국민에게 이해시킬 수 없는 정부는 국민에게 국가의 정당성을 요구할 수 없다.
정보화 사회 이후 정책의 모든 측면을 과학적으로 평가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증거 기반 정책’(Evidence-based policy)은 영국 노동당을 중심으로 20세기 후반 영미권에서 활발히 논의되고 실행되고 있는 국가 정책 노선의 흐름이다.
증거란
“어떤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근거”
를 뜻한다.
근거란 최대한 객관적이어야 한다.
영국의 내각 사무처는 증거를 전문가의 지식, 국내외 연구, 기존 통계, 이해관계자 협의, 이전의 정책평가, 인터넷, 자문 결과, 정책대안의 비용, 경제적·통계적 모델링의 결과물 등으로 포괄적으로 정의한다.
과학적 정책이라고 해서 과학자들의 의견만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증거는 다양할수록 좋다.
과학적 정책은 과학적 방법론에서 나타나는 합리성을 정책의 결정과 평가에 사용하자는 것이다.
그것은 치열함이라는 태도다.
국민의 세금으로 이루어지는 정책의 모든 과정에 치열함이라는 미덕이 녹아들어야 한다는 의미다.
한국은 공공기관의 국민경제 비중이 다른 나라들에 비해 지나치게 높고, 그들의 경영 비효율성으로 인해 정책에 대한 국민의 불신이 심각한 사회다.
세금이 중간에서 샌다는 것은 일반 상식에 속하고, 정책은 높은 분들의 의중에 의해 주먹구구식으로 결정되고 폐지되기 일쑤다.
따라서 한국 사회에서 정책 결정의 권력을 쥐고 있는 이들이 정책을 일종의 과학적 추론 과정으로 여기고, 이에 입각해 무거운 책임을 져야 한다는 점을 일깨울 필요가 있다.
관료 마피아의 문제도 증거 기반 정책이라는 시스템으로 제어할 수 있다.
정책에 스며든 과학적 삶의 양식은 불확실한 세상에서 벌어지는 사고와 사건들에 대한 대처에도 도움을 줄 수 있다.
두 척의 배가 침몰했다. 수백 명의 아이들과 군인들이 죽었다. 그중 한 척은 여전히 바닷속에 가라앉아 있는데, 우리는 정부에서 발표된 제대로 된 보고서 하나 손에 들고 있지 않다.
아직 제대로 된 조사는 시작되지도 않았다. 챌린저호 폭발사고를 다룬 영화 <더 챌린저>에서 조사위원으로 참여한 과학자 리처드 파인먼은 정부 관료의 진실 은폐 시도를 마주한다.
하지만 파인먼이 오링(O-ring)을 가지고 보여준 과학적 실험이 사고의 원인을 밝혔고, 미국 우주산업은 오히려 발전의 계기를 얻었다.
우리는 천안함 폭침에 대한 제대로 된 실험을 보고받지 못했고, 세월호를 인양하지 못했으며, 경제민주화라는 허황된 공약의 과학적 근거를 들어본 적 없다.
이 나라엔 과학이 없고, 과학적 증명의 노력이 없고, 그래서 근거가 없다.
이 국가는 존재의 근거를 증명하기 위한 노력을 포기했다.
만약 그런 게 있다면 세월호 1주기에 대통령이 국가를 이탈하는 비합리적인 사건은 일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