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모님처럼 작고 겸손하게
나경환 시몬
제가 처음 레지오 마리애와 관련을 맺게 된 것은 1979년 안양 명학동 성당에서였습니다. 당시 본당신부님은 후일 한국 최초로 파푸아 뉴기니 선교를 다녀오시게 된 수원교구의 방상복 신부님이셨습니다. 전입을 온 터라 단체 활동도 하지 않던 제게 신부님은 단체 가입을 권하셨고, 저는 그날로 레지오에 입단하였습니다. 이렇게 레지오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채 명학성당 ‘병자의 구원’ 쁘레시디움에 발을 딛게 된 것이 레지오와의 첫 만남이었습니다.
당시 그 쁘레시디움은 모두 기혼자였는데 젊은 총각은 저 혼자여서인지 3개월이 지나 선서를 하자마자 서기를 맡게 되었습니다. 당시 젊다는 이유만으로도 저를 아끼고 사랑해주셔서 참 기쁘게 활동할 수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레지오 활동을 통해서 새로 전입해온 낯선 본당에 정을 붙이고, 방문활동과 묵주기도를 통해 저도 모르게 성모신심이 자랐던 것 같습니다. 그 후 근처의 성당으로 이사해서는 사목회 임원으로 출세(?)도 하였는데, 직장과 성당을 오가는 바쁜 생활 속에서도 레지오만은 쉬지 않고 계속하였습니다. 그리고 가는 곳마다 서기를 맡아 보았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당시 다른 간부도 해 보았더라면 좋은 경험이 되었겠다 싶지만, 어려서 그랬는지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33살의 늦깎이로 부르심을 받아 1986년 수원신학교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신학교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쁘레또리움 단원으로 기도활동을 계속하였고, 학교에 레지오활동을 건의해 보았지만, 신학생이 ‘어느 특정단체에서만 활동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해서 신학교내에서 레지오를 조직하거나 활동을 하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신학교생활 중에 어려울 때마다 성모님께 대한 신심이 제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성모님이 늘 제 곁에 계심을 느끼기에 마음이 편하고, 또 성모님을 통해 주님께 바라는 것은 다 들어주셨기에 성모님을 무척 사랑합니다. 사제가 된 현재는 순교자들의 모후이신 성모님의 도우심으로 다산 정약용이 십자가 신앙으로 설계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자, 정조 사후 2000여명 이상의 순교자들이 피를 흘린 수원화성(華城:아름다운 성이란 뜻. 둘레 5,743미터) 성지개발을 기쁘게 해 나가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이 세상의 빛을 처음 보는 순간은 바로 어머니 태중에서 밖으로 나오는 날입니다. 어머니의 태중에서 생겨나 어머니의 사랑을 먹고 자라다가 밝은 세상 밖으로 나오는 것이지요. 한 생명이 태어나기 위해서는 아버지도 있어야 하지만, 어머니의 모태가 있어야만 태어날 수 있도록 하느님은 섭리하셨습니다. 제가 늦은 나이에 성소를 받아 성모님의 사랑하는 아들 사제로 태어난 것도 성모님의 사랑 안에서라고 생각합니다. 성모님은 모든 영광을 주님께로 돌리신 분이시고 주님께 연약한 우리 인간을 연결해 주시는 대변자요, 전구자이시며, 간청자요, 변호자이십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
저는 매일 이렇게 기도합니다. “이 몸은 주님의 종 사제입니다. 제가 바라는 대로가 아니라 주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수원성지 개발을 하면서도 항상 성모님께서 가르쳐주신 대로 마음을 비우고 기도하다보니 인간적인 집착이나 아집에서 좀 더 자유로워지고, 때로 제가 바라는 대로 되지 않고 엉뚱한 방향으로 전개되더라도 평정심을 잃지 않게 됩니다.
하느님께 대한 조건없는 사랑, 전폭적인 신뢰, 끝없는 겸손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일들을 감사와 기쁨으로 받아들이셨던 성모님이 아니십니까! 우리는 성모님으로부터 이것저것 재지 않고 순수한 믿음으로 즉시 순명할 수 있는 결단력과 순발력을 배워 나가야 하겠습니다. 은총의 바오로 해에 성모님과 같이 겸손하고, 바오로(작다는 뜻) 사도처럼 작은 모습으로 주님을 생각하는 마음에 온 마음이 설레고 행복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언제 어디서나 성모님처럼 주님 안에서 마음의 평화를 얻고 주님 앞에 작아져야 하겠습니다. 성모님께 대한 굳은 신심을 꾸준히 키워나가면, 결과에 집착하지 않고 과정에 충실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용기를 내려주실 것입니다.
수원성지 전담 겸, 팔달지구Co. 지도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