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박하선이 드라마 《동이》에서 인현왕후 역을 열연하고 있을 때였다. 천성이 착한데다 약간의
허당기까지 있어 맨날 장희빈에게 당하기만 하는 인현왕후 역으로는 제격이라는 평이었다. 촬영이
없는 어느 여름날, 박하선은 친구들과 함께 용인 에버랜드에 있는 캐리비안 베이로 수영을 하러 갔
다. 그녀가 비키니 차림으로 수영장에 들어서자 남자들뿐만 아니라 여자들도 찬탄의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평소 맨살을 잘 드러내지는 않지만, 박하선의 피부와 몸매는 여배우 중에서도 최고라고
알려져 있었다. 선글라스까지 착용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빼어난 몸매는 낭중지추, 한 중년여인이 알
아보고 다가와 반갑게 인사를 했다.
“어머, 박하선 씨 아니세요? 요즘 인현왕후 역 잘 보고 있어요. 어쩜, 몸매도 이리 고울까!”
순간 박하선은 왕비가 비키니 차림으로 수영을 하더라는 소문이 나면 드라마에 누를 끼쳤다고 감독
에게 혼나지나 않을까 염려되어 황급하게 손사래를 치며 큰 소리로 부인했다.
“나 인현왕후 아닐세!”
허둥대는 그녀의 변명을 듣고 온 수영장이 떠나갈듯 폭소가 일었다. 박하선의 이 허당기가 입소문을
타고 널리 퍼지면서 《동이》의 인기는 오히려 상승했고, 그녀의 허당기를 익히 알고 있는 감독은 아
무 말 없이 웃어넘겼다.
인현왕후와 장희빈의 얘기는 영화와 드라마에 가장 자주 등장하는 사극 소재다. 몇 년에 한 번씩 새
영화나 드라마가 나오는데, 악역임에도 불구하고 장희빈 역으로 출연한 배우는 인기배우 반열에 오
르는 징크스도 있다. 김지미‧남정임‧윤여정‧김혜수‧정선경‧김태희‧이소연 등이 장희빈 역을 맡은 이후
더욱 승승장구한 배우들이다. 이 가운데 연기를 거저먹은 배우가 딱 한 명 있다. 다른 배우들은 피나
는 노력 끝에 장희빈의 독살스런 표정과 말투를 연기했지만, 김혜수는 가만히 있어도 툭 불거진 광대
뼈와 사나운 눈빛이 천생 장희빈이었던 것이다.
숙종의 여인들이었던 인현왕후와 장희빈은 출신 성분부터 하늘과 땅 차이였다. 인현왕후는 조선 최
고의 명문가 출신으로 아버지 민유중은 형조판서‧대사헌‧호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그녀는 궁중법도
에 따라 간택되어 왕비에 올랐다. 이에 반해 장희빈은 중인의 딸이자 몸 파는 기녀 출신으로서 궁녀
로 들어왔다가 숙종의 눈에 띄어 승은(承恩)을 입고 신분이 수직상승한 권모술수의 여인이었다. 장희
빈은 왕자(경종)를 출산한 공로로 한때 왕비에 오르기도 했지만, 폐서인 되었다가 복위한 인현왕후에
게 저주를 퍼붓는 굿판을 벌인 게 들통이 나서 사사되었다.
조선조의 후궁과 궁녀 등 이른바 ‘왕의 여자들’을 통틀어 내명부라 했다. 왕비‧세자빈‧대비‧대왕대비
등의 신분은 내명부를 초월했다. 왕과 세자의 후궁들을 내관이라고 했는데, 정1품 빈에서부터 종4품
숙원까지 서열이 정연했다. 궁녀는 정5품 제조상궁에서부터 종9품 주치(奏徵)까지 계급이 나눠져 있
었다. 궁녀는 왕이나 세자의 눈에 들어 하룻밤 승은을 입으면 종9품에서 종4품으로 신분이 수직상승
했다. 새파란 무수리가 왕의 살침 한 방으로 하룻밤 사이에 평생을 궐에서 일한 제조상궁보다 지위가
높아지는 요지경, 그것이 왕조의 법도였다.
