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셀 나무와 영원하신 하나님
창세기 21:32~34, 그들이 브엘세바에서 언약을 세우매 아비멜렉과 그 군대 장관 비골은 떠나 블레셋 사람의 땅으로 돌아갔고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원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으며 그가 블레셋 사람의 땅에서 여러 날을 지냈더라
찬송가 301장(지금까지 지내온 것)
오늘 본문 말씀은 아브라함이 브엘세바라는 곳에 거류할 때에 그랄 왕인 아비멜렉과 군대장관 비골의 방문을 받고 평화 언약을 체결하고 돌려 보낸 후에 에셀나무를 심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셀나무는 매우 큰 나무로서 그 밑에는 자연스럽게 그늘이 드리워 시원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 아래에서 쉴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에셀나무를 심었다는 것은 마음의 평안함을 얻었다는 증거요 장막을 가지고 이동 생활을 하면서도 나름대로 브엘세바의 에셀나무를 심은 지역에서 안정적인 삶을 살아가기 시작했다는 증거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제 자기 아내 사라가 이삭을 낳아 상속자가 생겼으며, 하나님께서도 그의 아들 이삭과 더불어 언약을 맺을 것이라고 약속하신 바 있었기에 특별히 마음에 안정을 얻게 되었습니다. 하갈과 이스마엘과 아내 사라와의 분란으로 집을 떠나보낸 여종 하갈도 이스마엘과 더불어 바란광야에 정착해서 살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을 것이니 그로 인하여 염려하는 마음도 사라졌을 것입니다. 또한 거주하는 지역의 권력자 그랄 왕이 직접 군대장관까지 데리고 와서 자기에게 평화협정을 맺자고 제안하고 브엘세바에서 팠던 우물까지 확실하게 맹세로써 보장해줌으로써 다툼의 여지도 없어지고 양들이 먹을 수 있는 물도 확보하게 되었으니 걱정이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이제 많은 것들이 평안하고 안정을 얻게 되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에셀나무를 심어 놓고 그 그늘에서 평안함과 여유를 가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듯 모든 것이 평안하고 안정되었을 때에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잊지 않았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을 보면 아브라함이 에셀나무를 심은 브엘세바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곧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창세기 4장 26절에 보면, 아담의 아들 셋이 낳은 에노스 시대에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예배를 드린 것을 의미합니다. 아브라함은 모든 것이 평안하게 되었을 때에도 그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은혜와 보호와 축복으로 이루어진 것을 기억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영광을 돌린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 아브라함의 어떠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을까요? 그가 그 때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을 때의 하나님의 호칭을 통하여 추측할 수 있습니다. 33절에 이르기를 “거기서 영원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으며”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개역성경에서는 “거기서 영생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으며”라고 번역했습니다. 원문을 보면,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영원의 하나님이라고 불렀으며”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를 ‘엘 올람’, ‘영생의 하나님’, ‘영원의 하나님’이라고 불렀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아브라함이 특별히 자기를 불러 지금까지 함께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영원하신 하나님’이라고 이름을 부르며 경배한 까닭은 어디 있을까요? 그것은 분명 아브라함이 그 시점에서 하나님의 영원성을 깊이 묵상했고 그 하나님의 영원성이 그로 하여금 하나님을 더 깊이 감사하며 의지하며 사랑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아브라함은 이미 나이가 들어서 103세나 105세나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의 아들 이삭은 이제 젖을 떼고 어린아이에 불과합니다. 자기 아내 사라도 이제 나이가 95세에 이르게 되었을 것입니다. 자기와 아내 사라가 얼마를 더 살지 모르지만, 이삭에게 영원히 곁에 있어줄 수 없을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연로한 아브라함 자신과 달리 하나님은 영원히 살아 계시기에, 아브라함 자신은 세상을 떠날지라도 하나님은 이삭과 그 후손들에게 영원히 돕는 자가 되어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영원하신 것이 너무나 감사하였기에 그는 하나님을 영원하신 하나님으로 부르며 송축하였던 것입니다.
