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십이입처설 - 존재란 어떻게 인식되느냐가 중요하다.
지난 시간에는부처님의 세계관이 지닌 의의를 살펴보았습니다. 부처님은 이 세계가 우리의 외부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서 연기하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이야기를 잘못 이해하면, 부처님은 세상의 존재를 부정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본문의 [세계가 우리 마음에서 연기한다]는 것은 [세계란 12처 18계 오온을 통해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이 말을 잘 이해하는 것은 무척 중요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세계의 존재를 부정한 것이 아닙니다. 단지 우리와 세계의 관계를 바르게 인식하도록 하고 있을 뿐입니다. 외도들의 전변설이나 전취설은 객관적인 외부의 존재를 일차적이고 근원적인 것으로 보는 사상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이러한 객관적인 존재들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자연대상은 우리와 무관하게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연기설은 우리의 마음을 일차적이고 근원적인 것으로 보는 사상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마음을 일차적이고 근원적인 것으로 보는 연기설의 입장에서는 자연세계를 존재하는 것으로 보지 않고 인식되는 것으로 봅니다. 뿐만 아니라 자연대상과 함께 그 속에 존재하고 있는 자아도 존재하는 것으로 보지 않고, 인식되는 것으로 봅니다.
십이입처의 외입처와 내입처는 바로 이러한 연기설의 입장에서 본 세계와 자아의 모습인 것입니다. 따라서 연기설의 입장에서는 세계와 자아의 본질을 외부에 존재하는 자연대상에서 구하지 않고, 우리의 의식속에서 찾습니다.
그래서 중아함 [분별관법경](分別灌法經)과 같은 곳에서는 “존재의 실상을 찾기 위해서는 마음을 밖으로 내보내 산란하게 하지 말고 안에 머물도록 하라”고 당부하십니다. 불교의 선정은 이렇게 존재의 실상을 찾기 위해 행하는 것입니다.
연기설의 입장에서 보면 세계는 나에 의해 인식되고 있는 현상일 뿐입니다. 나를 원천적으로 배제하는, 즉 나에게 원천적으로 인식이 될 수 없는 대상의 존재는 무의미한 것입니다.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고 생각되지도 않는 것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잡아함 319경]에서 일체는 십이입처라고 하시면서 그 밖에 일체를 세우는 것은 경계가 아니기 때문에 무의미하다고 말씀하신 것은 이러한 의미를 표현한 것입니다. 외도들이 논쟁하고 있던 문제에 대하여 부처님이 침묵하신 것은 외도들이 외부의 세계에 우리의 인식과는 상관없이 존재하는 것이 있다는 신념에서 그같은 문제로 다투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거론하고 있는 세계나 영혼은 가상적이며 허구적인 존재라는 것을 비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부처님의 중도는 이같은 허구적이고 모순된 입장을 떠나 각자 자신의 마음으로 시선을 돌려서 존재의 실상을 찾는 것입니다. 이같은 중도의 입장에서 보면 ‘대상을 인식하는 우리의 마음’을 배제한 채 거론되고 있는 ‘존재에 대한 모든 판단’은 허망한 말장난에 지나지 않습니다.
부처님이 그런 존재의 유무를 논쟁하는 것에 대하여 유무중도를 설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불교의 연기설은 존재론적으로 말하면 관념론도 아니고 실재론도 아니며, 유심론도 아니고 유물론도 아니며, 일원론도 아니고 다원론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관념론이라 실재론, 유심론이나 유물론, 일원론이나 다원론은 모두가 우리의 인식과는 상관없으 어떤 사물이 실체로서 존재하고 있다는 가정 아래서 나온 것들입니다. 흔히들 불교를 관념론이나 유심론으로 생각하는데, 불교는 원천적으로 모든 존재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어떤 사물이 실체로서 존재하고 있다는 가정 아래서 나온 이들 사상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부처님이 이렇게 모든 존재론적 입장을 배척한다고 해서 존재의 문제를 포기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부처님은 단지 존재의 문제를 새로운 차원으로 전환시키고 있을 뿐입니다.