영화든 드라마든 극의 하이라이트는 장희빈이 취선당 한쪽에 신당을 차려놓고 무당을 불러 굿을 하
면서 인현왕후에게 저주를 퍼붓는 엽기적인 장면이다. 인현왕후를 상징하는 인형을 만들어 비단옷을
입힌 뒤 바늘로 급소를 찌르고 온 몸에 화살을 쏘아 그 효험이 인현왕후에게 나타나도록 한다는 염원
이었다.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지기로, 장희빈이 그 저주의 굿판을 벌인 직후 인현왕후는 하반신이 부
풀어 오르는 괴질이 발병하여 신체가 썩어 들어가는 고통 속에 승하했다. 장희빈은 굿을 하기 전에도
흉물을 만들어 인현왕후의 침전인 통명전 마루 밑에 묻도록 시켰다. 『숙종실록』 재위 27년(1701)
10월 3일 조에는 궁녀 숙정이 잡혀와 문초를 받고 대답한 내용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외신당에서 굿을 할 때 무녀가 ‘만약 중전이 없어진다면 희빈께서 다시 중전이 될 것이다’ 하고 외
쳤습니다. 재작년 9, 10월에는 희빈이 말하여 죽은 새‧쥐‧붕어 각 7마리를 버드나무 고리에 담아 한상
궁과 숙이가 통명전과 대조전 마루 밑에 묻기도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현왕후와 장희빈 얘기에 빠져 울고 웃는 것은 한국인들의 정서에 잘 맞는 갈등구조
와 권선징악적 요소가 골고루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장희빈이 사약을 마신 곳은 창경궁 통명전 마
당이었다. 그녀는 죽는 마당에서도 마지막으로 한 번만 아들(경종)을 보여달라고 졸라서는, 아들이
오자 고환을 터뜨리는 패악을 저질렀다. 그 일로 경종은 후사가 없어 영조가 보위에 오르는 역사적
전환이 있었다. 신분의 시소게임을 벌인 두 여인의 궁중비사는 당대에 씌어진 「인현왕후전」에 잘
그려져 있다. 작가 미상인 「인현왕후전」은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 작가 미상의 「계축일기」
와 함께 조선의 3대 궁중문학으로 꼽힌다.
장희빈이 당파싸움의 희생양이라는 견해도 있다. 숙종 때는 조선의 안민석(민주당 국害의원)이었던
송시열이 사사건건 역모로 몰아 상대방을 대거 숙청한 피곤한 시절이었다. 인현왕후와 장희빈을 앞
세워 서인과 남인은 서로 권력을 잡기 위해 피나는 투쟁을 벌였다. 이기는 방법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상대방을 모함하여 도륙을 내는 길뿐이었다. 숙종은 이 갈등구조를 교묘하게 역이용하여 적당
한 시기에 기사환국‧갑술환국‧신사환국 등을 일으킴으로써 수많은 신하들을 처형하며 왕권을 유지했
다. 인현왕후를 폐위했다가 복위시키고 장희빈에게 사약을 내리는 파천황의 사건들도 모두가 이러한
환국(換局. 쿠데타)의 산물이었다.
장희빈은 죽어서도 그예 서오릉의 숙종 곁으로 돌아왔다. 숙종과 인현왕후는 처음부터 서오릉의 명
릉에 나란히 모셔져 있었고 장희빈은 경기도 양주를 거쳐 광주로 이장되었는데, 1969년 이곳으로 도
로가 통과하게 되자 정부에서 서오릉 한쪽 구석에 조성되어 있는 대빈묘역으로 이장했던 것이다. 귀
신이 되어서도 자신의 무덤으로 도로를 끌어들여 그예 숙종 곁으로 돌아오는 장희빈의 끈질긴 집념,
그녀의 욕심은 죽어서도 여전히 통했던 것이다.
출처:문중13 남성원님 글
첫댓글 간밤에 조금내린 잔설이 차도옆 언저리에 하얗게 쌓여 있습니다. 고궁도 좋지만 집에서 수서역까지 탄천변을 걷는게 조용한풍경으로 더 좋을것 같습니다. 올해를 보내는 마지막날, 가족과 함께 즐겁게 보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