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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김희진, 지금 어디 가는 거야?"
"아저씨때문에 백화점에서 나왔잖아요. 딱히 갈데도 없는데 시내에서라도 아이쇼핑하면 좋잖아요."
"좀 쉬자. 어디 들어가서 커피라도 마시면서 좀 쉬자구."
"뭐 얼마나 걸었다고, 남자가 엄살은...."
"전에 말했지. 사고로 다쳤었다고. 나 오래 못 걸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윤호가 상가 계단에 털썩 주저앉아버린다. 꽤나 힘이 들었는지 잔뜩 인상을 구긴 그는 자신의 다리를 통통 두드리기 시작했다. 제법 힘을 주고 두드리는 모양새가 엄살은 아닌듯 싶다. 희진은 슬쩍 윤호의 옆으로가 쪼그리고 앉아 그를 쳐다보았다.
"다리 다친거였어요? 진즉에 말을 하지. 겉보기에 멀쩡해서 몰랐죠."
"말했으니깐 이젠 됐지? 그러니깐 좀 쉬었다 가자구."
딱히 목적이 있어 돌아다닌게 아니었다. 윤호가 무작정 백화점에서 끌고나오는 바람에 시연과도 헤어지고 마땅히 갈 곳이 없어 걸었던 것 뿐이다. 희진은 연신 자신의 다리를 주무리고 있는 윤호를 빤히 쳐다보았다. 시선을 느낀 윤호가 홱하니 고개를 돌려 쳐다볼 때까지 희진은 그렇게 윤호의 옆모습을 빤히 쳐다보고 앉아 있었다. 몰랐다고는 하지만 장애인 판정을 받았을 정도면 꽤 큰 사고였을 것이다. 희진은 미안한 마음에 윤호의 다리를 당겨 토닥토닥 두드려주기 시작했다.
"진즉에 말했으면 쓸데없이 안 걸어다녔죠. 말하라고 있는 입인데 그걸 왜 아껴? 이렇게 해 봐요."
"하여튼 곧 죽어도 할 말은 다 하지. 됐어!"
"삐졌어요?"
"삐지긴 누가 삐졌다고 그래?"
픽픽 거리며 심통을 부리는 폼이 영락없이 초딩 사내아이다. 몰라서이긴 했지만 그래도 미안한 마음에 희진은 윤호의 다리를 정성껏 두드려주었다. 팔자에도 없는 보디가드 노릇을 하느라 지쳐있던 윤호는 자신의 다리를 두드려주는 희진을 보며 괜한 신경질을 부린 거 같아 내심 미안하기도 하다.
"사고 언제 났어요?"
"다섯살때!"
"굉장히 어릴때네요. 많이 힘들었겠다."
"너무 어려서 이젠 기억도 안나."
"그래도 부모님들은 기억 하실 거 아니예요. 참 많이 힘드셨겠다."
"부모님? 그래, 그 분들도 힘들었겠지. 멀쩡했던 자식이 병신이 됐으니 힘들었겠지."
"병신은........멀쩡하게 다 나았는데 무슨 병신이예요."
"그렇게 보여?"
"멀쩡해 보여요. 나 처음에 아저씨 차에 장애인 스티커가 붙어있는거 보고 되게 이상했거든요. 멀쩡한 사람이 그런 스티커도 붙이고 다니고, 운전석도 개조되어 있고, 그래서 사기꾼인줄 알았다니깐요."
"뭐? 사기꾼?"
사기꾼이란 소리에 윤호가 피식 웃음을 터트린다. 딴에 맞는 말이다. 사기꾼이지. 아직 어머니인 남 여사나 아버지인 이 태성은 자신이 이렇게 두 발로 걸어 다닐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집 식구들 가운데 유일하게 형인 윤성만이 알고 있는 사실이다. 만일 두 발로 멀쩡하게 걸어다니고 있는 자신을 본다면 과연 어머니는 어떤 반응을 보이실까? 지붕이라도 뚫고 올라갈듯 기뻐하며 아버지에게 맞서겠지. 아버지는 또 어떤 얼굴이 되실까? 휠체어에서 내려온 아들을 보며 기뻐해주시긴 할까? 아무튼 부모님을 모조리 속이고 이렇게 살고 있으니 희진의 말처럼 사기꾼이 맞을 것이다.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물어봐."
"왜 엄마를 남 여사라고 불러요? 계모예요?"
"뭐? 계모?"
"그렇잖아요. 지난번에 큰 아저씨도 그렇고, 오늘 아저씨도 그렇고, 친 엄마라면 그렇게 할 수 없잖아요."
"그렇게 할 수 없다니, 뭘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거야?"