[잡아함 37경]을 보면 이 같은 부처님의 입장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나는 세상 사람들과 다투지 않는다. 세상 사람들이 나와 다툴 뿐이다. 세간의 지혜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하는 것은 나도 있다고 말한다. 비구들이여, 색, 수, 상, 행, 식은 무상하고, 괴롭고, 변해 가는 것으로 있다고 지혜 있는 사람은 말하며, 나도 역시 그렇게 말한다.
세간의 제혜 있는 사람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나도 역시 없다고 말한다. 색, 수, 상, 행, 식은 항상 존재하며, 변함없이 머무는 것이라고 한다면, 지혜 있는 사람은 그러한 “오온은 없다”고 말하며, 나도 역시 “변하지 않고 항상 존재하는 오온은 없다”고 말한다. ...비구들이여, 세간과 세간법이 있다는 것을 나도 역시 스스로 알고 스스로 깨달아 다른 사람을 위해 연설하고 보여준다. 나의 이러한 입장을 세간의 눈 없는 장님들이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할 뿐 나의 허물이 아니니라. ... 색수상행식은 무상하고, 괴로움이며, 변해 가는 것이다. 이것이 세간이고 세간법이다.
부처님이 세상 사람들과 다투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부처님도 세상의 존재를 부정하지는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이 세계가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불교의 입장을 허무주의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하신 말씀입니다.
부처님이도 있는 것은 있다고 말씀하시고 없는 것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이 있느냐, 무엇이 없느냐? 를 문제 삼습니다. 영혼은 있느냐 없느냐? 영원한 세계는 있느냐 없느냐? 세계를 만든 존재는 있느냐 없느냐? 이런 것을 우리는 문제 삼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무엇이 있느냐?’고 묻는 것은 존재하는 것에 대하여 그 실상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엇’을 문제 삼는 것은 무엇인가가 우리의 외부에 우리와는 상관없이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면 우리가 문제 삼고 있는 ‘무엇’은 우리에게 인식된 것일 뿐입니다.
‘인식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그것을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면 물고기는 물 속에서 숨을 쉬기 때문에 물을 공기로 인식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것을 물로 인식합니다. 우리가 물 속에 들어가면 그곳에 공기가 없어서 숨을 쉴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물고기는 물 밖에 나오면 공기가 없어서 숨을 쉴 수가 없을 것입니다. 물 속에 공기가 없다는 사람의 생각이 옳은 것입니까, 공기가 있어서 숨을 쉰다는 물고기의 생각이 옳은 것입니까? 공기가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는 사람과 물고기의 입장에 따라 그 해답이 서로 대립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무엇이 있느냐’고 물을 때는 그것을 인식하는 사람에 따라 각기 다른 견해가 서로 대립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모든 존재는 우리에게 ‘인식된 것’으로만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우리의 주관적인 인식을 배제하고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알아보려고 해도 그것이 우리에게 알려지기 위해서는 인식되어야 하므로 결국은 인식된 것이 되고 맙니다.
과학에서 아무리 객관적인 자연을 연구한다고 해도 자연은 결국 인간에게 인식된 자연일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존재의 문제를 다룰 때는 항상 인식의 문제와 함께 다루어야 합니다. 신라의 원효(원효)스님은 무덤에서 썩은 물을 마시고 이것을 깨달았습니다. 원효 스님은 의상스님과 당나라에 유학을 가기 위해 길을 가다가 밤이 되어 무덤 속에서 자게되었습니다.
밤중에 심한 갈증을 느끼고 물을 찾다가 손에 바가지가 잡혀서 무심코 그 바가지 속의 물을 마셨습니다. 갈증이 심했기 때문에 물 맛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다음날 깨어나 어젯밤에 마셨던 맛있는 물이 생각나서 다시 마실 요량으로 바가지를 찾으니 바가지는 없고, 그 곳에는 해골바가지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는 구더기가 득실대는 썩은 물이 담겨있었습니다.
