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식이를 만났습니다
제 죽마고우입니다
조그만 시골 마을에서 몆 안되는 동갑나기로서
어릴적 손꼽놀이 할때도 이 녀석은 늘 내 곁에 있었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어색하고 약간은 설레는 마음으로 면 소재지 다방을
맨 처음 들어설 때도 제 곁에 동식이가 있었습니다
마을에서 4키로 정도 떨어진 면 소재지에는 다방이 두개 있었습니다
이 면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던 저는 이 다방에 아주 호기심이 많았습니다
면의 건달들이 죽치고 앉아있고
야하게 차려입은 레지들이 배달차 오토바이를 타고 굉음을 내면서 달릴 때
상당부분 노출되는 시원스런 다리가 시골 풍경에 이질적이면서도
묘한 분위기를 만들어내서 사춘기 시골 소년들의 눈길을 잡았던 다방이었습니다
저희 고향에는 다방이 두개였습니다
젊은 사람들이 출입하는 다방과 늙은 노인분들이 출입하는 다방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부득불 젊은 사람이 나이든 분들이 출입하는 다방에 들어가게 되면
절대로 다방 레지에게 장난을 걸지 않은 것이 불문율이었습니다
저도 약속이 그 다방으로 잡혀서 부득히 들어서면
평소에 점잖고, 고상하고, 어렵게만 여겨지던 마을 어른분들이
다방레지하고 앉아서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게 되면
영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제가 얼굴이 뜨겁고, 몹시 무안하였습니다
그래도 고등학교 졸업하고 친구들과 술김에
용기를 내어 맨 처음 다방에 들어서서
커피 시켜놓고 담배한대 피워무니 드뎌 어른이 된 것 같고
기분이 그런데로 쏠쏠하였던 기억이 나는군요
이번 설날 고향행에서
그동안 몇년동안 만나지 못했던 동식이를 만났습니다
얼마나 반갑고 재미있던지 마을에서 그 흥을 다하지 못하고
결국 읍내까지 콜택시를 불러 술한잔 하러 나갔습니다
동식이는 순천까지 가서 거하게 한잔 하자는 것을
우리 고향의 경제부흥과 유흥문화 발전을 위해 읍내에서 마시자는
재운이의 논리정연과 고향사랑에 힘이 실려 읍내에서 한잔하였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선술집에서 불고기나 두부시켜 놓고 막걸리 대포나 들이켰으면
좋겠는데 다들 세련되어지고 고상해져서 그런지 고향에서 유일한 맥주집으로 가서
한잔 했습니다
어릴때라 이용은 못해봤지만
시골 허름한 술집마다 간판에 "왕대포"라고 하는 글이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김일성이 남침을 결행하려다 포기한 것이
첫번째는 숫자파악이 잘 안되는 방위들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그 다음으로 무수히 도처에 널려있는 이 왕대포 때문이었다는 학설이 파다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방위들의 도시락 때문에 남침이 좌절되었다고 하는 학설에
무게를 실어주고 있습니다만
술집으로 노래방으로 돌다가 집에 돌아갈 시간이 되었는데
택시를 타지 말고 마을까지 걸어가 보기로 하였습니다
날씨가 몹시 추운 밤에 4키로가 다되는 길을 걷기로 한 것은
모처럼 마을 옛친구들을 만나니 흥도 나고
초등학교때부터 고등학교때까지 일요일과 방학만 빼고는 매일 걸었던 길이니
추억에 젖어보고 싶기도 하였습니다
장날이면 이 길이 사람으로 하얗게 변한 길입니다
몹시 추운날이면 국민학교 저학년들은 징징 짜면서 걸었던 길이고
더운 여름이면 왜 그렇게 멀기만 한 길이던지....
마을은 세개나 지나치고 다리를 세개가 건넙니다
하고많은 추억을 간직한 길입니다
국민학교 2학년때 다리가 최종 완성이 되어 어른들은 모다 기뻐하시고
잔치날 같았는데
학생들은 입이 세발이나 나올만큼 불만이 팽배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여름에 큰 비가 내려 홍수가 지면
이 마을은 학교를 갈 수가 없어 아주 합법적으로다가 결석이 가능하여
붉은 홍수물 구경하면서 하루를 뽀땃하게 보낼수가 있었는데
이제 그 큰 기쁨이 사라졌다는 것이죠
지금은 아스팔트 포장이 잘 되어 있고 조계산 송광사 가는 길이 우리마을 앞으로
뚫리면서 직선으로 도로가 나서 거리도 아주 단축이 되어
돌아오는 길이 금방이었습니다
돌아오는 고향 시골길이 이제는 옛날같은 정취와 낭만은 사라졌다고는하나
정다운 고향친구들과 함께 박장대소하면서 옛일을 떠올리면서 걷자니
기분과 정다움이 극에 달했습니다
이 길에 얽힌 동식이와의 악연이 있어서 소개코자 합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저는 재수까지 하여
대단치 않은 대학에 들어가서 다녔는데 공부에는 별로 취미가 없었던 동식이는
서울로 취직을 하여 갔었습니다
그런데 두어해 서울에서 돈벌던 동식이가 소문도 없이 목포해양전문대에 입학을
하였습니다
대학시절 동식이와 만나는 날은 항상 이 고향 시골길었습니다
자취생활을 하려면 토요일 집에가서 밑반찬과 기타 찬거리와 쌀 자루를 가지고
와야 하는 형편이기에 거의 매주 토요일이면 큰 용건이 없는 한 집에 갔었죠
저는 가난한 학생답게 허름한 청바지에 운동화에 모양없는 티셔츠 바람으로
다녔는데
동식이는 완전히 눈부신 변모를 하였습니다
까만 구두는 빛났고, 새햐얀 제복은 파리도 낙상할만큼 잘 다려져 있었습니다
게다가 그 높고 품위있는 모자라니!!
