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신륵사일주문>정자(강월헌)>삼층석탑>신륵사>대정각기비>숲길>극락보전>조사당>삼화상진영>보제존자석종> 더층전탑>숲길> 불이문> 구룡루>여주박물관>여주대교>마왕>영월루>여주역
신륵사는: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봉미산(鳳尾山)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의 승려 원효가 창건한 사찰이다.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이다.신라진평왕 때 원효(元曉)가 창건하였다고 하나 정확하지 않다.나옹이 입적할 때 오색구름이 산마루를 덮고,구름도없는 하늘에서 비가 내렸으며,수많은 사리가 나왔고, 용(龍)이호상(護喪)을했기에 절이 클 수 있었다고 한다.현존하는 당우로는 극락보전,조사당,명부전,심검당,적묵당봉향각,칠성각,종각,구룡루 등이 있다
여주 신륵사 다총석탑은:극락보전 앞에 있는 탑으로,2단으로 기단을 쌓고,그 위로 여러종의 신을 쌓아 올린 것이다.통일 신라와 고려 시대의 일반적인 석탑 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통일 신라나 고려의 양식과 전혀 다르다.기단에서부터 탑신부까지 전부 돌을 한 장씩 쌓는 방식을 취하였다.바닥 돌 윗면에는 연꽃을 돌려 새겼다. 아래층 기단의 네 모서리에 새겨진 기둥 조각은 형식적이나, 특이하게도 물결무늬가 도드라지게 새겨져 있다. 아래층 기단의 맨 윗돌은 두꺼워 탑의 안정감을 높여 주며, 위층 기단의 모서리에는 꽃 모양이 새겨진 기둥이 있고, 각 면에는 용무늬가 깊게 새겨져 있다.탑신부의 각 지붕돌 밑면의 받침은 얇은 한 단이며, 네 귀퉁이에서 가볍게 추켜 올라가 있다. 8층 몸돌 위에 지붕돌 하나와 몸돌 일부분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총수가 더 많았을 것으로 보이지만 8층 탑신의 아래까지만 옛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다.각 부분 아래에 핌을 둔 점으로 보아 고려 시대 석탑의 특징이 일부 드러나지만, 세부적으로는 그러한 특징을 벗어난 표현도 나타난다. 하얀 대리석이 주는 질강은 탑을 한총 우아하게 보이게 하며, 전체적으로 국보 제2호인 원각사지 십층석탑과 돌의 재질.조각 기법이 비슷하다.신륵사1072년조선 성종3에대규모로 새 단장을하였는데,이탑도 이때에함께 세워진 것으로보인다
마암은 여주 지명의 유래*가 되는 황마*와 여마가 이곳에서 솟아났다 하여 마암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이러한 이유로 고려시대 여주의 지명이 황려치라 불렀다고 한다. 즉, 여주의 지명은 골내근현-황효-황려-여흥-여주로 변천되었는데, 황려 지명은 이 마암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이다.그리고 여주 출신 대문호인 이규보의 한 시중에 "두 마리의 말이 기이하게 물가에서 나왔다 하여, 이 때문에 고을 이름이 황려라네"라고 적은 내용이 있어 그 역사성이 매우 높은 유적이다.또한 여주의 대표적 성씨엔 여흥 민씨의 시조가 탄생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여주시를 대표하는 자연경관 유적이다.그리고 이규보, 이색, 서거정, 최숙정, 검상현, 정약용, 김창협 동 당내의 시인객들이 찾아와 시와 풍류를 즐기던 명소였다.현재 마이 시작되는 평평한 바위면에 배※이라 큰 글씨가, 위쪽에 여주목사를 역임한 이인용 제과 '시원+ 일라이, 오른쪽에 여주군수를 지낸 '신현태#&※"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첫댓글 중학교때 수학여행을 갔던 곳이예요ㆍ
태어나서 처음으로 멀리 떠났던 신륵사ᆢ
눈치가 없어
막내이모 손을 잡고 이모부랑 데이트를 즐겼던 곳도 여주 신륵사 였습니다ᆢ
내 기억의 한 편 아득하던 신륵사를 전철로 하루에 다녀오다니 세상이 매우 가까워졌음이 실감 납니다 ㆍ날씨도 계절도 최고의 날에ᆢ
산머슴님 여주여행 즐거웠습니다 사진 감사합니다ᆢ
산머슴님 어제 여주 신륵사길 함께하여주시고 멋진 사진봉사로 다시 한번 걸어봅니다. 감사드립니다.
어제의 일정이 고스란히 또 한 번 추억여행 합니다 수고 많이 하셨고 보이네 돼지갈비 또 생각납니다 고생 하셨습니다
늘 멋진사진 찍으시느라 수고 많으신 산머슴님께 감사드리고 늘 함께 해주셔요ㆍ 고맙습니다ㆍ
신륵사 보행을 다시 한번 다녀옵니다.
구석구석 놓진 기억들을 되살려 주네요.
산머슴님 수고하셨습니다.
감사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