지난 밤에 먹었던 물이 저 해골속의 썩은 물이었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역겨워지면서 구역질이 나왔습니다. 그 순간 원효 스님은 깨달았습니다. 어둠 속에서 갈증을 느낄 때는 깨끗한 바가지 속의 맛있는 물이 밝은 낮에 보내 해골바가지 속의 더러운 물이라니! 해골이나 물은 변함이 없는데 나의 마음이 변하니 해골도 물도 변했던 것이구나. 그래서 모든 것은 마음 따라 일어나서 마음 따라 사라진다는 이치를 깨닫고, 내가 구해야 할 부처님법은 나의 마음 속에 있지 당나라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유학할 생각을 바꾸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가 단지 더럽고 깨끗한 것이 마음에 따라 다르게 느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원효 스님이 깨달은 것은 단순히 더럽고 깨끗하다는 감정적인 판단이 우리의 마음에 의해 좌우된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원효 스님은 모든 존재는 우리의 인식에 의해 인식된 것일 뿐이라는 존재의 실상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원효스님이 목이 말라 물을 마실 때는 분명히 깨끗하고 맛있는 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침에 보니 그 물은 없고 더럽고 구역질나는 물이 있었습니다.
부처님은 이렇게 목이 마를 때 있고, 날이 밝았을 때 있는 것을 없다고 하시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지혜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하는 것은 나도 있다고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무덤 속에는 본래부터 더럽고 구역질나는 물이 있었다는 생각에는 반대합니다. 해골 바가지의 물 속에는 구더기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 구더기에게 바가지 속의 물은 결코 더럽거나 구역질나는 물이 아닙니다. 구더기에게는 그 물이 어느 물보다 깨끗하고 향기로운 맛있는 물일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깨끗하다고 인식하고 있는 물 속에서는 구더기가 살지 못합니다. 그 물이 구더기에게는 더럽고 구역질나는 물인지도 모릅니다. 따라서 본래부터 더럽거나 깨끗한 물은 이 세상에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본래부터 깨끗하거나 더러운 물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지혜 있는 사람이 없다고 하는 것은 나도 없다고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부처님은 이렇게 ‘무엇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는 잘못된 것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것을 문제삼어야 합니까? 부처님은 우리에게 인식되고 있는 존재가 어떻게 해서 그렇게 인식되고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원효 스님에게 해골 속의 물은 어떻게 해서 맛있는 물로 인식되었을까요? 그리고 아침에 그 물은 어떻게 해서 구역질나는 물로 인식되었을까요? 그 물은 본래 더럽고 구역질 나는 물인데 목이 마르고 어두워서 맛있는 물로 잘못 인식되었다가 아침에 밝은 빛을 통해 더러운 물이 바르게 인식된 것일까요? 그렇다면 해골 속의 구더기는 왜 그 더럽고 냄새나는 물 속에서 살고 있을까요?
더러운 줄을 모르고 살고 있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통해서 우리의 삶에 도움이 되는 것은 깨끗하고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드리고 이 생각을 가지고 이 생각에 상응하는 것을 깨끗하다고 말합니다. 원효 스님이 목이 마를 때는 그 물을 목마름을 해결해 주었기 때문에 그 물은 원효 스님이 깨끗하고 좋다고 생각하는 것에 상응했습니다.
그래서 그 물은 맛있고 깨끗한 물로 인식되었습니다. 그런데 아침에 보니 그것은 자신이 더럽다고 생각하고 있는 생각에 상응하는 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물은 ‘더러운 물’로 인식되었던 것입니다. 구더기가 그 속에서 잘 살고 있는 것은 그 물이 구더기의 삶에 도움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 물은 구더기에게는 어떤 물보다 깨끗하고 좋은 물입니다.
이렇게 우리에게 인식되는 모든 존재는 우리의 삶과 관계해서 우리에게 인식된 것들입니다. 따라서 부처님은 무작정 무엇이 존재하는가를 묻지 말고 그것이 우리의 마음 속에 어떻게 해서 존재하는 것으로 인식되게 되었는지를 물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존재의 문제는 이렇게 ‘무엇’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의 문제입니다. 부처님은 이렇게 존재의 문제를 무엇의 문제에서 어떻게의 문제라는 새로운 차원으로 전환하셨던 것입니다 . (계속)
첫댓글 잘 보았습니다 감사 합니다
항상 밝은 미소 보내며
내가 없어도 세상은 존재할것이다. 이런 생각이 실체(홀로 존재할수 있는 어떤것)에 묶인 생각입니다.