그 높은 모자는 최소한 경찰은 되어야 쓸수가 있고 군대서도 장성급은 되어야
쓰는 모자가 분명한데
"동식이 저 놈이 늦 머리가 트인게야"
"원래 머리가 좋은 놈이었는데 농사일 돕느라고 공부할 틈이 없었던게지"
"서울서 돈벌어 학비로 제놈이 충당한다고 하던데"
"하옇튼 저 놈 출세했어"
"동식이 부모는 이제 고생 끝났어"
"봉놋방 저 놈도 어릴때는 좀 하는 것 같더니 영...."
가급적 토요일이면 동식이를 마주치지 않아야 고향 찾아가는 길이 더 즐거울 것
같은데
왜 그렇게 토요일 집에 가는 날에는 꼭 동식이를 만나는 것인지
이 녀석은 일부러 나와 시간을 맞추는거야 뭐야
이번에 만나서 함께 길을 걸으면서 이 애기를 했더니
동식이는 전혀 느끼지 못하였다고 발뺌이었습니다
첫댓글그렇게 가증스런 동식이를 비롯한 정다운 고향친구들과 옛추억을 회상하며 마을을 향해 걷는 봉놋방의 발걸음은 가볍기 그지없었고 즐거움에 콧노래를 흥얼 거리기도 하였습니다. 다리를 넘고 얕으막한 산자락을 부여잡고 왼편으로 가볍게 돌아 넘자 드디어 정겨운 마을의 정경이 봉놋방의 눈앞에 펼쳐 집니다. 500 년된
고향... 고향친구... 정말 좋지. 그런데 나는 도회지서 살다보니 고향이 없다. 어릴 대 내가 뛰어놀던 곳은 다 헐려 이제는 길이 되고, 아파트가 들어서고... 그리고 사람들도 다 이사를 가고... 어쩌다 그 부근을 가봐도 생소하기만 하다. 고향이 없는 사람들...... 생각해보면 도회지의 삶이란 게 참 쓸쓸하다!
첫댓글 그렇게 가증스런 동식이를 비롯한 정다운 고향친구들과 옛추억을 회상하며 마을을 향해 걷는 봉놋방의 발걸음은 가볍기 그지없었고 즐거움에 콧노래를 흥얼 거리기도 하였습니다. 다리를 넘고 얕으막한 산자락을 부여잡고 왼편으로 가볍게 돌아 넘자 드디어 정겨운 마을의 정경이 봉놋방의 눈앞에 펼쳐 집니다. 500 년된
정자나무며 그앞의 순이네 그옆의 동식이네 그리고 철수네 가게방 등등 달빛에 살포시 감싸여 잠이든 평화로운 나의 마을이......정자나무 아래서 정다운 친구들과 뿔뿔히 헤어지고 봉놋방은 철수네 가겟방을 돌아 본가를 향할때쯤 골목길 끝자락에 빨래 방맹이를 들고 서있는 호랭이 마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날 아
침 해가 뜰때까지 우리마을엔 이종범 타격 연습소리가 끊이질 않았고 봉놋방의 고향소식은 전북대학 병원 병동까지 이어졌음을 슬프지만 고백 드립니다. 광사부 회원 여러분 우짜둔둥 차안에 스타킹같은 이상한 여성물건 잘 간수해서 저같이 매맞는 남편이 되시지 않길 비옵니다.
나에게도 이런 비슷한 기억이 있었는데 순창 쌍치에서... 30여년 전 면소재지 다방에서 홍차에 위스키를 곁들이며 밤새웠던 친구. 지금은 어디에서 무얼하고 있는지 아련한 회상에 젖게하는 글 잘 읽었습니다.
고향... 고향친구... 정말 좋지. 그런데 나는 도회지서 살다보니 고향이 없다. 어릴 대 내가 뛰어놀던 곳은 다 헐려 이제는 길이 되고, 아파트가 들어서고... 그리고 사람들도 다 이사를 가고... 어쩌다 그 부근을 가봐도 생소하기만 하다. 고향이 없는 사람들...... 생각해보면 도회지의 삶이란 게 참 쓸쓸하다!
그리운 시절을 보게 해 주는 봉놋방님 감사합니다.
부럽당~~ 동식님을 가입 권유해서 ..그날밤 얘기 듣고 싶다..어떤생각 하며 걸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