또한 최근 그랄 왕 아비멜렉과 언약을 맺고 맹세하여 브엘세바의 우물도 확보를 하였습니다. 하지만 사람과의 언약이란 어디까지나 계약 당사자가 살아 있을 때에만 신뢰가 이어지고 당사자가 죽으면 깨어지기 쉬운 경향이 있습니다. 그 예로 다윗이 암몬의 왕 나하스 간에는 평화롭게 잘 지냈는데, 나하스가 죽고 그 아들 하눈이 들어서자 신하들의 부추김을 받고서 다윗의 조문 사절단에게 크게 모욕을 주어 보냄으로 장례식 끝난 즉시 두 나라간에 큰 전쟁이 일어나고 말았던 예가 있습니다. 솔로몬 당시에는 애굽의 공주를 아내로 맞아 이스라엘과 애굽간에 평화가 있었으나 솔로몬이 죽고 그 아들 르호보암이 왕위에 오르자 곧장 애굽 군대가 쳐들어와서 솔로몬이 만들었던 금방패들을 다 빼앗아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아비멜렉 왕이 와서 맹세로 맺은 평화조약도 신뢰할 수 없었습니다. 자기나 아비멜렉 왕은 영원하지 못하고 결국 죽게 될 터인데, 그러면 또 다시 아브라함 자신과 그 아들 이삭에게는 전쟁에 휘말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믿을 자가 오직 영원하신 하나님뿐이며 하나님이 지켜주셔야 자기와 자기 후손들이 평안과 안정을 계속 누릴 수 있음을 기억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를 영원하신 하나님이라고 부르며 경배하였던 것입니다.
한 가지 더 생각해본다면, 아브라함은 인간의 유한성을 깊이 인식하며 영원하신 하나님을 앙망하며 그 곁에 영원히 함께 있고 싶어하는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하나님을 두고 ‘영원하신 하나님’이라고 불렀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아브라함은 모든 것이 평화롭고 아들 이삭이 다섯 살이나 열 살이나 되어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지만 그러나 인생은 결국 늙고 병들고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인 것입니다.
당시 아브라함이 브엘세바에 심었던 에셀나무는 수백년을 거뜬히 사는 수명이 긴 상록수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은 나무의 수명보다 못한 인생의 유한함을 절실히 느끼면서 영원히 사시는 하나님 곁에 영원히 사는 삶을 꿈꾸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그는 팔레스타인 땅에서 살아가는 지상의 삶을 넘어서서 하나님과 영원히 사는 하늘의 본향을 바라보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아브라함은 영원하신 하나님과 함께 사는 평안하고 행복하고 영원한 자신의 미래를 꿈꾸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를 기록한 사도는 믿음의 장 11장에서 아브라함에 대하여 이르기를,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브리서 11:9,10, 16)
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본질적으로 이 땅의 삶은 다 나그네의 삶이요 늘 불안정하게 떠돌며 싸움과 전쟁이 그치지 않으며 늙고 병들고 이별과 슬픔이 있는 삶의 연속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잠시 브엘세바에 머물 그 때에 모든 것이 평안하고 안정을 얻었지만 그러한 지상의 평화는 잠시 잠깐일 뿐임을 알기에, 그는 영원하신 하나님을 더 깊이 묵상하며 그 곁에 영원히 머무는 삶을 꿈꾸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모든 것이 평안할 때에도 우리도 언제나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던 아브라함과 같이 예배자로 살아갑시다. 또한 하나님이 영원하시며 불변하시며 우리와 우리 자손들에게 신실하심을 믿고 사람과 환경보다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의지하며 살아갑시다. 그리고 세상 모든 것이 다 끝이 있고 우리의 지상 순례의 삶도 때가 되면 마치게 됨을 기억하고, 영원하신 하나님과 함께 사는 하늘 본향을 바라봅시다. 이것이 믿음의 아버지 아브라함이 가졌던 신앙이요 우리 역시 가져야 할 신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