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5:25-30 큰 아들은 아버지께서 돌아온 작은 아들을 위해 잔치를 벌이는 것에 대해 아버지와 함께 기뻐하기 보다는 아버지께 분노를 표시하며 열심히 종처럼 일한 자신을 위해서는 염소새끼 한마리도 안줬다고 말했다.
이전 말씀에서 작은 아들이 아버지를 향해 가자 아버지는 멀리서 아들을 알아보고 달려와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최고 좋은 옷을 입히고 반지를 끼우고 신발도 신기고 최고의 잔치를 베풀며 기뻐하는 내용이었다. 이어지는 말씀은 작은 아들을 위해 잔치를 벌인 것을 보고 큰 아들이 화를 내는 내용이다.
25절은 "그러나" 라는 말로 앞부분과 연결이 된다. 기뻐하는 아버지와는 반대로 라는 의미이다. 큰 아들이나 맏아들로 번역된 말의 문자적인 의미는 "더 늙은 아들" 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아버지가 기뻐 잔치를 벌이는 그 때 더 늙은 아들은 밭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 의미는 아버지와 분리되어 있었고 함께 있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는 사실 큰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있었다는 뜻이다. 작은 아들은 명백하게 아버지로부터 분리되어 있었지만 큰 아들은 교묘하게 살짝 바뀐 형태로 분리되어 있었던 것이다. 작은 아들의 분리는 안전하지 않은 것이지만 큰 아들의 분리는 더 위험하게 분리되어 있는 것이다. 날마다 안타깝게 작은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아버지와 함께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마음과 같은 마음은 전혀 없었고 못된 동생에 대한 멸시와 분노만 가득했을 것이다.
큰 아들은 큰 토지를 소유한 지주의 아들이고 집에는 많은 종들이 있었기에 큰 아들이 직접 가서 일을 할 필요는 없었다. 이제 남은 재산은 모두 자신의 몫이기에 종들이 열심히 일하도록 잘 감시해서 소출을 늘리고 자기 재산을 늘리는 일에만 집중했던 것이다. 작은 아들은 세상 쾌락을 즐기기 위해 아버지와 분리되어 있었지만 큰 아들은 자신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아버지와 분리되어 있었던 것이다.
큰 아들이 돌아올 때 집에 가까이 오자 그는 음악소리와 춤추는 소리를 들었다. 음악소리라는 말은 본래 여러 악기가 함께 어울리는 소리를 내는 것을 묘사한 말이다. 영어의 symphomy가 이 말과 똑 같은 말이다. 여러 개의 관악기가 함께 연주하는 소리일 것이다. 춤추는 소리라는 말은 빙 둘러선다는 뜻에서 온 말이다. 영어 번역들은 대부분 dancing이라고 번역했지만 이는 춤추는 모양만 나타내는 말이 아니다. 춤추는 동작은 멀리서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말은 남자들이 손뼉치며 노래하며 춤을 추는 모습을 암시한다. 사람들이 손을 잡고 빙 둘러서서 노래하며 춤추며 손뼉도 치며 노는 소리가 멀리까지 들리는 장면이다. 영어의 chorus라는 말이 이 말에서 온 것이다.
26절에서 큰 아들은 집에 가까이 왔는데도 들어가지 않고 한 종을 불러 무슨 일인지 물었다. 역시 아버지와 친하지 않고 분리되어 있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아버지와 친했다면 얼른 들어가서 무슨 일인지 아버지에게 물었어야 했다. 자신은 밭에 나가서 일하는 종들을 열심히 감독하다 돌아왔는데 자신의 몫인 재산으로 아버지께서 잔치를 벌이시는 소리를 듣고 분노했을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께 직접 묻지 않고 종을 불러 물었을 것이다. 엄격히 말하면 아버지가 죽어야 그 재산은 자기 것이 되는데도 작은 아들이 자기 몫을 챙겨 나가자 모두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27절에서 종이 큰 아들에게 대답한 말은 "당신의 동생이 왔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아버지가 살진 송아지를 잡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를 건강하게 맞이했기 때문입니다" 이다. "건강하게 맞이했다" 라는 말은 특별히 다친 곳 없다는 뜻이고 맞이했다는 말은 돌려 받았다는 뜻이다. 아버지는 작은 아들을 특별히 상한 곳이 없이 되돌려 받았다는 뜻이다.
