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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신안군 흑산면에 있는 섬. 섬 전체가 검게 보여서 흑산도라는 이름이 붙었다.
목포시에서 남서쪽으로 약 97.2km 떨어져 있다.
다물도·대둔도·영산도·홍도 등과 함께 흑산군도를 이룬다.
오랫동안 지금의 가거도를 '소흑산도', 흑산도를 '대흑산도'라고 하여 가거도를 흑산도의 일부로 보았으나
2008년 소흑산도를 '가거도'라는 원래의 이름으로 환원하면서 '흑산도'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이곳에 사람이 처음으로 정착한 것은 828년(신라 흥덕왕 2)이며,
당시 완도에는 장보고가 청해진을 두고 중국과 교역하고 있었다.
본래는 월산군에 속했으나, 1678년(숙종 4)에 흑산진(黑山鎭)을 두어 나주목에 속했다.
그뒤 1914년에는 무안군에, 1969년에는 다시 신안군에 편입되어 지금에 이른다.
최고봉인 문암산(400m)을 비롯하여 깃대봉(378m)·선유봉(300m)·상라봉(227m) 등 100∼300m 내외의 산이 곳곳에 솟아 있다.
해안은 소규모의 만과 갑이 이어져 드나듦이 비교적 심하다. 특히 북동쪽에는 비교적 넓은 만이 있다.
기후는 대체로 온난하나, 비가 적다. 농작물로는 고구마·보리·콩·마늘·참깨 등이 생산된다.
연안일대에서는 조기와 병어가 잡히고, 김·미역 등이 양식된다. 홍어가 특산품으로 알려져 있다.
취락은 대체로 만입부에 산재하며, 특히 북동쪽의 진리·신리 일대에 집중 분포한다.
유물·유적으로 진리 2구에 장보고가 왜구를 방어하기 위해 쌓은 길이 2,300m, 높이 0.5~2m 되는 반월성이 있다.
다도해해상국립공원의 일부로 지정되어 관광지로도 유명하다. 목포-흑산도-홍도 간에 정기여객선이 운항된다.
흑산도 지역주민과 관광객의 교통불편 해소를 위한 총 연장 1,200m 규모의 흑산 공항 건설 사업이 2014년부터 추진 중이다.
흑산도 자체의 면적은 21.70㎢, 해안선 길이 41.8km이다.
흑산관광협동조합을 이끄는 장순열 가이드님은
“초기 입도는 군인, 상인, 당나라 유학생, 승려 등 해상왕 장보고 장군의 선단에 의해 이뤄졌고,
그때 쌓은 산꼭대기 반달모양의 상라산성과 제사유적, 관사터, 무심사지가 첫 정착지 진리 읍동마을을 감싸고 있다”면서
“정약전 선생이 흑산도 사리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주민과 잘 화합하면서 지혜롭고 인문학이 빛나는 마을이 됐다”고 소개했다.
대(大)장도는 세계적인 연구대상이다.
섬에서 발견된 최초의 고산습지(해발235m)로 국내 세 번째 람사르습지로 지정돼 있다.
이탄층(泥炭層: 지하에서 흘러나오는 물에 의해 죽은 식물이 썩지 않고 쌓인 곳)이 발달돼 있고,
멸종위기종인 매와 수달, 천연기념물 새매와 흑비둘기, 제주도룡뇽, 플라나리아 등 희귀 동식물이 서식하고 있다.
흑산도의 특산물인 홍어와 함께 흑산도를 상징하는 노래가
1969년에 제작한 권혁진 감독의 영화 <흑산도 아가씨>의 삽입곡으로 불렸던 이미자의 "흑산도 아가씨"이다.
영화 <흑산도 아가씨>는 뭍에 유학갔던 효성이 지극한 흑산도 처녀 소영이 여름방학을 맞이하여
친구 유미와 함께 고향 흑산도에 내려갔다가 가난에 찌들어 섬 생계의 생명줄이라 할수있는 발동선을 사지 못하고
시름에 잠겨있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서 상경해 호스티스로 돈을 벌어서
아버지에게 발동선을 마련해 줄 요량으로 일하던 중 친구인 유미에게 발각된다.
유미는 친구의 지고지순한 효성에 감동을 받아서 자기가 대신 친구 소영의 아버지에게 발동선을 마련해 주고
어둠의 세계로부터 친구를 구한다는 지란지교의 본을 보여주는 지극히 휴먼 드라마이다.
이 노래의 작사자 정두수씨는 흑산도가 조기파시로 최전성기를 구가하뎐 1965년 여름,
모신문의 석간에 "흑산도 어린이들 소원이 이루워 지다"라는 제목의 기사가 읽었다.
흑산도의 어린이들이 꿈에도 그리던 서울에 오고자 했는데 심한 풍랑에 배를 못타는 것을 안타까워한 육영수 여사가
해군함정을 내줘서 어린 학생들이 서울에 오는 소원을 풀어줬다는 기사에서 착상하여
아득한 뭍을 그리워하는 흑산도 어린이들의 마음을 표현한 노래 가사를 만들었다 한다.