"엄마를 남 여사라고 했잖아요. 큰 아저씨는 지난번에 가게에서 완전 살벌하게 빠지직!! 불꽃 튀기는 눈 싸움도 벌이고, 친 엄마라면 그럴수 없죠."
"친 엄마라면 그럴수 없다구? 글쎄....... 친 부모, 자식간에도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가 아니라면 그럴 수 있어."
"에~이, 무슨 그런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해요. 우리 아버지도 맘에 안들면 빗자루부터 날아오고, 욕도 하고 정말 친 아빠가 맞나 싶을 때가 한두번이 아니거든요. 그래도 난 아빠를 김 사장님이라고는 안 불러요. 그리고 그렇게 살벌하게 째려보지도 않고, 그랬다간 그 날로 사망 신고서 작성해야할걸요."
"훗후! 빗자루라고? 그래, 너 그 날 보니깐 한두번 맞아본 솜씨가 아니었어. 아주 지능적으로 피해다니는게 완전 생활인거 같더라."
"치~ 그래도 할아버지 계실땐 말려주셨는데, 할아버지 돌아가시고 나니깐 말려줄 사람이 없어서 그런지 더 하시는거 같아. 노인네가 날이 갈수록 기운이 뻗쳐가는게 아무래도 우리 엄마 나 몰래 아버지 약 해드렸나봐. 하나뿐인 딸내미는 영양부족으로 얼굴에 허옇게 버즘이 피고있는데."
뽀루퉁한 희진의 얼굴을 보며 윤호는 왠지 희진이 부러워졌다. 늦은 밤, 낯선 남자와 함께 나타난 딸에게 앞,뒤 가리지 않고, 무작정 빗자루를 휘둘러대던 그녀의 아버지는 결코 자신의 이익이나 필요에 의해 행동하는게 아니었다. 딸을 보호하려는 아버지의 무한한 애정의 표현이었다. 한번도, 단 한번이라도 아버지가 자신에게 그런 애정을 보인 적이 있었던가? 사고가 났던 그 때 이후로 따뜻한 눈길 한 번 마주쳐 본 적이 없었다. 듣지 말았어야 할 말을 들었었던 그때, 만일 형이 없었더라면, 형 윤성이 곁에 없었더라면 그대로 창문을 열고 뛰어내렸을지도 모른다. 형이 없었더라면......
"너 참 부럽다."
"내가요? 내가 왜 부러워요?"
"빗자루 휘두르시는 아버지가 있어서, 그걸 말려주시던 할아버지의 추억이 있어서, 허물없이 지내는 엄마가 있어서 참 부럽다."
"어이구, 별게 다 부럽네. 아저씨도 아버지 있잖아요. 그것도 부자 아버지."
"근데 너 말야. 왜 자꾸 날 아저씨라고 부르는거니? 나 아직 스물 다섯밖에 안됐어."
"남자들은 고등학교 졸업하는 그 순간부터 아저씨가 되는 거예요. 학생이라고 하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총각 그럴수도 없고, 그냥 만인에게 공용된 호칭인 아저씨가 제일 무난하죠."
"그건 서로 모르는 사이일때 그런거고, 지금은 서로 알잖아. 이름을 불러도 되고, 아니면 오빠라는 호칭도 있고...."
"오빠?! 아휴~ 닭살스러워!"
"너 니네 아버지가 날 남친으로 알고 계신데, 남친을 아저씨라고 부르는걸 알면 아버지가 뭐라고 하실거같니?"
"그건....아버지 눈에 안 띄면 되는거죠."
"그건 그쪽 희망사항이고."
"그럼.......윤호씨?!"
"으......많이 닭살스럽다. 그냥 오빠라고 부르지. 나이도 세살 차이 밖에 안나는데. 그게 가장 자연스럽잖아."
맞는 말이긴 한데 여지껏 오빠란 소리를 해본적이 없다. 태어나면서부터 오빠는 존재하지 않았었고, 사촌들은 다 자신보다 어리고, 과에서도 모두 선배라는 호칭으로 통일해 부르곤 했으니 오빠란 말을 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낯간지럽게 오빠라니, 왠지 닭살스럽다. 하지만 아버지에게 남친이라고 소개를 했으니 아저씨란 호칭이 이상하기는 하다. 눈 딱 감고 불러? 오빠?!
"엄마랑 싸웠어요?"
"엄마랑 왜 싸워?"
"근데 왜 엄마를 피해요? 밖에서 우연히 마주치면 반갑지 않아요?"
"글쎄, 반가워야 하는 거지?"