이세상 어디에도 홀로 존재할수 있는것은 없습니다. 이것이 있기에 저것이 있다는 연기적 설명에서의 이것 저것도
실체가 아닙니다. 좋은글 잘 보았습니다.
내가 없어도 세상은 존재하지 않나요?
내가 없어도 세상은 존재합니다.
윗글은 부처님은 세상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는다...
이런 내용 아닌가요?
존재를 인식하는 것을 법, 달마라고 합니다.
부처님은 이 법이 공하다, 실체가 없다고 하신 것이지
존재를 부정하신 것은 아닙니다.
십사무기에서 세상은 영원하가? 질문에
부처님은 무기하셨습니다.
질문한 바라문은 세상의 존재를 묻기에 그렇습니다.
불교는
존재가 무상하다가 아니라
법이 무상하다가 바른 것이다고 봅니다.......()....
해는 영원한가?
해는 영원하지 않습니다.
과학을 믿는 현대인은 태양의 나이가 50억년이며 앞으로 50억년이 지나면 태양이 소멸한다고 압니다.
부처님은 이 사실을 알리가 없습니다.
우리 불자들이 혼동하는 이유가
해는 영원하지 않다를 부처님 가르침이라고 보는 까닭이라고 봅니다.
부처님 가르침이 과학과 일치하기에
혼동한다고 봅니다......
해(세상)는 영원한가?
부처님은 무기하셨습니다...
존재는 무상한가?
세상은 영원한가?..........부처님은 무기하셨습니다.
이 문제도 원론적으로 색을 보는 차이입니다.
남방불교의 아비달마나
우리가 많이 접했던 대승불교, 반야심경에서도
색을 물질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색이 공하니
물질 존재가 공한 것으로 변하게 된 것입니다.
부처님이 무기한 까닭과
색이 물질이다는 해석에
앞뒤가 안 맞는 모순을 발견합니다....
새벽산사님.......
1. 초기 대승불교에서 색은 마음이었습니다.
용수보살의 논저에서 색은 마음이었는데
이 후에 대승불교에서 색이 초기불교와 같이 물질 존재로 변합니다.
색이 물질 존재가 되다 보니 존재가 무상하다로 비약합니다.
깨달음의 비약입니다.
우주의 성주괴공도 이런 논리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여집니다.
존재의 무상은 대승불교가 만들었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또한 인도 당시의 물질론에서
성주괴공 사상은 이미 유행한 사상이 아닐런지요?
2. 초기불교와 대승불교에서 모두 과거칠불을 말합니다.
깨달음으로 볼 때 과거7불 = 고타마 부처님입니다.
부처님은 더 이상 태어나지 않는다고 누누히 말씀하셨습니다.
과거 부처님이 고타마 부처님이라면 부처님도 전생이 있고 윤회하는 격입니다....
이것도 모순입니다.....
저는 과거7불을 부처님이 설하신 것을
과거에도 깨달은 분이 있었다.
나만이 깨달은 것이 아니다.
미래에도 더 많은 부처님이 있을 것이다.
깨달음은 과거 현재 미래로 계속 이어질 것이다'' 라는 가르침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부처님이 일체는 12입처라 하신것은 모든것을 인식과 연관하여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식을 벗어난 것은 무기하셨습니다. 경계를 벗어난 일체를 세우는것은 일체가 아니라 하여 부정하였습니다. 또한 변하지 않는 실체를 부정하셨습니다.
변하지 않는 실체가 있다면 다른것과 상관없이 그것은 존재한다고 할수 있겠지만 모든것이 변함을 인정하는 상태에서 다른것과 상관없이 존재한다는 것은 경계를 벗어난 것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모든것이 변한다는 것은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다른것 없이 홀로 존재하는 무엇이 있다는 생각이 착각이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