하지만 1968년 절해고도 흑산도에서 당시 인기 여배우 윤정희 등 여러 출연진의 힘을 빌려서
흑산도 처녀의 애환을 모티브로한 영화 <흑산도 아가씨>가 로케를 무사히 마치고 영화상영을 눈앞에 두고 있었으나
최종적으로 정작 영화의 이미지에 맞는 삽입곡이 준비되지 않아서 부랴부랴 가요계의 거장 박춘석씨에게 이 일을 의뢰한다.
정두수씨는 당초 생각해둔 섬아이들의 심정을 이 영화의 주인공인 소영의 마음으로 바꿔 가사를 고쳐쓰고
나머지 이 노래를 불러줄 가수 선정에 절치부심해야하는 마지막 관문에 봉착했다.
이런 우여곡절을 거치며 최종적으로 선정된 가수가 당시 부산 지방 콘서트로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던 이미자였다.
이미자는 오랜 콘서트로 몸이 녹초가 된 상태라 서울에 귀가하면 푹 쉬고 싶은 마음이 꿀떡같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이런 이미자의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고 <흑산도 아가씨>영화 제작팀은 서울역에 도착한 이미자를
반납치하다시피하여 사정을 설명하고 바로 스튜디오로 데려가서
몇차례 피아노 반주와 함께 녹음을 마치게서 탄생한 것이 명곡 <흑산도 아가씨>이다.
노래 후반부에서는 이런 급박한 상황과 이미자씨의 몸상태를 반증하듯 목소리가 다소 불안정하다.
이 가사의 탄생과 이미지를 놓고서 순수한 흑산도 아가씨와 흑산도 갈매기(흑산도에 팔려온 윤락여성의 총칭)을 놓고
솔직하게 답을 준 것은 이 영화의 주제곡을 작사했던 정두수님의 인터뷰에서였다.
정두수씨는 분명 본래는 뭍을 모성처럼 그리워하는 섬아이들의 절절한 마음과
백사 전광용이 쓴 소설 <흑산도>를 모티브로 해서 가사의 그림을 그렸으나
이런 의도와는 달리 영화의 스토리에 맞추다 보니 다소 엇박자가 되어서
본래 흑산도 아가씨 보다는 흑산도 갈매기의 이미지를 다룬 노래로 와전된 것이라 밝힌 바 있다.
아무튼 흑산도를 주제로한 여러가지 예술작품이 다수 나온 가운데서 가장 유명한 것이
영화 <흑산도 아가씨>에 주객전도격으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이미자의 노래로 잘 알려진 <흑산도 아가씨>라 할수 있겠다.
장순열님께서는
흑산도에 대해 엄청난 자긍심과 함께
가이드를 해주시는 열정과 내공은 감동적일만큼 대단하신 분이었다!
비리마을을 지나면 허공에 떠 있는 형상의 그 유명한 400m의 하늘도로가 시작된다.
해안 절벽을 따라 교각이 없는 다리를 길게 놓은 형태의 이 길은
마치 하늘 위에 떠 있는 듯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흑산도 최고봉인 문암산 깃대봉 해발 377m에서 급하게 흘러내린,
문자 그대로 천인단애(千仞斷崖)인 이곳은 길을 내기가 도무지 어려운 지형이다.
그래서 절벽에 ‘H’빔을 가로로 박은 뒤 그 위에 다리를 축조한,
이른바 켄틸레버(cantilever) 공법으로 시공했다.
바닷 쪽에 있는 도로는 받침대도 없이 공중에 떠있는 상태라 한다.
다리 안쪽 벽면에는 각 마을을 대표하는 벽화가 아름답게 그려져 있다.
바다를 끼고 섬 전체에 둘러 있는 25.4km의 흑산도 일주도로는
1984년 첫 삽을 뜬 이후 27년 만인 2010년 3월에야 비로소 개통되었다.
해안일주도로 준공기념비가 날개를 단 천사의 모습으로 표현된 조형물은
신안군의 이미지인 천사의 섬을 그대로 표현한 작품이다.
동서양이 함께하는 의미의 천사를 표현했다고 한다.
이곳에서 16년간 유배생활을 한 손암 정약전은 동생(다산)의 둘째 아들(학유) 보다 여섯 살이나 어린
청년 장창대(1792~?) 등과 고기잡이와 해양자원 탐방을 마치면,
초기엔 사촌서당, 말기엔 우이도 서당에서 섬마을 아이들을 가르쳤다.
수산물 연구는 당시로선 양반이 할 일이 아니었지만, 실천하는 실학자 다웠다.
장창대는 배 위에선 손암의 친구였지만, 서당에선 깎듯한 제자였다.
절해고도(絶海孤島)에 유배 온 낯선 이방인과 섬사람들의 계급장 뗀
만남, 갈등, 교류 속에서 인정은 더욱 두툼해졌을 것이다.