"엄마랑 싸운거 맞구나. 아무리 그래도그렇지, 남자가 소심하게 엄마를 모른척 쌩까면 안되죠."
"엄마랑 싸운다.....싸우고 싶어도 싸울 시간이 없어. 우리 어머니는 너무 바쁘거든."
"바빠요?"
"그래, 무척이나 바쁜 사람이지........이런 얘기 그만하고 좀 이르긴 한데 저녁이나 먹자. 맛있는 거 사줄께."
"해도 안졌는데 무슨 저녁을 벌써 먹어요? 할 일 없으면 집에나 가요."
"집은 무슨.......그러지 말고 같이 밥 먹자. 내가 맛있는거 사준다니깐."
"집에 가요. 집에 가면 밥도 있고 다 있는데 뭐하려 아깝게시리 밖에서 밥을 먹어요?"
희진이 벌떡 일어나 앞장 서 걷기 시작하는 걸 본 윤호가 옷을 탁탁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앞서가는 희진의 뒤를 쫓아 걸어가기 시작했다.
"어디로 가는 거예요?"
"응?"
"우리 지금 어디 가고 있냐구요?"
"어.....어디 갈까? 가고 싶은데 있어?"
말을 얼버무리는 윤성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시연은 말없이 시선을 돌린다. 남 여사를 피해 백화점을 나왔지만 그녀의 차는 아까부터 윤성의 차를 따라오고 있었다. 때문에 그의 신경은 온통 뒤따라오는 남 여사에게 가 있었기에 옆 좌석에 앉은 시연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어딜 가는거냐는 그녀의 말을 듣고서야 그녀와 함께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게 된 윤성은 겸연쩍은듯 시연의 눈치를 살피며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 남 여사를 달고 그대로 논현동으로 갈수는 없는 일이었기에 벌써 한 시간이 넘도록 이리저리 서울 시내를 돌고 있었다.
"지금 저 까만 차 때문에 오피스텔에 못가는 거죠?"
"훗! 먹통인줄 알았더니 제법 눈치도 있네."
"아무리 멋 부린다고 해도 커다란 썬글라스를 실내에서까지 쓰고 있는 사람이 흔하진 않으니깐요. 아저씨 어머니, 안그래도 너무 미인이라서 쉽게 눈에 띄는데 선글라스까지 끼고 있으니깐 금방 알아보겠던데요."
백화점에서 필요 이상으로 친근하게 어깨를 감싸고 밀착해오는 윤성이 이상하다 생각된 시연은 주위를 둘러보다 남 지현을 발견했었다. 마땅치않은 시선으로 윤성을 노려보고 있는 그녀는 얼굴의 절반을 가리는 선글라스로 위장을 한다고 했지만 본인의 의도와는 달리 눈에 확 띄는 외모와 차림새로 다른 이들의 시선을 끌고 있었다.
"하긴 워낙에 눈에 띄는 사람이지. 어머니는 아직도 니가 내가 만나고 있는 여자라고 생각하니깐 어쩔수 없잖아. 무슨 꼬투리가 잡고 싶은건지 지금도 우릴 따라오고 있잖아."
"그래서 어디까지 갈 생각이예요?"
"뭐.....주말인데 데이트나 하지. 다른 연인들처럼."
"데이트요?"
"어차피 주말인데 할일도 없잖아. 더구나 이렇게 매력적인 운전사가 남친인데, 방구석에 틀어박혀 재미없는 법률 책 파고 있는것보다 백배는 낫지. 안그래?"
"헐!! 완전 어이없네. 자뻑도 그 정도면 중증인거 알고 있죠?"
"난 사실을 말하고 있는건데. 니 눈엔 내가 별로인거 같니?"
"어이구~ 왕자병까지 있나봐요?"
"누가 그러더군, 이 정도 생겼으면 자뻑이든 왕자병이든 다 용서가 된다고."
"우~와!! 인정!!!"
"하하핫!!! 어디로 갈까? 이왕 남자 친구하기로 한거 확실하게 해줘야지. 안그래?"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는 시연을 보고는 핸들을 돌렸다. 지금 시간이면 양평쪽이 한가롭고 괜찮은 커피숖도 많으니 한바퀴 돌고 오면 뒤따르는 저 차도 적당히 떨어져 나갈테지. 윤성은 오랜만에 하는 드라이브가 왠지 즐겁게 느껴졌다
양평으로 들어서면서부터 뒤따르던 차는 사라지고 없었다. 하지만 굳이 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지않은 윤성은 그대로 차를 달리고 있었다. 본의 아니게 남 여사 덕분에 이곳까지 오게 됐지만 그리 시간을 허비했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시덥잖은 농담에 기분좋은 웃음까지, 덕분에 꽤 괜찮은 드라이브를 즐겼다. 팽팽히 조여있던 기타줄처럼 긴장의 연속이었던 시간에서 벗어나 오랜만에 교외로 나와 바람도 쐬고 맛있는것도 먹고, 이렇게 한가하게 앉아 커피도 마실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다인이라는 사람, 어머니가 아저씨 짝으로 생각하는 사람이예요?"