28절에서 아들은 분노를 터트렸고 집에 들어가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버지는 나와서 이렇게 분노한 큰 아들을 달래며 들어가자고 간청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 아들은 아버지께 삿대질을 하며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큰 아들의 이러한 분노는 아버지에 대한 것이다. 집에 들어가기를 원하지 않았다는 말은 그 아버지의 존엄성에 대한 울분에 찬 모욕이고 할 수 있다면 두들겨 패고 싶은 마음을 나타낸 것이다. 이는 작은 아들이 자기 몫은 다 챙겨갔는데도 다시 돌아왔고 그런 작은 아들을 위해 자기 몫의 재산을 아버지가 낭비하는 것에 대한 분노이다.
아버지의 집은 예수께서 제시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를 의미한다. 큰 아들이 잔치에 들어가기를 거절하는 것과 같이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께서 제시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거부하고 있는 것이더. 예수께서는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을 제외시키길 원하지 않았는데도 저들이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못된 탕자인 작은 아들과도 같은 세리와 죄인들과 자신들은 차원이 다른 거룩한 사람들이기에 그런 사람들이 있는 그 나라에는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
29절에서 큰 아들은 자신을 달래는 아버지에게 다음과 같이 대답하며 말했다. "보세요! 제가 여러 해 동안 아버지를 섬겼고 결코 아버지의 명령을 어긴 적이 없습니다" 섬겼다는 말은 종으로서 아버지를 섬겼다는 뜻이다. 아버지를 위해 종처럼 열심히 일했다는 뜻이다. 말로는 아버지를 위하는 것처럼 말하지만 사실은 아버지의 남은 재산은 모두 자기 것으로 확정해 주었기 때문이다. 열심히 일한 것은 자기 재산을 늘리고 잘 관리하기 위한 것이지 아버지를 위한 것이 아니다.
큰 아들은 아버지의 명령을 어긴 적이 없다고 자랑하지만 큰 아들은 아버지의 마음을 몰라준 것이다. 큰 아들은 일을 열심히 해야하는 종이 아니라 아버지의 고통이 무엇이고 지금 아버지가 왜 기뻐하는지를 알아야 하는 아들이다. 그런데 큰 아들은 아버지의 마음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아버지보다는 자신에게 확정된 재산에만 관심이 있는 것이다.
큰 아들이 한마디 덧붙인 것은 자신의 친구들과 함께 즐기라고 염소 새끼 한마리도 준 적이 결코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완전히 먹어치워버린 아들이 오니 살진 송아지를 잡았다는 것이다. 비교되는 것은 살진 송아지와 염소 새끼이다. 염소 새끼는 살진 송아지에 비하면 훨씬 작고 가치도 적은 것이다. 이 말은 큰 아들이 겉으로는 아버지와 함께 있는 척 했지만 속으로는 아버지와 완전히 분리되어 있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아버지와 함께 기뻐하기는 거부하면서 아버지로부터 분리되어 아버지의 재산으로 친구들과 함께 즐기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작은 아들은 공공연하게 드러내놓고 아버지를 거역하고 그 재산을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사용했지만 큰 아들은 교묘하게 아버지를 거역하고 아버지와 분리된 채 아버지의 재산을 자신의 쾌락을 위해 사용하고 싶은 마음을 드러낸 것이다. 세리와 죄인들은 드러내 놓고 하나님을 거역한 죄인들이지만 바리새파 사람들은 은밀하게 하나님을 거역하면서 거룩한 척하던 사람들이다. 큰 아들은 하나님과 분리된 채 자신의 탐욕을 위해 열심히 일하면서 아버지를 위해 일한 척 속이던 사람들이다.
중요한 것은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것이다. 큰 아들은 집을 나간 동생을 늘 걱정하면서 돌아오길 간절히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을 알았어야 했다. 아버지와 같은 마음으로 아버지 곁에 서서 동생이 오기를 기다렸어야 했다. 만약 밭에 나가서 소식을 몰랐다 해도 집에 와서 아버지께 다가와 직접 듣고 함께 기뻐했어야 했다.
우리도 우리가 성실하고 거룩하게 신앙생활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것이다.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서 우리도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며 원수까지도 사랑하여 그들도 아버지께 돌아오도록 해야 한다.