영화 ‘자산어보’에서 장창대 역을 맡은 변요한이 대본을 읽은 뒤 촬영 답사를 왔다가
감동의 눈물을 흘린 심정이 어느정도 이해가 된다.
칠형제바위는 풍랑으로부터 마을을 지키는 자연 방파제로 태풍이 불어 어머니가 물질을 못하자
일곱 형제가 바다로 뛰어들어 7개의 작은 섬으로 변했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12굽이길과 함께 흑산도 제1·2경을 다툴 정도로 빼어난 경관으로 사진 맛집이다.
사리마을에서 시계방향으로 진행하다 나오는 소사리를 지나 자리한 천촌리에 면암 유적지가 있다.
면암 최익현은 1876년 강화도 조약에 반대하는 상소로 인해 흑산도로 유배를 와 3년 조금 넘게 살았다.
처음에는 진리에 살며 일신당이라는 서당을 세워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천촌 마을로 들어와 정착했다.
천촌 마을 들어가는 길목에 있는 바위를 최익현은 성리학의 비조 주자의 싯구에서 따와 지장암(指掌巖)이라
이름 지은 후 이곳에 '箕封江山 洪武日月(기봉강산 홍무일월)'이란 글자를 새겨 놓았다.
해석하면, '중국 기자가 조선에 온 것이 문명의 시작이니,
이 강산에 여전히 명 나라의 연호가 붙은 해와 달이 뜬다'
그의 문집인 면암집에 의하면, 섬 사람들이 유교 경전 공부에 힘 쓰는 것을 보고 감탄하여 각자했다고 한다.
각자된 지장암 앞에 세워진 비석은 면암이 유배 시절에 살았던 것을 기념하는 유허비로
1924년 그의 제자인 오준선, 임동선 등이 세웠다고 한다.
일명 '거시기 바위'로 불리는 구문여(바위가 잠긴 섬이란 뜻을 가진 이름).
여자 거시기와 닮았다고 하는데..
거센 파도가 칠 때 구멍사이로 물줄기가 뿜어져 나오면 장관이란다!
마을 주변 산림이 울창하고 사철 푸르다 하여 청촌이라고 부른다.
[22일]
영산도는 고려시대 이전까지만 해도 어미섬인 흑산도보다도 더 많은 사람이 살았다.
섬 주변에 해산물이 많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잦은 왜구의 침략으로부터 주민들을 지키기 위해
공도(空島)정책(주민들을 육지로 이주시켜 섬 전체를 텅 비게 만드는 정책)을 실시하게 되었다.
흑산도 사람들은 배를 타고 목포를 거쳐 영산강을 거슬러 나주에 많이 정착했다.
나주의 영산포는 영산도 사람들이 피난을 가서 배를 대던 포구였고,
흑산도를 비롯한 섬사람들이 집단으로 거주하던 곳이다.
영산화가 많이 핀다고 하여 ‘영산도(永山島)’라 불렀다는 설과,
섬의 산세가 신령스러운 기운이 깃든 곳이라 하여 ‘영산도(靈山島)’라 했다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영산도는 ‘영산8경’과 함께 섬 전체가 갯바위 낚시터로도 유명하다.
개발되지 않은 천혜의 자연환경을 유지하고 있어 다도해해상국립공원(흑산영산도지구),
유네스코생물권보존지역으로 지정되었으며, 2013년에는 환경부 생태우수마을로 선정되었다.
읍동마을 우측의 방파제 끝에는 작은 섬 하나가 있다.
다리로 연결된 이 섬의 이름은 옥도다.
옥도의 옥(獄)은 감옥을 의미한다.
옥도에는 작은 굴이 있는데 그곳에 해적이나 죄인들을 가둬 놓았다고 한다.
배낭기미는 흑산도를 대표하는 해변이다.
전망이 수려한 데다 송림 아래에는 데크와 나무 테이블까지 놓여 있어 캠핑 구미가 당기는 곳이다.
흑산도는 다도해해상국립공원에 속해 있으며
이곳 해변에서 야영과 취사가 허락되는 시기는 6월부터 9월까지다.
흑산성당은 일찍이 천주교 신자 조수덕이 고향 흑산도로 귀향하던 해인
1951년 8월 죽항리에 공소를 만든 것을 시작으로 이곳의 천주교는 여느 섬보다 교세를 확장하였다.
목포 산정동 본당에서 파견된 브라질 출신 요한 신부가 1958년 성당을 신축하여 터를 잡은 이후,
1960년에 흑산성모중학교를 설립하여 1973년 공립 흑산중학교가 설립되기 전까지
이 지역 중등교육을 담당하였고, 1969년에 준공한 대건조선소에서는 선박수리와 건조는 물론
이곳에서 나오는 전력으로 예리, 진리 등에 전기를 공급하였다 한다.
1969년에는 흑산신용협동조합을 설립하여 금융지원을 하는 등 천주교가 섬에 이바지한 바가 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