한껏 여유로워진 윤성이 느긋한 기분을 만끽하며 커피 잔을 비우고 있을 때 였다. 문득 시연의 입에서 나온 뜻밖의 질문이 그의 주위를 상기시키고 있었다. 다인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나? 시연을 찾아간 남 여사의 입에서 비웃듯 흘러나온 다인의 이름을 시연이 잊지않고 기억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조금 놀랍기는 하지만 윤성은 이내 아무렇지도 않다는듯 입을 열었다.
"어머니가 원하는 사람이 아니라 내 약혼녀야."
"약혼녀?!"
덜컹 심장이 내려앉는것 같다. 약혼녀가 있었다니, 윤성의 입에서 나온 약혼녀라는 말에 시연은 롤러코스터를 타고 떨어질때처럼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만 같다. 자신의 당황을 눈치 챘을까 서둘러 커피잔을 들며 고개를 숙이는 시연과는 달리 윤성의 얼굴에선 아무런 변화을 읽을 수가 없었다. 시연은 그런 윤성을 보며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약혼녀가 있다는 사실도 놀랍지만, 결혼할 여자까지 있는 사람이 왜 이런 무모한 일을 벌이고 다니는 건지도 궁금하다. 사회적으로 안정되고 인정받는 직업을 가지고, 결혼 할 여자까지 있는 사람이 왜 그런 무시무시한 일을 하고 다니는 건지 쉽게 이해가 되질않는다.
"약혼녀가 있는게 이상해?"
"당근 이상하죠."
"뭐가 이상하지?"
"그렇잖아요! 아니 약혼녀까지 있는 사람이 왜 그런 위험한......"
시연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하마터면 왜 그런 위험한 일을 하고 다니냐 말할 뻔 했다. 시연은 슬며시 커피를 마시고 있는 윤성의 눈치를 살폈다. 힐끔 쳐다보긴 했지만 이내 느긋하니 커피향을 즐기고 있는 그를 보며 얼른 말을 얼버무려 버린다.
"원래 남자들은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안정적인 삶을 살고싶어 한다던데, 약혼녀까지 있다면서 아저씨는 쓸데없는 일에 정신을 쏟고 있는 거 같아요."
"쓸데없는 일이라니?"
"친구들이랑 전쟁놀이 하는 것도 그렇고, 사춘기도 아닌데 어머니랑 신경전 벌이는 것도 그렇고...."
"왜 그게 쓸데없는 일이라는 거야? 친구들간에 친목을 도모하는 일이 왜 쓸데없는 짓이야? 그리고 어머니는........"
윤성의 말끝이 흐려졌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굳어진 그의 표정에 시연은 왠지 모를 긴장감이 느껴져 그의 입에서 나올 뒷말이 불안하기만 하다. 하지만 불안해하는 시연과는 달리 윤성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여기까지 온 기념으로 재밌는 사실 하나 알려줄까? 뭐, 비밀까지는 아니지만 조금 전까지 우리 뒤를 열심히 쫓아오는 사람, 사실은 내 어머니가 아니야. 윤호 어머니지."
"에? 그게 그거 아닌가? 무슨 그런 당연한 말을........"
"가끔씩 궁금할때가 있었어. 그 머리로 어떻게 법대를 다니는 건지......"
"무슨 뜻이예요?"
"가정법원에 가면 복잡한 호적, 그리 드문 일 아닐텐데.......윤호의 어머니이긴 하지만, 내 어머니는 아니라는 말,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
"그러니깐 그게 아버지께서 재혼을........"
"재혼이 아니야, 그냥 호적에 기재되어 있는 어머니라는 사람과 피 한방울 안 섞이지 않았다는 거지. 대신 윤호를 낳은 생모니 나랑 윤호는 배 다른 형제라고 하면 설명이 되나? 아! 아니다. 옛날에는 이런 경우 서자라는 말을 썼지. "
"서자요?"
태연자약하게 커피를 마시며 자신을 서자라고 속삭이듯 말하는 윤성을 보며 시연은 무척이나 놀랐다. 그리고 또 한번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걸 느꼈다. 서자라니, 전처의 자식이 아닌 서자. 법적으로 혼외 정사로 인해 생긴 자식을 일컫는 말인데, 그럼......
"뭘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해? 서자 몰라? 바람 피워서 생긴 자식이라구."
"아~그런.......근데 윤호씨가 동생이면.........."
"결혼이 먼저가 아니라 바람이 먼저였다는 말이지. 그 바람을 타고 내가 태어난거구. 결혼은 그 다음이지."
시연은 말을 잃어버렸다. 저 말대로라면 아기까지 낳고 함께 살던 사람을 버리고 새로운 여자와 결혼을 했다는 건데, 드라마나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를, 분명 상처가 되었을 그런 이야기를 저렇게 태연자약하게 남의 일처럼 이야기 하고 있는 그를 보며 어떤 말을 해야할지 몰랐다. 하지만 윤성의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고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윤호를 만난건 내가 8살때였어. 다인인 원래 윤호와 결혼하기로 되어 있었거든. 근데 사고가 있었지. 그래서 내가 대신 다인이와 약혼한 거야."
"!!!!!!!!!"
"어머니 입장에선 갑자기 나타난 남편의 혼외자가 자신이 낳은 아들을 재치고 장남 자리와 약혼녀를 모두 가로채 갔으니 정말 눈에 가시 같은 존재 아니겠어? 친 아들의 여자와 재산까지 몽땅 내가 가로채갔으니깐. 이제 왜 남 여사가 날 못잡아먹어 안달이 난건지 이해하겠지?"
"그.......그런 얘기를......... 왜 그런 얘기를 저한테....."
"너 지금 되게 궁금하잖아."
"아니예요. 내가 왜 남의 사생활을....."
"너, 굉장히 궁금한 얼굴이거든. 검사 아들 뒷조사를 하고 다니는 어머니는 과연 어떤 사람일까? 검사 아들이 사흘씩 외박을 해도 외박이 중요한게 아니라 어떤 여자와 있었는지가 더 궁금한 어머니, 그리고 아들의 약혼녀에게 그 아들의 외도 사실을 전해주는 어머니, 듣고보니 재밌지 않아?"
"외도는 무슨.........그럼 약혼녀가 외도 사실을........아니, 아저씨 외박한거 알아요?"
"왜? 신경쓰여? 약혼녀까지 너한테 달려갈까봐 겁나?"
"내가 왜 겁을 먹어요!!! 내가 뭔 죄가 있다고........"
"그래, 신경 쓸 거 없어. 너한테 피해가는 일은 없을테니깐."
윤성은 평탄하지않은듯한 자신의 가정사를 마치 흥미진진하게 읽은 소설책의 독후감을 들려주듯 빙글빙글 웃음까지 띄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예기치 못한 이야기에 제대로 관리가 안되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시연의 표정을 흥미롭게 감상하면서.....
윤성은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얘기를 하고 있는 자신이 스스로도 이해가 되지 않지만 왠지 저 아이와 함께 있으면 모든 게 편안해지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 섞이고 있는 자신이 느껴졌다. 얼마되지 않은 차 한 잔을 편안하게 마실 수 있는 여유를 부리면서.
"그럼 아저씨 낳아주신 친 어머님은 어디 계세요?"
".........."
순간 시연은 자신의 질문이 잘못되었다 생각했다. 하지 말았어야 될 질문이었나보다. 그때까지 여유롭게 빙글빙글 웃기만 하던 윤성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져 마치 정지 버튼을 누른듯 미동도 없이 커피잔을 든 채 그대로 굳어져버렸다. 굳어버린 윤성의 얼굴은 떠올리기 싫은 기억들이 생각나는 듯 어둡기만 하다.
"미안해요. 괜한 걸 물어서....."
"그래. 미안한 질문을 했어."
"난 그냥...."
"이제 그만 가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윤성이 그대로 몸을 돌려 나가버린다. 자리를 떠나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시연은 괜한걸 물었다 후회가 되었다. 누구에게나 싫은 기억이 있는건데, 오지랖 넓게 괜한 참견을 했나 싶어 미안한 마음이 든다. 하지만, 한편으론 억울하기도 하다. 불편한 가정사를 농담처럼 늘어놓은건 윤성이었다.
"치! 묻지도 않은 얘기를 자기가 먼저 풀어놨으면서 저 쌩한 반응은 뭐람. 사람 무안해지게스리."
차에 올라타는 윤성의 굳은 얼굴을 보며 시연은 어쩌면 윤성이 하는 무모한 일들이 그를 낳아준 어머니와 상관이 있는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빙글거리며 생각없는 사람처럼 굴다가 어머니 이야기에 급격히 굳어지는 그의 얼굴이 그렇게 말해주고 있는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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